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염불은 어떻게 하는가?

인광대사가언록. 마음 닦고 염불하는 수행의 요령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2. 18:21

본문

1) 염불은 어떻게 하는가?

 

일단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을 함께 갖추었으면, 이제 염불의 기본 수행을 닦아야 하오. 믿음과 발원을 선행 안내자로 삼고, 염불을 기본 수행으로 삼는 것이오. 믿음과 발원과 수행, 이 세 가지가 염불 법문의 필수 요건이라오. 수행이 있어도 믿음과 발원이 없으면 왕생할 수 없고, 반대로 믿음과 발원만 가지고 수행을 안 하면 역시 왕생할 수 없소.

믿음과 발원과 염불 수행 세 요건이 솥발처럼 (삼위일체로) 빠짐없이 함께 갖추어져야, 극락왕생이 틀림없이 결정되오. 왕생할 수 있는지 여부는 온전히 믿음과 발원의 유무에 달려 있고, 연화의 품위(品位) 고하는 전적으로 부처님 명호를 염송한 깊이에 달려 있소.

염불의 기본 수행(正行)은 각자 자기의 신분에 따라 정하며, 어떤 특정한 방법 하나에 집착해서는 안 되오. 자신에게 특별한 일이나 부담이 없는 사람 같으면, 마땅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시 저녁부터 아침까지, 앉거나 눕거나, 서거나 말하거나, 옷 입거나 밥 먹거나 대소변 보건 간에, 모든 때와 모든 장소에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한 구절 위대하고 거룩한 명호를 항상 마음과 입에서 떠나지 않도록 염송하는 것이오.

손과 입을 깨끗이 씻고 의복을 단정히 입었으며 장소가 청결하기만 하면, 소리 내어 낭송하든 조용히 묵송하든 어떻게 해도 괜찮소. 그러나 잠자리에 들었거나, 옷을 벗고 있거나 목욕하거나, 또는 대소변 보는 때 및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서는 소리 내어서는 안 되고, 단지 묵송하는 것이 좋소. 이런 경우에 묵송해도 염불 공덕은 한 가지이며, 소리를 내면 부처님께 공경스럽지 못한 게 되오. 그렇지만 이러한 때와 장소에서는 염불할 수 없다고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되오. 단지 소리 내어 염불할 수 없다는 것뿐임을 염두에 두시오. 특히 잠자리에 들어 소리를 낼 것 같으면, 단지 공경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를 손상시킬 수 있으니 꼭 유념해야 하오.

또 염불은 장기간 끊임없이 지속해야 하오. 새벽에 부처님을 향해 예배(禮拜)를 드리고, 먼저 아미타경 한 번과 왕생주(往生呪) 세 번을 독송하오. 그런 뒤 아미타불신금색(阿彌陀佛身金色)’으로 시작하는 8구절의 찬불게(讚佛偈)를 염송하고, ‘나무서방극락세계대자대비 아미타불을 한 번 염송한 뒤, 이어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 명호만 1천 번 또는 5백 번을 염송하오. 염불할 때는 주위를 돌면서 하되, 돌기가 불편하면 꿇거나 앉거나 서거나 모두 괜찮소. 염불이 끝날 때는 다시 본 자리로 돌아와 꿇어앉아,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과 청정대해중보살(淸淨大海衆菩薩)을 각각 세 번씩 염송한 다음, 정토문(淨土文)을 염송하며 극락왕생을 발원 회향하면 되오.

정토문을 염송하는 것은, 글의 뜻에 따라 마음을 내자는 것이오. 만약 마음이 글의 뜻에 따라 서원을 일으키지 않으면, 내용 없는 빈껍데기 글이 되고 말아, 실질 이익을 얻을 수 없소. 정토문 염송이 끝나면, 삼귀의를 염송하고 부처님께 예배드린 뒤 물러 나오는데, 이것이 아침 공과[朝時功課]라오. 저녁 때도 이와 똑같이 하면 되오.

만약 예배(禮拜)를 많이 하고 싶은 경우에는, 염불을 마치고 제자리에 돌아올 때 부처님께 마음껏 절을 올리고, 세 보살을 세 번씩 염송하며 아홉 번 예배드린 뒤 회향 발원하면 되오. 아니면 공과(功課)가 모두 끝난 뒤, 자기 형편껏 예배()하는 것도 괜찮소. 단지 간절하고 지성스럽게 해야 하오. 그저 대충 해대거나 방석을 너무 높이 깔면, 공경스럽지 못하게 되오.

