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각 수행 방법에 대한 평가
내 생각에 수행 법문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있소. 우선 자기 힘에 의지해 계율·선정·지혜의 삼학(三學)을 닦아,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며 생사윤회를 해탈하는 것은, 보통 법문이라고 하오. 그리고 이와 달리,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을 갖추고 부처님 명호를 지송(持誦)함으로써, 부처님의 자비력에 의지해 서방 극락에 왕생하는 것은, 특별 법문이라고 하오. 보통 법문은 완전히 자기 힘[自力]에만 의지하고, 특별 법문은 자기 힘과 부처님 힘을 함께 겸비한다오. 설사 제아무리 선정과 지혜를 깊이 닦아 미혹을 끊는 공부가 뛰어나더라도,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염불하여 극락왕생을 구함이 없다면, 역시 자력 수행에 속할 따름이오.
이 두 가지를 비유로 견주어 보겠소. 보통 법문은 산수(山水)를 그리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붓으로 한 획 한 획 정성스레 그어야 점차 완성되는 격이오. 특별 법문은 산수(山水)를 사진기로 촬영하는 것과 같아서, 제아무리 수십 겹의 산봉우리와 계곡이 어우러져 있더라도, 단추 한 번 눌러 순식간에 고스란히 완성되는 격이오. 또 보통 법문은 도보로 길을 걷는 것과 같아, 튼튼한 자라도 고작 하루에 백수십 리밖에 못 간다오. 하지만 특별 법문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윤보(輪寶: 요즘의 비행기나 로켓트를 대신 상정해 보면 좋음)를 타는 것과 같아, 하루에 금방 사대부주(四大部洲: 지구상의 오대양 육대주를 상정)에 두루 이를 수 있다오.
우리들은 이 자리에서 즉시 성불할 자격도 없고, 또 미혹을 완전히 끊어 마음대로 행동하더라도 악업을 짓지 않는다는 구체적인 실증도 없소. 그런데도 정토 법문 수행에 전념하여, 부처님의 자비력으로 업장을 짊어진 채 왕생하길 바라지 않겠소? 그렇다면 아마도 미래의 시간이 다하도록, 여전히 삼악도나 육도 가운데 생사윤회를 계속하면서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만 같아, 슬프지 않을 수 없소. 바라건대 우리 불자 모두 함께 올바른 믿음을 내면 좋겠소.
염불 법문에는 대략 네 가지가 있소. 지명(持名)과 관상(觀像)과 관상(觀想)과 실상(實相) 염불이 그것이오. 이 네 가지 방법 중에, 부처님 명호를 지니고 염송하는 지명(持名: 또는 稱名이라고 함) 염불이 중생의 근기를 가장 널리 두루 포섭하고, 착수하기도 쉬우며 마장(魔障)을 초래하는 일도 없다오.
만약 관법(觀法)을 수행하려거든, 반드시 먼저 관경(觀經)을 숙독하여, “이 마음으로 부처를 짓고, 이 마음이 부처임[是心作佛, 是心是佛.]”과 “마음이 청정하면 부처가 나타나며, 경계가 밖으로부터 오는 게 아님[心淨佛現, 境非外來.]”을 깊이 알아야 하오. 그래서 단지 마음이 나타나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그 경계가 더욱 심오하고 미묘해지며, 마음 또한 더욱 정치(精緻)하게 순일(純一)해진다오.
이와 같이만 한다면, 관상(觀想)의 이익이 결코 사소하지 않소. 그러나 관상하는 경계가 익숙하지 못하고, 마음의 길[心路]도 분명하지 않으면, 조급하고 허황된 마음으로 경계가 한시 바삐 나타나기만 바라기 쉽소. 그러면 전체가 망상이 되어, 부처님과도 마음과도 모두 서로 감응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마장(魔障)의 태반(胎盤)만 잠복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오.
이렇게 경계만 얼른 보려고 망상을 품으면, 마음이 더욱 조급하고 허황되기 쉽소. 그러면 틀림없이 여러 전생에 맺은 원수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거짓 경계를 나토어 미혹시키려 들 것이오. 최초의 원인 자리가 진실하지 못하니, 그런 거짓 경계가 마장으로 나타난 것인 줄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겠소? 그리하여 크게 기뻐하며 흥분하여 안절부절 못하면, 악마가 곧 몸에 달라붙어, 제 정신을 잃고 미쳐 날뛰게 되오. 그런 사람은 설령 산 부처님께서 몸소 나타나시어 구제하려고 해도 어찌할 수가 없소.
