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부처님[唯佛]·마음[唯心]을 으뜸 종지로 삼는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성호 한 구절은 유심(唯心)을 으뜸 종지(宗旨)로 삼는 줄을 모름지기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유심의 의미는 모름지기 세 가지 사량(思量: 관점·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 세 가지 사량이란 바로 현량(現量)·비량(比量)·성언량(聖言量)입니다.
첫째, 현량(現量)이란 그 진리를 몸소 증득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예컨대, 구마라집(鳩摩羅什) 대사는 일곱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절에 들어갔다가, 부처님 발우[佛鉢]를 보고 기뻐서 머리에 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뒤 그의 마음에 ‘나는 나이가 아주 어리고 부처님 발우는 몹시 무거운데, 어떻게 내가 머리에 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언뜻 스쳐지나 갔습니다. 이 생각이 들자마자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발우를 내려놓으면서, 마침내 “모든 법이 오직 마음뿐이다[萬法唯心].”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또 신라 때 원효(元曉) 법사는 중국에 공부하러 오던 길에 밤에 무덤가에서 묵게 되었는데, 몹시 목이 타서 달빛 아래 보이는 맑은 물 한 움큼을 손으로 움켜 마셨습니다. 마실 때는 물이 몹시 향긋하고 맛있다고 느껴졌는데, 이튿날 새벽 깨어나서 그 물이 바로 무덤 속에서 흘러 나온 (해골 바가지에 담긴) 걸 보고는 속이 뒤집히며 구역질이 심하게 났습니다. 그래서 이내 모든 법이 오직 마음뿐임[萬法唯心]을 깨닫고, 본국으로 되돌아가 훌륭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현량(現量)으로 자신이 몸소 체험으로 증득한 것입니다.
둘째, 비량(比量)이란 많은 현상[衆相]을 통하여 그 리치를 관찰하여 비유로써 아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 비유 가운데 꿈의 비유[夢喩]가 가장 절실합니다. 예컨대, 꿈속에서 보는 산천이나 인간과 같은 삼라만상은 천차만별로 잡다하지만, 모두 다 내 꿈꿀 수 있는 마음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꿈꾸는 마음을 벗어나서는, 그 어떤 법(물건)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꿈의 허망한 모습으로 비유해 보면, 우리들 앞에 펼쳐져 있는 일체 모든 법이 오직 마음[唯心]의 표현일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성언량(聖言量)이란 삼계가 오직 마음뿐이며[三界唯心] 모든 법이 오직 인식뿐이다[萬法唯識]는 진리를 팔만사천 대장경과 역대 모든 론장(論藏) 어록에서 한결같이 설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현량·비량·성언량의 세 관점에서 유심의 의미를 살펴보았는데, 이제 구체적 사실[事: 현상]과 추상적 리치[理: 본질]의 두 범주를 통해 도구(道具)와 조화(造化)의 관계를 밝혀 보겠습니다.
즉, 본질이라는 추상적 리치의 도구[理具]가 있기 때문에, 바야흐로 현상이라는 구체적 현상의 조화[事造]가 있게 됩니다. 만약 본질(추상적 리치)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현상(구체적 사실)이 어떻게 만들어질(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본질이 갖추어진[理具] 까닭은, 단지 현상의 조화(造化: 발현)를 갖추어 주는 도구일 따름입니다. 현상의 조화를 떠나서 달리 갖추어야 할 바는 없는 것입니다. 현상의 조화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본질의 도구가 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만약 현상이 조화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본질이 본디 갖추어져 있는 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거꾸로, 현상이 조화로 나타나는[事造] 까닭은, 단지 본질이 본래 갖추어져 있음을 조화로 나타내기 위함일 뿐입니다. 본질이 본래 갖추어져 있지 않고서는 달리 조화를 나타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바로 이 한 생각 한 마음 가운데에 열 법계와 온갖 법[十界萬法]이 본래 갖추어져 있습니다. 바로 이 한 생각이 연분 따라[隨緣] 열 법계와 온갖 법을 지을 수 있습니다.
