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진리에 들어가는 핵심 법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큰 바다[佛法大海]는 믿음[信]이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거니와, 정토 법문은 믿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는 념불은 곧 모든 부처님의 가장 심오한 수행방법입니다. 오직 다음 생에 부처님이 되실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님만 조금 알 수 있을 뿐, 그 나머지 모든 성현들은 그 지혜 수준으로 알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에, 단지 믿고 따라야 할 따름입니다. 하물며 하근기의 하찮은 범부 중생들이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그래서 열한 가지 착한 법[十一善法]23) 가운데서도 믿음이 맨 처음 나오는데, 믿는 마음[信心]에 앞서는 그 어떠한 착한 법도 없음을 뜻합니다. 또 보살의 55지위24) 서열도 믿음[信: 十信]으로부터 시작하는데, 믿음의 지위 앞에 그 어떤 성현[보살]의 지위도 없음을 말합니다.
[11선법(善法): 유식종(唯識宗)에서 세간과 출세간의 삼라만상을 포괄하여 백법(百法)으로 설명하는데, 심법(心法:8識)·심소유법(心所有法:51)·색법(色法:11)·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24)·무위법(無爲法:6)으로 크게 5분(分) 된다. 그 가운데 심소유법은 다시 편행(遍行:5)·별경(別境:5)·선(善:11)·번뇌(煩惱:6)·수번뇌(隨煩惱:20)·부정(不定:4)으로 구분되는데, 선법 11가지는 신(信)·참(續)·괴(愧)·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癡)·정진(精進)·경안(輕安)·불방일(不放逸)·행사(行捨)이다.
소승(小乘) 구사종(俱舍宗)에서는 75법(法)으로 설명하는데, 심법(心法)을 통괄하여 하나로 보고 무위법을 셋으로 나누며 심소유법을 46가지로 구분한다. 그 가운데 대선지법(大善地法)은 10가지인데, 무치(無癡)가 빠지고, 정진을 근(勤)으로 불러 신(信) 다음 두 번째에 두고, 행사(行捨)를 사(捨)로 불러 세 번째 두는 등 약간의 차이가 있다.]
[55위(位): 보살승(菩薩乘)의 위계(位階)는 각 경론(經論)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바, 대일경(大日經)·승천왕반야경(勝天王般若經)·지도론(智度論)에 나오는 십위(十位)부터,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묘각(妙覺)을 합쳐 부르는 11위(位), 유식론(唯識論)에서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에 묘각을 합친 41위(位), 그리고 십주(十住) 앞에 십신(十信)을 보탠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의 51위(位), 여기다가 다시 묘각 바로 아래에 등각(等覺)을 보탠 화엄경과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의 52위(位), 수릉엄경(首楞嚴經)에서 난(煖)·정(頂)·인(忍)·세(世)의 사선근(四善根:四加行)을 십회향 뒤에 보탠 56위(位)까지 매우 다양하게 분류된다. 여기서 55위(位)라 함은, 56위(位)에서 맨 위의 묘각(妙覺)을 부처님 과위[佛果]로 따로 떼어 놓고 보살이 보리도를 수행해 올라가는 길만을 셈한 수릉엄경의 법문을 따른 것이다.]
그래서 마명(馬鳴) 보살님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지으셨고, 선종의 삼조(三祖) 승찬(僧璨) 조사님은 『신심명(信心銘)』을 지으셨습니다. 믿는 마음[信心] 하나가 진리[道]에 들어가는 중요한 핵심 법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왕중회(王仲回)가 양무위(楊無爲)25)한테 물었답니다.
[양무위(楊無爲): 송(宋) 신종(神宗) 때 태상(太常)과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등을 지낸 양걸(楊傑). 예악(禮樂)에 밝았고, 불교수행에도 정진하였음. 앞에 천태지자 대사의 『정토십의론』에 서문을 씀.]
“념불을 어떻게 하여야 끊어짐 없이 갈 수 있습니까?”
이에 양무위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답니다.
“한번 믿은 뒤에는 두 번 다시 의심하지 마시오.”
그러자 왕중회는 아주 기뻐하며 돌아갔는데, 얼마 안 있어 양무위는 꿈에 중회가 나타나서 머리를 조아리고 합장하며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가르침을 받잡고 일러준 대로 해서 커다란 이익을 얻었습니다. 지금 저는 이미 극락정토에 왕생하였습니다.”
양무위가 나중에 중회의 아들을 만나 중회가 서거한 때와 광경을 물었더니, 그 때가 바로 자기 꿈에 나타난 날이었더랍니다.
오호라, 믿음의 뜻과 리치가 이토록 중요하고 위대하답니다.
