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념불은 중단함 없이 오래 지속해야

철오선사어록. 철오선사어록 하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8.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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념불은 중단함 없이 오래 지속해야

 

 

중생과 부처님이 조금도 다름없이 평등하게 공유하는 것은, 오직 지금 당장 생각을 떠난 신령스런 지각[現前離念靈知]일 뿐입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청정한 깨달음의 인연을 따라 깨닫고 또 깨달으시며, 정화시키고 또 정화시키시어, 지극히 청정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령스런 지각[靈知]이 가로로 시방세계에 두루하며, 세로로 삼세에 관통하여 광대무변합니다. 반면 우리 중생은 미혹되고 오염된 인연을 따라 미혹되고 또 미혹되며, 오염되고 또 오염되기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신령스런 지각이 좁게 갇히고 짧게 끊어지며, 미천하고 열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중생의 좁게 갇힌 신령스런 지각도 모든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신령스런 지각과 본바탕은 서로 다르지 않고, 터럭 끝만큼의 차이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생의 지각도 청정한 깨달음의 인연을 따라 업장이 다 녹아 없어지고 감정이 텅 비게 된다면, 이 좁게 갇힌 지각도 그 자리에서 광대무변한 신령스런 지각으로 단박에 탈바꿈하게 됩니다. 마치 별빛만한 불씨가 수만 평의 산과 들을 태울 수 있듯이.

그러나 지금 당장의 한 생각 신령스런 지각[現前一念靈知], 아는 대상인 경계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은 넓고 비좁고, 훌륭하고 보잘것없는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물론 아는 주체인 지각으로 보면 전체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마치 똑같은 불이지만, 전단(數檀)을 사르면 향기롭고 똥을 태우면 구린내가 나듯이 태우는 물건은 비록 다르지만, 태울 수 있는 불은 둘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또한 같은 물이지만 맑고 흐림은 같지 않으며, 같은 거울이지만 어둠침침하고 선명함은 다른 것과도 같습니다. 물이 맑고 흐림은 비록 다를지라도 축축한 성질은 둘이 아니며, 거울이 어둠침침하고 선명함은 비록 다를지라도 비추는 본질은 같습니다.

물은 축축한 성질이 한 가지이므로 흐린 물도 정화시켜 맑게 할 수 있으며, 거울은 비추는 본질이 한 가지이므로, 어둠침침한 거울도 갈고 닦아 선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거울의 빛이 어둠침침한 것은 때가 끼었기 때문일 따름입니다. 때는 비추는 게 아니고, 비춤은 거울의 본질입니다. 마찬가지로 물이 흐린 것은 먼지가 섞였기 때문일 따름입니다. 먼지는 축축한 게 아니고, 축축함은 물의 본성입니다.

이 한 생각의 신령스런 지각은 물의 축축함처럼, 거울의 비춤처럼, 불의 타는 속성처럼, 본체로 말하자면 조금도 서로 다름이 없습니다. 오직 본체상 다름없음으로 말미암아, 수도(修道)의 방편 법문 가운데 여러 가지의 서로 다른 문()이 있게 됩니다.

단지 뭇 성인들을 우러러 흠모하는 방법, 단지 자기의 심령을 존중하는 방법, 밖으로는 뭇 성인을 흠모하고 안으로는 자기의 심령을 존중하는 방법, 뭇 성인을 흠모하지도 않고 자기 심령을 존중하지도 않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첫째, 단지 뭇 성인을 우러러 흠모하는 방법이란, 바로 우리 정토 법문으로 념불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뭇 성인들이 모두 우리보다 앞서 자아의 심령을 이미 증명하여,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語默動靜] 어느 때나 모두 모범이 될 만함을 우리는 알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뭇 성인을 우러러 흠모하지 않는다면, 닦아 나아갈 길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더러는 오로지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고, 더러는 부처님의 법음과 상호(相好)를 관상(觀想)하면서, ··뜻의 세 가지를 경건하게 가다듬고 하루 여섯 때에 정성스레 예경하되, 마음을 다 기울여 귀명(歸命)49)하며 금생에 타고난 몸이 다하도록 받들어 지킵니다. 때가 되고 인연이 무르익으면 감응(感應)50)의 길이 서로 교차하면서, 마음 자리가 크게 열리고 심령의 빛이 저절로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귀명(歸命): ‘나무(南無)’의 번역어로서,  자기 생명을 부처님께 맡김과,  부처님 명하신 가르침에 귀순함과,  생명의 뿌리가 한 마음 바탕 자리[一心本元]에 되돌아감의 세 가지 뜻을 함축하여, 신심이 아주 지극함을 나타내는 용어.]

그러면 내 자아 심령도 원래 뭇 성인과 조금도 다름없이 평등함을 알게 되니, 이 또한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감응(感應): ()은 우리가 부처님을 감동시킴. ()은 부처님이 우리 정성에 호응함.]