추상적 리치(본질)의 도구[理具]란, 비유하자면 금 속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온갖 기물을 이룰 수 있는 리치를 뜻하며, 구체적 사실(현상)의 조화[事造]란 기술자의 정교한 세공의 연분에 따라 다양한 용도와 형태의 기물을 만들어 내는 걸 가리킵니다. 또 이구(理具)란 밀가루 속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온갖 식품을 이룰 수 있는 리치를 뜻하며, 사조(事造)란 물과 불과 인공(요리사의 가공)의 연분이 합쳐져서 온갖 식품을 만들어 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지금까지 구체적 사실과 추상적 리치를 통해 알아보았는데, 이제 다시 이름[名: 개념]과 실체[體: 본체]의 같고 다름을 가지고 진실[眞]과 허망[妄]을 분간해 보겠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는 이름은 같지만 실체가 다른[名同體異] 것이 있기도 하고, 거꾸로 이름은 다르지만 실체가 같은 [名異體同] 것이 있기도 합니다.
이름이 같지만 실체가 다른 것은, 예컨대 마음이라는 이름은 똑같이 하나인데도, 육단심(肉團心)도 있고 연려심(緣慮心)도 있으며, 집기심(集起心)도 있고 견실심(堅實心)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육단심(肉團心)29)은 바깥 사대(四大: 地水火風)와 같아서,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육심(肉心)이라고 하며, 고기 덩어리 마음이라는 뜻으로 심장을 가리킴. 범어로는 흘리타야(紇利陀耶)인데, 의근(意根)이 깃들어 있으며, 여덟 조각 고깃잎[肉葉]이 모여 련꽃을 이룬다고 밀교에서는 보았음]
연려심(緣慮心)은 여덟 인식[八識]과 통하는데, 여덟 가지 인식(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말나식·아뢰야식)은 모두 각자 맡은 바 경계의 연분 따라 사려를 통해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허망한 것입니다.
집기심(集起心)은 오직 제8식(아뢰야식)에 특정한 명칭인데, 모든 법의 종자를 모아 저장할 수 있고, 또한 모든 법이 드러나 행해지도록 일으킬 수 있다는 뜻에서 붙여졌습니다. 이 마음은 진실과 허망이 함께 어우러져 합쳐진 것입니다.
견실심(堅實心)은 곧 견고하고 진실한 성품으로서, 생각을 떠난 영명한 지각[離念靈知]이자,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의 본체[純眞心體]입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오직 마음뿐[唯心]’이라는 것은 바로 견고하고 진실하며 순수한 진리의 마음[堅實純眞之心]입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실체는 같은[名異體同] 것은, 예컨대 여러 경전에서 말하는 진여(眞如)·불성(佛性)·실상(實相)·법계(法界) 등과 같이 온갖 궁극을 가리키는 이름(명칭)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모두 견고하고 진실하며 순수한 진리의 마음입니다.
여기까지 이름과 실체를 가지고 진실과 허망을 분간해 보았으니, 이제 끝으로 본유(本有: 본래 가지고 있음)와 현전(現前: 눈앞에 나타냄)을 가지고 다시 한번 비교하여 지적해 보겠습니다.
여러 경전들에 보면, 시작도 없이 본래 지니고 있는 진실한 마음[無時本有眞心]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무릇 ‘본래 지니고 있다[本有]’고 말했다면, 지금 당장이라고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현재 있는 것[現有]은 곧 바로 본래 지니고 있는[本有] 것입니다. 만약 시작도 없음[無始]이 없다면, 눈앞에 나타남[現前]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눈앞에 나타남을 떠난다면, 어떻게 시작도 없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까닭에 반드시 본래 지니고 있는 것만 높이 떠받들고 시작도 없음은 멀리 밀쳐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 눈앞에 나타나는 한 생각 마음의 자기 성품[現前一念心之自性]이 바로 본래 지니고 있는 진실한 마음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눈앞에 나타나는 한 생각이 바로 “전체 진여가 고스란히 망상이 되고[全眞成妄] 전체 망상 그대로가 곧 진여면서[全妄卽眞], 망상으로 보면 하루 종일 바깥 사물의 연분 따라 변하지만[終日隨緣], 진여로 보면 하루 종일 조금도 변하지 않기[終日不妄]”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눈앞에 나타나는 한 생각을 떠나서, 그 밖에 다른 어떤 진실한 마음과 자기 성품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옛 고승대덕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위음왕불 저 언저리[威音那畔]30)도 지금 세상 문 앞을 떠나지 않네. 중생들이 지금 어리석음을 행하는 건, 바로 모든 부처님께서 지혜의 본체를 움직이지 않으심일세.”
