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범(化凡) 거사에 대한 답신
화범(化凡) 거사 보시오.
보내온 편지는 잘 받았소. 정토 법문은 불법 가운데 특별한 법문이라, 전생에 청정한 인연(因緣)을 맺지 않은 사람은 자못 믿음을 내기 어렵다오. 선사(禪師)들은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아[明心見性] 부처가 된다고 영웅처럼 자처하고, 강사(講師)들은 교리(敎理)와 관법(觀法)을 널리 설하여 전파하는 것으로 자부심이 대단하오. 그래서 이들은 정토 법문을 중생들에게 소개하거나 권장하려고 마음먹기는커녕, 오히려 온 힘을 다해 적극 배척하고 헐뜯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라오.
말법(末法)시대의 중생은 정토 법문을 만나지 못하면, 설령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보거나 또는 교리와 관법에 깊숙히 통달한다고 할지라도, 번뇌와 미혹을 완전히 끊지 않는 한 누구도 생사 륜회를 해탈할 수 없소.
나는 숙세의 업장이 몹시 무거워서, 태어난 지 여섯달 만에 눈병을 앓아, 그로부터 180일 동안 한쪽 눈도 떠보지 못했다오. 숨쉬고 젖 먹는 것을 빼놓고는, 밤낮으로 계속 울어 대기만 했다는 거요. 그 뒤 병이 나아 하늘을 볼 수는 있었지만, 서당에 나가 글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修),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불교를 비방하고 배척한 문장의 해독(害毒)에 그만 나도 모르게 중독되고 말았소. 다행히 그러한 대유학자들과 같은 재주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불법을 비방하고 그 죄로 지옥에 떨어지는 악보(惡報)를 받았을 것이 틀림없소.
그 뒤로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고, 그로 말미암아 곧 출가하게 되었소. 그러나 참선과 교리의 문은 너무도 높아서 내 능력으로는 들여다 볼 엄두도 못내고, 오직 부처님의 자비에 기대어 극락 왕생하기를 기원하게 되었다오. 20년 전 보타산(普陀山) 법우사(法雨寺)에 잠시 얹혀 한가한 직책을 맡은 적이 있을 뿐이오. 그러나 ‘인광(印光)’ 두 글자는 절대로 붓과 종이로 드러난 일이 없어서, 시끄럽지 않고 안락하게 지낼 수 있었소.
그런데 1917년(民國 6년) 어떤 두 사람이 내가 아는 이들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수천 부 인쇄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듬해 서울여(徐蔚如)가 내 『문초(文崇: 印光大師 법문집)』를 인쇄하여 배포하게 되었소. 그 뒤로는 매일같이 한가한 겨를이 없게 되었다오. 그러나 나는 찾아오거나 편지 부쳐 오는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단지 정토 법문을 이야기해 주며, 나는 그밖에는 전혀 아는 게 없는 무식쟁이라고 말했을 따름이오.
그대가 이미 『안사전서(安士全書)』와 『요범사훈(了凡四訓)』 그리고 내 『문초』를 읽었다면, 이들 내용에 따라 스스로 실행하여 남들까지 교화시켜 나가면, 그걸로도 넉넉하고 오히려 남음이 있을 것이오. 만약 이밖에 더 선종(禪宗)과 교리(敎理)를 연구하려고 든다면, 내 생각에는 아마도 그대가 선가(禪家)의 말들이 미묘하고 불경의 교리가 심오함에 이끌려, 그만 정토 법문을 한 번 쓰고 내버리는 휴지 조각처럼 멸시하지나 않을까 저어할 따름이오. 그러나 참선이나 교리 연구가, 오히려 다른 것은 한 가지도 모르면서 단지 착실하게 한 마음으로 꾸준히 계속하는 념불만도 훨씬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 두시오.
나는 많이 늙어서 시력과 정신이 모두 부치니, 다음부터는 지극히 중요하고 절박한 일이 없거들랑 편지하지 마시오. 편지를 볼 시력과 답장 쓸 기력이 없기 때문이오.
이번에 그대에게 사원(師遠)이라는 법명을 지어 보내오. 원(遠)은 곧 진(晋)나라 때 려산(廬山)의 혜원(慧遠) 대사를 가리키오. 그분이 련종(蓮宗: 정토종)을 처음 일으켜 세운 시조이신데, 그 혜원 대사[遠]를 스승으로 삼아서[師], 지금 유행하는 여러 종파의 지식(知識)들에게 마음이 혹하거나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오.
요즘 세상에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깨달음[開悟]을 최고의 목표와 일로 삼고 있소. 깨달아도 증득(證得)하지 못하면, 생사 해탈의 큰 일은 전혀 마무리될 수 없음을 모르는 게요. 설사 초과(初果: 수다원)나 2과(二果: 사다함)·3과(三果: 아나함)를 증득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생사 륜회 가운데 있게 되오. 다만 그들은 향상만 있지 후퇴나 하락은 결코 없는 것뿐이오. 그러나 초과조차 증득하지 못한 사람은 다음 생에 복을 누리다가 죄업을 지으면 영원히 삼악도에 떨어지기 십상이오. 4과(四果: 아라한)를 증득한 자라야 비로소 생사를 완전히 끝마칠 수 있소.