모름지기 자기 근성(根性)을 스스로 헤아려야 하오. 그래야 혹시라도 오직 높고 뛰어난 것만 붙잡으려다가, 이익은 못 얻고 손해만 보는 어리석음은 없게 되오. 일찍이 선도(善導) 화상께서 “말법 시대의 중생은 정신과 의식이 날넘고 건방지며, 마음은 거칠고 경계는 세밀하여, 관법 수행을 성취하기 어렵다.”고 하셨소. 그래서 위대한 성인께서 자비와 연민을 베푸사, 오로지 ‘나무 아미타불’ 명호만 지송하는 염불을 특별히 권하셨다오.
명호를 부르는 게 쉽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또 더러 마음을 잘못 써서 마장의 경계에 빠져드는 자가 있을까 진심으로 염려한 까닭이라오. 스스로 잘 살피기 바라오. 또 간절한 정성 자체도 조급하고 허황된 마장을 제거하는 한 가지 비결이오. 마음과 힘을 다해 실행한다면 정말 다행이겠소.
그리고 혹시라도 한 부처님을 부르며 생각하는 염불이 수많은 부처님을 부르며 생각하는 공덕만큼 크지 못하다고 생각지 마시오. 아미타불은 법계장신(法界藏身: 법계에 감추어져 가득 차 있는 몸)으로, 시방 법계의 모든 부처님들의 공덕이 아미타불 한 분께 전부 원만히 갖추어져 있음을 모름지기 알아야 하오. 마치 제망주(帝網珠)에서 천 구슬이 한 구슬에 포섭되고, 한 구슬이 천 구슬에 두루 비춰지는 것처럼, 아미타불 한 분만 입에 올려도, 모든 부처님이 빠짐없고 남김없이 전부 망라된다오.
만약 오랫동안 수행한 대사(大士)라면, 인연 경계가 폭넓은 것이 전혀 방해가 안 되오. 오히려 경계가 넓을수록, 마음이 더욱 오롯이 통일될 수 있소. 그러나 공부가 아직 깊지 못한 보통 초심자들은, 만약 인연 경계가 넓어지면 마음과 의식이 분산하기 마련이오. 지혜는 얕고 업장은 두텁기 때문에, 더러 마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오. 우리 석가모니불과 역대 조사들께서 모두 한결같이 일심으로 아미타불 염송에 전념하라고 가르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오.
염불 수행으로 삼매를 증득한 뒤에는, 온갖 법문의 무한하고 미묘한 이치가 모두 원만히 갖추어지게 되오. 옛 사람들이 “큰 바다에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온갖 강물을 다 쓴 셈이고, 몸소 함원전(含元殿) 안까지 들어가 본 사람에게는 장안(長安)을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다.”고 하신 말씀은, 이러한 상황을 가장 잘 형용한 비유라고 하겠소.
나무 아미타불 명호를 지송하는 염불법이 아무나 할 수 있고 깊지도 못하다고, 이를 내버리고 관상(觀像)이나 관상(觀想)·실상(實相) 등의 염불법을 닦겠다고 나서지는 절대 마시오. 무릇 네 가지 염불 가운데, 오직 명호를 지송하는 방법이 말법 시대 우리 중생의 근기에 가장 잘 들어맞기 때문이오. 명호를 지송하여 일심불란(一心不亂)에 이르면, 실상(實相)의 미묘한 이치도 전부 드러나고, 서방 극락의 미묘한 경지도 철저히 원만하게 나타난다오. 즉 명호를 지송하여 실상을 몸소 증득하고, 관법을 닦지 않아도 서방 극락을 철저히 친견하는 것이오.
명호를 지송하는 염불법은 불도에 들어가는 현묘한 문[入道之玄門]이자, 부처가 되는 지름길[成佛之捷徑]이라오. 요즘 사람들이 교리나 관법을 모두 제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면서 관상(觀想)이나 실상 염불법을 닦다가는, 자칫 악마가 들러붙기 쉽소. 재주를 부리려다 오히려 낭패를 당하고, 위로 올라가려다가 도리어 아래로 추락하는 꼴이 되기 십상이오. 마땅히 행하기 쉬운 방법을 수행하여, 지극히 미묘한 과보가 저절로 이루어져 나타나도록 하는 게 좋지 않겠소?
여래의 설법은 원래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이루어졌소. 그래서 실법(實法)을 행하며 권법(權法)을 베풀기도 하고, 권법을 열어 실법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한평생 다섯 시기의 교화가 차례로 있었다오. 그리고 또 중생이 자력으로 해탈하기는 어렵고, 부처님 힘에 의지하면 해탈이 쉬운데다가, 말세 중생의 근기가 형편없이 열악함을 아시고, 특별히 정토 법문을 열어 두셨소. 상중하 세 근기의 모든 중생이 다같이 이익을 얻어 불퇴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미리 배려하신 것이오.