만약 일이 많고 바빠서 한가한 여유가 없는 경우에는, 새벽에 세수와 양치질을 한 뒤, 부처님이 계시면 세 번 예배드린 다음, 몸을 단정히 하고 공경스럽게 합장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시오. 이 때 한 번 호흡[一口氣]이 다하는 동안을 한 번의 염불로 하여 열 번 호흡까지 반복하고, 짧은 정토문을 염송하거나 원생서방정토중(願生西方淨土中)’ 4구 게송을 염송한 다음, 부처님께 세 번 예배드리고 마치면 되오. 부처님이 안 계시면 서쪽을 향해 정중히 문안드린 다음, 앞에서 말한 대로 염불하면 되오.

이것이 바로 십념법(十念法)인데, 송나라 때 자운참주(慈雲懺主)가 국왕과 대신 등 정무(政務)가 번잡하여 수행할 겨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히 세운 방편이라오. 어째서 한 호흡이 다하도록 염불을 시키는가 하면, 중생의 마음이 산만하여 전념(專念)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라오. 이렇게 염불할 때는 호흡[]을 빌려 마음을 르므로, 마음이 산만해지지 않을 수 있소. 그러나 각자 호흡의 장단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야지, 억지로 호흡을 길게 늘여가며 염불을 많이 하면 절대 안 되오. 억지로 하면 기()를 손상하기 때문이오. 또 십념에서 그쳐야지, 이십념, 삼십념까지 너무 많이 해도, 기를 손상하기 쉽소. 산만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왕생하기 어렵다오. 이 염불법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킬 수 있어서, 일심으로 염불하여 결정코 왕생하자는 뜻이오. 염불의 횟수는 비록 적지만, 그 공덕은 자못 깊소. 아주 한가하거나 몹시 바쁜 경우에 각각의 염불법을 제시하였으니, 반쯤 한가하고 반쯤 바쁜 사람은 스스로 자기 형편에 맞춰 적당한 수행 방법을 마련하면 될 것이오.

염불 법문은 세속 티끌을 등지고 깨달음을 향하여, 본래 근원 자리로 되돌아가는 최고 제일의 미묘한 법이오. 특히 재가 거사 신분에게 더욱 친밀하고 절실하다오. 재가 불자는 몸이 세간 그물 안에 있으면서 수많은 사무에 시달리기 때문에, 마음을 가라앉혀 참선을 하거나 고요한 방에서 독경을 할 시간과 정신력의 여유가 거의 없소.

오직 염불 법문만이 가장 편리하고 적합하다오. 아침저녁으로 부처님 앞에 자기 분수와 능력에 따라 예배드리고 염불하며 회향 발원하면 되오. 이밖에 길을 다니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옷을 입거나 밥을 먹거나, 모든 때와 모든 장소에서 구애받지 않고 염불하기가 좋소.

다만 깨끗한 곳과 공경스러운 데에서는 소리를 내거나 내지 않거나 모두 괜찮지만, 깨끗하지 못한 곳과 공경스럽지 못한 데에서는 소리 내지 않고 묵송으로 해야 하오. 이런 때와 장소에서 염불할 수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님을 염두에 두시오. 묵송의 염불 공덕도 평소 낭송 때와 똑같다오. 그래서 자빠지고 넘어지는 때에도 반드시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마음이 여기서 떠나지 않도록 이어가는 것이오.

마음이 바깥 사물을 탐하지 않고 염불에 전념하길 바라오? 또 전념이 안 될 때 전념하고, 염불할 수 없을 때 염불하고 싶소? 그러면 달리 특별하고 오묘한 방법을 찾지 말고, 오직 죽을 한 글자를 이마 위에 붙여 눈썹까지 드리워지게 하고, 마음으로 늘 이렇게 생각하시오.

