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깊게 발원은 간절하게
우리들이 생사(生死)의 중대한 갈림길에 놓일 때, 오직 두 가지 힘에 좌우됩니다. 하나는, 마음의 실마리가 여러 갈래로 복잡하게 엉클어진 가운데 무거운 쪽으로 치우쳐 떨어지게 되니, 이것이 곧 심력(心力: 마음의 힘)입니다. 다른 하나는, 마치 사람이 남한테 빚을 많이 진 경우 강한 자가 먼저 끌어(빼앗아)가 버리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바로 업력(業力: 업장의 힘)입니다.
업력이 가장 크지만, 심력은 더욱 큽니다. 업장은 본디 자기 성품[自性]이 없어 온전히 마음에 의지하지만, 마음은 업을 지을 수도 있거니와, 업을 뒤바꿀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심력은 오직 묵직하고, 업력은 오직 강하여 중생을 끌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 묵직한 마음으로 정토 수행[淨業]을 닦는다면 청정한 업[淨業]이 강해질 것이며, 마음이 묵직하고 청정한 업이 강하니 오직 서방 정토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사바세계의 목숨이 다할 때는, 다른 곳에 생겨나지 않고 틀림없이 서방 정토에 왕생하게 됩니다. 비유하건대, 큰 나무와 큰 담장이 평소 서쪽을 향해 기울어지고 있었다면, 나중에 무너질 때는 결코 서쪽 이외의 다른 쪽을 향할 수 없는 리치와 똑같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묵직한 마음[重心]이겠습니까? 우리들이 정토 수행을 닦아 익힘에, 믿음은 깊은 게 귀중하고, 발원은 간절한 게 소중합니다. 믿음이 깊고 발원이 간절한 까닭에, 그 어떠한 이단 사설(異端邪說)도 우리(마음)를 흔들거나 미혹시킬 수 없으며, 그 어떠한 경계 인연(境界因緣)도 우리(마음)를 꾀어내거나 유혹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정토 법문을 올바로 수행할 적에, 가령 달마 대사께서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나시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합시다.
“나한테는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서[直指人心] 본래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는[見性成佛] 참선 법문이 있느니라. 그대가 만약 념불 공부를 놓아 버리기만 하면, 내 그대에게 이 참선 법문을 전해 주리라.”
설령 이렇더라도, 우리는 단지 달마 조사께 예를 올리고 이렇게 응답해야 합니다.
“저는 먼저 이미 석가여래로부터 념불 법문을 전해받아, 종신토록 변함없이 받아 지니면서 수행하기로 발원하였습니다. 조사(祖師)께서 비록 심오하고 미묘한 참선의 도를 가지고 계신다 할지라도, 저는 감히 저의 본래 서원을 스스로 어길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가령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문득 몸을 나토시어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칩시다.
“내가 전에 념불 법문을 설한 것은 단지 일시적인 방편이었을 따름이니라. 이제 그것보다 훨씬 훌륭한 수승법문(殊勝法門)이 있나니, 그대는 마땅히 념불을 놓아 버릴지어다. 내 그대에게 당장 그 수승법문을 설해 주겠노라.”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는 단지 부처님께 머리 조아리며 이렇게 여쭐 뿐입니다.
“저는 앞서 세존께 정토 법문을 받으면서, 이 한 목숨 붙어 있는 한 결코 바꾸지 않겠다고 발원하였습니다. 여래께서 비록 더욱 수승한 법문을 가지고 계신다 할지라도, 저는 감히 제 본래 서원을 스스로 어길 수가 없습니다.”
비록 부처님이나 조사께서 몸을 나토실지라도, 오히려 그 믿음을 바꾸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마왕(魔王)이나 외도(外道) 또는 허망한 사설(邪說)이 어찌 그 믿음을 뒤흔들거나 미혹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을 수 있다면, 그 믿음은 정말 깊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설령 빨갛게 달군 쇠바퀴가 정수리 위에서 빙글빙글 돈다고 할지라도, 이 따위 고통 때문에 극락 왕생의 발원을 놓아 버리거나 움츠리지 않아야 합니다. 또 가령 전륜성왕의 훌륭하고 미묘한 오욕(五慾)의 쾌락이 눈앞에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그까짓 즐거움 때문에 극락 왕생의 발원을 놓아 버리거나 움츠려도 안 됩니다.
