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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다

철오선사어록. 철오선사어록 상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10. 00:10

본문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다

 

 

진실로 삶과 죽음(생사륜회)을 위하여 보리심을 내고,

깊고 독실한 믿음과 발원으로써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라.

[眞爲生死, 發菩提心, 以深信願, 持佛名號].”

 

 16글자는 정말로 념불 법문의 한 위대한 강령이자 종지입니다. 만약 진실로 생사 륜회를 벗어나겠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일체의 법문이나 가르침이 다 말장난[戱論: 문자의 유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간의 어떠한 괴로움도 생사 륜회보다 더 엄청나게 무거운 것은 없습니다. 생사 륜회를 끝마치지 못하면, 생겨났다 죽고 죽었다 생겨나면서 남과 죽음을 끊임없이 되풀이합니다. 한 아기보(자궁)를 벗어나면 다른 아기보로 들어가고, 한 살갗 부대를 내버리면 다른 살갗 부대를 다시 갖게 되면서, 그 고통이란 이미 감당하거나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납니다.

하물며, 륜회를 벗어나지 못하면, 타락(후퇴)을 면하기 어려운 법이거늘, 돼지의 자궁이나 개의 자궁이나 어느 곳인들 뚫고 들어가지 않겠으며, 당나귀의 가죽이나 말의 가죽이나 어느 살갗 부대를 뒤집어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지닌 이 사람 몸은 가장 얻기 어려우면서도, 또한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한 순간의 생각 차이로 금방 악도에 들어가기 십상입니다. 삼악도는 들어가기는 쉬운데 나오기는 어려우며, 특히 지옥은 갇힌 시간이 아주 길면서도 받는 괴로움은 엄청나게 큽니다.

전에 현겁(賢劫)의 일곱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동안 내내 개미 노릇만 하고 있는가 하면, 앞으로 8만 겁 이후에도 비둘기 몸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처럼 축생의 처지[畜道]도 그 시간이 지극히 장구하거늘, 아귀나 지옥에 처하는 시간은 그보다 몇 배나 더 긴지 모릅니다. 장구한 세월이 흘러 지나도록 어느 때나 끝마치며 어느 때나 쉬게 될지, 천만 가지 고통이 뒤섞여 지지고 볶을 때, 의지할 곳 하나 없고 구해줄 이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리치를 한 번 말할 때마다, 터럭과 옷자락까지 쭈볏 설 만큼 소름끼치고, 때때로 한 생각이 미칠 때마다, 오장륙부 마음속까지 온통 불타듯 들끓어 오릅니다. 이러한 까닭에 지금 당장 생사 륜회의 괴로움을 생각하기를, 마치 부모님을 여읜 듯 비통하게 여기고, 또한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황급히 서둘러야 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생사 륜회가 있어 내가 벗어나려고 바라는 것처럼, 일체 중생이 모두 생사 륜회하고 있으므로 또한 모두 다 거기서 벗어나야 마땅합니다. 저 중생들은 나와 본디 똑같은 한몸이며, 모두 다 오랜 과거 전생 동안 내 부모였고, 또한 미래에 모두 부처님이 되실 분들입니다. 만약 저 중생들을 두루 제도할 생각은 안 하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구한다면, 리치로 보아도 어그러짐이 있고, 마음도 편안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큰 마음[大心: 弘願]을 내지 않는다면, 밖으로는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을 감동시켜 가피를 얻을 수 없고, 안으로는 자신의 본래 성품에 딱 들어맞을[契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위로는 부처님 도를 원만히 성취할 수 없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시작도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입은 은혜와 사랑은 어떻게 보답하여 벗어나며, 또 시작도 없는 오랜 세월 동안 맺은 원한과 허물은 어떻게 풀어 없앨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오랜 겁 동안 쌓은 죄악의 업장을 참회하여 소멸시키기도 어렵고, 오랜 겁 동안 쌓아온 선근 공덕을 성장시켜 무르익게 하기도 어렵습니다. 하는 일이나 닦는 수행마다 온갖 업장의 인연에 부닥치고, 설사 뭔가 조금 성취하는 바가 있더라도, 끝내는 편협하고 조그만 것에 머물고 맙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본래 성품에 걸맞게 커다란 보리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큰 마음[大心]을 일단 내었으면, 그 다음에는 마땅히 큰 수행[大行] 가운데, 착수하기 쉬우면서 성취하기도 쉽고, 또 지극히 평온하고 안전하면서도 지극히 원만하고 신속한 첩경으로는, 독실한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는 칭명념불(稱名念佛)보다 더 나은 게 없습니다.