나 아무개는 시작도 없는 옛날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 지은 악업이 끝없고 수없이 많아서, 그 악업이 실체와 형상이 있다면, 아마 시방 허공조차도 다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숙세에 무슨 복덕을 지었기에, 금생에 다행히도 사람 몸 받고 태어나 불법까지 듣게 되었을까? 만약 지금 일심으로 염불하여 극락왕생을 구하지 않는다면, 숨 한 번 들어오지 않고 멈출 때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져, 끓는 가마나 칼 산[刀山], 칼 나무[劍樹]의 고통을 받으며, 오랜 겁이 지나도록 빠져 나올 줄 모를 것이다.

설령 지옥을 벗어난다고 할지라도, 다시 아귀에 떨어질 것이다. 배는 바다처럼 큰데 목구멍은 바늘귀만큼 작아, 오랜 겁 동안 계속 굶주림과 허기에 시달리며, 목구멍에 불길이 타올라도 물의 이름조차 듣지 못하고, 잠시도 배를 채우기 어려울 것이다. 또 설사 아귀에서 벗어날지라도, 다시 축생에 떨어져, 사람들이 타고 부리거나 아니면 잡아먹는 고통을 끊임없이 당할 것이다.

그리고 설령 축생에서 벗어나 사람 몸을 다시 되찾는다고 할지라도, 어리석은 바보로 태어날 것이다. 악업 짓는 것을 복덕이나 재능으로 착각하고, 선행 닦는 것은 수갑과 족쇄로 오인하기 때문에, 결국 몇십 년이 채 못 되어 또 삼악도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렇듯이 티끌처럼 수 없이 오랜 겁 동안 육도 윤회를 되풀이하면서, 비록 고해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쳐도 빠져 나올 길이 없으리라.’

이와 같이 생각하면서 위에서 말한 대로 염불하여 극락왕생을 구하면, 그 자리에서 소원을 이루어 낼 것이오. 그래서 장선화(張善和)와 장종구(張鍾)가 임종에 지옥의 모습이 나타나자 염불을 몇 번 간절히 했더니, 곧장 부처님이 와서 극락왕생하도록 영접하시는 모습을 친견했다고 하오.

이러한 이익은 부처님 한평생 가르침이나 백천만억 법문을 다 뒤져 보아도, 결코 다시 있지 않을 것이오. 그래서 내가 늘상,

부처 이하의 구계(九界) 중생은 이 (정토 염불) 법문을 떠나서는 위로 불도를 원만히 성취할 수 없으며, 시방 세계의 모든 부처님은 이 법문을 내버리고는 아래로 뭇 중생을 두루 이롭게 할 수 없다.”

고 말하는데, 바로 이러한 뜻이라오.

염불할 때 마음이 하나로 잘 모아지지 않으면, 마땅히 마음을 추스르고[攝心] 생각을 절실하게 하오. 그러면 마음이 저절로 통일될 것이오. 마음을 추스르는 방법은, 지성과 간절보다 더 나은 게 없소. 마음이 지성스럽지 않으면, 추스르려 해도 별 도리가 없소. 지성을 다하는데도 마음이 순수하게 통일되지[純一] 않으면, 귀를 기울여 잘 듣도록 하시오. 소리를 내든 내지 않든, 염불은 모두 모름지기 생각이 마음에서 일어나, 소리가 입으로 나오고, 그 소리가 다시 귀로 들어가야 하오. 묵송의 경우 비록 입을 움직이지는 않지만, 생각의 차원[意地]에서는 이미 그 소리의 모습[]이 있기 마련이오.

마음과 입으로 또렷또렷하게 염송하고, 귀로 또렷또렷하게 듣는다면, 마음이 오롯이 추슬러지면서, 잡념 망상이 저절로 사라지게 되오. 그런데도 더러 망상의 물결이 용솟음쳐 오르거든, 십념법(十念法)으로 횟수를 세어 보시오. 이렇게 온 마음의 힘을 고스란히 부처님 명호 염송하는 소리 하나에 갖다 바치면, 비록 망상을 일으키고 싶어도 여력이 없을 것이오. 이것이 마음을 추슬러(잡도리하여) 염불하는 궁극의 미묘 법문이오.

