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업습의 기운[習氣]을 다스리는 방법
염불에서 일심불란의 경지를 얻고 싶으면, 반드시 생사 해탈을 위하는 진실한 마음을 내어야 하오. 행여라도 세상 사람들이 나를 진실한 수행자라고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되오. 염불할 때에는, 반드시 한 글자 한 구절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고, 입으로 나와 귀로 들어가야 하오. 한 구절을 이와 같이 염송하듯, 백천만 구절도 또한 이와 같이 염송해야 하오. 정말 이렇게 염불할 수만 있다면, 잡념 망상은 고개를 쳐들 수도 없고, 마음과 부처가 저절로 서로 들어맞게 될 것이오.
그리고 모름지기 마음을 잘 써야 하오. 지나치게 집착하여, 몸과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거나, 갖가지 마장(魔障)을 초래하는 일은 없어야 하오. 육근을 모두 추슬러 깨끗한 생각이 서로 이어지도록 하는 거요. 이렇게만 수행한다면, 샛길로 빠지거나 잘못될 염려가 결코 없을 것이오.
염불할 때 간절해질 수 없는 까닭은, 사바세계가 고통투성이고 극락세계가 즐거움 천지인 줄 모르기 때문이오. 한번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문명의 중심 국가에 태어나기 어려우며, 부처님 법 만나기 어려운데, 특히 정토 법문은 얻어 듣기가 더욱 어렵도다. 만약 일심으로 염불하지 않다가, 한 숨 다시 들어오지 않는 때에는, 숙세와 금생의 가장 중대한 악업에 따라 삼악도에 떨어져, 오랜 겁토록 결코 벗어날 기약 없이 막심한 고통을 받을 게 틀림없으리라.’
이렇듯이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여 보리심을 내었으면 좋겠소. 보리심이란 바로 자신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自利利他] 마음이오. 이 마음을 한 번 내게 되면, 마치 기계에 전기를 통하고 약에 유황을 첨가하듯, 그 힘이 몹시 커지면서 그 효험 또한 아주 빨라진다오. 그로 말미암아 업장이 소멸하고 복덕과 지혜가 증대함은, 보통의 복덕이나 선근으로 비유할 수가 없다오. 염불할 때는 수시로 늘 금방 죽어 지옥에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시오. 그러면 간절하지 못한 염불이 저절로 간절해지고, 감응도 저절로 따르게 될 것이오. 괴롭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염불하는 것이, 인연에 따라 업장을 해소하고 생사고해를 벗어나는, 최고 제일의 미묘한 방법이라오.
업습을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은 아주 간절하고 부지런한데도, 업습이 사라지는 효험이 잘 나타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겠소? 대부분은 생사 해탈의 마음이 간절하지 못한 때문이오. 즉 미혹과 업장을 해소하여 깨끗한 생각을 성취하고, 평범을 초월하여 성인의 경지에 들겠다는 발원을, 단지 입에만 살아 있는 명분으로 여기기 때문이오. 그래서 실제 효험이 없는 것이오.
가령 우리가 사람 몸 받기가 얼마나 어렵고, 부처님 법 만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우며, 특히 정토 법문 얻어 듣기란 더더욱 얼마나 어려운 줄 안다면, 사정은 좀 달라질 것이오. 지금 다행히 대장부의 몸을 받고 태어나 가장 듣기 어려운 정토 법문을 만나 듣게 되었는데, 감히 유한한 세월을 여색이나 명성·재물을 얻는 데 모두 소모해 버리고서, 생사고해를 표류하면서 육도 윤회하려 들겠소?
모름지기 곧장 죽을 死 자 (이 글자는 너무도 좋소) 하나를 이마 위에 붙여야 할 것이오. 탐내거나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될 경계가 나타나거든, 이것이 바로 미래의 끓는 가마솥이나 용광로 불길 같은 과보임을 알아차려야 하오. 그러면 아마도, 나방이 불꽃에 날아들어 스스로 타 죽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까지는, 결코 범하지 않을 것이오.
반면 자기의 분수와 처지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은, 모두 나를 사바고해에서 건져 줄 자비로운 배[出苦慈船]인 줄로 인식해야 하오. 그러면 인(仁)을 부닥쳐 굳이 사양하거나, 의(義)를 보고도 모르는 척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오. 이와 같이만 행한다면, 세속 홍진의 모든 경계가 곧장 도덕 수행의 문에 들어가는 인연이 될 것이오. 어찌하여 꼭 세속의 인연을 싹둑 끊어버린 다음에야, 비로소 도를 닦을 수 있다고 하겠소?
무릇 마음에 주인(줏대)이 똑바로 있어서, 외부 사물의 경계에 따라 돌지(움직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세속의 티끌과 수고로움으로도 해탈을 이루리다. 그래서 『금강경』은 사람들에게 마음이 형상(모습)에 머물지(집착하지) 않도록 거듭 일깨우고 있소. 일체 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면서도, 제도하는 주체라는 나[我]나 제도 받을 대상이라는 사람[人]이나 중생,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얻을, 남김 없는 열반[無餘涅槃]이라는 수자(壽者)의 모습 등을 전혀 보지 않아야 하오. 그래야 비로소 진짜 보살도를 행한다는 거요.
만약 내가 제도하며, 중생이 제도 받고, 남김 없는 열반이 제도의 법이 된다는 모습(의식)이 있게 되면, 비록 중생을 제도할지라도 일승실상(一乘實相)의 도에는 딱 부합할 수 없다오. 중생이 본체가 부처이므로 부처의 성품은 모두 절대 평등한데, 그런 줄 잘 모르고, 범부의 감정으로 성인의 견해(생각)를 망령되이 내기 때문이오. 그래서 최고의 무위(無爲) 이익을 가지고도, 그저 보통의 유위(有爲) 공덕밖에 못 이루는 것이오. 하물며 명성이나 여색·재물에 미련을 두고 탐착하는 자들이야 말할 게 있겠소?
염불이 순수하게 일심으로 집중되지 않을 때는, 반드시 마음을 밖으로 치닫지 못하도록 통제해야 하오. 그렇게 오래 지속하면, 저절로 순수하게 일념이 될 것이오. 한 덩어리가 된다[成片]는 말도, 잡념 망상이 끼어들지 않고 순수하게 일념이 되는 것을 일컫소.
처음 염불에 마음을 둔 뒤 아직 삼매를 몸소 증득하지 못한 동안에는, 누구라도 잡념 망상이 없을 수 없다오. 오직 마음이 항상 깨어 비춰 보면서, 잡념 망상에 따라 돌지(흔들리지) 않는 것이 귀중하오. 비유하자면, 양쪽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자기의 성곽을 견고히 지켜 적군이 조금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고, 만약 적군이 공격해 오면 용감히 맞아 싸워 물리치는 전쟁과 비슷하오.
반드시 정각(正覺)의 병사로 사방을 모두 에워싸고 지켜, 적들(잡념 망상)이 하늘 위로 올라갈 길도 없고, 땅 속으로 들어갈 문도 없도록, 빈틈없이 막아야 하오. 그러면 그들은 씨조차 소멸하는 참패를 당할까 스스로 두려워하여, 서로 앞다투어 투항해 올 것이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 자세는, 주전(主戰) 장수가 혼미하지도 않고 나태하지도 않으면서, 항상 또렷또렷 깨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오. 장수가 혼미하거나 나태하면, 적군을 섬멸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적군에게 참패당하게 되오.