둘째, 단지 자기 심령만 존중하는 방법이란, 선종의 참선처럼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直指人心]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는[見性成佛]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루 12(~亥時) 내내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모든 행위에서, 오로지 그 사람의 본래면목만을 드러내고 본 바탕 자리 기풍과 광채만을 받아 쓰면서, 마음과 성품 이외에는 터럭 끝만큼도 집착함이 없습니다. “이른바 남들이야 천 분 성인이 나토든 말든, 나한테는 자연 그대로의 진짜 부처님이 계시다[任他千聖現, 我有天眞佛].”는 심경입니다. 조예가 깊어지고 공부가 무르익어 깨달아 증명함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이윽고 일체의 성현들도 이미 오래 전에 바로 자아의 심령을 먼저 증명하셨음을 알게 될 터이니, 또한 그런 성인들을 우러러 흠모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셋째, 밖으로 뭇 성인을 흠모하고 안으로 자기 심령을 존중하는 방법이란 이렇습니다. 무릇 자기 심령을 존중하고자 하면, 반드시 뭇 성인을 우러러 흠모해야 합니다. 오직 뭇 성인을 우러러 흠모하는 것이 바로 자기 심령을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뭇 성인을 우러러 흠모하고자 하면, 반드시 자기 심령을 존중해야 합니다.

만약 자기 심령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뭇 성인을 우러러 흠모할 수 있겠습니까? 이 방법은 안과 밖을 교차로 닦으면서 마음과 부처님을 똑같이 존중하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집착함이 없고 진리[]에 나아감이 더욱 빨라집니다.

공부의 힘이 지극히 무르익어 전체가 고스란히 상응해 나타나면, “뭇 성인도 단지 나보다 앞서 자아의 심령을 증명한 것일 따름이니, 굳이 우러러 흠모할 필요가 없고; 또 나 자신의 심령도 또한 뭇 성인과 가지런히 평등할 따름이니, 어찌 힘들여 존중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진리를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넷째, 뭇 성인을 흠모하지도 않고 자기 심령도 존중하지 않는 방법이란, 이른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아니하고 마음과 부처를 모두 잊어버려, 철저히 내팽개치고 조금도 기대거나 의지함이 없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세상을 잊어버리고, 안으로는 몸과 마음을 벗어나서, 한 생각 일어나지 않고, 온갖 인연을 앉은 채로 끊어 버립니다. 오래오래 공부가 무르익어 원만하게 증명해 들어가면, 본래의 심령이 홀로 우뚝 드러나고, 뭇 성인이 문득 가지런히 나타나시어, 비록 뭇 성인을 애써 우러러 흠모하지 않더라도 바로 최선의 흠모가 되고, 비록 자기 심령을 존중하지 않더라도 도리어 진실한 존중이 됩니다.

이 네 가지 방법(), 공부하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 근기와 성품을 잘 헤아려, 각자 기호와 적성에 맞게 선택하면 됩니다.

단지 한 법문으로 깊숙이 들어가[一門深入] 오래 지속하면, 어느 길이나 모두 반드시 상통하는 감응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허망한 집착심을 내어 함부로 경박한 논란을 일으키고, 나가서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들어와서는 큰소리치며, 하나만 옳고 나머지는 모두 틀리다고 비난하는 따위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짓들은 단지 미묘한 진리[妙道]에 어긋나고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위대한 법을 비방하여 커다란 죄업을 초래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릉가경(楞伽經)에 이르시기를, “뭇 성인들이 아시는 것을 서로 대물려 전수하신 바는, 망상이 본디 성품이 없음이다.”라고 하셨고, 이조(二祖: 慧可)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마음을 찾아 보아도 도대체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대승기신론에는 만약 중생이 무념(無念)을 관조할 수 있다면, 곧 부처님 지혜[佛智]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고, 화엄합론(華嚴合論)에는 한 생각을 단박에 깨달아 연기(緣起)가 생기지 않음을 안다면, 삼승(三乘)의 방편 수행[權學]을 훨씬 초월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불경의 가르침과 조사들의 말씀이나 보살 또는 선지식들의 론장(論藏)들은, 모두 지금 당장의 한 생각을 꼬집어 일깨우신 것으로, 망상의 성품이 본디 텅 비었음[妄性本空]을 밝히신 것입니다.

