념불할 때가 곧 부처님을 뵈올 때이자 부처님이 될 때라
맨 처음 진짜(진리)를 헤매어(잃어) 가짜(망령)를 일으킴[迷眞起妄]은 한 생각 허튼 움직임[一念妄動]이라 하고, 맨 끝에 가짜를 되돌이켜 진짜로 돌아옴[返妄歸眞]은 한 생각 딱 들어맞음[一念相應]이라고 합니다.
그러한즉, 가짜(허튼 생각)를 일으킨 뒤 진짜로 되돌아오기 이전에, 또 어떤 법이 이 한 생각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한 생각 깨달아 맑은 인연에 따르면 곧 부처님 법계가 되고, 한 생각 헤매어 더러운 인연에 따르면 곧 나머지 아홉(보살 이하 륙도 중생) 법계가 됩니다.
시방 허공은 이 한 생각이 헤매어 어두워진 것이며, 일체의 (불)국토는 이 한 생각이 맑게 엉긴(응집된) 것입니다. 태생·난생·습생·화생의 네 생명 모습으로 나타나는 기본 과보[四生正報]는 이 한 생각의 감정 의지가 합쳐졌다 흩어졌다 함이요, 땅·물·불·바람의 네 요소로 이루어지는 의지[환경] 과보[四大依報]는 이 한 생각의 운동 정지가 거슬렀다 순응했다 함입니다.
오직 이 한 생각에 의지하여 모든 법이 바뀌어 나타나니, 이 한 생각을 떠난 바깥에는 어떠한 법도 있을 수 없습니다. 원래 이 한 생각은 본질상 법계로서 인연 따라 일어나는데, 인연은 자기성품[自性]이 없으므로 전체가 고스란히 법계입니다.
그러므로 가로(횡)로는 시방세계를 두루하고, 세로(종)로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를 다하면서, 잘못도 떠나고 시비도 초월하여 불가사의할 따름입니다. 법이기에 이러한 위신을 갖추고, 법이기에 이러한 작용을 갖춘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생각으로 서방 아미타불을 생각하며[念佛] 극락정토 왕생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념불할 적에, 서방 정토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내 마음속에 있으며, 또 내 이 마음도 벌써 서방 정토의 의보와 정보 안에 있게 됩니다. 마치 두 거울이 서로 마주 비치면, 서로 상대를 자기 안에 담아 비춰 주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가로로 시방세계에 두루 하는 실지 모습입니다.
그리고 세로로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를 다한다는 말로 볼 것 같으면, 념불할 때가 바로 부처님을 뵈올 때이자 또한 곧 부처님이 될 때이며, 왕생을 구할 때가 바로 왕생하는 때이자 또한 곧 중생들을 제도할 때입니다. 과거·현재·미래의 삼세가 동시에 존재하며, 달리 시간상 앞뒤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제석천궁 그물[帝網]의 구슬이 서로 비추는 빛으로도 전체를 고스란히 비유하기 어렵거니와, 남가일몽(南柯一夢)20)의 고사도 대략 빙산의 일각에나 비슷할 것입니다.
[남가일몽(南柯一夢): 당(唐)나라 리공좌(李公佐)가 지은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에서, 순우분(淳于焚)이 회화(홰)나무[槐樹]에 기대어 잠든 사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대괴안국(大槐安國) 남가군(南柯郡)의 태수가 되어 한평생 부귀영화를 진창 누리고 80세에 수명이 다하면서 깜짝 놀라 깨어나 보니, 대괴안국은 자기집 남쪽 그 홰나무 아래 있는 큰 개미집이고, 남가군은 그 홰나무의 남쪽 가지였다는 줄거리로, 한바탕 꿈을 가리킴.]