그런데 세상에는 고상한 것만 좋아하고, 훌륭한 것만 좇아가는 이들이 많소. 시대와 중생의 근기를 관찰하지 못하고, 늘상 거의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수행하라고 가르치고 권하는 것이오. 그 뜻이야 비록 몹시 선하겠지만, 시대와 근기를 그만 놓쳐버려, 힘만 많이 들이고 얻는 이익이 아주 적게 되니, 안타깝기 그지없소.
한 마음[一心]을 아직 얻기 전에는, 부처를 보겠다는 염두가 결단코 싹터서는 안 되오. 한 마음을 얻게 되면, 마음과 도가 합쳐지고 마음과 부처가 합쳐져서, 부처를 보려고 하면 단박에 볼 수 있고, 보고 싶지 않으면 역시 아무 어려움 없이 안 보게 되오.
그런데 한 마음을 얻지도 못한 채 성급히 부처만 보려고 한다면, 마음과 생각이 어지러이 드날리고, 부처를 보려는 염두가 가슴 속 깊이 단단히 맺혀, 수행의 막대한 병폐가 된다오.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하면, 오랜 생애 동안 원한 맺힌 중생이 그 조급한 욕심과 망상을 틈타, 부처님 몸으로 나타나 숙세의 원한을 보복하려고 덤비게 되오. 자기 마음에 올바른 식견이 없이 온통 악마의 분위기로 휩싸여 있으니, 한번 부처의 환영(幻影)을 보면 그만 크게 기뻐하며, 악마가 마음속 깊이 파고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미쳐 날뛰기 쉽소. 그러면 비록 산 부처가 나서서 구하려 해도 어쩔 수 없소.
단지 한 마음[一心]만 이룰 수 있다면, 하필 미리 부처를 볼 수 있을지 여부를 계산한단 말이오? 한 마음이 된 뒤에는, 좋고 나쁨을 저절로 알게 되오. 부처를 보지 못했다면, 말할 것 없이 공부에 정진할 수 있어야 하오. 또 설사 보았더라도, 더욱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수행에 전념하여야 하오. 그러면 오해나 착각으로 인한 허물은 결단코 없으며, 오직 나날이 향상 전진하는 이익만 있을 것이오.
세간에는 이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조금 수행해 보고는, 금방 분수에 넘치는 기대를 품는 경우가 많소. 예컨대, 거울을 닦아 티끌과 먼지가 말끔히 사라지면, 틀림없이 맑은 광명이 드러나 천지 만물을 훤히 비추게 되오. 그런데 거울 표면을 닦는 데는 힘쓰지 않고서, 단지 빛이 나기만 바란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소? 온통 먼지투성이인 거울에 설령 빛이 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요괴의 빛이지, 거울 본연의 빛은 아니오.
혹시라도 마음을 잘못 써서, 훌륭한 이익을 스스로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신심마저 흔들어 후퇴시킬까 염려스러워, 특별히 보충하는 말이오. 영명(永明) 대사께서 일찍이 “단지 아미타불만 뵙는다면, 어찌 깨닫지 못할까 근심하리오?[但得見彌陀, 何愁不開悟?]”라고 읊으셨소. 이제 그 시구를 본떠, 나는 “단지 마음이 어지럽지 않기만 바랄 뿐, 부처님 뵙고 못 뵘은 따지지 않으리[但期心不亂, 不計見不見.].”라고 말하고 싶소. 이러한 이치를 알았거든, 마땅히 마음과 부처가 합치하는 도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오.
때로는 잠시 방편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급하지 않은 일은 거절하는 것도, 몹시 유익한 수행이 되오. 폐관(閉關: 結制·杜門不出] 수행 중의 공부는, 마땅히 ‘오롯이 정신 집중하여 두 갈래 지지 않는[專精不二]’ 일심불란을 주목표로 삼아야 하오. 마음이 과연 하나가 되면, 저절로 불가사의한 감응이 통할 것이오. 아직 하나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조급하고 망령된 마음으로 먼저 감응이 통하길 구해서는 안 되오. 한 마음이 된 뒤에는 틀림없이 감응이 통하고, 감응이 통하면 마음이 더욱 하나로 오롯이 집중할 것이오.
그런데 마음이 아직 순수하게 하나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감응이 통하기만 간절히 바라면, 그 욕심이 바로 수도(修道)의 제일 큰 장애가 된다오. 하물며 조급하고 망령된 마음으로, 아주 특별한 기대에 잠긴다면 어찌 되겠소? 온갖 악마를 불러들여 청정한 마음을 파괴할 게 분명하오.