마찬가지로 염불 수행하는 사람이 마음을 추스를(잡도리할) 줄 모르면, 염불을 할수록 잡념 망상이 더욱 치성하게 일어나게 되오. 그러나 마음만 추스를(다잡을) 수 있으면, 잡념 망상이 점점 가벼워져, 마침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오. 그래서 이러한 게송(시구)도 전해오고 있소.
도를 배움은 왕궁의 성곽을 지키는 것 같아, 學道猶如守禁城
낮에는 여섯 감각의 도적을 막고 밤에도 또렷또렷 지키네. 晝防六賊夜惺惺
군대를 거느리는 주전 장수가 군령을 제대로 시행하면, 將軍主帥能行令
방패와 창칼을 움직이지 않고 태평세월을 이루리. 不動干戈定太平
염불할 때 마음이 통일되지 않는 것은, 생사에 대한 마음이 절실하지 않기 때문이오. 만약 자신이 지금 당장 홍수에 휩쓸리거나 불길에 타오르는데, 구원해 주는 사람 하나 없다고 생각해 보시오. 그리고 그렇게 곧 죽게 되어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생각해 보시오. 그러면 달리 미묘한 방법을 구할 필요도 없이, 마음이 저절로 집중 통일될 것이오.
그래서 경전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여 보리심을 내라[思地獄苦, 發菩提心.].”는 말씀이 거듭 나온다오. 이는 크게 깨달으신 세존께서 가장 간절하고 요긴하게 일깨워 주신 가르침인데도,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그렇게 진실하게 생각하려 들지 않는구려.
지옥의 고통은 홍수에 휩쓸리거나 불길이 타오르는 것에 비하여, 무량무수 배나 더 참혹하오. 그런데 홍수에 휩쓸리거나 불길에 타오르는 걸 생각하면 머리카락이 쭈뼛이 설 정도로 두려우면서도, 지옥을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소? 지옥은 우리의 마음 힘[心力]이 워낙 작아서, 그 고통의 일들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없소. 반면 홍수와 화재는 우리가 몸소 보고 들은 체험이 있어, 생각만 해도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머리카락과 뼛속까지 서늘해지는 거라오.
염불은 그 자체가 정기(正氣)를 함양하고 정신을 조절하는 방법이자, 본래 진면목을 참구하는 법문이기도 하오. 왜 그렇게 말하겠소? 우리들 마음은 평상시에 어지럽게 흩어지는데, 만약 지성으로 염불을 하면, 일체의 잡념 망상이 모두 점차 사라지게 되오. 그러면 마음이 저절로 집중 통일되고, 정신과 원기가 자연히 충만해지고 조절된다오.
보통 우리는 염불이 잡념 망상을 쓰러뜨리는 줄 잘 모르오. 게다가 염불을 좀 해보면, 마음속에 온갖 잡념 망상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오. 그러나 오래도록 염불을 지속하면, 이러한 잡념 망상이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오. 맨 처음 단계에 잡념 망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마음속에 파묻혀 숨어 있던 잡념 망상이 바로 염불하는 힘 때문에 비로소 고개를 쳐드는 거라오. 염불하지 않으면 나타날 리가 없다오.
비유하자면, 방 안에 티끌이 전혀 없이 청정한 것처럼 보이다가도, 창 틈새로 한 줄기 햇살이 비쳐 들면, 얼마나 되는지 알 수조차 없는 수많은 먼지가 어지러이 움직이는 모습이 금세 드러나는 것과 같소. 방 안의 티끌이 햇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듯이, 마음속의 잡념 망상도 염불(광명)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오. 만약 항상 염불한다면, 마음은 저절로 청정해지리다.
[ 여기 세 단락의 내용은 바로 참선(參禪)의 원리와 똑같다. 이는 염불과 참선이 본래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이치이다. 염불선(念佛禪)은 화두(話頭) 대신 ‘나무아미타불’을 들고 사념(思念)·참구(參究)하는 수행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공자(孔子)는 요순(堯舜) 성왕과 주공(周公)의 도를 흠모하여, 매 생각마다 잊지 않았다오. 그래서 국 그릇 속에서 요 임금을 보고, 담 벽에서 순 임금을 보았으며, 꿈속에서 주공을 보았다오. 이렇듯이 평소에 항상 기억하고 생각하는 이치가, 염불과 무엇이 다르겠소?
중생의 마음과 입이 번뇌와 미혹의 업장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거룩한 명호를 마음과 입으로 염송하여 정화시키라고 일러주신 것이오. 향에 물든 사람의 몸에서는 향기가 배어 나오듯이, 염불에 오래 물든 사람은 업장이 스러지고 지혜와 복덕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본래 갖추어진 불성이 저절로 드러난다오.
만약 잡념 망상이 머릿속에 꽉 차 있다면, 쉴 새 없이 불안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만 그대의 생각을 따를 것이오. 올바른 생각(正念)을 아직 진실하게 일깨우지 못했기 때문이오. 그런데 만약 올바른 생각이 진실하고 간절하면, 친구가 저절로 한 곳에 전념 집중하는 정념(正念)을 따를 것이오.
그래서 통제 조절이 법도에 알맞으면 포악한 도적들도 모두 어린애가 되고, 반대로 통제 조절이 법도에 어그러지면 비록 자기 손발이라도 원수가 된다고 말하오. 범부 중생의 경지에서 누군들 번뇌가 없겠소? 모름지기 평상시에 미리 예방 조치를 취해 두면, 사물의 경계나 인연에 부닥쳐서도, 번뇌 망상이 갑작스레 터져 나오지는 않을 것이오. 설령 터져 나와도, 즉각 정신을 차려 비춰 보기 때문에, 곧 사라지게 할 수 있소.
번뇌를 일으키는 경계와 인연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가운데 특히 심한 것으로 재물과 여색과 갑작스런 봉변[橫逆]을 들 수 있겠소. 의롭지 못한 재물은 그 해악이 독사보다 심한 줄만 안다면, 재물을 보고 구차하게 얻으려는 번뇌는 일지 않을 것이오. 또 남의 편리를 봐 주면, 궁극에 모두 자기 앞으로 되돌아온다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염두에 두시오. 그러면 곤궁하고 급박한 환난을 당하여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재물이 아까워 차마 돕지 못하는 번뇌도 별로 없을 것이오.
여색은 설령 꽃 같고 옥같이 미묘한 이를 대하더라도, 항상 자기 친 자매나 딸처럼 여기는 마음을 간직하면 되오. 설령 기생이나 창녀라도, 역시 그렇게 똑같이 여기며, 나아가 연민하는 마음과 제도하려는 마음을 품어야 하리다. 그러면 미색을 보고 욕정이 꿈틀거리는 번뇌가 없을 것이오.
또 부부 사이에는 서로가 귀한 손님처럼 공경하며, 아내는 서로 도와 조상의 핏줄을 이어주는 은인으로 여기고, 혹시라도 피차간에 쾌락을 즐기는 욕정의 도구로 생각하는 일은 없어야 하오. 그러면 욕정 때문에 몸을 망치거나, 아내가 애를 못 낳거나, 자식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번뇌(근심걱정)는 없겠소. 자녀는 어려서부터 잘 가르쳐야, 부모 마음을 거역하거나 집안 분위기를 파괴하는 우환이 생기지 않소.