예전에 정토 법문을 설하신 분들만 해도, 이 방법을 언급하신 적이 없소. 그때까지는 사람들의 근기가 아직은 괜찮아서, 이렇게까지 안 해도 쉽게 마음이 하나로 집중될 수 있었기 때문이오. 그런데 나 인광은 스스로 마음을 조복시키기가 어려워, 비로소 이 방법의 미묘함을 알게 되었다오. 여러 번 시험하여 여러 번 효험을 확인한 결과 드리는 말씀이니, 근거 없이 가볍게 지껄이는 추측으로 여기지 마오. 천하 후세의 우둔한 근기들이 나와 같은 방법으로 염불하여, 만 사람이 수행하면 만 사람 모두 극락왕생하기를 진심으로 바랄 따름이오.

이른바 십념(十念)으로 수를 세는 법은, 염불할 때에 첫 번째 구절부터 열 번째 구절까지 분명히 염송하면서, 동시에 분명히 수를 기억하는 것이오. 열 번째 구절까지 염송한 다음 다시 첫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되풀이해 염송하며, 결코 이십이나 삼십까지 길게 염송하지는 않소. 횟수는 염송하면서 마음속으로 기억하되, 염주를 굴려 헤아려서는 안 되오.

만약 열 구절을 한숨에 곧장 기억하기가 어려우면, 두 번으로 나누어 첫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 그리고 여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기억해도 좋소. 그것도 힘들면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 네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 일곱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로 삼분하여 염송해도 괜찮소. 다만 염송을 뚜렷이 하면서, 기억도 뚜렷이 하고 듣기도 뚜렷이 하면, 잡념 망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소. 이렇게 오래 지속하면, 일심불란(一心不亂)의 경지도 저절로 얻어질 것이오.

여기서 말하는 십념(十念), 잡념 망상을 추스르는 점에서는 앞에서 말한 새벽 공과(功果) 중의 십념법(十念法)과 같지만, 그 수행 공부는 크게 다르오. 새벽 공과의 십념법은 한 번의 호흡 동안을 1념으로 삼고, 그 동안 지송하는 염불 횟수의 다소는 따지지 않소. 그렇지만 여기의 십념은 나무아미타불 한 구절 염송을 1념으로 삼소. 또 새벽의 십념법은 10념으로 충분하고, 20념이나 30념으로 길어지면 오히려 기()를 손상시켜 병을 일으킬 염려가 많소. 그러나 여기의 십념은 첫 번째 구절 염불하면서 마음속으로 첫 번째인 줄 알고, 열 번째 구절 염불하면서는 마음속으로 열 번째인 줄 알기만 하면 되오. 첫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염송한 뒤, 다시 첫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염송을 되풀이하기만 하면, 설사 하루에 수만 번을 반복하더라도 전혀 상관없소. 이렇게 염송하면 잡념 망상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가장 훌륭하게 정신을 함양할 수 있소. 수시로 빠르게 하거나 느리게 하거나 전혀 장애가 없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언제 해도 다 좋소.

십념으로 횟수를 기억하는 염불법은, 염주를 돌려 횟수를 세는 방법에 비하여, 그 이익이 하늘과 땅처럼 크게 차이 나오. 염주를 쓰면 몸도 수고롭고 정신도 흔들리지만, 이 십념의 방법은 몸도 편하고 정신도 안정되오. 다만 일을 할 때는 더러 수를 기억하기가 어려우므로 단지 간절하게 곧장 염불하기만 하고, 일이 끝난 다음에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횟수를 기억하면 되겠소. 쉴 새 없이 불안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지만, 한 곳에 정신을 집중하여 염송하는 부처님 명호 가운데 정말 좋은 친구가 따라 다닌다오.

 

[주역(周易) () 괘의 구사(九四) 효사(爻辭), “쉴새없이 불안하게 왔다 갔다 하면 (너와 비슷한) 친구들만 너(의 생각)를 따른다[憧憧往來 朋從爾思.].”라는 구절이 나오고, 계사전(繫辭傳) 하편에서 또 이 구절을 인용하여, 음양 왕래의 천도(天道) 변화를 거론하고 있다. 인광 대사가 이 구절만 잘라내 좋은 뜻으로 인용[斷章取義]하여, 그대 생각[爾思] 대신에 한 곳에 정신 집중하여 염송하는 부처님 명호 가운데[專注一境之佛號中]”로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대세지보살이 육근을 모두 추슬러(가다듬어) 깨끗한 생각이 서로 이어짐으로써 삼매를 얻는 것이 최고 제일입니다[都攝六根, 淨念相繼, 得三摩地, 斯爲第一.].”라고 말씀하였소. 근기가 뛰어난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소만, 우리같이 근기가 우둔한 중생은 이렇게 십념으로 횟수를 기억하는 염불법을 놓고서, “육근을 모두 추슬러 깨끗한 생각이 서로 이어지게 하기가 굉장히 어렵고도 또 어려운 일이오.