손가락에 피를 내어 경전을 쓰는[寫經] 일은 일단 늦추고, 마땅히 한 마음으로 염불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하오. 피를 많이 흘리면, 기력이 소진하고 정신이 쇠약해져, 도리어 수행에 장애가 될까 두렵기 때문이오. 몸이 편안한 뒤에 도가 높아지는 법이오. 범부의 지위에서 법신 대사(法身大士)의 고행을 본받아 실천하려 들면 안 되오. 단지 한 마음만 얻으면, 모든 법이 두루 원만하게 갖추어진다오.
관상(觀想) 염불법은, 먼저 이치의 길[理路]이 명백하고 관조의 경지[觀境]가 익숙하며, 조급하거나 경망스런 마음이 없고, 차분히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는 뜻을 갖추어야 하오. 그런 사람이 아니면 수행해 봤자, 손해만 많고 이익은 적다오.
실상(實相) 염불법이야, 부처님 한평생 가르침과 모든 법문에 공통하는 최고 미묘한 수행이오. 천태종(天台宗)의 지관(止觀)이나 선종의 참구 향상(參究向上) 등의 수행이 모두 그것이오. 이른바 자기 성품에 본래 갖추어진 천진(天眞)스런 부처를 사념(思念)한다는 것이오.
이러한 실상 염불은 말하기는 쉬운 듯하지만, 수행하고 증득하기는 실로 어려움 가운데 최고 어려움이라오. (이미 도를 얻은 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다시 온[再來: 再臨] 대사(大士: 보살)가 아니라면, 누가 현생에 단박 몸소 증득할 수 있겠소? 이렇듯이 어렵기 때문에, 명호 지송하는 염불을 아주 특별히 찬탄하고 권장하는 것이오.
이걸 알고도, 여전히 자기 힘에 의지해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 본래 심성을 회복하려고 고집할 뿐,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여 서방 극락에 왕생하길 바라지 않으려는 사람은, 아마 씨도 없을 것이오. 실상(實相)은 일체의 법에 두루 존재하오. 명호를 지송하는 염불법이야말로, 구체적인 일[事]이자 추상적인 이치[理]이며, 얕으면서도 깊고, 수행의 과정이자 성품 자체이며, 범부의 마음이면서 부처님의 마음인, 최고 위대한 법문이라오. 명호 지송 염불의 본체와 실상을 알아본다면, 그 이익은 몹시도 크고 깊소.
명호 지송법을 도외시하고 실상법만 오로지 닦는다면, 만 사람 가운데 한둘도 진실로 증득하기가 어렵다오. 내생에 소동파(蘇東坡)나 증로공(曾魯公)·진충숙(陳忠肅)·왕십붕(王十朋) 등과 같은 과보만 얻을 수 있어도, 이미 최상의 경지에 속하오. 그렇지만 생사윤회를 해탈하는 일이, 어찌 큰 뜻을 품고 큰 소리를 치는 것으로만 호락호락 이루어질 수 있겠소?
염불의 즐거움은, 오직 진실하게 염불하는 자만이 스스로 알 수 있소. 그렇지만 반드시 뜻과 정성을 다해 마음을 추슬러 간절히 염불해야 하며, 바깥 경계나 형상에 집착해서는 결코 안 되오. 그렇지 않으면, 마음 바탕이 확 트이지 않고 관상의 길도 익숙하지 못하여, 악마의 경계가 앞에 나타나도 알아보지 못할 터이니, 몹시 위험하게 되오.
지금 진실로 정토 법문을 널리 펼치는 이는, 정말 찾아보기도 힘든 지경이오. 선지식을 두루 참방하겠다는 염두일랑 걷어치우고, 일심으로 염불하기로 작정한다면, 그 이익이 무척 클 것이오. 이 말을 듣지 않으면, 한바탕 정신없이 힘들고 분주한 헛걸음만 하고 말 것이오. 정말 간절히 당부하는 말이오.
염불하면서도 염불함이 없고, 염불함이 없으면서도 염불함이란, 염불이 상호 감응하는 때에 이르면, 비록 항상 염불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거나 생각을 일으키는 모습이 전혀 없는 경지라오. (물론 서로 감응하기 전에는, 마음을 움직이거나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염불하지 않는 것이오.) 비록 마음을 움직이거나 생각을 일으키지 않지만, 한 구절 부처님 명호를 늘상 입으로 부르며 염송하거나[稱念] 마음속으로 기억하며 염송하는[憶念]하는 것이오. 그래서 염송하면서도 염송함이 없고, 염송함이 없으면서도 염송한다고 말하오. 염송함이 없다[無念]는 말을 염송하지 않는다[不念]는 의미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되오. 염송함이 없으면서도 염송한다는 말은, 마음을 움직이거나 생각을 일으키는 모습이 없이, 염송과 염송이 끊이지 않고 이어짐을 일컫소. 이러한 경지는 얻기가 결코 쉽지 않으므로, 함부로 망상이나 오해를 해서는 안 되오.