갑작스런 봉변[橫逆]에 대해서는, 모름지기 연민하는 마음을 내어야 하오. 상대방의 무지몽매함을 불쌍히 여기고, 그와 따지거나 다투지 않는 것이오. 또 자기가 전생에 일찍이 그를 해치거나 괴롭힌 적이 있어, 지금 이 봉변을 당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묵은 빚을 갚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기뻐하는 마음[歡喜心]을 내어야 할 것이오. 그러면 뜻밖의 봉변을 당하여 보복하려는 번뇌가 저절로 스러질 것이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초보 근기를 염두에 둔 방책이오. 오래도록 수행해온 상근기의 선비[大士] 같으면, 나도 텅 비었음[我空]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끝없는 번뇌조차도 모두 대광명의 보물창고[大光明藏]로 변화시킬 것이오. 마치 칼날은 숫돌에 갈아 예리해지고, 금은 용광로에 제련하여 순수해지는 것과 똑같은 이치요. 연꽃이 진흙 수렁에서 자라 피어나기 때문에, 바야흐로 청정하고 조촐하게 빛나는 것 아니겠소?
군자의 배움은 자기를 위한다오. 매 순간 매 생각마다 자기를 두드려 가며, 스스로 살필 따름이오. 꿈속과 깨어 있을 때가 한결같은 경지는, 공부가 원만히 무르익은 사람이라야 가능하오. 그러나 깨어 있을 때 늘 자신을 잘 붙잡고 닦아가길 오래 지속하다 보면, 꿈속에서도 크게 허튼 짓 하는 현상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도에 대한 생각을 한층 가중시키면, 그만큼 속세에 대한 범부 감정이 한층 가벼워지기 마련이오.
[중국 속담에 “인간의 감정이 성글어질 때 도의 감정이 깊어진다[人情疏時道情深].”는 명언이 있다. 속세의 인간에게 따돌림 당하거나 멀어질 때, 진리에 대한 구도심(求道心)이 더욱 간절하고 치열해진다는 뜻이다.]
이는 필연적인 이치라오. 그래서 미혹을 아직 끊지 못한 사람은 모름지기 항상 노력해야 하오. 만약 한바탕 제멋대로 방종하면, 옛 병폐가 틀림없이 재발하게 되오. 보고 생각하는 미혹[見思惑] 두 가지를 모두 완전히 끊어버린 사람이라야, 비로소 자기 마음대로 날뛰어도 통제나 속박할 필요가 없게 된다오.
[공자가 “70세에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따라 행해도 법도를 벗어남이 없었다[七十從心所欲不踰矩)”고 술회한 경지일 것이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의 마음은,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소. 우리가 이것들이 병인 줄만 안다면, 그 세력이 치성해지기 어렵소. 비유하자면, 집안에 도적이 들었을 때, 집 주인이 그를 자기 식구로 잘못 알면, 온 집안의 보물과 귀중품을 깡그리 도둑맞게 되는 것과 비슷하오. 만약 그가 도적인 줄만 안다면, 잠시도 집안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밖으로 멀리 내쫓아, 재산도 잃지 않고 집안도 평안히 지킬 것이오.
그래서 고승대덕들도 “(번뇌의) 생각이 일어나는 것 자체는 두렵지 않으나, 다만 늦게 알아차리는 게 두렵다[不怕念起, 只怕覺遲.].”고 말씀하셨소. 탐욕·성냄·어리석음이 한 번 일어나는 순간 즉시로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다시 금세 사라지기 때문이오. 그러나 만약 탐욕·성냄·어리석음을 자기 집 주인으로 여긴다면, 마치 도적을 자기 자식으로 오인하여, 집안 재산과 보물을 모두 털리는 것과 같은 꼴이 된다오.
바깥 경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자신을 붙잡아 지키는 힘[操持力: 줏대]이 약하기 때문이오. 기쁘고 슬픈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즉시, 좋아하고 싫어하는 기색이 얼굴에 바로 나타나는 것이오. 붙잡아 지킨다[操持] 함은 곧 함양(涵養: 修養)을 일컫소. 올바른 생각[正念]이 무게가 있으면, 나머지 다른 것들은 모두 가볍게 되오. 그래서 진실한 수행인들은 티끌 속(세속)의 수고로움 가운데서 갈고 닦으며, 번뇌와 업습의 기운을 점점 소멸시켜 간다오. 이것이 바로 실재 공부(實在工夫)라오.
만약 자기 마음의 번뇌와 못된 버릇[習氣]을 마주해 다스리지 않고 내버려 두면, 외부의 수행이 좀 있다고 내면의 공부가 완전히 황폐해지기 쉽소. 그래서 도리어 아만심(我慢心)이 생겨나고, 조그만 공리(功利)를 대단한 덕으로 여겨, 손해가 막심해지오.
비유하자면, 밥을 먹을 때는 모름지기 채소로 반찬을 삼아 함께 들고, 또 우리 신체는 반드시 옷을 단정히 입어 장엄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과 같소. 어찌 생사를 해탈하려고 수행하는 기나긴 여정에서, 단지 한 문 안에만 깊숙이 들어가려고, 나머지 문을 모두 닫아버린단 말이오?
한 문 안에 깊숙이 들어가 나머지 문을 모두 닫아버리는 것은, 오직 일 주일이나 수 주일 시한부 출가수행(기도결제 등)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오. 평상시에 계속 그렇게 하는 수행은, 보살이 다시 온 경우가 아니면, 금방 해이해지거나 게을러지지 않을 수가 없소. 범부 중생의 마음은, 항상 계속하면 곧 싫증을 내기 때문이오.
하늘이 만물을 낳아 기름에는, 반드시 햇볕(온도)과 눈․비(습기)를 적당히 조절하고, 추위와 더위를 번갈아 내려 줌으로써, 자연의 오묘한 조화(造化)를 현실로 나톨 수 있소. 가령 늘 비만 내리거나 늘 맑기만 하거나, 늘 덥거나 늘 춥다면, 하늘 아래 어떤 생물이 목숨을 지탱할 수 있겠소?
하물며 마음이 원숭이처럼 변덕스러운 우리가, 온갖 방법으로 자신의 번뇌와 버릇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어느 한 곳에 안주하려 든단 말이오? 그러면 그 마음이 제멋대로 바깥으로 내달리지 않기가 정말 매우 어려울 것이오.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의 능력을 스스로 헤아려서, 어느 한 방법에만 편협하게 집착하지 말아야 하오. 그렇다고 원칙과 질서도 없이 뒤죽박죽이 되는 일은 없도록 조심해야 하오.
바깥으로만 치닫고, 마음의 빛을 되돌이켜 자신을 비춰 보지 않으면, 부처님 가르침을 배워도 진실한 이익을 얻기가 몹시 어렵소. 맹자도 일찍이 “학문의 도는 다름이 아니라, 바깥으로 흩어진 마음을 되찾는 것일 따름이다[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라고 말했소. 그런데 우리가 불교를 배우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염불할 줄 모른다면, 이는 유교의 가르침에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셈이 되거늘, 하물며 진실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법을 전하신 부처님 가르침에 합당하겠소?
관세음보살은 자기 성품을 되돌이켜 듣고, 대세지보살은 육근을 모두 추슬러 깨끗한 생각이 계속 이어지게 하였소. 또 『금강경』에서는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며, 빛깔·소리·냄새·맛·감촉·생각 등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나 기타 온갖 수행을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소. 『반야심경』에서는 오온이 모두 텅 비었음을 비추어 보았다오. 이 모든 말씀이 우리에게 바깥 경계에 부딪쳐 마음을 인식하도록 가르쳐 주는 미묘한 법문이오. 만약 줄곧 계속해서 오로지 널리 보려고[博覽]만 한다면,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업장이 다 소멸하지 않아, 그 이익을 얻지는 못한 채, 먼저 그 병폐만 입을 것이오.