그렇지만 이렇게 마음을 추스르는 염불[攝心念佛] 방법은 얕은 듯하면서 아주 깊고, 작은 듯하면서도 매우 큰 불가사의한 법문임을 알아야 하오. 다만 부처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할 것이오. 자기 생각과 식견이 미치지 못하는 내용이라고 해서, 의혹을 품어서는 절대 안 되오. 만약 의혹을 일으키면, 오랜 겁 동안 심어온 착한 뿌리가 그로 말미암아 그만 사라지고, 궁극에는 실익을 몸소 얻을 수 없기 때문이오.

염주를 굴리며 염불하는 방법은, 오직 길을 다니거나 머무르는[行住] 때에만 적합하오. 정좌(靜坐)하여 정신을 함양하는 때에는, 손을 움직이면 정신이 안정될 수 없기 때문에, 자칫 병을 일으키기 쉽소. 그러나 십념으로 횟수를 기억하는 염불법은, 길을 다니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어느 때를 막론하고 적합하지 않음이 없소. 다만 누웠을 때는 오직 소리 없이 묵송하여야 하오. 누워서 소리를 내면, 한편으로는 공경스럽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를 손상하게 되니, 이 점을 절대로 명심하기 바라오.

일단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을 갖추었으면, 반드시 뜻과 마음을 다해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의 성호(聖號)를 붙잡아 지켜야 하오. 길을 다니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거나, 밥 먹거나 옷 입거나 똥오줌을 싸거나, 어느 때건 이 여섯 글자(‘아미타불 네 글자만 염송해도 괜찮음) 성호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오. 그래서 반드시 온 마음이 부처이고 모든 부처가 곧 마음이 되어, 마음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마음과 부처가 하나가 되도록[全心是佛, 全佛是心, 心佛不二, 心佛一如] 하여야 하오.

만약 생각이 여기에 있어 염불이 지극해지고 감정이 잊혀 사라지면, 마음이 텅 비면서 부처가 나타날 것이오. 그러면 현생에 염불삼매(念佛三昧)를 몸소 증득하고, 임종에 가서는 극락정토의 상상품(上上品: 九品 중 최고 제일)의 연화에 왕생하게 될 것이오. 이것이 염불 수행의 지극한 경지라오.

염불할 때는 각자 편의에 따르면 되오. 총림의 염불당(법당) 같으면, 먼저 아미타경을 독송하고 왕생주를 세 번 또는 한 번 염송한 뒤, 찬불게를 염송하오. 이어 나무서방극락세계 대자대비 아미타불을 염송하오. 이때 불당 안을 서서 돌면서 염불하는데, 반드시 동쪽에서 남쪽·서쪽을 거쳐 북쪽에 이르는 (시계바늘) 방향으로 돌아야[右繞] 하오. 이런 방향이 순종(順從)이고 수희(隨喜)가 되며, 순종의 방향이라야 공덕이 있소. 서역에서는 이렇게 빙 둘러 도는[圍繞] 것을 가장 중요시하는데, 동방(중국·한국)에서도 예배(禮拜: )와 함께 나란히 행해 왔소. 만약 동쪽에서 북쪽과 서쪽을 거쳐 남쪽에 이르는 (시계바늘 반대) 방향으로 거꾸로 돌면[反繞: 左繞] 허물이 되니, 잘 알아 두지 않으면 안 되오.

돌면서 염불하기를 절반쯤 마치면, 앉아서 차분히 묵송을 한참 하고, 다시 일어나 소리내어 염불하오. 염불이 모두 끝나면 꿇어 앉아, 나무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청정대해중보살을 각각 세 번씩 염송하고 발원문을 염송하면 되오. 집에 있는 불자들은 집안이 좁아 돌기가 어려울 것이오. 그러면 서거나 꿇거나 앉거나, 편한 자세로 염불하면 되오. 다만 자기의 정신과 기력에 따라 알맞게 정하는 것이 중요하며, 남들이 하는 방법을 자기 표준으로 본받을 필요는 없소.