관상(觀想) 염불법이 비록 좋긴 하지만, 보고 생각하는 부처님 형상은 오직 마음속에 나타나는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하오. 만약 마음 바깥의 경계로 잘못 알면, 혹시라도 악마가 들러붙어 미쳐 날뛸 수도 있으니, 이 점을 잘 알아야 하오. 오직 마음이 나타내는[唯心所現] 형상은, 비록 뚜렷하고 분명한 모습으로 느껴질지라도, 실제로 알맹이 있는 물건 덩어리는 아니라오. 만약 바깥 경계로 착각하여 덩어리가 실제 있는 것으로 여긴다면, 곧 악마의 경계가 되고 말 것이오.
다른 분들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걸 보면, 다분히 현묘(玄妙)한 곳에 치중하는 것 같소. 하지만 나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 주로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이끌고 있소. 가령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설사 선종(禪宗)과 교법(敎法)을 하나하나 철저히 궁구할지라도, 단지 삼세(三世) 모든 부처님의 원한만 이룰 따름이오. 하물며 선종이나 교법을 철저히 궁구하지도 못하는 범부 중생이 자기 본분마저 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소?
믿음과 발원 없는 염불이, 비록 화두를 붙잡는 참선보다는 공덕이 크지만, 스스로 미혹을 끊지 못하면 자기 힘으로 생사를 벗어날 수 없기는 마찬가지라오. 믿음과 발원이 없으면, 부처님의 가피와 영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힘에만 의지하는 일반 보통 법문과 같기 때문이오. 그렇게 하여 도를 증득하기는 정말로 몹시 어렵소.
그리고 믿음과 발원으로 극락왕생을 구하는 수행이 비천하고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지 마시오. 화장해회(華藏海會)의 보살들이 한결같이 십대원왕(十大願王)으로 극락왕생을 회향 기도하는 것이, 『화엄경』의 맨 마지막 대단원을 장식하지 않소? 게다가 정토의 모든 보살과 조사들이 말씀하신 가르침도, 모두 믿음과 발원으로 극락왕생을 구하라고 일깨우지 않소?
관상염불법이 비록 16가지나 되지만, 이를 닦고 익히는 사람은 마땅히 닦기 쉬운 방법으로 수행해야 할 것이오. 여래의 백호관(白毫觀)이나 열세 번째의 잡상관(雜想觀)을 행하는 게 좋을 듯하오. 구품관(九品觀)은 수행자가 왕생하는 전인(前因: 전제 조건)과 후과(後果: 후속 결과)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뿐이오. 그러니 그러한 사실만 알면 그만이고, 이를 특별히 독립의 관상법으로 행할 필요는 없소.
관상의 이치는 잘 알지 못하면 안 되고, 관상의 일(수행)은 천천히 하는 편이 낫소. 만약 이치의 길[理路]을 분명히 알지도 못하고 관상의 경계도 뚜렷하지 못하면서, 조급한 마음과 붕 뜬 기분으로 관상법을 수행한다면, 마장(魔障)을 불러들일 수 있기 때문이오. 설사 관상의 경계가 앞에 잘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만약 마음속에 함부로 기뻐하는 염두가 일어나면, 그 기쁨이 도리어 장애로 변하여, 지금까지 닦는 공부를 다시 후퇴시킬 수도 있다오.
그래서 『능엄경(楞嚴經)』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소.
“성인이라는 마음을 품지 않아야, 정말 훌륭한 경계라 부른다. 만약 성인이라는 생각을 하면, 곧장 뭇 사악의 침공을 받는다[不作聖心, 名善境界. 若作聖解, 卽受群邪.].”
한 마음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는 염불로 천 번 만 번 확실한 수행을 삼기 바라오. 지극한 마음이 하나로 집중할 때, 청정한 경계(정토)가 저절로 앞에 나타날 것이오. 법신(法身)이 관상에 들면, 그 이치는 실로 몹시 심오함을 모름지기 알아야 하오. 마음으로 부처를 짓고, 마음이 부처라는 일은, 본디 평상(平常)스럽소. 평상스러우면서도 범상(凡常)치 않고, 몹시 심오하면서도 결코 깊지 않다오.