색욕(色欲) 한 가지는, 온 세상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질병이오. 단지 중하 근기의 중생만 여색에 미혹하는 것이 아니오. 상근기의 사람들도, 만약 스스로 전전긍긍하며 행실을 조심하지 않으면, 역시 미혹하지 않기가 어렵소. 예로부터 얼마나 많은 뛰어난 영웅호걸들이, 정말 성현이 되기에 충분한 천부 자질을 지니고서도, 단지 이 여색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여, 도리어 어리석은 범부로 전락하고, 결국 삼악도에 길이 떨어졌는지도 모르오.
그래서 『능엄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만약 모든 세계의 육도 중생이, 그 마음만 음란하지 않다면, 생사윤회를 계속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삼매를 닦는 것은, 본디 세속 티끌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함인데, 음란한 마음을 제거하지 않으면, 티끌은 벗어날 수 없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본디 생사고해를 벗어나기 위해 수행하오. 그런데 여색의 병폐를 통절히 제거하지 않으면, 생사윤회는 결코 벗어나기 어렵소. 염불 법문이 비록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왕생한다고 하지만, 만약 음란의 업습이 단단히 맺혀 있으면, 부처님과 가로막혀 감응의 길이 확 트이기 어렵다오.
이러한 화근을 끊어버리고자 한다면, 일체의 여인을 모두 친족 생각[親想]과 원수 생각[怨想]과 더러운 생각[不淨想]으로 대하는 것이 으뜸이오. 친족 생각은, 나이 든 여인을 보면 어머니로 생각하고, 손위 여자는 누나로 생각하며, 손아래 여자는 여동생으로 생각하고, 소녀는 딸로 생각하는 것이오. 설령 욕심의 불길이 치성하더라도, 어머니나 누이나 딸에게까지 올바르지 못한 생각을 감히 품지는 못할 것 아니오? 모든 여인을 이렇게만 본다면, 욕정이 이치(윤리)에 통제되어 발작할 수 없을 것이오.
원수 생각은, 미녀를 보고 사랑의 마음을 일으키면, 그 사랑의 마음 때문에 삼악도에 떨어져 오랜 겁토록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을 받을 터이니, 아름답고 애교스러운 여인은 도적이나 호랑이·이리·독사 같은 맹수나 비상(砒霜)·짐독(鴆毒) 같은 독약보다 백천 배 이상 훨씬 참혹하다고 인식하는 것이오. 이토록 지극히 무서운 원수에 대해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집착하는 자는, 어찌 곱절 이상 미혹한 중생이 아니겠소?
더러운 생각은, 미모로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단지 맨 바깥 한 켠 얇은 피부일 따름이며, 이 표피를 벗겨 버리면 차마 볼 수조차 없다는 것이오. 피와 살·고름·뼈·똥오줌이 비린내 풍기며 흥건히 낭자하여, 귀엽거나 사랑스런 감정을 일으킬 물건이 하나도 없소. 단지 얇은 피부에 싸여 허망한 애착과 연모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오.(그래서 중국에서는 사람 몸을 ‘취피낭(臭皮囊)’으로 부른다.)
화려한 꽃병에 똥을 가득 담아 놓으면, 이것을 가지고 놀 사람은 하나도 없소. 그런데 지금 여기 미인의 얇은 피부는 바로 화려한 꽃병과 다름없고, 피부 안에 감싸인 물건들은 똥에 비해 훨씬 더 더럽고 지저분하오. 어찌 그러한 바깥 피부를 애착하여, 그 피부 안에 담긴 온갖 더러운 물건들을 까마득히 잊고, 허망한 생각을 제멋대로 일으킨단 말이오?
진실로 정신 바짝 차리고 전전긍긍하여 이 업습을 통절히 제거하지 않는다면, 여자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애정의 화살이 뼈 속에 날아와 박혀도, 스스로 빼낼 수 없을 것이오. 평소에 이러하다면, 죽은 뒤 여자의 뱃속[胎]에 다시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오. 사람인 여자 뱃속에 들어가면, 그래도 괜찮겠소. 하지만 짐승의 암컷 뱃속에 들어가게 되면, 장차 어찌할꼬? 여기까지 한번 생각하게 되면, 마음과 정신이 놀라움과 두려움에 움찔할 게오.
그렇지만 미색의 모습을 실제 보고도 혹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거든, 미색을 보기 전에 평소부터 항상 위에 든 세 가지 생각을 해 두어야 하오. 그래야 미색을 직접 보고도, 거기에 마음이 따라 흔들리지 않을 수 있소. 그렇지 않으면, 설령 미색을 보지 않아도, 머릿속 생각에서부터 벌써 혹한 마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끝내는 음욕의 업습에 사로잡히기 쉽소. 정말로 성실하고 진지하게 악업의 버릇을 씻어내 버려야, 바야흐로 자유를 누릴 수 있다오.
흔히들 세속 잡무에 뒤얽혀 벗어날 도리가 없다고 말하오. 바로 잡무가 뒤얽혀 있을 때 거기에 따라 움직이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 얽힘은 저절로 벗어나게 된다오. 마치 거울이 사물의 모습을 비출 때, 모습이 와도 막지 아니하고, 모습이 떠나도 붙잡지 아니하는 것과 같소. 이러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설령 세속 잡무를 완전히 떠나버려 한 가지 일도 없게 될지라도, 여전히 마음이 산만하고 잡념 망상에 단단히 뒤얽혀 벗어나지 못한다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평소 처지에서 수행하며 본분을 다해야 하오. 그러면 온 종일 세속 잡무에 뒤얽혀 있어도, 온 종일 만물 바깥에 유유자적 노닐게 되오. 보통 “한 마음 머묾이 없으면 온갖 경계가 모두 한가롭고, 육진이 악하지 않으면 올바른 깨달음과 같게 된다[一心無住, 萬境俱閒, 六塵不惡, 還同正覺.].”고 말하는데, 바로 이러한 뜻이라오.
미혹한 마음이 사물의 경계를 좇아 바깥으로 치달리기 때문에, 온전한 지혜와 복덕의 형상이 곧 망상과 집착으로 변해 버린다오. 그래서 정말로 오직 정성과 일념으로 아미타불 성호를 붙잡아 지니면서,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서방 극락왕생을 꾀해야 하오. 명호를 오래도록 지송하다 보면, 마음과 부처가 하나로 되고, 바로 그 한 염두를 떠나지 않고서도, 오온이 텅 비어 있음을 철저히 깨우칠 수 있소.
망상과 집착이 사라지면 지혜와 복덕의 형상도 스러지고, 마음이 청정해짐에 따라 불국토도 청정해진다오. 자신이 존재하는 바로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서도, 고요한 광명[寂光]에 그윽이 부합하게 되오. 오직 이 한 자리만이 우리들이 궁극에 몸을 평안히 두고 운명을 세울[安身立命] 수 있는 곳이라오.
우리 인생은 허깨비처럼 세간에 고작 수십 년 머물 따름이오. 분별 지식을 알게 된 이후로 밤낮 쉬지 않고 바쁘게 경영하고 도모하는 일들은, 모두 자신과 집안의 체면을 세우거나 자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것이오. 병폐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단지 나[我]가 있다고 집착하여 놓으려고 하지 않는 데에 있소. 그 생각의 뿌리가 너무도 깊숙하고 단단히 박혀 있어, 비록 부처님이 몸소 설법해 주어도 풀어질 수가 없을 정도라오. 그러면서도 자기의 주인공인 본래 진면목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이 내팽개치기 보통이오. 그래서 업장에 따라 영겁토록 들락날락 윤회하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수행의 요체는 번뇌와 업습(業習)을 다스려 나가는 데 있소. 업습이 한 푼 적어지는 만큼, 공부가 한 푼 진보하는 것이오. 수행에 더욱 힘쓸수록 업습이 더욱 드러나는 까닭은, 단지 구체적인 일들의 모습에 따라서만 수행할 줄 알았지, 지혜의 빛을 안으로 되돌이켜 비추어 자기 마음속의 허망한 감정을 이겨내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오.
