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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와 감응의 진리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리요

철오선사어록. 철오선사어록 상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10.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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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와 감응의 진리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리요

 

 

우리들 앞에 지금 당장 나타나는 한 생각[現前一念]은 중생()의 연분에 따르면서도 본래 성품은 없으며[緣生無性], 또 본래 성품은 없으면서도 중생의 연분에 따릅니다[無性緣生]. 그러기에 부처님 세계에 생겨나지 않으면, 곧 보살 이하 륙도 중생의 아홉 법계에 생겨납니다. 만약 중생의 연분에 따르면서도 본래 성품은 없다는 관점에서 말한다면, 중생과 부처님이 모두 평등하여 한결같이 텅 비었으며, 만약 본래 성품은 없으면서도 중생의 연분에 따른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부처님부터 지옥에 이르기까지 열 법계의 우열은 하늘과 땅 차이보다 더 현격히 다릅니다.

아기달왕(阿祈達王)은 림종에 한 시자가 부채로 파리를 쫓다가 그만 부채가 얼굴에 떨어지면서 심한 고통으로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을 품은 까닭에, 마침내 축생에 떨어져 독사가 되었답니다. 반면 어떤 부인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다가 실수로 손을 놓쳐 아들이 물 속에 빠지자, 아들을 건지려다 그만 함께 빠져 죽었는데, 그 자비심 때문에 천상에 올라갈 수 있었답니다.

무릇 한 생각의 자비심과 성냄 차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천상과 축생으로 갈라지게 되었으니, 이처럼 림종에 부닥치는 중생의 연분에 따른 한 생각을 어찌 신중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이러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연분 따라 극락정토 왕생을 구한다면, 아미타불을 친견하면서 극락 왕생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림종의 한 생각은 결코 요행으로 얻어 올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모름지기 정성으로 존속시키면서 평소에 늘상 꽉 붙잡고 있어야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바로 이 (나무) 아미타불 한 구절의 성호를 천 번 만 번 염송하며, 그렇게 하루 종일 한평생 념불하는 까닭도, 바로 이 한 생각을 무르익게 하기 위한 목적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과연 정말로 이 한 생각이 순수히 무르익는다면, 림종에 오직 이 한 생각만이 가득하고 그 밖의 다른 생각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지자(智者) 대사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림종에 선정에 (결정되어) 있는 마음이 곧 극락정토에 생겨나는 (왕생하는) 마음이니라[臨終在定之心. 卽淨土受生之心].”

그렇다면 오직 이 한 생각만 있고 그 밖에 다른 생각은 없는 것[唯此一念, 更無異念]이 바로 선정에 (결정되어) 있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념불의 경지(수준)가 과연 이와 같다면, 아미타불을 뵙지 않고 그 밖의 어떤 사람을 뵈올 것이며, 또 극락정토에 왕생하지 않고 그 밖의 어느 곳에 생겨나겠습니까? 다만 우리들 스스로의 믿음이 여기에 미치지 못할까 저어할 따름입니다.

 

관무량수경에 보면, “이 마음이 부처를 이루고, 이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을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문자 밖의 뜻을 음미해 보면, “이 마음이 부처를 이루지 않고, 이 마음이 부처가 아니다.”는 말씀이나, “이 마음이 (보살 이하 지옥까지) 아홉 법계를 이루고, 이 마음이 곧 아홉 법계이다.”는 말씀이나, 또는 이 마음이 아홉 법계를 이루지 않고, 이 마음이 아홉 법계가 아니다.”는 말씀 등의 리치가 모두 함께 훤히 드러납니다.