제13관법에서, 여래께서 특별히 근기가 열악한 중생을 위해 방편법문을 열어 놓으셨소. 1장 6척(一丈六尺: 16자)이나 8척(尺) 높이의 작은 아미타불상을 관상하는 법이 그것이오. 또 마지막 제16관법은 죄악과 업장이 몹시 무거운 자들에게, 곧장 아미타불 명호를 불러 왕생하도록 알려주고 있소. 그래서 형상은 비록 크고 작을지라도 부처님은 본래 하나이고, 관상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명호만 염송해도 곧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오.
이러한 가르침만 잘 생각해 보아도, 명호를 지송하는 염불법이 최고 제일임을 알 수 있소. 말법 시대 수행인들이 현생에 결정코 극락왕생하고 싶다면, 바로 이 명호 지송법을 보배로 삼지 않을 수 있겠소?
요즘 사람들은 거의 태반이 체면을 차리기 위해 허공에 누각을 지으려고 하오. 한 푼이나 반 푼밖에 없으면서도, 백천만 냥을 가지고 있다고 허풍 떨기 일쑤요. 예컨대, 어떤 거사의 수행 기록은 그 경계가 모두 손과 붓으로 쓴 것이지, 마음 바탕에서 체험한 것이 아니오. 그대들은 정말 거짓을 꾸미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이런 버릇이 있다면, 그 허물은 결코 작지 않음을 명심하시오.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근본 5계에 포함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폐단을 방지하기 위함이오. 더러 보고도 안 보았다고 말하거나, 못 보고도 보았다고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거짓말에 속하오. 그런데 만약 허공에 누각을 짓고 수승한 경계라고 망령되이 말한다면, 아주 큰 거짓말 계율[大妄語戒]을 범하는 것이오. 체험하지 못하고서 체험했다고 말하거나, 증득하지 못 하고서 증득했다고 말하면, 그 죄가 살인이나 강도·간음보다 백천만억 배 이상 더 크고 무겁다오. 그런 사람이 만약 힘써 참회하지 않다가, 날숨 한번 들어오지 못해 죽으면, 불법을 파괴하고 어지럽히며 중생을 미혹시키고 오도(誤導)한 죄로, 그만 아비지옥에 떨어진다오.
그러므로 그대는 절대로 신중해야 하오. 자신이 본 경계가 100이라면, 101을 보았다고 말해도 안 되지만, 99만 보았다고 말해도 안 되오. 지나치게 말해도 죄와 허물이 되지만, 모자라게 말해도 허물이 되기 때문이오. 왜냐하면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수행 경지가 타심통(他心通)의 도안(道眼)을 얻지 못하여, 말하는 내용으로만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흔히 ‘지나치면 오히려 미치지 못하는(모자라는) 것만 못하다’는 뜻으로 잘못 알고 쓴다. 그런데 사실은 ‘지나치면 미치지 못하는(모자라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유(猶)는 ‘같을 유’, ‘오히려 유’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오히려’라는 부사로 흔히 해석하기 때문에, ‘못하다’는 뜻이 문장의 호응상 저절로 뒤따라 붙으며, 의미상 ‘불급(不及)’과 혼동하여 착각하는 것이다. 바로 지나침[過]과 모자람[不及]이 전혀 없는 중용(中庸)을 추구하는 유가의 도(道)가 함축된 성어(成語)로, 본문의 내용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만약 이러한 경계를 진짜 선지식에게 말하여, 정사시비(正邪是非)를 확실히 증명 받는다면, 허물이 없게 되오. 그런데 증명 받지도 않고서 단지 스스로 자랑하고 과시하려 든다면, 허물이 있게 되오. 또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도 허물이 되오. 선지식에게 증명받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털어 놓아서는 안 되오. 말해 버리면, 그 이후로는 그런 수승한 경계를 영원토록 다시 얻지 못할 것이오. 이 점이 바로 수행인들이 조심할 제일 크고 중요한 관문이기에, 천태종에서 거듭 말하고 있소.
[천태종뿐만 아니라, 모든 종파와 종교를 막론하고 가장 중시하는 수칙이다. 예컨대, 노자(老子)는 ‘다언삭궁(多言數窮)’을 경고하는데, ‘말이 많으면 자주 곤궁해진다’는 뜻이다. 또 중국에는 더 직접적이고 실감나는 ‘언진도단(言盡道斷)’이라는 격언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말이 다하자마자 도가 끊어진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듣는 ‘언어도단(言語道斷)’도 본래 이와 상통하는 의미로 풀이되나, 우리는 (특히 禪宗에서는) 보통 언어의 길이 끊긴, 바꾸어 말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禪(마음)의 경지를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근래 수행인들은 대부분 마귀에 붙들려, 조급하고 망령된 마음으로 수승한 경계를 보려고 바라는 듯하오. 그런 경계가 악마의 소행임은 말할 필요도 없겠소. 설사 그 경계가 확실히 수승한 경계일지라도, 한평생 환희심 따위에 탐착하여, 손해만 당하고 이익은 보지 못할 것이오. 하물며 그 경계가 확실히 수승한 경지라고 증명하기 어렵다면 어떻겠소?