평상시에 미리 막을 준비를 해두면, 바깥 경계와 인연을 만날 때, 업습이 더 이상 재발하지 않을 수 있소. 가령 평소에 나의 이 몸과 마음은 완전히 허망한 것이어서, 나라는 실체와 실성(實性)은 전혀 찾을 수 없음을 인식해 둔다고 합시다. ‘나’가 있지 아니한데, 어떻게 바깥 경계나 다른 사람들로 말미암아 번뇌가 생길 수 있겠소? 이것이 바로 가장 절실하고 요긴한 근본상의 해결 방법이라오.
만약 ‘나’가 텅 비었음을 확연히 깨달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여래께서 설하신 ‘다섯 가지 (헐떡이는) 마음(미혹, 번뇌업장)을 멈추는 관찰법[五停心觀]’에 따라 다스려야 할 것이오. 마음이 바깥 경계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평안히 머물 수 있도록 다스리는 법문이오.
탐욕이 많은 중생은 부정관(不淨觀)을 수행하고, 성냄이 많은 중생은 자비관(慈悲觀)을 수행하며, 마음이 자주 산만해지는 중생은 수식관(數息觀)을 수행하고, 어리석은 중생은 인연관(因緣觀)을 수행하며, 업장이 두터운 중생은 염불관(念佛觀)을 수행하는 것이오.
탐욕이란, 사물을 보고 마음에 사랑과 즐거움이 일어나는 것을 일컫소. 욕계(欲界)의 중생은 모두 음욕으로부터 생겨나는데, 음욕은 사랑에서 생기오. 만약 자기 몸과 남의 몸을 바깥부터 안으로 하나하나 자세히 관찰한다면, 더러운 땀․침․터럭․손톱․뼈․살․피․고름․똥․오줌 따위로 가득 차, 비린내는 시체나 다름없고, 더러움은 측간과 같음을 보게 될 것이오. 누가 이런 물건에 탐욕과 애착을 내겠소? 탐욕과 애착이 식어버린다면, 마음 바탕이 청정해질 것이오. 그렇게 청정해진 마음으로 부처님 명호를 염송하면, 마치 맑은 물에 다섯 가지 맛을 풀어 간을 맞추고, 흰 바탕에 오색 물감을 칠해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아진다오. 원인 자리[因地]의 마음으로 과보 자리[果地]의 깨달음에 들어 맞추게 되니, 힘은 절반밖에 안 들어도 공덕은 배가 되어, 그 이익이 헤아릴 수 없이 크오.
성냄[瞋]이란, 바깥 경계를 보고 마음에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생각이 불끈 일어나는 것을 일컫소. 부귀(富貴)한 사람들이 자주 성내기 쉬운데, 만사가 뜻대로 순조롭고, 아래에 부릴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오. 조금이라도 자기 비위에 거슬리면, 가볍게는 폭언과 욕설을 퍼붓고, 심하게는 채찍이나 매질을 해대기 일쑤요. 오직 자기 기분만 시원하길 바라고, 남의 마음이 얼마나 상할지는 전혀 돌아보지도 않기 때문에, 화를 버럭 내는 것이오.
마음에 성화가 한번 치밀면, 상대방에게 무익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큰 손해가 있게 되오. 성냄이 가벼우면 마음과 뜻이 번잡하고 조급해지며, 분노가 크게 치솟으면 간과 눈이 바로 상하게 되오. 모름지기 마음속에 항상 한 덩어리 큰 온화한 원기(元氣)를 간직하여야만, 질병이 소멸하고 복록과 수명이 늘어나게 된다오.
옛날에 아기달왕(阿耆達王)은 한평생 부처님을 모시면서, 오계를 철저히 지켰소. 그런데 임종에 시중드는 신하가 부채를 가지고 파리를 쫓다가, 피곤하여 깜박 조는 순간 부채를 왕의 얼굴에 떨어뜨려, 왕이 마음에 분노와 원한을 일으키며 숨을 거두었다오. 바로 이러한 일념 때문에 왕은 구렁이 몸을 받았는데, 다행히 숙세의 복력(福力) 덕분에 그 원인을 알아차리고, 사문(沙門: 출가 수행자)에게 삼귀의와 수계를 설법해 달라고 청해, 곧장 구렁이 몸을 벗어버리고 천상에 생겨났다오. 이 사례만 보아도, 성냄의 업습이 가장 큰 해독이 됨을 알 수 있소.
그래서 『화엄경』은, “한 생각 성내는 마음 일어나면, 백만 가지 업장의 문이 활짝 열린다[一念瞋心起, 百萬障門開.].”고 설하고 있소. 또 고승 대덕은 이런 게송도 남겼소.
성냄은 마음속의 불길로 瞋是心中火
공덕의 수풀을 불살라 버리네. 能燒功德林
보살의 도를 배우고 싶거든 欲學菩薩道
인욕으로 성내는 마음을 지켜라. 忍辱護瞋心
여래께서 곧잘 성내는 중생에게 자비관을 닦으라고 가르치신 것은, 일체의 중생이 모두 과거의 부모이자 미래의 부처님들이기 때문이오. 과거의 부모님이라면, 전생에 낳아 길러주신 은덕을 생각하고, 이를 다 갚을 수 없음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오. 그런데 어찌 조금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하여, 버럭 성을 낸단 말이오? 설사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기쁜 마음만 내고, 분노나 원한은 품지도 말아야 하오.
그래서 보살은 머리·눈·골수·뇌 따위를 내어 줄 때에, 그걸 요구하는 사람이 자기의 더할 나위 없는 보리도(菩提道)를 성취시켜 주는 선지식이나 은인이라고 생각한다오. 『화엄경』의 「십회향품」을 보면 저절로 알 것이오. 또 우리의 일념 심성은 본디 부처와 다르지 않소. 단지 본래 심성을 등지고 잃어버린 채, ‘나’라는 선입견[我見]을 견고히 집착하고 있소. 때문에 일체 인연이 모두 자기와 대립하게 되오. 마치 활 과녁이 우뚝 서면, 모든 화살이 일제히 그를 향해 날아와 박히는 것과 비슷하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자기 마음이 원래 부처님 마음이고, 부처님 마음은 텅 비어서 아무 것도 없음을 알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마치 허공이 우주 삼라만상을 모두 감싸고, 큰 바다가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소. 또 하늘이 만물을 두루 덮고, 땅이 만물을 고르게 떠받치면서도, 덮고 떠받치는 것을 자기 공덕이라고 여기지 않음을 보시오.
내가 만약 조금 뜻에 거슬리는 일이 있다고 곧 성을 낸다면, 스스로 자기 도량(度量)을 협소하게 좁히고 덕을 상실하는 짓이 아니겠소? 비록 부처님 마음과 진리의 본체는 갖추었을지라도, 생각을 움직이고 마음을 쓰는 것은, 완전히 범부 중생의 감정투성이가 되오. 이는 망상을 진짜로 오인하고, 노예를 주인으로 삼는 격이 되오.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정말 몹시 부끄럽고 창피할 것이오. 평상시 늘 이런 생각을 한다면, 마음의 도량이 크고 넓어져, 포용하지 못할 게 없소. 사물과 나를 똑같이 보고, 피차간을 서로 구분하지 않는 거요. 비위에 몹시 거슬리는 일이 닥쳐오더라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거늘, 하물며 조금 뜻대로 안 된다고 금방 화를 버럭 내겠소?