염불에서 비록 마음 생각[心念]이 가장 중요하고 존귀하지만, 그렇다고 입으로 낭송하는 것[口誦]을 폐지해서는 안 되오. 몸과 입과 생각의 세 가지[三業]가 서로 돕고 어울려 조화를 이루어야 가장 바람직하오. 가령 마음으로 생각할지라도, 몸으로 예경(禮敬)하지 않고 입으로 지송하지 않으면, 진실한 이익을 얻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오. 세간에서 사람들이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옮길 때에도, 오히려 모두 한 소리를 내어 힘을 집중시키고 서로 돕지 않소? 하물며 마음을 추슬러(다잡아) 삼매를 증득하려는 염불 수행이야 오죽하겠소?

그래서 대집경(大集經)에서는, “크게 염불하면 큰 부처님을 보고, 작게 염불하면 작은 부처님을 본다[大念見大佛, 小念見小佛.].”고 말씀하셨소. 또 고승 대덕들은 큰 소리로 염불하면 보게 되는 부처님도 몸이 크고, 작은 소리로 염불하면 보게 되는 부처님도 몸이 작다.”고 하였소. 하물며 우리 같은 범부 중생은 마음이 대부분 어둡고 어지러운데, 몸으로 예배드리며 입으로 낭송하는 힘을 빌리지 않고서, 어떻게 일심불란의 염불삼매를 쉽게 얻을 수 있겠소?

선도(善導) 화상은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위대한 신통력과 지혜를 겸비하셨소. 그러나 그분이 정토 법문을 설하여 전하실 때는 현묘(玄妙)함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진실하고 간절하면서도 평범한 곳에서 사람들에게 수행 방법을 가르쳤소. 그러나 그분이 가르치신 전수(專修)와 잡수(雜修)의 두 가지 수행 방법은 그 이익이 끝없이 많소.

전수(專修: 전념 수행), 몸은 예경에 집중하고[身業專禮: 돌거나 앉거나 절하거나, 몸가짐이 흐트러지지 않는 不放逸], 입은 지송에 집중하며[口業專稱: 경이나 주문을 독송하는 경우에도, 뜻과 마음을 다해 회향하면 專稱이 됨], 뜻은 사념에 집중하는[意業專念] 것이오. 이와 같이 수행하면, 만 사람 가운데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서방정토에 왕생하게 되오.

잡수(雜修: 복합 수행)란 갖가지 다양한 법문을 함께 수행하면서, 한결같이 극락왕생에 회향 발원하는 것이오. 이는 마음이 순수하게 통일되지 않기 때문에, 진실한 이익을 얻기 어렵소. 백 명 가운데 한둘이나, 천 사람 가운데 서넛이 왕생하기도 드물다는 것이오. 이는 황금 같은 성실한 말씀으로, 만고에 변하지 않을 철칙이오.

발원문은 문장 자체가 비록 크게 거창하지만, 모름지기 마음으로부터 진실하게 우러나와야 바야흐로 발원이라고 할 수 있소. 그렇지 못하면, 마음과 입이 서로 어긋날 터이니, 어떻게 발원이라고 하겠소? 현세의 발원은 비록 무방하겠지만, 복덕과 지혜를 함께 갖춘 자손을 낳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음덕(陰德)을 크게 쌓고 방편법을 널리 실행하는 가운데서 찾아야 할 것이오.

염불 수행에서 회향 기도는 거르거나 폐지해서는 안 되오. 회향이란 믿음과 발원을 입으로 표현하는 것이오. 그러나 회향 기도는, 단지 아침저녁 공과(功課)가 끝난 뒤와, 낮에 염불 독경이 끝난 뒤에만 하는 게 좋소. 물론 염불 자체는 새벽부터 밤중까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오. 이때 마음속에 왕생을 발원하는 염두만 품고 있으면, 그것으로 평상시 회향 기도는 충분하오. 만약 의식에 따라 정해진 문장을 독송하며 회향할라치면, 정말로 늘상 이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오. 모든 대승경전도 한결같이 모든 중생이 곧장 불도를 이루도록 가르치고 이끌고 있소. 단지 사람들이 성심으로 공경스럽게 염송하지 못하여, 진실한 이익을 온전히 얻지 못하는 게 매우 안타까울 뿐이라오.