법장(法藏) 비구가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한테 불성(佛性)에 맞갖는 48가지 큰 서원을 발한 뒤, 무량겁의 세월 동안 발원에 따라 되셨습니다. 그래서 법장은 아미타로 명호가 바뀌었고, 세계의 명칭은 극락이 되었습니다. 아미타께서 아미타가 되신 까닭은 유심(唯心: 유심정토)과 자성(自性: 자성미타)을 깊이 증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즉, 미타와 극락은 바로 자성미타와 유심극락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이 마음과 성품[心性]은 바로 중생과 부처님이 평등하게 함께 지니는 것이며, 결코 부처님한테만 치우쳐 속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중생한테만 치우쳐 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마음이 미타에 속할 것 같으면, 중생은 곧 미타 마음 속의 중생인 것이며; 만약 마음이 중생에 속할 것 같으면, 미타는 바로 중생 마음 속의 미타인 것입니다. 미타 마음 속의 중생으로 중생 마음 속의 미타를 생각[思念]하는데, 어찌 중생 마음 속의 미타가 미타 마음 속의 중생한테 반응(호응)하지 않겠습니까?
단지 다른 것은, 부처님은 이 마음을 깨달아서 마치 깨어 있는 사람과 같고, 중생은 이 마음을 잃고 헤매는지라 마치 꿈속 사람 같을 따름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부처님)을 떠나서 달리 꿈속 사람(중생)이 없거늘, 어찌하여 꿈속 사람을 떠나서 달리 깨어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꿈속 사람이 스스로(꿈속 상태)를 진짜라고 오인(誤認)하지만 않으며, 또한 꿈속 사람을 떠나서 달리 깨어 있는 사람을 찾지만 않으면 됩니다.
오직 깨어 있는 사람을 늘상 생각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머지않아 곧 큰 꿈이 점차 깨이게 되고, 꿈속의 눈이 뜨일 것입니다. 그러면 꿈속에서 생각하던 주인(중생)이 곧바로 꿈속에서 생각하던 바 깨어 있는 사람(부처님)이 되며, 깨어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꿈속의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꿈속에 있는 사람은 수많은데, 깨어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입니다. 시방세계의 뭇 여래께서는 모두 다함께 하내 법신(法身)이며, 한 마음[一心]이자 한 지혜[一智慧]이고, 위력과 무외(無畏)도 또한 마찬가지로 하나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이자 바로 여럿[卽一卽多]이며, 항상 같으면서도 항상 구별되는[常同常別], 법 그대로면서 저절로 미묘한[法爾自妙] 법인 것입니다.
념불의 뜻과 리치는 대략 이와 같습니다.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건 결정코 왕생하며, (사바 고해를) 떠나는 건 실제로는 떠나지 않는다[生則決定生, 去則實不去].”
이 두 구절에서 앞 구절은 구체적인 사실을 말하고, 뒷 구절은 추상적인 리치[理]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체적인 사실[事]은 리치에 즉한 사실[卽理之事]이며, 그래서 왕생하지만 왕생함이 없다[生而不生]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왕생을 곧이곧대로 왕생으로 여기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또 추상적인 리치도 사실에 즉한 리치[卽事之理]며, 그래서 떠나지 않으면서도 떠난다[不去而去]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떠나지 않음을 곧이곧대로 떠나지 않는다고 여기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두 구절을 한 구절로 종합해서 보면, 구체적 사실과 추상적 리치가 원만하게 융합[事理圓融]하여, 이른바 합치면 둘다 아름답게 되는 격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두 구절을 각각 별개의 문장으로 나누어 본다면, 구체적 사실과 추상적 리치가 따로 놀게 되니, 이른바 갈라지면 둘다 손상되고 마는 격입니다. 만약 이 두 구절만으로는 한 구절로 종합해 보기가 적합하지 않다면, 이 두 구절의 뒤에 부연한 구절을 덧보태 네 구절로 보면 됩니다.
“왕생하는 건 결정코 왕생하지만, 왕생하면서도 왕생함이 없으며,
떠나는 건 실제로는 떠나지 않지만, 떠나지 않으면서도 떠난다.
[生則決定生 生而無生 去則實不去 不去而去].”
비록 네 구절이 되었지만, 그 의미는 조금도 늘어남이 없으며; 또한 한 구절로 합쳐진다 해도, 그 의미는 조금도 줄어듦이 없습니다. 결국 구체적 사실과 추상적 리치가 원만하게 융합한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그렇지만 ‘떠나는 건 실제로는 떠나지 않는다’는 리치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왕생하는 건 결정코 왕생한다’는 사실에 집착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왜냐하면 구체적 사실에 집착하여 추상적 리치에 좀 어둡기로서니, 오히려 구품련화에 오르는 공덕은 헛되이 날리지 않지만; 만약 추상적 리치에 집착하여 구체적 사실(나무 아미타불 명호 지송하는 칭명념불)을 아예 작파한다면, 이내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고 마는 허물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체적 사실은 추상적 리치를 저절로 겸비하는 공덕이 있지만, 추상적 리치는 구체적 사실 없이는 홀로 설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왕생하는 걸 진짜 왕생하는 걸로 여기면 곧 상견(常見: 有見)에 떨어지고, 떠나지 않는 걸 진짜 떠나지 않는다고 여기면 곧 단견(斷見: 無見)에 떨어집니다. 단견과 상견은 비록 모두 똑같이 올바르지 못한 사견(邪見)에 속하지만, 그러나 단견의 허물과 폐단이 훨씬 크고 무겁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구체적 사실에 집착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궁극에는 두 구절을 원만히 융합 회통하는 것이 가장 훌륭함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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