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어디서 깨달음을 구할 것인가
무릇 도를 알아본(깨달은) 뒤에 도를 제대로 닦기 시작하고, 도를 닦은 뒤에 도를 증득하는[夫見道而後修道, 修道而後證道.] 것이니, 이는 모든 성인이 함께 거치신 길이요, 만고불변의 확정된 이론입니다(옮긴이: 이른바 先悟後修를 뜻함). 그러나 도를 알아 보는(깨닫는) 걸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교종(敎宗)에 따른다면, 반드시 (경론의 리치에 대한) 원만한 이해가 크게 열려야[大開圓解] 하고, 선종(禪宗)에 의한다면, 반드시 첩첩관문을 곧장 꿰뚫어야[直透重關]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도 닦는 걸[修道] 논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곧 눈먼 봉사 문고리 잡기식 수련[盲修如鍊]이 되고 마니, 담에 부딪치고 벽에 머리 찧다가 마침내 구덩이에 떨어지고 늪에 빠지는 꼴을 면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정토 념불 법문 하나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미타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여기서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 지난 곳에 극락(極樂)이라는 명칭의 세계가 있는데, 그 곳에 아미타(阿彌陀)라는 명호의 부처님께서 지금 현재 설법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단지 그 곳에 왕생하길 발원하며 그 부처님 명호만 지송하면 곧 그 곳에 왕생할 수 있답니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마음과 눈으로 친히 아시고 보신 경계이며, 결코 보살·벽지불·성문의 삼승(三乘) 성현들이 알아볼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마땅히 부처님 말씀을 굳게 믿고, 그에 따라 그 곳에 왕생하길 발원하며 아미타불 명호를 지송하여야만 됩니다. 이는 곧 부처님의 지견(知見)으로 우리 자신의 지견을 삼는 것이며, 그밖에 다른 깨달음의 법문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법문의 수도(修道)는 반드시 깨달은 뒤 법에 따라 갈고 닦고 익히며, 마음을 추스려 선정을 이루고[攝心成定], 선정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터지고[因定發慧] 지혜로 말미암아 미혹을 끊어야[因慧斷惑] 합니다. 터진 지혜에는 우열이 있게 마련이고, 끊은 미혹에도 깊이(정도)의 차이는 있는 법이니, 그런 것을 모두 따진 다음에야 바야흐로 후퇴할지 안 할지(不退轉의 여부)가 판가름 납니다.
그러나 오직 이 정토 법문만큼은, 다만 믿음과 발원의 마음으로 부처님 명호를 오로지 지송하여, 한 마음 흐트러지지 않는[一心不亂] 경지에 이르면, 정토 수행[淨業]이 바로 크게 성취되고, 목숨이 다한 뒤 결정코 극락 왕생하며, 한번 왕생하면 곧 영원토록 뒤로 물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또 다른 법문의 수도는 먼저 모름지기 자신의 현재 업장을 깨끗이 참회해야 합니다. 만약 현재의 업장을 깨끗이 참회하지 않으면, 이것이 곧 도를 가로막아 더 이상 앞으로 닦아 나갈 길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정토 법문을 닦는 사람은 이내 업장을 지닌 채 왕생할 수 있기에, 모름지기 업장을 깨끗이 참회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지송하는 나무 아미타불의 념불 소리 한 마디가 80억 겁 동안 쌓아온 생사 륜회의 중죄(重罪)를 소멸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법문의 수도는 모름지기 번뇌를 죄다 끊어야 합니다. 만약 보고 생각하는 번뇌[見惑, 思惑]가 터럭 끝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육신의 생사 륜회가 끝없이 이어지며, 성현과 범부 중생이 함께 사는 동거 국토(同居國土)를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정토 법문 수행만은 곧장 공간상[橫]으로 삼계(三界)를 벗어나며, 번뇌를 죄다 끊지 않은 채로도 여기 사바세계의 동거 국토로부터 저기 극락정토의 동거 국토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저기 극락정토에 한번 왕생하면, 생사 륜회의 그루터기가 뿌리째 영원히 뽑혀 버립니다. 그리고 거기에 왕생하면, 항상 부처님을 뵈옵고, 때때로 법문을 들으며, 의식주 모든 것이 저절로 그러한 대로[自然] 나오고, 물이나 새나 나무들조차도 모두 설법합니다.
그 곳 동거 국토에서는 그 위의 세 가지 정토(常寂光土, 實報土, 方便土를 가리킴. 同居土와 함께 네 정토로 나뉘어짐)가 나란히 보이면서, 위로 훌륭한 분들이 모두 한 곳에 함께 모여 수행한답니다. 그래서 세 가지 불퇴전[三不退]22)을 원만히 증득하여, 바로 그 한 생애에 부처님의 뒤를 이을 후보 자리[補佛位]에 오릅니다.