그러나 수행인이 수양을 잘하여, 조급하고 망령된 마음이나 탐착하는 마음이 전혀 없고, 온갖 경계를 보더라도 아예 보지 않은 것과 똑같이 대하며, 환희심이나 탐착심을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이나 놀람·의심 따위도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에게는 수승한 경계가 나타나는 경우에 아주 유익함은 물론이고, 설사 악마의 경계가 펼쳐지더라도 또한 유익하게 되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악마에 홀려 흔들리거나 맴돌지 않고서, 곧장 위를 향해 정진할 수 있기 때문이오. 이러한 말은 보통 사람들에게 잘 말하지 않는데, 그대에게 바로 이러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정말로 말하지 않을 수가 없구려. 그대가 맨 처음 예불 때 보았다는 대사(大士: 보살) 형상은 정확하지 않소. 만약 정말이었다면, 그 형상이 관경(觀經)의 묘사와 합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때문에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렇지만 그대가 이로 말미암아 신심이 더욱 간절해진다면, 이 또한 좋은 인연이오. 다만 항상 불보살의 형상을 보려고 욕심내지만 않으면 되오. 오직 지성으로 불보살께 예배(禮拜) 드리기만 한다면, 다른 염려는 할 필요가 없소. 잠자리에 들면서 눈앞에 흰 빛[白光]과 함께, 예불 때 뵈었던 불보살 형상이 허공에 걸린 듯 서있는 모습이 나타난 것도, 비록 좋은 경계(현상)이지만, 역시 탐착해서는 안 되오. 앞으로 그런 기대나 희망을 가져서는 안 되오. 바라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이오. 그대의 근기와 성품을 살펴 보건대, 아마도 전생에 선정(禪定)을 제법 닦은 것 같소. 그래서 이러한 형상이 자주 나타날 것이오.
명(明) 나라 때 우순희(虞淳熙)가 천목산(天目山: 浙江省 서북부 소재. 최고봉 해발 1,587m) 높은 봉우리에서, 죽기를 작정하고 폐관(閉關) 수행을 계속했다오. 참선을 오래 닦은 결과 마침내 선지(先知: 先見之明)를 얻어, 날씨의 맑고 흐림과 사람들의 길흉 화복을 예언하게 되었소. 그는 이미 연지(蓮池) 대사에게 귀의하였는데, 연지 대사가 그 소식을 듣고는 편지를 써 보내, 그가 악마의 올무에 빠져 들었다고 호되게 꾸짖었다오. 그 뒤 소식은 알 수가 없었소.
도를 배우는 사람[學道人]은 모름지기 큰 것을 닦고 알아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조그만 이익을 얻고서 반드시 큰 손해를 당하게 되오.
[일찍이 공자(孔子)도 “군자는 크게 받을 수 있으니 작게 알아서는 안 되고, 소인은 크게 받을 수 없고 작게 알 수 있을 따름이다[君子不可小知而可大受, 小人不可大受而可小知: 論語, 衛靈公 편].”는 위대한 말씀과 함께, “성급하게 욕심내지 말고, 작은 이익을 보지 말라. 욕심이 성급하면 이르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면(집착하면) 큰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無欲速, 無見小利. 欲速則不達, 見小利則大事不成: 論語, 子路 편].”는 소중한 가르침을 남겼다.]
이러한 경계가 설사 정말로 다섯 신통[五神通]을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버려 두어야, 바야흐로 누진통(漏盡通)까지 얻을 수 있다오. 만약 한번 탐착하기만 하면, 더 이상 향상 진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후퇴하고 타락할 수 있으니, 잘 알아 두지 않으면 안 되오.
[신통(神通): 불가사의함을 신(神)이라 하고, 자유자재 함을 통(通)이라 한다. 천안통(天眼通: 色界와 欲界의 모든 사물을 비춰 보는 눈)·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듣는 귀)·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을 꿰뚫어 봄)·숙명통(宿命通: 宿世 전생의 일을 모두 앎)·신족통(神足通: 如意通, 神境通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장애물도 관통하며, 자유자재로 비행하고, 돌을 황금으로 변화시키거나, 불을 물로 바꾸는 기적도 행함)을 오신통(五神通)이라 한다. 여기에 누진통(漏盡通: 번뇌가 완전히 소멸한 성인의 경지. 阿羅漢 이상)을 합쳐 육신통이라고 한다.]