오호라, 정말로 이러한 리치를 분명히 알고서도 오히려 (여전히) 념불 (부처님 생각) 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런 이는 나도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관무량수경에 나오는 이 마음이 부처를 이루고, 이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두 구절은, 단지 관무량수경이라는 한 경전의 총강(總綱)과 종지(宗旨)가 되는 법문 요체일 뿐만 아니라, 석가여래께서 한평생 펼치신 위대한 교화 법문의 총강과 종지입니다. 또한 단지 석가여래께서 한평생 펼치신 위대한 교화 법문의 총강과 종지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시방삼세 일체 제불의 가르침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총강과 종지입니다. 이 종지만 투철하다면, 그 어느 종지인들 투철하지 않을 것이며; 이 법문만 분명히 안다면, 그 어느 법문인들 분명히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흔히들 배움이 비록 많지 않더라도 최상의 성현에 오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법은 본래 성품이 없으며[眞法無性], 더러움[오염]과 깨끗함[청정]은 연분에 따를 뿐입니다[染淨從緣]. 하내 진리를 높이 치켜올리면, 그 몸통[전체]이 바로 (부처부터 지옥까지) 열 법계를 이루며, 따라서 열 법계 전체가 곧 하내 진리[진여]인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마음과 성품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인과(법칙)를 내버리거나 떠나는 법이 없으며, 거꾸로 인과(법칙)를 깊이 믿는 사람은 궁극에는 반드시 마음과 성품을 크게 밝히고야 맙니다. 이는 리치로나 대세로나 틀림없고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지니는 한 생각을 능히 생각하는 주체인 마음[能念之心]은 전체 진여[실상, 본체]가 고스란히 망상[허망, 현상]이 되고, 따라서 전체 망상 그대로가 바로 진여입니다. 망상으로 보면 하루 종일 바깥 사물의 연분 따라 변하지만, 진여로 보면 하루 종일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나무 아미타불이라는 한 구절 생각[사념, 염송]하는 바[대상]의 부처님은 온전한 덕으로 명호를 지으셨는지라, 덕 이외에는 명호가 없습니다. 또 거꾸로 명호로써 덕을 밝히는지라 명호 이외에는 덕이 없습니다.26)

[이름, 개념과 실체, 실재가 완전히 일치하는 이른바 명실상부(名實相符)를 가리킴.]

념불할 줄 아는 마음(주체) 바깥에 달리 염송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객체)이 있는 것도 아니며, 거꾸로 염송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 바깥에 념불할 줄 아는 마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체[]와 객체[]가 둘이 아니며, 중생과 부처님이 완연히 똑같습니다. 본래 네 구절을 떠나 있고[本離四句]27), 본래 온갖 시비를 끊었으며, 본래 일체 만유에 두루 퍼져 있으면서, 본래 일체 만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래 네 구절을 떠나다[本離四句]: 1. 사구분별(四句分別)로서, ()와 공()으로 모든 법을 분별하는 네 가지 기준.  텅 비지 않고 있다[有而非空]는 유문(有門).  있지 않고 텅 비었다[空而非有]는 공문(空門).  있기도 하고 텅 비기도 하다[亦有亦空].  있지도 않고 텅 비지도 않다[非有非空]. 있고 없고[有無]의 법문은 이 네 구절에 다 포함되고, 더 이상의 제5구는 없다. 어떠한 상대적 분별도 허용하지 않고 완전히 초월하는 절대 진리를 비유할 때, “본체는 온갖 시비를 끊고, 리치는 세 구절 분별을 초월한다.[體絶百非, 理超四句]” 식으로 표현한다.

2. 사구추검(四句推檢)으로서 자인(自因: 내부 원인타인(他因: 외부 원인공인(共因: 내외 원인무인(無因: 원인 없음)의 네 구절로 유위법을 추론하고 점검하여, 모든 법이 생기지도 않고 얻을 수도 없음을 증명함. 예컨대, 꿈에 호랑나비가 되었다고 하자. 이 꿈 속의 나비가 만약 스스로 생겼다고 치면, 꿈이 없어도 나비가 스스로 생겨야 하고; 만약 꿈이라는 타인(他因)으로 생겼다면, 꿈 속에선 항상 나비가 생겨야 하며; 만약 나비의 자인과 꿈의 타인이 함께 작용해 생겼다면, 나비와 꿈은 각자 단독으로는 생겨날 원인이 못 되는 것인데, 어떻게 서로 합쳐진다고 생겨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나비 자인이나 꿈 타인이 전혀 없이 생겨났다면, 허공 같은 존재로 자타가 없으므로 항상 나비를 생기게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추론해 보면, 모든 법은 곧 생기지도 않고 얻을 수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절대적이며 원만하고 융합하여, 참으로 불가사의할 따름입니다. 련종(蓮宗: 淨土宗)의 념불 수행자들은 마땅히 이 말의 내면적 의미를 믿고 들어가야 합니다.