무릇 허망이 본디 텅 비었고 진여가 본디 있다면, 바로 부처님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다만 우리 중생들이 오래도록 더럽고 오염된 인연만을 따르느라, 본디 텅 빈 자리를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모름지기 맑고 깨끗한 인연으로 점차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바로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원인 자리와 똑같은 내 마음을 가지고, 바로 마음 속에 갖춰진 과보(果報) 자리인 내 부처님을 생각(염송)하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가 종래부터 서로 통해 있으며, 마음과 부처님이 법(진리) 그대로 하나인 것입니다. 바로 마음 속에 갖춰진 과보 자리의 부처님은, 연분 없는 중생한테도 베푸시는 대자심[無緣大慈]과 모든 중생과 한 몸이시라는 대비심[同體大悲]으로, 본래 그 자체가 불가사의합니다. 또 바로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원인 자리와 똑같은 내 마음도, 깊은 믿음과 절실한 발원으로 오로지 간절하게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므로, 이 또한 불가사의합니다.

한 생각 한 생각 념불하는 가운데, 온갖 더러운 오염을 일제히 정화시켜, 본디 텅 빈 성품을 원만히 드러내고, 신령스런 바탕 자리에 딱 들어맞아, 부처님 과보의 바다에 곧장 뛰어들게 됩니다.

그러한즉, 맑고 깨끗한 인연으로 말하면 이보다 더 나은 게 없습니다. 다만 념불할 때에, 마땅히 온갖 연분을 몽땅 내려놓고 오직 한 생각만을 치켜 들되, 마치 머리카락에 붙은 불을 끄듯이 다급하게, 마치 부모님의 상()을 치르듯이 애절하게, 마치 어미닭이 알을 품듯이 끈기 있게, 마치 용이 여의주를 머금듯이 평온하게 지속하여야만 합니다. 조그만 효험을 바라지 말고 재빠른 성취를 구하지 말며, 단지 오직 한 마음으로 늘상 이와 같이만 념불하면 됩니다.

이것을 더할 나위 없이 깊고 미묘한 참선 법문[無上深妙禪門]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념불하면, 육근(六根)을 지닌 육신(肉身) 세계가 아주 은밀하게 그 마음을 따라 생각생각마다 섬세하게 변화하고 정화되어 가는데, 보통 범부 중생의 마음이나 육안으로는 거의 알아 볼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러다가 금생의 업보가 다해 목숨이 그칠 때가 되면, 아미타여래 성중(聖衆)께서 홀연히 눈앞에 나타나시고, 더러는 기이한 향기와 미묘한 천상 음악이나 그 밖에 여러 가지 신령스럽고 상서로운 조짐들이 함께 어우러집니다. 그 때서야 세상 사람들은 바야흐로 청정한 도업이 성취되었구나라고 말들 하지만, 청정한 도업 성취가 어찌 그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겠습니까?

념불은 마땅히 네 가지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첫째,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죄업만 지어왔으니, 마땅히 참괴한 마음[續愧心]을 내야 합니다.

둘째, 이 념불 법문을 들었으니, 마땅히 기뻐하는 마음[誤慶心]을 내야 합니다.

셋째, 시작도 없는 오랜 업장으로 이 법문을 만나기가 지극히 어려우니, 마땅히 비통한 마음[悲痛心]을 내야 합니다.

넷째, 부처님께서 이처럼 자비로우시니, 마땅히 감격스런 마음[感激心]을 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마음 중 하나만 있어도 정토 수행(청정한 도업)은 곧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념불은 중단함이 없이 오래 지속해야 합니다. 자꾸 중단하면 정토 수행 또한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래 지속함에 피로와 권태를 모르고 용맹스럽게 정진해야 합니다. 피로와 권태를 느끼면 정토 수행 또한 성취할 수 없습니다. 오래 지속은 하면서 용맹스럽지 못하면 퇴보하게 마련이며, 용맹스럽기는 한데 오래 지속하지 못하면 진보가 없게 됩니다.

 

념불할 때는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생각이 없으면, 이것이 바로 정지[: 停止, 사마타]입니다. 그리고 념불할 때는 모름지기 또렷또렷 분명해야 합니다. 또렷또렷 분명하면, 이것이 바로 관조[: 觀達, 위빠사나]입니다.

한 생각[一念: 念佛] 가운데 지관(止觀)이 함께 갖춰지는 것이지, 따로 지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는 선정[]의 원인이며, 선정은 지()의 결과입니다. 또한 관()은 지혜[]의 원인이며, 지혜는 관()의 결과입니다. 한 생각 일지 않으면서 또렷또렷 분명함이 바로 고요하면서 비춤[卽寂而照]이고, 또렷또렷 분명하면서 한 생각도 일지 않음이 바로 비추면서 고요함[卽照而寂]입니다.

이와 같이만 할 수 있다면, 청정한 도업(정토 수행)이 틀림없이 이루어지며, 이처럼 이루어지면 모두 상품(上品) 련화에 왕생합니다. 한 사람부터 백천만억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이 수행하기만 하면 모두 이와 같이 성취하게 됩니다. 그러니 념불하는 수행인이 삼가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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