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曰:
汝等比丘! 常當一心, 勤求出道. 一切世閒, 動不動法, 皆是敗壞不安之相. 汝等且止, 勿得復語. 時將欲過, 我欲滅度, 是我最後之所教誨.
"비구 여러분! 항상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벗어날 길을 구하십시오. 세간에 움직이건 움직이지 않건, 일체 모든 법은 죄다 부서지고 무너질 불안정한 모습일 뿐입니다.
여러분, 이제 그만 아서라! 더 이상 말하지 마십시오! 때가 지나가려 하니, 나는 이제 열반하렵니다. 이것이 내가 마지막 일깨우는 가르침입니다."
論曰:
七. 다음으로 갖가지 자성을 벗어나 내가 없는 청정함 부분(離種種自性淸淨無我分)을 설합니다.
여기서 갖가지 자성(種種自性)은, 오음법五陰法 중에 갖가지 견해와 근심(見患)을 지어, 번뇌망상하는 자성의 장애를 뜻합니다.
1.'汝等比丘, 常當一心'은 이러한 장애의 대치법으로, 진실한 지혜에 머물라고 부촉하십니다.
【절요】오음법五陰法 중에 갖가지 번뇌망상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므로, 마음을 임금님으로 모셔(以心爲主) 한곳에 전념하도록 절제하라는 뜻입니다.
【보주】'一心'두 글자는, 지금까지 위에서 일깨우신 여러 가지 가르침 법문을 통틀어 마무리하는 총결론입니다. 진실로'一心'은 온갖 법문(萬法)의 임금님이므로, 그래서 한곳에 전념하도록 절제하면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2.'勤求出道'는, 지혜는 실로 얻기 어려우므로, 방편으로 수습하여 일심一心으로 여실히 정진해 얻으라고 일깨웁니다.
【절요】일심一心의 여실한 지혜(如實慧)는, 실로 얻기 어려우므로 정진하라고 권합니다.
【보주】어지러운 마음(亂心)은 진실한 이치에 어긋나는 허망한 알음(妄知)이고, 한 마음(一心)은 진실한 이치에 들어맞는 참된 알음(眞知)입니다. 그래서 여실한 지혜(如實慧)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지혜를 얻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부지런히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구체 사물로 보면, 위 경문에 의거하여 마땅히 그 마음을 하나로 오롯이 집중하여 벗어나는 길을 구함입니다. 둘째는 추상 이치로 보자면, 한 마음(一心) 여실한 지혜(如實慧)가 곧바로 벗어나는 길(出道)입니다.
3.'一切世閒, 動不動法, 皆是敗壞不安之相'은, 진실한 지혜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상대적 법은 죄다 덧없음(無常)을 보여주며, 이름과 모습이 평등한 법(名相等法)임을 마땅히 알라고 보여줍니다. 이 가운데'動不動'은, 삼계 모습(三界相)이 고요하거나 어지러운 차별(靜亂差別)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절요】세간世間은 삼계를 다 함께 가리키는데, 움직이면 욕계欲界이고, 움직이지 않으면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입니다.'敗壞不安'은 결국 덧없음(無常)을 가리킵니다.
【보주】위에 두 세계(색계와 무색계)는 수명이 아주 길어서, 외도들은 움직이지 않는다(不動)고 오해하여, 삼계가 모두 덧없는 줄은 모릅니다. 그래서 경전에 이르기를, 삼계가 평안치 못함은 마치 불타는 집(火宅)과 같다고 합니다.
4.'汝等且止'이하는, 몹시도 깊은 적멸법 가운데 적멸(甚深寂滅法中寂滅)로서, 청정한 무아(淸淨無我)를 나타냅니다. 여기서'且止勿語'는, 몸ㆍ말ㆍ뜻 세 가지 업이 전혀 움직이지 않아야(三業無動), 적멸寂滅한 무아無我에 상응하는 법의 그릇(法器)을 성취한다고 권하심입니다.
【절요】구업口業을 깨끗이 함입니다. 구업이 깨끗해야 뜻도 또한 깨끗해집니다.
