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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참 뜻

의심끊고 염불하세. 천태지자대사 정토십의론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11. 22:50

본문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참 뜻

 

 

두 번째 의문

모든 법의 본체는 텅 비어[諸法體空] 본래 생겨남이 없고[無生] 평등하며 적멸(寂滅)한데, 지금 이내 이 곳을 내버리고 저 곳을 좇아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다는 서방 정토에 왕생하길 바란다면, 이 어찌 리치(진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또 경전에 이르기를, “만약 정토를 구하거든 먼저 자기 마음을 정화시킬지니, 마음이 청정하면 곧 불국토도 청정해지느니라[若求淨土, 先淨其心; 心淨故, 卽佛土淨]”고 하셨는데,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떻게 뜻이 통하겠습니까?

 

답변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소. 첫째는 전체(총론)적인 답이고, 둘째는 개별(각론)적인 답이오. 첫 번째 전체적인 답은 이렇게 말할 수 있소.

그대가 만약 아미타부처님의 서방 정토에 왕생하길 구하는 것이 이 곳을 내버리고 저 곳을 좇는 행위로 리치(진리)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대가 이 곳에 매달려 서방 정토에 왕생하길 구하지 않는 것은, 거꾸로 저 곳을 내버리고 이 곳에 집착하는 행위로, 이것 또한 리치에 맞지 않고 병(: 잘못)이 된다오.

또 전계(轉計: 사람인지 책인지 미확인)가 이렇게 말했소. “저 곳에 왕생하길 바라지도 않고 또한 이 곳에 생겨나길 바라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은 단멸견(斷滅見)3)이다.”

[단멸견(斷滅見):다섯 가지 사악한 견해[五惡見] 가운데 두 번째 변견(邊見:극단에 치우친 견해)은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이다. ‘상견은 우리 중생의 몸과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항상 머무른다(존재한다)고 믿는 생각이다. 단견은 반대로 우리 중생의 몸과 마음이 지금 현재 이대로만 존재하며, 지금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어져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생각인데, 이를 단멸(斷滅)’이라고도 부른다. 흔히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썩어 없어지고, 영혼도 육신과 마찬가지로 흩어져 더 이상 생명 존재가 없다고 믿는 무신론이 단견[斷滅]에 속한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소.

수보리여, 그대가 만약 아누다라삼먁삼보리심(阿麴多羅三臺三菩提心)을 내는 사람은 모든 법이 단멸(斷滅)이라고 설한다고 생각하거든, 이런 생각일랑 하지 말게나. 왜냐하면 보리심을 낸 사람은 법에서 단멸의 모습[斷滅相] (보거나) 말하지 않기 때문일세.”

두 번째 개별(각론)적인 답은 이렇게 말할 수 있소.

무릇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모든 존재가) 생겨나는 인연[生緣] 가운데 모든 법이 조화롭게 합쳐질[諸法和合] 따름이며, 자기 성품을 지키지(고집하지) 않소[不守自性]. 따라서 생겨나는 본체[生體]에서 뭔가 찾으려 해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소. 이 생명이 생겨날 때 어디서부터도 오는 바가 없기에[無所從來], 그래서 불생(不生)이라고 일컫는다오.

또 불멸(不滅)이란, 모든 법(존재)이 흩어져 사라질 때, 역시 자기 성품을 지키지(고집하지) 않기에 내가 흩어져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소. 이 생명(존재)이 흩어져 사라질 때도 어디로도 가는 바가 없기에[去無所至], 그래서 불멸(不滅)이라고 일컫는다오.

인연이 조화롭게 합쳐져 생겨나는 것 이외에 따로 불생불멸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바라지 않는 것을 가리켜 무생(無生, 無生法忍)이라고 일컫지도 않소.

이러한 까닭에 (龍樹보살이 지으시고 구마라집이 漢譯하신) 중론(中論)의 게송에 이런 말씀이 있소.

 

因緣所生法 인연으로 생겨나는 법(존재)일랑

我說卽是空 나는 곧 텅 비었다고 말하노니,

亦名爲假名 또한 가짜 이름이라고 일컫기도 하고

亦名中道義 또 다르게는 중도의 리치라고 일컫기도 한다.

 

중론(中論)에는 또 이런 말씀도 있소.

