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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도 극락 왕생을 발원하는 까닭

의심끊고 염불하세. 천태지자대사 정토십의론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11.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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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도 극락 왕생을 발원하는 까닭

 

 

첫 번째 의문

모든 불보살님들께서는 대자대비를 본업(本業)으로 삼으신다는데, 만약 중생들을 제도하시고자 한다면, 정말로 오직 삼계(三界)에 몸을 나토시어 오탁악세(五濁惡世)와 삼악도(三惡途) 가운데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셔야 마땅할 줄 압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스스로 자기 생명만 평안히 수행하며, 중생을 내버리고 떠나시려 한단 말입니까? 이는 대자대비가 없는 것이며,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는 것이니, 보살이 추구하는 보리도(菩提道)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답변

보살에도 두 종류가 있소. 하나는 오랫동안 보살도(菩薩道)를 닦고 행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은 분으로서, 이 분들은 진실로 자기 책임(사명, 원력)을 감당할 수 있소. 다른 하나는 아직 무생법인을 얻지 못한 분들과 이제 막 보살의 마음[初發心]을 낸 범부들이오.

두 번째의 범부 보살(凡夫菩薩)들은 모름지기 어느 때고 부처님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오. 그렇게 (항상 부처님 곁에 머물면서) 무생법인의 법력[忍力]을 성취하여야만, 비로소 삼계 안에 몸을 나토어 오탁악세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오.

그래서 지도론(智度論)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번뇌와 업장에 얽매인 범부 중생이 제 아무리 큰 자비심을 지녔더라도, 오탁악세에 태어나길 발원하여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오탁악세는 번뇌가 매우 강렬하여, 스스로 무생법인의 법력을 지니지 못한 자는 마음이 바깥(사물) 경계에 따라 뱅뱅 돌기(흔들리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이 빛과 소리에 얽매여(물들어) 스스로 삼악도에 떨어질 판인데, 어떻게 다른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가령 인간 세상에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성인의 도[聖道]를 얻기가 어렵소. 더러 보시나 지계 등의 수행으로 복을 지어 인간 세상에 태어나 국왕이나 대신이 된다고 합시다. 전생의 복덕으로 자유자재로이 부귀영화를 누리다 보면, 설령 훌륭한 선지식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가르침)을 믿고 따르려 하지 않고, 그저 탐착과 미혹에 휩싸여 안일하게 방종하면서 온갖 죄악을 두루 짓게 마련이오. 이러한 악업을 짊어지고 한번 삼악도에 들어가면, 한량없는 겁[無量劫]이 지나야만 비로소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소. 그것도 몹시 가난하고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게 되고, 만약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또 다시 지옥에 떨어지기 십상이오.

이와 같이 생사 륜회를 되풀이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지금 사람이란 사람은 죄다 이 모양 이 꼴이라오. 이것을 일컬어 수행하기 어려운 길[難行道]이라고 부르오.

그래서 유마경(維摩經)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자기 질병도 구제할 수 없는데, (하물며) 다른 병든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단 말인가[自疾不能救, 而能救諸疾人].”

 지도론(智度論)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예컨대 두 사람이 똑같이 각기 자기 가족이 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다고 하자. 한 사람은 감정이 다급하여 곧장 물 속에 뛰어들어 구해 내려 했으나, 적절한 방편의 힘이 없어 물에 빠진 사람이나 구하려는 사람 모두 그만 다 함께 익사하고 말았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훌륭한 방편을 생각해 내고, 곧장 가서 배나 뗏목(또는 밧줄이나 튜브)을 가져다가 그를 무사히 건져 올려 마침내 모두 다 익사의 고비를 벗어났다.”

막 보리심을 낸 보살도 또한 이와 같은 리치라오.

이처럼 아직 무생법인을 얻지 못한 보살은 스스로 중생을 구제할 수가 없소. 이러한 까닭에 항상 모름지기 부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오. 무생법인을 얻은 다음에라야 바야흐로 중생을 구제할 수 있소. 마치 위의 비유에서 배를 얻은 사람처럼 말이오.