이는 소승(小乘)의 수행으로 말한 것이고, 대승(大乘)의 궁극 이상인 원만한 교리(圓敎)로 말한다면 조금 달라지오. 대승에서 보는 미혹을 끊는[斷見惑] 초신(初信)은 초과(初果)와 같소. 그러나 생각하는 미혹까지 모두 끊어 없앤[斷思惑盡] 7신(七信)의 경지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생사 륜회를 벗어날 수 있게 되오. 그러니 초신부터 6신까지는 아직도 생사를 다 끝마친 게 아니라오. 초신 경지에 든 보살의 신통력과 지혜만도 이미 일반 범부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하물며 2·3·4·5·6신의 지위야 말할 나위가 있겠소?
참선하는 사람들은 매번 선가에서 칼끝처럼 날카롭고 기민(機敏)하게 던지는 말에 정토종이나 교종의 수행인들이 모두 대답할 줄 모르는 것을 보고는, 자기네 도가 매우 높고 미묘하여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경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소. 그러나 사실인즉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옛 사람의 뜻을 잘 모르는 것이오. 만약 정말로 안다면, 그들은 반드시 영웅으로 자처하거나 자부하는 빛이 전혀 없게 되오.
왜 그런가 하면, 그토록 몹시 미묘한 말도 사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오. 그러한 미묘한 말의 뜻을 알 뿐만 아니라, 설사 확철대오(廓徹大悟)한다고 할지라도, 생사 륜회의 큰 일을 다 해결하는 것은 아니라오. 모름지기 완전히 증득한 경지까지 곧장 올라서야 비로소 일을 끝마치는 것이오. 그러나 후세에 증득한 경지까지 이른 사람은 사실 그렇게 많이 찾아볼 수가 없소.
오조사(五祖寺)의 사계(師戒) 선사는 송(宋)나라 초기에 천하에 명성을 떨친 훌륭한 분이오. 그분의 문하는 매우 높고 넓어 마치 용문(龍門)을 방불케 했소. 그런데 그 스님이 사후에 소동파(蘇東坡)로 다시 태어난 거요. 소동파는 과연 전생의 수행공덕과 지혜로 말미암아 그 문장이나 식견이 모두 비범하게 뛰어났으며, 자질구레한 체면치레에 얽매이지 않는 호방함을 보였소.
그런데 그가 항주(杭州)에 재직할 때 곧잘 기생들을 불러다 어울려 놀았다는 거 아니요? 이를 보면 그토록 유명했던 사계 선사도 결국 초과조차 아직 증득하지 못했다는 걸 알 수가 있소. 왜 그런가 하면, 초과를 증득한 사람은 도공계(道共戒) [도공계(道共戒): 3가지 계률 가운데 하나로, 성문·벽지불·보살 삼승(三乘)의 성인이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의 선정에 들어 무루의 지혜와 함께 저절로 몸에 갖추는 무루의 계률인데, 무루의 도(道)와 함께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뜻에서 도공계(道共戒)라 부름.]를 얻어 저절로 계률을 지키므로, 어떻게 하든지 계률을 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오.
[도공계(道共戒): 3가지 계률 가운데 하나로, 성문·벽지불·보살 삼승(三乘)의 성인이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의 선정에 들어 무루의 지혜와 함께 저절로 몸에 갖추는 무루의 계률인데, 무루의 도(道)와 함께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뜻에서 도공계(道共戒)라 부름.]
[유가에서 공자가 나이 일흔에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따라 행해도 법도를 벗어남이 없었다고 하는데, 바로 이러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이 도공계 경지에 해당할 듯함.]
만약 출가하지 않고 결혼을 하는 경우라면, 설령 목숨을 끊겠다는 위협으로 사음(邪淫)을 강요해도, 차라리 죽을지언정 사음의 계률을 절대 범하지 않는 정도라오.
참선하는 사람들이 만약 이러한 리치를 안다면, 어떻게 정토 법문을 감히 무시하겠소? 선종만 높이 추앙한 나머지, 어리석은 범부와 아낙네들이나 부처님 힘에 기대어 극락 왕생하라고 내맡기며, 자신들은 생사 륜회를 달게 받아들여 벗어나기를 바라지 않겠단 말이오? 내가 이런 말을 굳이 하는 까닭은, 행여라도 그대가 이러한 리치를 잘 몰라서 참선하는 사람들의 미묘하고 고상한 말에 휩쓸려, 그만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을 내버리고 자신의 힘[自力]에 기대려고 잘못 생각할까봐, 걱정스러워 미리 훈계해 두는 거요. 만약 그런 어리석은 판단 착오를 저지른다면 생사 륜회는 당나귀 해나 되어야 벗어날 수 있을 게요.
[미래세가 다하도록 12간지에 없는 당나귀 해가 찾아올 리는 만무하다.]
그대가 편지 끝에 붙인 게송(偈頌)에서 나를 지나치게 높이 추어올려 부끄럽기 짝이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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