 

諸法不自生 모든 법(존재)은 생겨나지도 않고

亦不從他生 또한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지도 않으며,

不共不無因 남과 함께 하지도 않고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니,

是故知無生 이런 까닭에 생겨나지 않는 줄 안다.

 

그리고 유마경(維摩經)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雖知諸佛國 비록 모든 부처님 나라와 중생이

及與衆生空 죄다 텅 빈 줄은 알지라도,

而常修淨土 항상 정토(법문)를 수행하여

敎化諸群生 모든 중생들을 교화한다네.

 

 유마경에는 이런 비유도 있소.

예컨대 어떤 사람이 큰 궁궐을 짓는다고 하자. 만약 그가 텅 빈 땅에 의지(기초)하여 짓는다면, 아무 어려움 없이 뜻대로 이룰 것이다. 그러나 만약 허공에 의지하여 지으려 한다면, 끝내 성공할 수 없다.”

모든 부처님의 설법은 항상 두 가지 진리[二諦]에 의지하신다오. 즉 가짜 이름[假名]을 깨뜨리지(떠나지) 않으면서도,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實相]을 설하시는 것이오.

지혜로운 이는 치열하게 극락정토 왕생을 간구하면서도, 생겨남(왕생)의 본체는 (텅 비어) 얻을 수 없는 줄 훤히 통달하므로, 이것이 진짜 생겨남이 없는 무생(無生)이오. 이런 걸 일컬어 마음이 청정하면 불국토도 청정해진다고 말하는 것이오.

반면 어리석은 자들은 생겨남(또는 왕생)에 얽매여, 생겨난다는 말을 들으면 생겨난다고 알아듣고, 생겨남이 없다[無生]는 말을 들으면 생겨남이 없다고 곧이듣소. 그래서 생겨남이 곧 생겨남 없음이며, 생겨남 없음이 바로 생겨남인 줄은 전혀 모른다오.

이러한 리치를 훤히 깨닫지 못하기에 함부로 시비를 다투며, 남들이 극락정토 왕생을 구하는 것에 대해 핏대를 올리면서 비판하기까지 하니, 이 얼마나 커다란 잘못이오? 이러한 자들은 바로 정법을 비방하는 죄인이며, 삿된 견해[邪見]에 빠진 외도(外道: 異端)일 따름이라오.

옮긴이 보충 해설: 보통 세간에서 불교의 공()이나 도교의 무()를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절대공[無記空]이나 허무(虛無)로 오해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불교의 색()이나 도교의 유()가 진실한 존재[實在]가 아니고 허망한 가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공과 무도 니힐리즘적인 절대공이나 허무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색과 유가 진실로 존재한다고 믿는 착각이 상견(常見)에 속한다면, 공과 무가 전혀 없는 것으로 믿는 오해는 단견(斷見) 또는 단멸(斷滅)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상)이 공(본질)에서 나왔기 때문에 색이 곧 공이며, (본질)에서 색(현상)이 나토어지기 때문에 공이 곧 색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노자가 말한 것처럼, “천하 만물은 유에서 생기고 유는 무에서 생기며[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또한 만물이 무성하다가도 각자 그 뿌리[]로 돌아가고[夫物芸芸, 各復歸其根]” 아무것도 없는 데로 돌아가기[復歸於無物] 때문에, 결국 유가 곧 무이며 무가 곧 유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견해가 중도실상(中道實相)일 것입니다.

노자가 도덕경 첫머리에서 도를도라고 할 수 있을진대 항상적인(진실한) 도가 아니며, 이름을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진대 항상적인 (진실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고 한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이나 무를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이는 진짜 공이나 무는 아니며, 색이나 유를 실재한다고 하면 이는 진짜 색이나 유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노자는 이어서 무( 또는 無名)는 천지의 시작이고, ( 또는 有名)는 만물의 어머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  , 無名 有名) (한 군데서) 함께 나왔으되 이름만 다르다[同出而異名]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래서 노자 철학사상은 도는 항상 행함이 없으면서도 행하지 않음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는 핵심 명제로 표현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바, 진짜 텅 빈 가운데 미묘한 존재가 있다[眞空妙有]는 명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나 수행을 정성껏 열심히 해 보신 분들은, 자기가 몸소 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생각이 저절로 행해지고 이루어지는, 진공묘유(眞空妙有) 또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의 경우를 체험한 적이 계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중도실상(中道實相) 가운데 한 면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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