어리석음[愚癡]은 지식이 전혀 없음을 뜻하지는 않소. 불교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이란, 세상 사람들이 선악의 경계와 인연에 대하여, 그것들이 모두 과거 숙세의 업장과 현생의 행위로 말미암는 감응인 줄을 모르고, 세상에 인과응보나 전생과 내생 따위는 전혀 없다고 함부로 망발하는 것을 가리키오.
일체의 중생은 지혜의 눈이 없어서, 단멸(斷滅)에 집착하지 않으면, 곧 항상(恒常)에 집착하기 십상이오. 단멸에 집착하는 자들은, 사람이 부모의 피와 기운을 받아 생겨나며, 생겨나기 이전에 본래 어떤 물건도 있지 않았고, 죽고 난 뒤에는 육신이 썩어 문드러지고 영혼은 바람에 나부껴 흩어지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말하오. 그러니 무슨 전생이나 내생 따위가 있겠소. 동방의 고지식하고 편협한 유생들이 대부분 이런 주장을 해 왔소.
항상에 집착하는 이들은, 사람이 항상 사람이 되고, 축생은 항상 축생이 된다고 생각하오. 업장이 마음으로 지어지고, 그렇게 지어진 마음의 업장에 따라, 육신의 형체가 바뀌게 되는 줄은 모르는 게오. 옛날에 지극히 독살스런 사람은 현생의 몸이 바로 뱀으로 변하고, 지극히 포악스런 사람은 현세의 몸이 호랑이로 변한 사례도 있소. 업력이 너무도 맹렬하게 크면, 당장 그 형체까지 뒤바뀌게 할 수 있거늘, 하물며 사후에 혼식(魂識)이 업장에 끌려 형체를 바꾸지 못하겠소?
그래서 부처님께서 12인연을 설하신 것은, 전생·현생·내생의 삼세(三世)를 관통하는 지론이라오. 전생의 원인은 반드시 후생의 결과를 불러오고, 후생의 결과는 반드시 전생의 인연에 바탕하는 것이오. 선악의 보답으로 화복(禍福)이 닥쳐오는 것은 모두 자업자득(自業自得)일 따름이며, 결코 하늘에서 불쑥 떨어지는 것이 아니오. 하늘은 단지 중생의 행위에 따라서 인과응보를 주재(主宰)할 따름이오.
생사의 순환은 끝이 없소. 본래 심성을 회복하여 생사를 끝마치려면,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여 서방정토 왕생을 구하지 않으면, 달리 길이 없소. 요컨대, 탐욕·성냄·어리석음의 세 가지는 생사의 근본 원인이고, 믿음·발원·염불 수행의 세 가지는 생사를 끝마치는 미묘한 법문이오. 앞의 세 독소를 내버리려면, 뒤의 세 요소를 닦아야 하오. 믿음·발원·염불 수행[信願行] 삼요소가 힘을 얻으면, 탐욕·성냄·어리석음[貪瞋癡]의 삼독이 저절로 소멸하기 때문이오.
호흡을 세는 수식관(數息觀)은 꼭 쓸 필요는 없소. 염불할 때에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으면 충분하오. 그때 마음을 추슬러 집중함은 수식관과 서로 비슷하지만, 그 효력과 작용은 수식관과 천양지차가 날 정도로 뛰어나기 때문이오.
혹자는, 앞에서 내가 설사 목숨을 잃더라도 단지 기뻐할 따름이며 성내지 말라고 한 말에 대해서, 강한 의혹을 일으킬 것이오. 가령 악인이 와서 자기를 해치려고 하는데도, 그와 따지거나 다투지 않고, 그가 자기를 죽이라고 내맡겨 둘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오.
수행인 중에는 범부 중생도 있고, 이미 법신(法身)을 증득한 보살도 있소. 또 세간의 도를 유지하려고 치중하는 이도 있고, 오직 자기 마음 하나 철저히 터득하는 데에 치중하는 이도 있소. 만약 오직 자기 마음만 철저히 터득하려 하거나, 이미 법신을 증득한 보살 같으면, 위에서 말한 원칙대로 하면 되오. 사물과 나를 똑같이 보고, 생사를 하나로 여기기 때문이오.
그러나 만약 일반 범부 중생이나, 세간의 도를 유지하는 데 치중하는 이들은 좀 다르오. 마음은 정말로 보살의 대자대비와 같이 포용하지 않음이 없도록 지녀야 하지만, 실제 일을 처리함에는 모름지기 세간의 통상 이치에 따라야 하오. 더러는 방어나 반격으로 그를 물리치거나 제압하고, 더러는 인자하게 대해 그를 감화시키거나 심복(心服)시킬 수도 있소.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소. 다만 어떤 경우에도, 마음에 독기나 성화를 품고 원한을 맺어서는 절대로 안 되오.
앞에서 언급한 말은, 사람들이 이러한 가상(假想)을 통해, 성내는 업습 기운을 소멸시켜 가라는 원칙이라오. 이러한 가상의 관찰법이 익숙해지면, 성내는 업습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오. 설령 실제로 자신을 해치는 상황이 닥치더라도, 정말 허심탄회하고 자연스럽게 큰 보시를 한다고 생각하며, 그 공덕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기원할 것이오. 서로 죽이고 해침으로써, 오랜 겁토록 번갈아 보복하고 빚 갚는 악순환에 비하면, 어찌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니겠소?
성내는 마음은 숙세의 습성이오. 지금 나는 이미 죽고 없으며, 상대방이 칼로 찌르거나 향을 바르거나,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완전히 내맡겨 버리시오. 마음에 맞지 않는 모든 경우에 대해서, 이처럼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분노가 일어날 수 없소.
성내는 마음이 백해무익한 줄 안다면, 어떠한 일이 눈앞에 닥치더라도, 하늘처럼 텅 비고 바다처럼 넓은 아량으로 모두 감싸고 받아들여야 하오. 그러면 현재의 관대한 습성이, 숙세의 편협한 습성을 조금씩 돌려 바꾸게 된다오. 성내는 습성을 정면에서 다스리지 않으면, 더욱 기승을 부려, 그로 말미암은 해악이 결코 작지 않을 것이오.
염불인즉, 반드시 자신의 정신과 기력에 알맞게 조절하여, 더러는 큰 소리나 작은 소리로, 더러는 소리 없는 묵송이나 소리는 있되 다른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는 금강념(金剛念)으로 염송하는 원칙을 세우면 되겠소. 지나치게 맹렬히 염송하여 도리어 병을 얻으면 안 되오. 지나치게 맹렬한 마음 자체도 욕심이 성급한 병이라오.
지금 소리를 내어 염불할 수 없다면, 마음속으로 묵송할 수는 있지 않겠소? 하물며 질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가, 어떻게 마음속을 깨끗이 씻어버린 듯, 아무 생각도 전혀 없이 텅 비울 수 있겠소? 다른 복잡한 일을 생각하느니, 차라리 부처님 명호를 생각(염송)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소? 이런 환자는 마땅히 긴요한 사무를 집안 식구들에게 부탁한 뒤, 장기간 마음속에 어떤 일도 걸어 두지 않은 채, 곧 자신이 죽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게 좋소.