[위음왕불:공겁(空劫)에 맨처음 성불한 부처님으로, 그 전에 부처님이 없었음. 그래서 선종에서 향상본분(向上本分)을 가리켜 ‘위음나반(威音那畔)’이라 부름. ‘위음나반’은 위음왕불 출현 이전으로, ‘지극히 먼 옛날’ 또는 ‘실제 진리의 자리[實際理地]’를 가리키고, ‘위음 이후’는 ‘향하(向下)의 불사문중(佛事門中)’을 비유함.]
이 어찌 진리[道]에 가까운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상 네 가지 리치[三量, 理具와 事造, 名과 體, 本有와 現前]로 유심(唯心)의 의미를 밝혀 보았습니다. 그래서 한결같이 오직 마음[唯心]을 으뜸[宗旨]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또 ‘아미타불’ 한 구절로 보자면, ‘오직 부처님[唯佛]’을 으뜸 종지로 삼습니다. 일체 모든 법이 ‘오직 마음’으로 나타난 것이라면, 전체가 온통 ‘오직 마음’뿐일 것입니다. 마음은 피차의 구분도 없고, 마음은 과거·현재·미래의 시간 구분도 없습니다. 열 법계나 모든 법에서, 의보(依報)거나 정보(正報)거나, 또는 가짜 이름[假名]이나 진짜 법[實法]이나 할 것 없이, 그 어느 법 하나를 아무렇게나 들추어낸다고 해도, 그 모두가 바로 마음의 전체이며, 그 모두가 마음의 위대한 작용을 갖추고 있습니다.
마치 마음이 가로(공간상)로 시방세계에 두루 펼쳐져 있고, 세로(시간상)로 삼세에 길이 이어져 있듯이 말입니다.
‘오직 마음뿐[唯心]’이라는 리치가 성립하기 때문에, ‘오직 빛깔뿐[有色]’ ‘오직 소리뿐[唯聲]’ ‘오직 냄새뿐[唯香]’ ‘오직 맛뿐[唯味]’ ‘오직 만짐뿐[唯觸]’ ‘오직 법뿐[唯法]’ ‘오직 티끌뿐[唯微塵]’ ‘오직 겨자씨뿐[唯芥子]’ 따위와 같은 일체 모든 ‘오직[唯]’의 리치가 다함께 성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처럼 일체 모든 ‘오직’의 리치가 다함께 성립하기 때문에, 바야흐로 진실한 ‘오직 마음뿐[唯心]’의 리치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만약 일체 모든 ‘오직’의 리치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단지 ‘오직 마음뿐[唯心]’이라는 텅빈 이름만 존재할 뿐, ‘오직 마음뿐[唯心]’이라는 진실한 리치는 전혀 없게 됩니다. 리치가 다 함께 성립하기 때문에, “법은 일정한 모습이 없으며, 연분 따라 곧 으뜸 종지가 된다[法無定相, 遇緣卽宗].”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티끌뿐’이나 ‘오직 겨자씨뿐’도 오히려 으뜸 종지(宗旨: 宗派·宗敎)로 삼을 수 있거늘, 8만 상호(相好)가 장엄하게 갖추어진 최상의 과보 지위[果地]이신 아미타불만 도리어 으뜸 종지로 삼을 수 없단 말입니까? 그래서 ‘오직 부처님뿐[唯佛]’을 으뜸 종지(정토종)로 삼는 것입니다.
