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품고 일으키는 생각이 어떠한가?
일체 모든 진리의 길[法門]은 마음 밝힘[明心]을 핵심으로 삼고, 일체 모든 수행의 길[行門]은 마음 맑힘[淨心]을 요체로 삼습니다. 그런데 마음 밝히는 요령은 념불(부처님을 생각함)만한 게 없습니다.
부처님을 그리워하고[憶佛], 부처님을 생각하면[念佛], 지금 당장에나 앞으로 미래에 반드시 꼭 부처님을 친견하며, 어떠한 방편도 빌릴 것이 없이 저절로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이와 같을진대, 념불이 마음을 밝히는 요체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마음을 맑히는 요령도 역시 념불만한 게 없습니다. 한 생각이 부처님과 상응하면 한 생각이 부처님이고, 생각생각이 부처님과 상응하면 생각생각이 부처님입니다[一念相應一念佛, 念念相應念念佛]. 맑은 구슬(과학적 예로는 백반)을 흐린 물 속에 넣으면, 흐린 물이 맑아지지 않을 수 없듯이; 부처님 명호를 어지러운 마음 속에 던지면, 어지러운 마음이 부처님처럼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을진대, 념불이 마음을 맑히는 요체가 아니겠습니까?
한 구절 부처님 명호(나무 아미타불)에는 깨달음[悟]과 닦음[修]이라는 두 법문의 핵심 요체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깨달음을 들자면 믿음[信]도 그 안에 담겨 있고, 닦음을 들자면 증명[證]도 그 가운데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信]과 깨달음[解: 이해, 解悟]과 닦음[行: 修行]과 증명[證: 證悟]의 네 법문이 모두 함께 포섭되어 있고, 대승과 소승을 비롯한 일체 경전의 핵심 요체가 빠짐없이 다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러한즉, 한 구절 (나무) 아미타불 명호야말로 지극히 종요(宗要)로운 길[道]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지금 당장 지니는 한 생각의 마음[一念之心]은, 전체 진여(실상, 본체)가 고스란히 망상(허망, 현상)이 되었으니[全眞成妄], 따라서 전체 망상 그대로가 바로 진여입니다[全妄卽眞]. 진여로 보면 하루종일 조금도 변함이 없지만, 망상으로 보면 하루종일 바깥 사물의 연분에 따라 변합니다.
무릇 우리가 부처님 경지의 연분에 따라 부처님 세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 그 아래의 아홉 세계[九界: 보살 이하 륙도 중생]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삼승(三乘: 보살·연각·성문)의 성인 경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곧 여섯 범부 중생[六凡: 륙도]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도 인간이나 천상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곧 삼악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또 아귀나 축생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곧 지옥을 생각하게 됩니다.
무릇 마음을 가진[有心] 평범한 존재(중생)는 생각이 없을[無念] 수 없습니다. 생각이 전혀 없는 마음의 본체[無念心體]는 오직 부처님만이 혼자서 증명하십니다.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을 얻은 등각(等覺) 보살 이하로는 모든 중생이 다 생각을 가집니다[有念].
무릇 우리가 한 생각을 일으키면, 반드시 열 가지 세계[十界] 가운데 어느 하나에 떨어지게 됩니다. 생각을 가지면서 열 가지 세계를 벗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열 가지 법계 밖에는 그 어떠한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매번 한 생각을 일으킬 때마다, 한 번 그에 상응하는 생명을 받는 연분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이러한 리치를 알고서도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을 자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 마음이 능히 부처님처럼 평등하고 대자대비한 의정(依正)17)의 모든 공덕 및 온갖 덕성을 갖춘 위대한 명호[萬德洪名: 아미타불]와 상응한다면, 곧 부처님 법계를 생각[念佛法界]하는 것입니다.
[의정(依正): 과거의 업(業: 원인)으로 받는 내 마음과 몸[心身]을 정보(正報: 기본 과보)라 하고, 그 마음과 몸이 의지해 사는 국토나 의식주 등 모든 세간 사물[환경]을 의보(依報: 부수 과보)라 함.]