이러한 청정한 마음 가운데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그려 보고 생각하며, 아울러 부처님 명호와 관세음보살 명호를 함께 염송해 보시오. 정말 이렇게만 한다면, 틀림없이 업장이 녹고 선근이 쑥쑥 자라나, 질병이 깨끗이 낫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리다.
더러 염불을 너무 지나치게 맹렬히 하여 불현듯 나타나는 듯한 질병도, 실제는 숙세 업장의 과보인 경우가 대부분이오. 맹렬한 염불이 외형상의 인연이 되긴 하지만, 이런 사람은 설사 염불을 맹렬히 하지 않더라도, 또 다른 인연으로 질병을 얻기 마련이오. 세상에 염불하지 않는 자들이 허다하게 많은데, 어찌 그들 모두가 병 하나 얻지 않고 건강하게 장수한단 말이오? 이러한 이치를 생각한다면, 염불 때문에 도리어 질병을 얻었다는 오해 따위는 백해무익함이 자명해지오.
질병과 악마는 모두 숙세의 업장으로부터 비롯하오. 그대가 단지 지성으로 간절하게 염불하기만 한다면, 질병이 저절로 낫고, 악마가 자연히 멀어질 것이오. 만약 마음이 지성스럽지 못하고, 더러 사음 따위의 바르지 못한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대의 마음 전체가 타락하여, 암흑 가운데서 마귀가 꿈틀거리고 소란을 피우게 된다오.
이런 경우에는, 염불을 마치고 회향할 때에 숙세에 원한 진 모든 사람들에게 회향하여, 그들이 그대의 염불 공덕을 입어 좋은 곳으로 건너가도록 천도(薦度)하는 염원을 내시오.. 그밖에는 일체 상관하지 마시오. 그들이 소리를 내어도 신경을 쓰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소리가 없어도 신경 쓰거나 기뻐하지 마시오. 오직 지성으로 간절히 염불하기만 하면, 저절로 업장이 녹고, 복과 지혜가 함께 증대한다오.
경전을 볼 때에, 요즘 사람들이 책 읽듯이 전혀 공경스럽지 못한 자세를 취하면 절대로 안 되오. 모름지기 부처님이나 조사·성현들께서 친히 강림하신 것처럼 공경을 다해야, 비로소 진실한 이익이 있게 되오. 정말로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마음 바탕이 광명정대(光明正大)하여, 사악한 귀신들이 얼씬거리거나 끼어들 여지조차 없을 것이오. 그렇지만 만약 먼저 사악한 마음을 품으면, 사악으로 더 큰 외부의 사악을 불러들이게 되오. 그러면서 어떻게 사악한 귀신들이 소란을 못 피우고 멀리 떠나가길 바라겠소?
타심통(他心通)으로 보면, 귀신이 작지만 가깝게 존재한다오. 업장이 다 사라지고 감정이 텅 비게 되면, 마치 보물 거울을 갖다 들이댄 것처럼, 귀신의 형상이 그대로 비추어 나타나오. 그런데 지심으로 염불하지는 않고, 귀신의 진상을 연구하려 든다면, 이 마음이 곧 악마 귀신의 종자가 될지도 모르오.
비유하자면, 보물 거울에 터럭 끝만큼의 티끌도 끼지 않으면, 저절로 천지 만물을 비추게 되는 것과 같소. 그대 마음이 티끌과 때로 아주 두텁게 뒤덮여 단단히 막혀 버렸는데, 타심통을 얻으려 한단 말이오? 이는 먼지 자욱이 낀 거울이 결코 빛을 발할 수 없는 것과 같소. 더러 빛을 발하더라도, 그것은 요귀의 빛이지, 결코 거울 자체의 빛은 아니라오. 이런 문제는 우리와 상관없는 일로 밀쳐 두고, 오직 물불 속에 빠진 듯, 또는 머리에 불이 붙은 듯한 다급한 심정으로, 간절히 염불만 하면 되오. 그러면 녹아 사라지지 않을 업장과 마귀가 결코 없을 것이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온갖 뜻하지 않은 일을 당할 때마다, 오직 도를 향해 진보하는 인연으로 이해하여, 마음에 거슬리더라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오. 그러면 설령 위험한 일을 당하더라도, 당시에 놀라 나자빠지거나 정신을 잃고 방황하지는 않을 것이오. 또 일이 다 지나고 나면, 감정도 함께 흘러가서, 마치 간밤에 꿈을 꾼 듯 아득할 것이오. 어찌 항상 마음에 걸려 끙끙 병을 앓기까지 하겠소?
그대가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일체의 외부 경계와 인연이, 모두 숙세의 업장으로 말미암는 현상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오. 또한 지성으로 염불하면 그 업장을 되돌릴 수 있음도 알아야 하오. 우리가 천리(天理)를 해치고 도덕을 파괴하는 일만 하지 않는다면, 무슨 물건이 두렵겠소? 염불하는 사람은 착한 신명이 보호하고, 사악한 마귀가 멀리 달아나거늘, 어떤 물건을 두려워하겠소?
그대가 만약 늘 두려워한다면, 이는 두려움의 마귀에 사로잡힌 것이오. 한량없는 겁부터 내려온 원수들이, 그대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빌미로 달려들어, 그대를 겁주고 윽박지르는 거라오. 그대가 정신을 잃고 미쳐 날뛰게 만들어, 숙세의 원한을 앙갚음하는 거라오.
내가 그래도 염불하는데, 설마 저들이 이렇게까지 하겠느냐는 생각일랑 하지 마시오. 그대의 올바른 생각[正念] 전체가 두려움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그 기운이 부처님과는 서로 막히고, 마귀와 서로 통하게 되기 때문이오. 부처님이 영험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대의 마음이 이미 올바른 생각을 잃어, 염불 자체가 온전한 이익을 얻지 못하는 것뿐이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보고, 지금까지 품었던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내기 바라오. 단지 일부일처(一夫一妻)라면, 내가 무슨 염려가 있겠소? 가령 숙세의 업장이 눈앞에 나타날 때, 그를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그를 소멸시킬 수 있겠소? 오직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올바른 생각을 견지하고 적당한 조치를 취하여, 사악한 마귀가 침범하지 못하고, 진리의 신명이 제 자리를 잡도록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사악으로 사악을 불러들여, 숙세의 원한이 한꺼번에 몰려들게 되오. 그러면 매사에 주견(줏대) 없이 행동거지가 완전히 흐트러지고 말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이제 그대를 위해서라도 마땅히 회포를 활짝 열어젖히고, 어떠한 것도 따지고 염려하거나 근심 걱정하지 않아야 하오. 단지 자신의 행실에 오점이 있을까만 두려워하고, 재앙이나 환난이나 귀신 따위는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
만약 질병의 고통이 몹시 극렬하여 참을 수 없는 경우에는, 아침저녁으로 염불할 때 회향 기도하는 것과 별도로, 마음과 뜻을 오롯이 다 바쳐 ‘나무 관세음보살’을 염송하시오. 관세음보살은 사바 홍진에 몸을 나토어, 자기 부르는 소리를 찾아다니며 그 고통을 구제해 주시기 때문이오. 사람들이 위급한 때를 당해 관세음보살을 지송하며 예배드리면, 금방 감응이 나타나오. 관세음보살이 즉시 자비 가피를 내리시어, 고뇌를 벗어나 안락을 얻도록 인도하신다오.