이른바 깊은 믿음[深信]이란, 석가여래께서 32상 가운데 하나인 범음 목소리[梵音聲相]로 친히 설하신 가르침은 결코 거짓이나 속임이 없으며, 또한 아미타 세존의 대자비심도 결코 헛된 발원이 없으심을 독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또한 념불로 극락 왕생을 구하는 원인 수행은, 마치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틀림없이 부처님을 친견하고 반드시 왕생하는 결과 복덕을 가져오리라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산에서 소리치면 메아리가 반드시 따르고, 햇빛 아래 사물에는 틀림없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법입니다. 원인은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으며, 결과는 전혀 까닭없이 그저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러한 리치는 부처님께 여쭈어 볼 필요도 없이 저절로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들이 지금 당장 지니는 한 생각의 마음 성품[一念心性], 전체 진여(실상, 본체)가 고스란히 망상(허망, 현상)이 되고[全眞成妄], 따라서 전체 망상 그대로가 바로 진여입니다[全妄卽眞]. 망상(현상)으로는 하루종일 바깥 사물의 연분에 따르면서도, 진여(본체)로는 하루종일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공간상)으로는 시방 삼계에 두루 미치고, (시간상)으로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관통하여, 본체 그 자체로 존재하며 밖이 없습니다.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도 결국 그 가운데 있습니다. 내가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님의 마음으로써, 내 마음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以我具佛之心, 念我心具之佛]. 내 마음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님께서, 어찌 내가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님의 마음에 호응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극락 왕생하신 분들의 전기에 실린 림종의 상서로운 모습들이 하나하나 또렷또렷 전해지는데, 이들 실록(實錄)이 또한 어찌 우리를 속이고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확신을 하고 나면, 극락 왕생의 발원이 저절로 간절해질 것입니다. 만약 저 극락세계의 즐거움을 가지고, 이 사바세계의 괴로움을 되돌아본다면, 마치 똥구덩이를 벗어나고 감옥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것만큼이나, 이 사바 고해를 싫어하고 떠나려는 마음이 저절로 강렬해질 것입니다.

반대로 이 사바세계의 괴로움을 가지고, 저 극락국토의 즐거움을 멀리 관망한다면, 마치 고향에 되돌아가고 보물창고에 달려가는 것만큼이나, 극락세계를 기뻐하고 왕생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간절해질 것입니다.

요컨대, 마치 목마른 자가 물 마시는 걸 생각하듯이, 굶주린 자가 밥 먹기를 생각하듯이, 또한 병들어 신음하는 자가 좋은 약을 먹고 낫기를 바라듯이, 어린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를 그리워하듯이, 극락 왕생을 발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원수가 칼을 들고 뒤쫓아 오는 걸 피해 달아나듯이, 또한 물 속이나 불 속에 빠져 다급하게 구원을 구하듯이, 그렇게 사바 고해에서 벗어나기를 발원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이렇게만 간절히 발원한다면, 어떠한 경계나 연분도 결코 우리 마음을 끌어당겨 뒤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다음에 이러한 믿음과 발원의 마음을 가지고, ‘나무 아미타불이라는 명호를 단단히 붙잡고 지송합니다. 부처님 명호를 한 번 지송할 때마다 구품련화 종자가 하나씩 심어지며, 한 구절 염송할 때마다 극락왕생의 기본 원인[正因]이 하나씩 다져집니다.

이렇게 부처님 명호를 염송함에는, 모름지기 곧장 마음과 마음이 계속 이어지고, 생각과 생각이 조금도 차이 나지 않도록 하며, 오직 전념하고 오직 부지런히 념불하여, 조금도 잡념망상이 끼여들거나 념불이 끊이지 않도록 닦아야 합니다. 념불을 오래할수록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고, 지송을 계속할수록 발원이 더욱 간절해져서, 그렇게 오래오래 지속하다 보면, 저절로 한 덩어리가 되어 한 마음 흐트러지지 않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의 경지에 들게 됩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념불하고서도 만약 극락정토에 왕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석가여래는 곧 거짓말쟁이가 되고, 아미타불은 부질없는 발원을 한 셈이 됩니다. 과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관무량수경에 나오는 이 마음으로 부처님이 되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다[是心作佛, 是心是佛].”는 두 구절 말씀은, 선종에서 말하는 곧장 사람 마음을 가리켜, 본래 성품을 보고 부처님을 이룬다[直指人心, 見性成佛].”는 법어보다도, 더욱 간단 명료하고 통쾌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본래 성품을 보는 것[見性]은 어렵고, 부처님이 되는 것[作佛]은 쉽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견성(見性)인가 하면, 마음의 의식[心意識]을 완전히 떠나 영혼의 빛[靈光]이 용솟음쳐 쏟아져야 비로소 본래 성품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작불(作佛)인가 하면,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며 부처님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의 복덕을 관조하면 곧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습니다.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할 때에, 이 마음이 곧 32상과 80종호니라[汝等心想佛時, 是心卽是 三十二相八十種好].”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부처님한테 생각[想念]을 두기만 하면 곧 부처님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무릇 선종의 성불(成佛) 관무량수경의 시불(是佛)은 리치상으로는 전혀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종의 견성(見性) 관무량수경의 작불(作佛)은 그 난이도가 이처럼 현격히 차이납니다. 그러니 념불을 참선과 비교해 보면 더욱 간단명료하고 통쾌하다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선종)는 조사의 말씀이고, 하나(경전)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어느 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이 가볍습니까? 그리고 어느 것을 선택하고 어느 것을 내버려야 하겠습니까?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다만 묵은 습관을 다 내버리고서, 마음을 텅 비우고 기질을 평정하게 가라앉힌 다음, 이 두 가지를 잘 음미해 보고 비교 점검해 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면 적어도 제 말씀이 틀리지 않다고 틀림없이 수긍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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