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般若)와 정토(淨土) 두 법문의 큰 뜻[大義]
반야(般若) 법문은 연기(緣起: 인연 따라 일어나는 有의 현상계)에 대해 성공(性空: 성품이 텅 비었다는 空의 본질계)을 밝힌 것인데, 비록 본래 성품이 텅 비었다고 하나, 인연 따라 일어남을 파괴(부정)하지는 않으며; 정토(淨土) 법문은 성공(性空)에 대해 연기(緣起)를 밝힌 것인데, 비록 인연 따라 일어난다고 하나, 본래 성품이 텅 비었음을 방애(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공(空)과 유(有)의 두 법문이 서로 걸리거나 가로막지 않음을 뜻합니다.
단지 그러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바로 인연 따라 일어나기[緣起] 때문에, 본래 성품이 텅 빈 것[性空]입니다. 만약 연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무엇)의 성품이 텅 비었단 말입니까? 그러니 인연 따라 일어남은 바로 본디 성품이 텅 비었다는 반증입니다. 또 거꾸로 성품이 텅 비었기 때문에,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약 성품이 텅 비지 않았다면, 어떻게 인연 따라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본디 성품이 텅 빔은 바로 인연 따라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그러할진대, 공과 유의 두 법문은 단지 서로 걸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서로 보완한다 할 것입니다. 바로 옛사람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만물의 형상이 천하에 꽉 차 있으되, 바라보면 아무 빛깔 없고;
온갖 소리가 대지에 떠들썩하되, 들어보면 아무 소리도 없구나.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텅 비고, 텅 비면 텅 빌수록 더욱 있는도다!”
무릇 연기와 성공이 동시에 존재한다면, 마음먹기에 따라 함께 사라지고 함께 나타나는 진면목을 곧장 지닙니다. 함께 사라지고 함께 나타남이 동시에 아무 걸림없이 이루어지니, 이야말로 바로 향상원융(向上圓融)이며 부사의제일의제(不思議第一義諦)입니다. 최상을 향한 원융과 불가사의한 제일의제는 바로 그 사람의 본래 근원 심성[本源心性]을 일컫는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갖가지 반야 법문이 바로 이 본래 근원 심성을 밝혀 주지 않는 게 없고, 또 부처님께서 설하신 갖가지 정토법문도 바로 이 본래 근원 심성을 밝혀 주지 않는 게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본래 근원 심성으로부터 갖가지 반야·정토 법문이 흘러나오고, 또 갖가지 반야·정토 법문이 모두 다 본래 근원 심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른바 “이 법계(法界)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 게 없고, 이 법계로 되돌아가지 않는 게 없구나.” 입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운서(雲棲) 대사께 “참선과 념불을 어떻게 해야 융합통달[融通]해 갈 수 있습니까?”라고 여쭙자, 대사께서는 “(참선과 념불이) 그대 말대로 두 물건이라면, 융합통달할 수 있겠지요!”라고 답하셨습니다.
아, 참으로 훌륭하신 말씀이시도다! 무릇 선(禪)이란 정토의 선이며, 정토란 선의 정토입니다. 본디 두 물건이 아닌데, 융합통달해서 뭐하겠습니까? 그런즉, 반야와 정토 두 법문은 오직 하내 본래 근원 심성일 뿐이며, 나눌래야 나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합칠래야 합칠 수도 없습니다. 나누고 합침도 불가하거늘, 하물며 더구나 서로 걸리거나 서로 보완함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일심불란(一心不亂), 극락정토 왕생의 대문(大門) (0) | 2023.01.08 |
---|---|
념불은 중단함 없이 오래 지속해야 (1) | 2023.01.08 |
서방 정토가 있다는 뜻을 풀이함[西有解] (1) | 2023.01.08 |
화엄경의 핵심 요지 (1) | 2023.01.08 |
수릉엄경의 두 가지 결정적 핵심 의의 (0) | 2023.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