세간의 훌륭한 의사도 단지 육신의 질병만 고칠 뿐, 업장은 치료할 수 없소. 어떤 사람이 창자 안에 종기가 생긴 중병에 걸렸는데, 의사는 진찰 후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오. 그런데 환자의 넷째 형수가 의사의 처방에 마음을 놓지 못하여 수술하지 않고, 가족 한 사람과 함께 죽어라고 염불하고 『금강경』 독송을 해댔소. 그 결과 지극히 중대하고 위험한 그 병이, 수술이나 투약도 없이 닷새 만에 씻은 듯이 깨끗이 나아버렸소.
이미 불법에 귀의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믿고 따를 일이지, 양의(洋醫)를 지나치게 믿고 따라서는 안 될 것이오. 모든 질병이 다 의약으로 치료해야 낫고, 의약 없이는 낫지 않는다고 한다면, 동서고금의 황제나 임금·귀족·부호들은 모두 영원히 병들지 않고, 또한 영원히 죽지도 않았어야 할 것이오.
그런데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질병도 적고 수명도 길며, 부유하고 존귀한 사람들은 도리어 병도 많고 수명도 짧은 경우가 많은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이겠소? 한편으로는 본인 스스로 병을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약이 병을 만드는 것이라오. 이 두 가지가 병을 더 만드는 부작용이 허다한데, 병고에서 벗어나길 바랄 수 있겠소?
그러므로 꼭 양의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굳이 모든 질병을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필요는 없소. 집안에서 위대하신 의왕(醫王)이신 관세음보살께 간구하면, 약을 쓸 필요도 없이 저절로 낫게 될 것이오. 양의의 치료를 받는 경우, 좋고 나쁨이 각각 절반 정도씩 되오. 하지만 대의왕이신 불보살님께 간구하면, 더러 육신상의 질병이 금방 낫거나, 설령 육신상 효과가 없더라도, 정신의식상으로는 틀림없이 좋아진다오. 만약 즉시 낫고자 하는 성급한 욕심과 망상으로, 지금까지 지켜온 계율과 수행을 완전히 내팽개친다면, 이는 생살을 짓이겨 종기를 만들고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처럼, 백해무익할 따름이오. 양의가 동방에 들어오기 전에는, 동방의 환자들이 누구도 병을 낫지 못했단 말이오? 정말로 부질없는 망상을 놓아버리고, 올바른 생각을 일으켜 세워야 할 것이오. 그러면 불보살님과 감응의 길이 확 트이면서, 질병이 저절로 깨끗이 나을 수 있소.
업장이 무겁고 탐욕과 성냄이 치성하며, 몸은 약하고 마음에 겁이 많은 사람은, 단지 일심으로 염불만 오래 꾸준히 지속하면, 모든 질병(결점)이 저절로 다 나을 수 있소.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도, 만약 어떤 중생이 음욕이나 성냄[瞋]·어리석음[愚癡]이 많을지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공경스럽게 염송하면, 곧 깨끗이 벗어날 수 있다고 설하였소. 염불(나무 아미타불의 염송) 또한 마찬가지오. 다만 마음과 힘을 다하되, 혹시라도 의심하거나 두 생각 품음만 없다면, 구하여 얻지 못할 게 없을 것이오.
매일 자기 직분을 다하는 걸 제외하고는, 부처님 명호를 염송하는 데 전심하시오. 아침저녁으로는 부처님 앞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시작도 없는 숙세의 업장을 간절히 참회하시오. 이와 같이 꾸준히 지속하면, 부지불식간에 불가사의한 이익을 얻게 되오.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의 성호를 지성으로 염송하면, 탐진치 삼독이 저절로 소멸하기 때문이오.
더구나 지금 세상은 말법 시대로, 온갖 환난과 재앙이 속출하고 있으니, 염불(나무 아미타불 염송) 외에 관세음보살 명호의 염송을 함께 하시오. 그러면 은연중에 불가사의한 전환과 변화가 그윽이 일어나게 될 것이오. 그 결과, 숙세 업장이 숨거나 피할 틈도 없이 눈앞에 닥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오.
사실 관세음보살은 이미 아주 오래 전에 성불하시어, 정법명여래(正法明如來)라는 호칭을 얻으셨소. 단지 그 분의 자비심이 너무도 간절하신 까닭에, 비록 상적광토(常寂光土: 항상 고요한 광명 불국토)에 안주하면서도, 실보(實報)·방편(方便)·동거(同居)의 세 국토에도 모습을 나토시는 것이오. 또 비록 항상 부처님 몸을 나토시면서도, 동시에 보살·연각(벽지불)·성문 및 인간·천상 등 육도 중생의 몸으로도 두루 나타나신다오. 그리고 비록 항상 아미타불을 모시면서도, 동시에 끝없는 시방 법계에 두루 색신(色身)을 나토고 계실 따름이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대로, 단지 중생에게 이익만 있다면, 달려가 도와주지 않음이 없소. 마땅히 어떤 몸(신분·모습)으로 제도해야 할 중생에게는, 곧장 바로 그 몸을 나토어 설법을 해주시는 것이오. 흔히 보타산(普陀山)은 관세음보살이 몸을 나토신 곳이라고 일컫소. 그런데 이는 중생에게, 정성을 바칠 구체적인 곳이 있다는 믿음(의지)을 주기 위해, 특별히 이 산에 자취를 보이신 것뿐이오. 어찌 관세음보살이 보타산에만 계시고, 다른 곳에는 안 계실 수 있겠소?
달 하나가 하늘에 뜨면, 모든 강물에 모습이 비치기 마련이오. 작게는 한 그릇의 물이나 한 방울의 물에까지, 각각 온전한 달의 모습이 나타나오. 다만 물이 흐리거나 움직이면, 달의 모습이 분명하지 못할 뿐이오. 중생의 마음도 물과 같아서, 오로지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면, 염송하는 즉시로 보살이 은연중 그윽이 나타나 가호(加護)해 주신다오. 그러나 만약 마음이 지성스럽지 못하거나, 오롯이 일념을 이루지 못하면, 관세음보살의 보호 구제를 받기가 어렵소. 이 이치는 매우 심오한데, 석인보타산지서(石印普陀山志序)를 보면 자세히 적혀 있소.
관세음(觀世音)이라고 이름 부르는 것은, 관세음보살이 원인 수행의 지위[因地]에 있을 때, 듣는 성품을 관조하여 원만하고 통달한 도를 증득하였기 때문이오. 또 과보의 경지[果地]에서는, 중생이 자기 명호 부르는 소리를 관찰하여 보호 구제를 베푸시기 때문에, 관세음이라는 명호를 얻었다오.
또 보문(普門)이란, 관세음보살의 도가 너무 크고 제한이 없어, 일체 중생의 근기와 성품에 따라 각자 적합한 귀향의 길을 두루 열어 주시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한두 법문만 세우지 않는다는 뜻이오. 마치 세상에 질병의 원인과 증상이 천태만상이기 때문에, 병을 치료하는 의약 처방도 천차만별인 것과 비슷하오. 어느 특정 법문에만 집착함이 없이, 중생이 미혹하는 원인과, 쉽게 깨달을 치료처에 따라, 처방을 일깨워 주시는 것이오.
예컨대 육근(六根: 眼·耳·鼻·舌·身·意), 육진(六塵: 色·聲·香·味·觸·法)·육식(六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 칠대(七大: 地·水·火·風·空·見·識: 주변 법계를 뜻함)가, 모두 각각 원만하고 통달한 도를 증득하는 인연이 될 수 있소. 다시 말해, 모든 법과 모든 사물이 죄다 생사고해를 벗어나 올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문이 되기 때문에, 보문(普門)이라고 이름 부르는 것이오. 만약 관세음보살이 오직 남해의 보타산에만 계신다면, 결코 ‘보(普)’문이 될 수 없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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