이처럼 지극한 순행의 쾌락과 역행의 고통에도 오히려 발원을 바꾸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세간의 사소한 순행(쾌락)과 역행(고통)의 인연 경계 따위가 우리의 발원을 어떻게 뒤바꾸거나 돌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발원할 수 있다면, 그 발원은 정말 간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깊고 발원이 간절한 걸 일컬어 묵직한 마음[重心]이라 하고, 그렇게 정토 수행을 닦으면 청정한 업이 반드시 강해집니다. 마음이 묵직한 까닭에 쉽게 순수해지고, 청정한 업이 강하기 때문에 쉽게 원숙해집니다.
극락정토의 업(공부)이 그렇게 원숙해지면, 사바세계의 오염된 연분이 곧 다하게 됩니다. 정말 그렇게 사바세계의 오염된 연분이 이미 다한다면, 림종 때 비록 륜회의 경계가 또다시 눈앞에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결코 륜회할 수 없습니다. 또 정말 그토록 청정한 업(공부)이 이미 원숙해진다면, 림종 때 비록 아미타불과 극락정토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길 바란다고 해도,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과 발원의 중요한 핵심은, 바로 평소에 잘 지니고 닦아야 림종 때 스스로 갈림길에 빠져들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마치 옛 고승대덕께서 림종에 육욕천(六欲天)의 동자(童子)들이 차례로 맞이하러 왔어도 모두 따라가지 않고서, 오직 일심전념으로 부처님만 기다리다가 나중에 부처님께서 나타나시자, 이윽고 부처님께서 오셨다고 말하면서 마침내 합장한 채로 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됩니다.
무릇 목숨이 막 넘어가는 림종은 사대(四大: 地·水·火·風)가 각기 흩어지려고 하는 판인데, 이 어떤 때입니까? 또 육욕천의 동자들이 차례로 맞이하러 왔다면, 이는 또 어떤 경계입니까? 정말로 평소 믿음과 발원이 100% 견고하게 확립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림종 때 그 같은 천상의 경계를 대하고서도 그토록 강인하게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옛 고승대덕 같은 분은 진실로 정토 법문 수행자들한테 만고불변의 모범과 전형이십니다.
어떤 참선 수행자가 이렇게 물어왔습니다.
“일체의 법은 모두 다 꿈과 같으니, 사바세계도 진실로 꿈이고 극락세계 또한 꿈입니다. 둘다 똑같이 꿈이라면, 극락 왕생의 념불 법문을 닦아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7지(地) 이하의 보살은 꿈 속에서 도를 닦으며[夢中修道], 무명(無明)이라는 큰 꿈은 비록 등각(等覺) 보살조차도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부처님 한 분만이 비로소 크게 깨어 있다[大覺: 완전히 깨달았다]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꿈꾸는 눈이 아직 깨어 열리기 전에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진짜처럼 완연(宛然)한 법입니다. 꿈속에서 사바세계의 지극한 괴로움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꿈속에서 극락세계의 미묘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사바세계의 꿈은 꿈에서 꿈으로 이어지면서, 꿈꾸고 또 꿈꿀수록 더욱 미혹에 깊숙이 빠져들지 않습니까?
그에 반해, 극락세계의 꿈은 꿈에서 깨어남(깨달음)으로 나아가면서, 깨어나고 또 깨어날(깨닫고 또 깨달을)수록 점점 부처님의 큰 깨어남[大覺]에 이르는 것입니다. 꿈꾸는 것은 둘 다 같지만, 꿈꾸는 까닭(목적)은 일찍부터 서로 같지 않거늘, 어떻게 함께 나란히 논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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