【보주】여기에서 왜 신업身業이 빠졌을까 물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릇 존귀한 분을 모심에 질문이 있으면 자리에서 일어나고, 또 질문을 받으면 일어나서 대답하는 법이니, 이는 몸과 입이 항상 서로 따라다님을 뜻합니다. 그래서 입이 움직이지 않으면, 몸도 또한 움직이지 않습니다. 삼업三業이 움직이지 않으면, 곧 적멸寂滅한 무아無我에 상응하는 법의 그릇(法器)입니다.
5.'時將欲過, 我欲滅度.'
【절요】이미 한밤중(中夜)이 되었음은 중도를 표시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도는 앞서 말한 것처럼 두 가지가 있는데, 지금 여기서는 단멸견과 상견을 모두 떠난 중도를 뚜렷이 표시하면서, 또한 불성佛性 중도를 은밀히 표시하고 있습니다.'나(我)'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아견我見, 둘째 아만我慢, 셋째 '나'라는 이름(名字)입니다. 여래는 아견과 아만이 다 사라지고, 다만 세간 습관에 따라 이름(언어)으로'나'를 일컬을 뿐입니다. 이제 가짜 몸이 소멸하게 되면,'나'라는 이름도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곧 무여열반이고, 참된 무아의 법입니다.
【보주】이걸 보면, 부처님은 가운데 中을 생명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운데 中이 존재하면 부처님도 있고, 가운데 中이 사라지면 부처님도 사라집니다. 중도에 평안히 머물면, 이것이 곧 시방 세계에 늘 머무시는 부처님(十方常住佛)입니다.
6.'最後敎誨'는 바로 마지막 가르침으로서, 유훈(遺訓: 遺敎)이란 뜻을 뚜렷이 나타냅니다. 이'遺敎'란 뜻은, 세상에 머물러 유지하는 법(住持法) 가운데, 가장 수승한 요점만 간추려 남긴 핵심입니다.
【절요】소승으로 세상을 가르친(小乘訓世) 지 어언 50년이 되어, 이제 막 열반에 드실 참에, 다시 간추려 가르침을 주시기에'최후’ 라고 말합니다.
【보주】?최후’란 저술가가 말하는 절필絶筆입니다. 또 앞서 이른바?임종에 말은 반드시 말이 간절하고 요긴하다’고 말한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맨 마지막에 은근히 부촉하신 말씀은, 반드시 만세토록 따라 지키기를 바라신 뜻입니다.
더러는 이렇게 물을지 모릅니다.“여기서 일단'소승으로 세상을 가르치셨다(小乘訓世)’고 말한다면, 어찌하여 앞에 말은 소승근기(小機)에서 보아 장교(藏敎: 소승 三藏敎)에 속한다고 할 수 없겠습니까?"
대답하자면 이러합니다. 론에서 말하기를, 이 경에서 매번'비구比丘’를 일컬음은, 세속번뇌에서 멀리 떠나는 수행자 모습(遠離相)을 표시하고, 마하연(대승) 방편도方便道가 이승二乘과 공통하며, 사부대중(四衆) 모두 또한 비구와 마찬가지로 멀리 떠나는 수행(遠離行)을 함께 해야 함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경전은 바로 이승을 위하되, 곁으로 보살도 겸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소승으로 세상을 가르치셨다(小乘訓世)’고 말함은, 큰 부분을 들어 대강 말한 것이니, 이는 천친보살이 전한 깊은 뜻입니다.
【해설】… 욕계는 동법動法이고, 색계와 무색계는 부동법不動法입니다. 비록 움직이고 고요하고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모두 무상無常 무아無我에 속하는지라, 한시바삐 벗어나길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적멸에 돌아가심에 임하여 중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구경(究竟: 궁극)을 보이신 것입니다. 세상에 머물러 유지하는 법(住持法) 가운데, 가장 수승한 요점만 간추려 남긴 핵심입니다.
오호라! 맨 마지막 은근한 부촉은 지극하신 자비심입니다! 제자 된 자들은 어찌 뼈와 간에 새겨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앞과 중간 … 부분은 론의 내용과 겹쳐 생략함: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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