또 논(: 智度論인 듯)에 이렇게 말씀하셨소.

비유하자면 갓난아기가 어머니 품을 떠날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에 어머니 품을 벗어난다면, 더러 깊은 구덩이나 우물에 빠지거나 또는 젖에 굶주려 죽을 것이다. 또한 비유하자면 새끼 새가 날개에 깃털이 완전히 자라나지 않았을 때에는, 단지 나무에 의지하여 가지 사이나 옮겨 다닐 수 있을 뿐, 멀리 공중으로 날아가지는 못하는 것과도 같다. 날개에 깃털이 온전히 자라나야, 비로소 허공에 날아올라 걸림없이 자유자재로이 비행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범부 중생은 스스로 힘이 없으므로, 오직 아미타불만을 일념으로 생각하고 염송하여 삼매(三昧)를 이루도록 해야 하오. 그렇게 청정한 도업이 성취되기에, 림종에 한 생각 추스려 결정코 극락 왕생하여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한 다음, 다시 삼계에 되돌아와 무생법인의 큰 배[]를 타고서 생사고해의 중생들을 구제하며, 자기 뜻[발원]대로 자유자재로이 부처님 사업(事業)을 널리 펼치는 거라오.

그래서 또 논(: 智度論인 듯)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지옥에 돌아다니며 노닐고 싶은 자는 (먼저) 저 나라[彼國: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무생법인을 얻은 다음에, 다시 생사 륜회의 나라[生死國]에 되돌아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교화하게 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보살들도 극락 정토에 왕생하길 발원하노니, 진실로 그 가르침을 잘 알고 따르길 기원하오. 그래서 룡수(龍樹) 보살님의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에서 정토념불 법문을 쉽게 수행하는 길[易行道]이라고 이름 붙였다오.

옮긴이 보충 소감: 새벽··저녁 하루 세 때 부처님 앞에서 경건히 독송하는 예불문의 맨 끝에,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願共法界諸衆生 自他一時成佛道)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문맥상 흔히들 시방 법계 모든 중생들이 나와 남 할 것 없이 한꺼번에(동시에) 부처님 도를 이루길 발원합니다라는 발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뒷 구절만 따로 떼어 음미해 본다면, 한문의 중의(重義)적인 특성상 또 다른 의미까지 함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는 수행의 과정 및 결과의 차원에서, 공부가 무르익어 나와 남이 하나가 될 때 부처님 도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전혀 없어진 경지에 이르러, 물아일체(物我一體) 또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이 되는 것이 궁극적인 깨달음의 도라는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수행의 방법 차원에서, 자력(自力)과 타력(他力: 불보살님의 가피력)이 하나가 될 때 부처님 도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바로 극락 왕생을 발원하며 념불하는 정토 법문이 가장 손쉬운 수행의 길[易行道]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근본 목표는 나와 남[중생]이 모두 동시에 부처님 도를 이루자는 대승적인 발원에 두어야 하겠지요.

우리 불교가 지금까지 수행이나 중생 교화에서 부진과 쇠약을 면치 못하는 주 요인도, 어쩌면 부처님 가피력을 동시에 구하는 념불 법문을 무시 또는 경시하고, 오로지 자기 마음 하나 닦아 지혜를 밝힌다는 참선(특히 화두선) 수행에 치우친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면에서 자기 반성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주체성을 부인하고 창조주에게 노예처럼 종속되는 타력 신앙이라고 불교인들이 비판·폄하하곤 하는데, 불교처럼 불성 평등의 기본정신에서 자력과 타력을 하나로 결합시켜 수행한다면, 그 효과(복덕과 지혜)가 얼마나 크게 증폭되겠습니까?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념불하는 타력 수행의 측면을 하찮게 여기는 생각이, 혹시라도 중생의 제 잘난 교만심의 발로는 아닐까요? 중국에도 도가 한 자 높아지면 마장은 한 길이나 높아진다[道高一尺, 魔高一丈]는 속담이 있는데, 우리 불교 수행인도 자칫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는 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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