정토 염불을 수행하는 사람은 갖가지 경계를 일삼지 않는다오. 그래서 또 어떠한 경계도 발생함이 없소. 만약 마음속으로 오로지 경계를 보려고만 한다면, 금방 수많은 경계가 나타난다오. 이때 마음을 조금이라도 잘못 쓰면 손해를 볼 수도 있으므로, 잘 알아 두어야 하오.
조급한 성미는 어느 한두 사람뿐만 아니라, 불교를 공부하는 모든 사람들이 대부분 범하기 쉬운 병폐라오. 이러한 병폐가 있는 사람들은, 악마의 경계에 빠져 들지 않으면, 곧잘 얻지도 못하고서 얻었다고 허풍을 떤다오.
우리 마음이 본디 부처인데, 번뇌가 말끔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억울하게도 중생 노릇만 하고 있는 줄을 꼭 알아야 하오. 그러므로 번뇌만 말끔히 사라지게 한다면, 본디 갖추어진 부처님 성품이 저절로 훤히 드러날 것이오. 마치 거울 표면을 닦아 먼지만 말끔히 소제하면, 빛이 나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소. 또 눈에 티가 들어간 경우, 티만 끄집어내면 눈이 저절로 광명(시력)을 되찾는 이치와도 같소.
먼지가 아직 말끔히 닦이지 않고, 티가 미처 후련히 빠지지 않은 때에, 성급히 빛을 내고 시력을 찾기 바란다면, 가능하겠소? 무릇 처음 마음을 내는 사람들에게는, 마땅히 이러한 이치부터 잘 알려 주어야 하오.
염불 수행을 하는 사람은, 물론 곧장 극락왕생하려는 마음을 지녀야 하오. 그러나 과보가 아직 원만히 이루어지기 전에는, 다만 인연에 맡겨야 하오. 공부가 충분히 무르익었다면, 굳이 기어코 왕생하려고 해도 별 장애가 없소. 그렇지 못한데도 억지로 왕생을 구하면, 그 마음이 곧 악마의 뿌리[魔根]가 된다오. 이러한 망령된 생각이 단단히 맺혀 풀리지 않는 덩어리를 이룬다면, 그로 인한 위험은 말할 수 없이 크다오.
과보가 다할 때까지 정성을 바치는 것이, 우리가 따라 행해야 할 길이오. 수명을 (人爲로) 단축시켜 진리를 증득하려는 행위는, 진실로 부처님 경전에서 심하게 질책하셨소. 예컨대, 『범망경(梵網經)』의 게송에는 이런 구절의 말씀이 있소.
나를 따지고 생각하는 자는 計我著想者
이 법을 낼 수도 없거니와 不能生是法
수명을 끊어 증득하는 자도 滅壽取證者
또한 법을 씨 뿌리는 게 아닐세. 亦非下種處
다만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하루 속히 극락왕생하길 발원할 따름이지, 억지로 왕생을 앞당기려거나, 기어코 즉시 왕생하겠다고 욕심을 내서는 안 되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마음이 극단에 치우치거나 집착하면 안 되오. 치우치거나 집착하면, 더러 마음을 잃고 미치게 되어, 이익도 없고 손해만 본다오.
정토 수행이 무르익어 오늘 당장 극락왕생한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을 것이오. 그러나 무르익지 않았는데 곧장 왕생하려 들면, 이는 채 자라지도 않은 벼 이삭을 살짝 뽑아 올려 성장을 도와주려다가, 도리어 말라 죽게 만드는, 알묘조장(揠苗助長)의 어리석음을 범하는 꼴이 되오.
그렇게 해서 마장(魔障)이 한번 일어나면, 단지 자기만 극락왕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신심을 후퇴시키는 빌미가 되기 쉽소. ‘염불 수행한다던 아무개를 보니, 염불은 이익도 없이 손해만 있는 것 같더라.’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면, 그 해악이 결코 작지 않을 것이오. 결정코 때를 앞당겨서 왕생하겠다는 억지 마음일랑, 오직 하루 속히 왕생하길 바라는 자연스런 마음으로 바꾸어 먹길 바라오. 설사 한시 바삐 왕생하지 못하더라도, 서운하거나 안타깝게 생각할 필요가 없소. 단지 정성과 공경만 다하다가, 과보가 원만히 이루어진 뒤에 왕생하면 좋지 않겠소? 그러면 적어도 조급하고 망령된 생각 덩어리로 악마를 초래하는 재앙은 없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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