일상생활 가운데 행하는 터럭 끝만한 선행이나 독경·예불의 각종 선근(善根) 한 가지라도, 그로 말미암아 얻는 공덕은 한결같이 극락왕생에 회향하시오. 이렇게 하면, 모든 수행 법문이 다 정토 법문의 보조 수행[助行]이 된다오. 마치 수없는 티끌이 모여 대지를 이루고, 수많은 물줄기가 모여 바다를 이루는 것과 같소. 그 심오하고 광대무변함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소? 그렇지만 모름지기 보리심(菩提心)을 내고, 중생 제도의 서원을 세워야 하오. 모든 수행의 공덕은 네 은혜[四恩]와 세 존재[三有]와 법계 중생(法界衆生)을 두루 위하여 회향하는 거라오. 그러면 마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듯, 새싹이 단비를 맞는 듯, 일체 중생과 진리의 인연[法緣]을 깊이 맺어, 자비의 뛰어난 대승 수행도 재빨리 성취할 수 있다오.

 

[네 가지 은혜[四恩]: 심지관경(心地觀經)에서는 부모의 은혜, 중생의 은혜, 국왕의 은혜, 삼보의 은혜를 차례로 거론하는데, 석씨요람(釋氏要覽)에서는 부모의 은혜, 스승과 웃어른의 은혜, 국왕의 은혜, 시주(施主: 중생)의 은혜를 들고 있다. 여기서 국왕은 지금의 국가 민족으로 이해하면 된다.]

 

[세 가지 존재[三有):  삼계(三界)의 별칭, 생사(生死)의 경계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음을 뜻한다. 즉 삼유란 삼계의 생사를 가리킨다.  한편 본래 있는[本有] 현생의 심신(心身), 마땅히 있을[當有] 미래의 심신, 이 양자 중간에 받는 심신인 중유(中有: 中陰)의 세 가지를 가리키기도 한다. 욕계와 색계의 생사에는 반드시 중유가 있다고 한다. ]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서 범부 중생이나 성문·벽지불의 소승 같은 이기적인 식견으로 자신이나 친척만을 위해 회향한다면, 비록 제아무리 미묘한 도덕을 수행할지라도, 거기서 얻는 과보는 낮고 보잘것없게 되오.

아침저녁의 염불 공과(功課)를 끝마칠 때는, 모름지기 발원해야 하오. 아침에 십념법(十念法)을 수행하는 경우에도, 염불 후 발원은 빠짐없이 해야 하오. 더러 소정토문(小淨土文)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만약 몸과 마음에 여유가 있으면, 연지(蓮池) 대사가 새로이 정한 정토문(淨土文)을 쓰는 것이 좋겠소. 이 정토문은 문리(文理)가 주도면밀하여, 고금을 통하여 최고으뜸으로 손꼽히오. 그렇지만 발원할 때 정토문을 독송하는 것은, 바로 그 문장의 의미에 따라 마음으로 진실하게 발원한다는 취지이지, 결코 정토문 한 번 읽음으로써 그냥 발원이 되는 것은 아님을 반드시 명심해야 하오.

매일 아침저녁의 염불 공과는 하나하나 법계 중생에게 회향해야 하오. 이 공과는 이것을 위해서 회향하고, 저 공과는 저것을 위해서 회향해도 안 될 것은 없소. 그러나 개별 회향과 별도로 보편 회향의 발원이 반드시 있어야, 비로소 세 가지 회향과 서로 부합하게 되오.

세 가지 회향이란, 첫째 진여실제(眞如實際)가 마음과 마음에 서로 딱 들어맞도록 회향하고, 둘째 부처의 과위와 보리[佛果菩提]가 매 염두마다 원만히 성취되길 회향하며, 셋째 법계 중생이 모두 함께 정토에 왕생하길 회향하는 것이오. 사람마다 각자 나름대로의 뜻과 직업이 있으므로, 단지 인연에 따라 분수에 맞게 수행하면 되며,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똑같을 필요는 없겠소.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