이러한 리치는 깨닫기는 가장 어렵거니와, 믿기는 가장 쉽습니다. 단지 곧장 이 자리에서 받들어 안기만 하면, 결국에는 반드시 온몸으로 받아 쓰게 될 것이니, 참구하여 공부하는 일에 끝마치고 해야 할 바를 이미 해치우는[所作已辦] 셈이 됩니다. 만약 그렇게까지 할 수가 없다면, 단지 편리한 대로 관찰하여 분수에 따라 받아 쓰면 됩니다.
마음은 업을 지을[造業] 수도 있으며, 마음은 업을 바꿀[轉業] 수도 있습니다. 업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지고, 업은 마음 따라 바뀝니다. 마음이 업을 바꿀 수 없다면 곧 업에 얽매이는 것이고, 업이 마음 따라 바뀌지 않는다면 곧 마음을 얽맬 수 있습니다. 마음이 어떻게 업을 바꿀 수 있는가 하면, 마음이 진리[道]와 합치하고 마음이 부처님과 합해지면, 곧 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업이 어떻게 마음을 얽맬 수 있는가 하면, 마음이 일상 인습에 의하여 되는 대로 행하고 받기에, 곧 업의 굴레에 얽매입니다.
현재의 모든 경계와 미래의 모든 과보는, 모두 오직 업의 소치이며, 또한 오직 마음의 조화(造化)입니다. 오직 업의 소치이기에 현재의 경계와 미래의 과보는 모두 일정함이 있는데, 이는 업이 마음을 얽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오직 마음의 조화이기에 현재의 경계와 미래의 과보는 모두 일정함이 없는데, 이는 마음이 업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보통 업이 마음을 얽맬 수 있어 현재의 경계와 미래의 과보가 일정한 때(숙명론의 상황)에, 문득 크고 넓은 마음을 내어 진실한 수행을 함으로써, 마음이 부처님과 합쳐지고 마음이 진리[道]와 합치된다면, 곧 마음이 업을 바꿀 수 있게 되어, 현재의 경계와 미래의 과보가 (원래) 일정하지만 (다시는) 일정하지 않게 됩니다.
또 마음이 업을 바꿀 수 있어 현재의 경계와 미래의 과보가 일정하지 않은 때(개척론의 상황)에, 크고 넓은 마음이 갑자기 후퇴하고 진실한 수행에 어그러짐이 생기면, 곧장 다시 업이 마음을 얽맬 수 있게 되어, 현재의 경계와 미래의 과보가 (원래) 일정하지 않다가 (도로) 일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업이란 이미 지난 때에 지은 것이라, 이것은 참으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마음을 낼지 말지 선택의 기회가 나한테 있어서, 업을 지을지 업을 바꿀지도 결코 남한테 달려 있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지금 당장 마음 내어 부처님을 생각[念佛]하며 극락 왕생을 구한다면, 예컨대 의보나 정보를 관상(觀想)하거나 또는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여 생각이 죽 이어져[念念相續] 관상과 념불이 지극해진다면, 마음이 곧 부처님과 합쳐집니다.
그렇게 합쳐지고 또 합쳐져서 합쳐짐이 지극해진다면, 마음이 업을 바꿀 수 있게 되어, 현재의 경계인 사바세계가 극락으로 바뀌고, 모태의 감옥[胎獄]에 다시 들어갈[輪廻] 미래의 과보가 정토에 화생(化生)할 련꽃 봉오리로 바뀌게 되나니, 이야말로 극락세계에 자유자재로이 노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때에, 그 마음이 더러 잘못 관조하거나 또는 갑자기 후회하거나 물러나서 더 이상 부처님과 합치하지 않게 되면, 곧장 다시 업이 마음을 얽매게 되어, 현재의 경계도 여전하고 미래의 과보도 의구(依舊)해지나니, 결국 사바 고해에 륙도 륜회할 괴로운 중생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들 사바 고해를 벗어날 뜻을 품고 극락정토 왕생을 구하는 사람들이여, 어찌 스스로 깜짝 놀라 경계하며 분발하여 수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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