[삼불퇴(三不退): 첫째, 수행해서 오른 지위가 떨어지지 않는 위불퇴(位不退); 둘째, 수행하는 방법이 후퇴하지 않는 행불퇴(行不退); 셋째, 올바른 생각(正念)이 흐트러지지 않는 념불퇴(念不退)를 가리킨다. 서방정토에 왕생하면 다시는 사바 예토(穢土)로 떨어지지 않는 처불퇴(處不退)를 삼불퇴에 더하면, 정토법문의 사불퇴(四不退)가 된다.
삼불퇴를 보살의 수행 지위에 상응시키는 대비법은 각 종파마다 조금씩 다르다. 법상종에 따르면, 만 겁 동안 수행하여 십주(十住) 지위에 올라, 다시는 악업에 타락하여 생사 륜회하는 일이 없는 경지가 위불퇴이고, 초지(初地)에 올라 이타(利他) 수행에서 물러나지 않는 게 행불퇴이며, 8지 이상에 올라 애쓸 필요가 없는 지혜를 얻고 생각마다 진여(眞如)의 바다에 드는 게 념불퇴라고 한다. 천태종에서는, 별교(別敎)의 초주(初住)부터 제7주까지가 보고 생각하는 번뇌(見思之惑)를 끊어 생사 륜회를 벗어난 위불퇴이고, 제8주부터 십회향(十廻向)까지가 진사번뇌[塵沙惑]를 끊어 이타행을 잃지 않는 행불퇴이며, 초지 이상이 무명번뇌[無明惑]를 끊어 중도(中道)의 정념을 잃지 않는 념불퇴라고 한다. 원교(圓敎)에 대비하면, 초신(初信)부터 제7신까지가 위불퇴, 제8신부터 제10신까지가 행불퇴, 초주 이상이 념불퇴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러한즉, 정토 법문은 맨 처음에는 깨달음의 법문을 구하는 게 생략되고, 나중에는 지혜가 터지길 기다릴 필요도 없으며, 모름지기 업장을 깨끗이 참회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번뇌를 말끔히 끊을 필요도 없으므로, 지극히 간단하고 명료하면서도 지극히 곧고 재빠른 길입니다. 그러나 증득해 들어가면, 지극히 넓고 크면서도 지극히 원만한 구경(究竟)의 경지입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수행자들은 마땅히 세심히 살피고 음미하여 신중히 선택해야 합니다. 행여 한때의 우쭐하고 제 잘난 자부심에 빠져, 이토록 수승(殊勝)하고 엄청난 최대의 이익을 놓치는 일은 절대 없길 바랍니다.
몹시 가난한 어떤 사람이 멀리서 돈 꾸러미 하나를 발견하고 다가가서 집으려고 보니 뱀이었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 옆에 비켜서서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뒤 다른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 바로 그 돈 꾸러미를 주워 가는 것이었습니다.
무릇 돈이 뱀으로 보인 것은, 오직 업장의 감응이며 마음의 나타남입니다. 돈 꾸러미 위의 뱀 모습이 진실로 업장의 감응이며 마음의 나타남이라면, 뱀 위의 돈 모습만 유독 업장의 감응이자 마음의 나타남이 아닐 리가 있겠습니까?
돈 위의 뱀 모습은 (가난뱅이) 한 사람이 지닌 개별 업장의 망견(妄見)이며, 뱀 위의 돈 모습은 수많은 일반인이 함께 지닌 공동 업장의 망견일 따름입니다. 한 사람의 망견은 그 망령됨을 쉽게 알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의 일반 망견은 그 망령됨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알기 쉬운 예를 가지고 알기 어려운 리치를 미루어 짐작해 보면, 그 알기 어려운 리치도 또한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즉, 뱀 모습은 진실로 뱀이지만, 돈 모습도 또한 뱀일 뿐입니다. 이렇듯이 계속 추론해 간다면, 안으로 육근(六根)을 지닌 육신은 물론, 밖으로는 사물 경계도 한 방향[一方]으로부터 시방(十方)까지, 나아가 사대부주(四大部洲)와 삼천대천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이 돈 위의 뱀 모습일 따름입니다. 다만, 오직 마음의 뱀이 나타나면 곧장 사람을 물 수 있지만, 오직 마음의 돈이 나타나면 바로 유익하게 쓸 수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오직 마음 밖에는 어떠한 바깥 경계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또 사바세계의 더러운 괴로움과 안양(安養: 極樂의 별칭) 세계의 청정한 즐거움도 모두 오직 마음의 나타남일 뿐입니다. 그러나 일단 마음의 더러운 괴로움이 나타나면 엄청난 고통과 궁핍을 당하지만, 마음의 청정한 즐거움이 한번 나타나면 막대한 희열과 이익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듯이 더러운 괴로움과 청정한 즐거움이 다같이 마음의 나타남이라고 한다면, 무슨 까닭에 마음의 더러운 괴로움을 내버리고 그 대신 마음의 청정한 즐거움을 취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어찌하여 꼭 영겁토록 생사 륜회하며 여덟 가지 고통에 기꺼이 시달림을 당한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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