항주(杭州)에 서생이던 류(柳) 아무개는 친족을 방문하러 가던 길에 비를 만나, 부근에 황폐한 빈집에 들어가 하룻밤 묵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한 젊은 부녀자가 먼저 들어와 비를 피하고 있었다. 류씨 서생은 밤이 다 새도록 딴 생각을 조금도 품지 않고, 처마 밑에 단정히 앉아 있다가, 새벽이 밝아오자 곧 갈 길을 떠났다.
그 부녀자는 마침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던 동료 서생인 왕(王) 아무개 아내였는데, 류씨 서생이 보인 덕행에 감동하여 그 일을 자기 지아비한테 말하였다. 그러나 그 지아비는 도리어 아내를 의심하고는 마침내 내쫓고 말았다.
나중에 류씨 서생이 향시에 응시하였다. 그때 그 답안지는 이미 등외로 밀려났는데, 잠시 뒤에 갑자기 시험관 책상 위에 저절로 놓여졌다. 깜짝 놀란 시험관은 기이하게 여기며, 다시 답안 문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별로 훌륭한 글이 아니라 다시 내팽개쳤다.
그런데 나중에 시험관이 급제자 답안지를 상관에게 최종 보고하려고 점검하는데, 어찌된 까닭인지 류씨 서생 답안지도 그 안에 함께 들어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시험관은 이 사람이 반드시 무슨 음덕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 답안지도 급제자 명단에 함께 포함시켜 올렸는데, 결국 제71등으로 급제가 확정되었다.
그때 마침 왕씨 서생도 같은 방에 있었다. 나중에 급제자 면담 시에, 왕씨 서생이 한 자리에 있는 가운데, 시험관이 류씨 서생 답안지를 평가 선발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언급하면서, 그 사연을 본인에게 캐물었다. 그러자 류씨 서생은 가만히 생각하더니, 별다른 중요한 일은 없었고, 다만 비를 피하러 황폐한 빈집에 들어가 묵었던 일만 기억난다고 대답하였다.
옆에서 그 말을 듣던 왕씨 서생이 크게 감탄하고서, 자기가 아내를 의심하고 내쫓았던 일을 반성했다. 그리고는 아내를 다시 맞이해 와 화합하고, 자기 누이동생을 류씨 서생한테 후처(後妻)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