이 마음이 능히 보리심 및 륙도만행(六度萬行)과 상응할 수 있다면, 곧 보살 법계를 생각하는 것이고; 내가 없다는 마음으로 십이인연(연기법)과 상응할 수 있다면, 곧 연각 법계를 생각하는 것이며; 내가 없다는 마음으로 사제(四諦)를 관찰하면, 곧 성문 법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마음이 사선팔정(四禪八定) 및 상품십선(上品十善)과 상응하면 천상 법계를 생각하는 것이며, 만약 계률이나 선행을 닦으면서 성내거나[瞋] 교만하거나 승부를 내려는 마음 따위를 품으면 곧 아수라 법계에 떨어집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느긋하고 유들유들한 마음으로 하품십악(下品十惡: 가벼운 죄악)을 생각하면 축생 법계에 떨어지고, 느긋하지도 성급하지도 않은 마음으로 중품십악(中品十惡)과 상응하면 곧 아귀 법계에 떨어지며, 만약 사납고 급한 마음으로 상품십악(上品十惡: 무거운 죄악)과 상응하면 바로 지옥 법계에 떨어집니다.
십악이란 곧 살생·도둑질·간음·망언(거짓말)·기어(綺語: 꾸밈말, 음담패설)·악구(욕설, 험담)·양설(이간질)·탐욕·성냄·사견(邪見: 어리석음)의 열 가지 죄악을 뜻합니다. 이와 반대가 바로 십선(十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스스로를 세밀하고 조용히 점검해야 합니다. 날마다 품고 일으키는 생각이, 과연 어느 법계와 상응하는 게 많고, 또한 어느 법계와 상응하는 게 더 강렬한지? 이렇게 스스로 묻고 점검해 본다면, 나중(내생)에 자신이 몸을 받고 목숨을 이어갈 곳은, 수고롭게 남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자명해집니다.
일체의 경계(境界)는 오직 자신이 지은 업(業)으로 불러일으키는 것이며, 또한 오직 자신의 마음이 나토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나토고 있는 곳이 본체 그대로 곧장 마음입니다. 무릇 마음이 있는 존재는 어느 누구도 경계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경계[佛境]를 나토지 못하면, 곧 아홉 법계의 경계를 나토게 되고, 삼승(三乘)의 성인 경계를 나토지 못하면, 곧 여섯 범부 중생[六凡: 륙도]의 경계를 나토게 됩니다. 또한 천상이나 인간이나 아귀·축생의 경계조차 나토지 못하면, 마침내 지옥의 경계를 나토게 됩니다.
부처님과 보살·연각·성문의 삼승 성인이 나토는 경계는, 비록 그 우열의 차이는 있지만, 요컨대 법락(法樂: 진리의 즐거움)을 받아 누리는 점에서는 한가지입니다. 또 삼계(三界: 욕계·색계·무색계)의 여러 천상이 나토는 경계는, 단지 오직 선정(禪定)과 오욕(五欲)의 즐거움을 받아 누릴 뿐입니다. 우리 인간 세상의 경계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뒤섞여 있는데, 각자 개인이 지은 업에 따라 그 혼합 비율이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귀와 축생의 경계는 괴로움이 훨씬 많고 즐거움이 별로 안 되는데, 지옥에 이르면 순수하게 한결같이 지극한 고통뿐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꿈속에서 보는 산천이나 인물 따위의 경계가 모두 꿈속 마음[夢心]에 따라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꿈꾸는 마음이 없다면, 틀림없이 꿈속 경계도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가령 꿈속의 경계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는 꿈꾸는 마음이 아예 없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밖에 경계가 없고[心外無境], 경계 밖에 마음도 없다[境外無心]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경계 전체가 그대로 곧 마음이며, 마음 전체가 온전히 그대로 경계입니다. 만약 원인 가운데서 결과를 살핀다면, 모름지기 마음을 관조해야 마땅합니다. 반대로 가령 결과가 나타난 곳에서 원인을 점검·확인한다면, 모름지기 경계를 잘 관찰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없는 경계가 있지 아니하며[未有無心境], 일찍이 경계 없는 마음도 또한 없다[曾無無境心]고 말합니다. 결과(과보)는 반드시 원인으로부터 생겨나고, 원인은 또한 틀림없이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이 마음과 경계, 그리고 원인과 결과가 결코 둘이 아니라 본디 하나라는 리치를 여실히 안다면, 그러고도 념불하여 극락정토 왕생하길 바라지 않는 자가 있으리라고는 나는 절대 믿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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