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일심불란(一心不亂), 극락정토 왕생의 대문(大門)

철오선사어록. 철오선사어록 하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8. 14:47

본문

일심불란(一心不亂), 극락정토 왕생의 대문(大門)

 

 

한 구절 아미타불(阿彌陀佛) 성호(聖號)는 낫지 못하는 병이 없는 만병통치약[阿伽陀藥]이고, 만족시키지 못하는 소원이 없는 여의주의 왕(如意珠王)이며, 건지지 못하는 고통이 없는 생사고해의 자비로운 항공모함[慈航]이고, 깨뜨리지 못하는 어둠이 없는 기나긴 한밤중의 지혜로운 등불입니다.

단지 한번 귓가에 스치기만 해도 인연이 있는 것이며, 단지 한 생각 믿음의 마음을 낼 수만 있어도 곧바로 감응을 일으킬 것이며, 신심이 과연 진실하다면 극락 왕생의 서원은 굳이 발하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발해집니다.

따라서 단지 믿음과 발원이라는 이 두 법만 항상 마음에 간직해 두면 됩니다. 마치 충신이 성왕(聖王)의 은밀한 교지(敎旨)를 받들 듯이, 효자가 자부(慈父)의 엄명을 받들 듯이, 그렇게 마음에 항상 새겨 간직하고 잊지 않는 것이, 념불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수시로 처하는 환경이 고요하거나 시끄럽거나 한가하거나 바쁘거나를 막론하고, 또 많이 념불하거나 적게 념불하거나 가리지 않고, 이 모두가 다 극락 왕생의 기본원인[正因]이 됩니다. 단지 두려워하고 경계할 일은 부지런함 속에 게으름이 끼여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시작도 없는 기나긴 겁의 세월 동안 륜회를 되풀이해 오면서, 어찌 그 륜회를 벗어나려는 마음으로 진리[]를 향한 수행이 전혀 없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은 구태의연한 인순(因循)에 그 믿음(마음)이 사그라지고, 미적거리는 게으름에 그 발원(열정)이 식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줄곧 생사 륜회를 헤매면서 크나큰 고뇌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미타불 명호를 지송하는 간단명료하고 요긴한 념불 법문을 알아들었는데도, 또 다시 구태의연한 인순과 미적거리는 게으름 속에 안일하고 주저하는 전생의 전철을 되풀이할 것입니까? 만약 그런다면, 혈기라곤 조금도 없는, 참으로 한심한 녀석이라 불러 마땅할 것입니다.

 

이른바 부처님 명호를 꼭 붙들어 지닌다는 집지명호(執持名號)란 바로 중용에서 말한 대로 두 손으로 꼬옥 받들어 가슴에 새기고 지키는[拳拳服膺]” 걸 가리키며, 마음에 굳게 새기고 지녀 잠시도 잊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혹시 한 생각이라도 끊어진다면 집지(執持)가 아니며, 한 생각이라도 끼여들거나 섞인다면 또한 집지가 아닙니다. 한 생각도 끼여들거나 끊어짐 없이 생각생각 계속 이어져야[念念相續] 비로소 진실한 정진입니다.

그렇게 정진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점차 한 마음 흐트러지지 않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의 경지에 들어, 청정한 업[淨業: 정토왕생의 수행]이 원만히 이루어집니다. 만약 일심불란에 이르러서도 다시 계속해서 끊임없이 정진한다면, 장차 지혜가 열리고 변재(辯才)가 터지며 신통을 얻고, 나아가 념불삼매(念佛三昧)를 이루어 온갖 기이한 영험과 상서로운 조짐들이 두루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치 밀랍으로 만든 사람 모형을 불에 가까이 다가세우면, 가장 얇은 곳이 먼저 녹아 버리는 리치와 같습니다. 다만 효험을 바라는 마음만 미리 품지 않고서, 오직 일심불란에다 온 힘을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일심불란이야말로 정토 수행의 궁극 귀향점이며, 극락정토 왕생의 대문(大門)입니다. 만약 이 문에 들어서지 못한다면, 극락 왕생이 끝내 안온하지 못할 터이니, 공부하는 사람들이 힘써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법문을 배우고 닦아 익히더라도, 모두 그 으뜸 요지[宗旨]를 제대로 분명히 알아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단지 모든 법이 오직 마음뿐[萬法唯心]인 줄만 알지, 거꾸로 마음은 오직 모든 법뿐[心唯萬法]인 줄은 미처 모릅니다.