 

산 목숨을 죽이는 살생은 그 허물과 죄악이 지극히 크고 무겁습니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님 성품을 지니고 있는데, 산 목숨(중생)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살기등등하니 방종하여 무거운 죄업을 짓고 깊은 원한을 맺으며, 결국 막대한 고통의 과보를 불러들이는 것은, 다 죽일 살()자 하나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렇게 해서 죽이려는 마음[殺心]이 점차 맹렬해지고 살생의 업장이 점차 깊어지면, 나중에는 점점 사람도 죽이고 일가친척도 죽이며, 심지어는 창칼을 휘두르는 전쟁까지 초래하는데, 어찌 끔찍스런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이 모두가 살생을 금지[戒殺]할 줄 모르는 데서 말미암는 비극입니다. 진실로 산 목숨 죽이는 걸 금할 줄 안다면, 제물로 바칠 희생조차 차마 죽이지 못할 텐데, 하물며 사람을 죽이고 일가친척을 죽이겠습니까? 희생도 차마 죽이지 못하는데, 창칼 휘두르는 전쟁은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

남의 부모를 죽이는 자는, 남이 또한 그의 부모를 죽이게 마련이고; 남의 형제를 죽이는 자는, 남이 또한 그의 형제를 죽이게 마련입니다.”28)

[맹자(孟子), 진심(盡心) ()편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임.]

이 말씀은 남의 부모형제를 죽일 수 없다는 일반론으로, 그나마 점차 살생을 금지하는 길로 이끄는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남의 부모형제를 죽이는 범죄가 바로 살생을 금지[戒殺: 채식]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생을 그만두지 않는 까닭은 인과응보의 리치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과란 감응입니다. 내가 나쁜 마음으로 남을 감동시키면, 남도 또한 나쁜 마음으로 반응해 옵니다. 거꾸로 내가 착한 마음으로 남을 감동시키면, 남도 또한 착한 마음으로 호응해 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인과의 감응이 현생(금생)에만 나타나는 줄로 알 뿐, 인과의 감응이 전생·현생·내생의 삼세 륜회를 통하여도 나타나는 줄은 미처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보통 사람들은 인과의 감응이 인간 세상에 나타나는 줄만 알 뿐, 이러한 인과의 감응이 천상·인간·아수라·축생·아귀·지옥의 륙도 륜회를 통하여도 나타나는 줄은 미처 모르고 있습니다. 정말로 인과의 감응이 삼세와 륙도의 륜회를 통하여 나타나는 줄 안다면, 륙도 중의 중생이 모두 여러 생에 걸친 자기 부모형제들일 텐데, 살생을 그만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사람들은 설령 인과의 감응이 륙도 륜회를 통해서 나타나는 줄은 안다고 할지라도, 세간과 출세간의 수행을 통해서도 나타나는 줄은 미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내가 없다는 무아심으로 감동시키면(수행하면), 성문과 연각의 과위(果位)가 호응해 오고(얻어지고); 보리심의 륙도만행(六度萬行)으로 감동시키면, 보살 법계가 과위로 호응해 오며, 모든 중생을 일미평등하고 일심동체로 대하는 대자비심으로 감동시키면, 부처님 법계가 과위로 호응해 오는 법입니다.

오호라! 인과와 감응의 진리[]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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