또한 ‘절대적인 원만 융합[絶待圓融]’을 으뜸 종지로 삼습니다. 열 법계의 모든 법 가운데 임의로 아무 법이나 하나 끄집어내든지, 그 어느 것 하나 바로 마음 전체가 아닌 게 없으며, 또 마음의 위대한 작용을 지니지 않은 게 없습니다.
가로로는 시방세계에 두루 펼쳐지며, 세로로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연이어 있습니다. 네 구절[四句]을 떠나 있으면서 어떠한 시비도 모두 끊었습니다. 오직 하내 몸통 자체가 온전히 진여(진리) 덩어리면서, 더 이상 바깥이란 게 없습니다. 청정함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 속에 어느 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한 법이 이러하거니와, 온갖 법이 또한 모두 그러합니다. 각각 모든 법이 고스란히 전체가 된다는 점에서는, 그 자체가 절대이며, 그밖에 다른 게 없습니다. 이것이 절대(絶待)의 의미입니다.
또 열 법계의 모든 법은, 하나하나가 각각 서로 온 허공에 두루 가득 차 있으면서, 각각이 서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가 서로 교차로 펼쳐져 있으면서, 하나하나가 철저하게 완비되어 있습니다. 그들 하나하나가 거침없고 막힘없으면서, 각각이 서로 해치지도 않고 뒤섞이지도 않습니다. 마치 높은 누대에 고풍스런 거울을 걸어 놓으면, 온갖 사물의 그림자가 겹겹이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제석천 인드라망[帝網]의 천만 구슬이 서로 되비추며 서로 머금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는 모든 법이 서로 번갈아가며 서로 비추는 차원을 말한 것으로, 이것이 곧 원만융합[圓融]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지금 절대와 원만융합을 합쳐서 하내 으뜸 종지[一宗]로 삼았습니다. 바로 절대일 때 곧 원만융합이 되고, 또 바로 원만융합일 때 곧 절대가 됩니다. 절대를 떠나서 달리 원만융합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절대란 바로 그 원만융합을 절대화함을 뜻합니다. 또 원만융합을 떠나서 달리 절대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원만융합이란 바로 그 절대를 원만히 융합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절대와 원만융합은 각각이 모두 불가사의합니다. 그런데 지금 둘을 합쳐서 하내 으뜸 종지로 삼았으니, 이는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또 감정을 초월하고 견해를 떠남[超情離見]을 으뜸 종지로 삼습니다. 위에서 말한 ‘모든 법이 절대이다[諸法絶待]’는 관점에서 보면, 이미 모든 허물을 떠나고 온갖 시비를 끊었으므로, 벌써 일체 중생의 감정과 망상과 집착은 물론, 성문·벽지불·보살의 세 성현 경지에서 서로 달리 나타나는 견해의 차별까지 훌쩍 초월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법이 원만히 융합한다[諸法圓融]’는 견지에서 보면, 네 구절[四句]을 원만히 완비하고, 온갖 시비를 모두 모아 융합하므로, 더더욱 범부 중생의 감정이나 성문·벽지불·보살의 세 성현들의 식견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래서 감정을 초월하고 견해를 떠남[超情離見]을 함께 합쳐서 하내 으뜸 종지로 삼았습니다.
맨 처음에는 ‘오직 마음뿐[唯心]’을 으뜸 종지로 삼았고, 다음에는 ‘오직 부처님뿐[唯佛]’을 으뜸 종지로 삼았으며, 그 다음으로 세 번째는 ‘절대적인 원만융합[絶待圓融]’을 으뜸 종지로 삼았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감정을 초월하고 견해를 떠남[超情離見]’을 으뜸 종지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네 겹(층)의 으뜸 종지를 총괄하여야만, 바야흐로 아미타불 한 구절의 정통 종지 중의 으뜸 종지가 됩니다. 그러니 아미타불 념불의 심오하고 미묘한 리치를 어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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