또 단지 마음 밖에 부처가 없는[心外無佛] 줄만 알지, 거꾸로 부처님 밖에 마음이 없는[佛外無心] 줄은 모릅니다. 그리고 한량없는 수량이 하나[無量爲一]인 줄만 알지, 하나가 한량없는 수량[一爲無量]인 줄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산하대지를 되돌려 자기한테 귀속시키는 줄만 알지, 거꾸로 자기를 되돌려 산하대지에 귀속시키는 줄은 미처 모릅니다.

그런데 마음이 오직 모든 법뿐[心唯萬法]이라는 리치를 모른다면, 어떻게 모든 법이 오직 마음뿐[萬法唯心]이라는 진리를 진실로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부처님 밖에 마음이 없는[佛外無心] 소식을 모른다면, 또 어떻게 마음 밖에 부처가 없는[心外無佛] 소식인들 제대로 알겠습니까?

이른바 하내 둥근 공을 칼로 한가운데 잘라 둘로 나눈 반구(半球), 서로 떼어 놓으면 둘다 망쳐 버리지만, 서로 합쳐 붙이면 둘다 아름답게 원만해지는 리치와 똑같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념불이란 반드시 오직 부처님[唯佛]’ 오직 정토[唯土]’를 으뜸 종지로 삼아야 합니다. 만약 오직 부처님[唯佛]’ 오직 정토[唯土]’의 으뜸 종지(宗旨)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진짜 오직 마음[唯心]’이라는 리치(의미)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진짜 오직 마음[唯心]’이라는 리치에 투철하다면, ‘오직 부처님[唯佛]’ 오직 정토[唯土]’라는 으뜸 종지는 저절로 성립합니다. 이러한 으뜸 종지가 성립하면, 곧 우리가 염송하는 한 구절 아미타불이나 우리가 왕생할 정토는, 온전한 몸통(본체) 그대로 커다란 쓰임(작용)이 되어[全體大用], 가로로 시방세계에 두루하고 세로로 삼세(三世)에 관통하며, 단독의 몸통 하나로도 온전한 진리가 되어[獨體全眞], 우주 삼라만상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감싸게 됩니다.

염송하는 대상[所念]인 부처님과 정토가 이러할 뿐만 아니라, 념불하는 주체[能念]인 우리 중생도 또한 마찬가지로 그러합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실상의 마음으로 실상의 부처님을 염송하고[以實相心, 念實相佛], 법계의 마음으로 법계의 부처님을 염송한다[以法界心, 念法界佛].”고 합니다.

생각생각마다 대상이 끊어지고[念念絶待], 생각생각마다 원만하게 융통합니다[念念圓融]. 마주 대할 게 없으므로[絶待], 일체의 법문을 고스란히 훌쩍 초월하여, 이와 더불어 짝할 게 없습니다. 또 원만하게 융통하므로, 일체의 법문을 모조리 포섭하여, 그 밖으로 빠져 나갈 게 없습니다.

이러한 걸 일컬어서, “법에는 일정한 모습이 없어, 인연 만나는 대로 곧 으뜸 종지가 되며, 커다란 쓰임(작용)이 번잡하게 일지만, 그 모두가 반드시 온전한 진리(본체)가 된다[法無定相, 遇緣卽宗, 繁興大用, 擧必全眞].”고 합니다. 한 구절 아미타불 명호는 모름지기 이와 같이 믿고 이와 같이 염송하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야흐로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가 됩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