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마음가짐과 품격 세움[存心立品]
만약 좋지 못한 경우를 당하거든,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생각을 해 보시오. 세상에 나를 능가하는 자가 정말 많지만, 나만 못한 이도 또한 적지 않소. 다만 굶주리지 않고 춥지 않다면, 어찌 꼭 대부호와 고관대작을 부러워한단 말이오? 하늘의 뜻을 즐거이 받아들이고 분수를 알아[樂天知命], 만나는 대로 편안히 여기는 것이오[隨遇而安]. 이와 같이 하면, 오히려 번뇌도 보리(菩提)로 변화할 수 있거늘, 근심 고통 따위야 어찌 안락으로 바뀔 수 없겠소?
만약 질병이 끊임없이 귀찮게 달라붙는다면, 몸뚱이 자체가 고통의 근본임을 통절히 생각하며, 어서 벗어버리고 싶은 혐오감을 강렬히 내시오. 그리고 정토 법문을 힘써 수행하여 극락왕생을 발원하여야 마땅하리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한결같이 고통을 스승으로 삼아[以苦爲師] 불도를 이루셨다오. 그러니 우리도 마땅히 질병을 약으로 삼아[以病爲藥], 한시 바삐 생사윤회를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하오.
우리 범부 중생에게 만약 빈곤·궁핍·질병 따위의 고통이 전혀 없다면, 매일같이 여색과 재물·명예 따위의 진흙탕을 쏘다니며, 한시도 쉴 수 없음을 모름지기 알아야 하오. 누가 세속에서 눈부시게 활약하며 득의양양할 때, 고개를 돌려 장차 그 곳에 빠져 결국 헤어나지 못할 줄 생각이나 하겠소? 그래서 일찍이 맹자(孟子)도 유명한 말씀을 남겼소.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그 근육과 뼈를 수고롭게 하며, 그 몸통과 살갗까지 굶주리게 만들고, 그 몸이 텅 비어 궁핍하게 만들며, 그가 하는 일마다 뒤흔들어 어지럽히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움직이고 성품을 강인하게 단련시켜, 그가 할 수 없는 부분에 능력을 증진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사람을 성취시킴에는, 대부분 괴로운 역경[逆]을 통한다오. 사람은 단지 하늘을 받들어, 그 역경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한 줄 아오. 그렇지만 맹자가 여기서 말한 ‘큰 임무’란 주로 세간의 높은 작위(爵位: 신분 지위)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오. 세간의 지위도 모름지기 그처럼 근심하고 수고해야, 바야흐로 하늘의 뜻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다오.
하물며 우리들이 범부 중생의 처지에서, 곧장 위로 법왕(法王: 부처님)의 깨달음 도를 받들고, 아래로 법계의 유정 중생을 교화시키려 하는 수행이야 오죽하겠소? 가령 조금이라도 빈곤과 질병 따위에 좌절 당하는 시련이 없다면, 범부의 미혹이 날로 치성하여 청정한 수행이 성취되기 어렵소. 본 마음을 잃어버리고 삼악도에 영원히 빠져, 미래세가 다하도록 벗어날 기약도 없을 것이오.
옛날 대덕이 “한바탕 뼛 속까지 스미는 추위를 겪지 않으면, 어떻게 매화 향기가 콧속을 찌를 수 있겠는가?[不經一番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라고 읊으신 게, 바로 이러한 뜻이오. 오직 지성스런 뜻과 마음으로 염불하여, 묵은 업장을 해소하여야 하오. 혹시라도 번잡하고 조급한 마음이 일어,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거나, “인과응보의 법칙은 허망한 것이고 불법도 신령스럽지 않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하오.
옛날에 거백옥(遽伯玉)은 평생 수행하면서, 50세 때에 이르러 49세 때의 잘못을 알아차렸소. 또 공자는 나이가 일흔이 다 되어서도, 오히려 하늘이 자기에게 몇 년만 더 내려 주면, 주역을 공부하여 큰 허물[大過]이 없겠다고 기원했다오.(공자의 주역 공부에 관한 문장은 크게 다른 해석들이 있음) 성현들의 공부는,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을 일으키는 바탕 자리에 궁극의 목표를 두지 않은 이가 없소.
그런데 근래의 유학자들은 오직 사장(詞章: 말과 문장만 다듬은 문학류)만 공부하고, 큰 학문[大學]의 기본 출발점인 정심(正心)과 성의(誠意)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소. 비록 매일같이 성현의 글을 읽지만, 성현들이 글을 남겨 세상 사람을 일깨우려고 한 근본 뜻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게오. 그들이 입으로 말하고 몸으로 행동하는 것을 성현의 말씀과 행동에 견주어 보면, 마치 밝음과 어둠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고, 네모와 동그라미가 서로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크게 다르오. 하물며 은밀하고 미세한 부분의 차이를 따져 볼 겨를까지 있겠소?
불경은 사람들에게 항상 참회하여, 무명(無明)을 완전히 끊고 불도를 원만히 이루라고 가르치고 있소. 비록 지위가 등각(等覺)까지 이른 미륵보살조차도, 매일같이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께 예경(禮敬)을 드리며, 무명이 깨끗이 사라져 법신을 원만히 증득하기만 기원한다오. 하물며 그 아래 보살이나 성문·벽지불은 말할 나위가 있겠소?
그런데도 우리 범부 중생은 몸뚱아리 전체가 온통 업장투성이인데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참회할 줄도 모르는구려. 비록 일념 심성(一念心性)이야 부처와 똑같이 평등하다지만, 번뇌와 악업의 장애가 마음의 근원을 뒤덮어, 밖으로 훤히 드러날 수 없는 현실인 걸 어떡하오?
악을 멈추고 선을 쌓는 수행에서, 엄격하고 사실대로 자신을 살펴보기로는, 공과격(功過格: 매일의 공덕과 죄과를 기록하는 표)보다 더 좋은 게 없을 것이오. 그렇지만 만약 마음이 정성과 공경에 중심을 두지 않는다면, 설령 매일같이 공과격을 빈틈없이 기록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알맹이 없는 텅 빈 종이에 지나지 않소.
반면 비록 공과격은 없더라도, 단지 공경과 정성만 마음에 간직하고, 하루 내내 어느 한 순간이라도 헛되고 들뜬 감정이나 게으르고 느슨한 생각이 나타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세상 사람들을 대할 때 오직 충실과 용서[忠恕]를 품으면, 아주 훌륭한 수행이 되오. 그러면 어느 때든 어느 곳이든, 사악한 염두가 일어날 수 없을 것이오. 설사 묵은 습관이 발작하여 더러 갑작스레 생기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마음속에 정성과 공경, 충실과 용서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염두가 일어나는 것을 스스로 금방 알아차릴 수 있고, 깨닫는 순간 곧 없어지게 되오. 사악한 생각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무성하게 날뛰고, 언행까지 뒤따라 죄업을 짓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소인들이 겉으로는 선을 행하는 척하면서, 실지로는 죄악을 저지르는 까닭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그들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정말 모르는 자들은, 단지 세간의 범부들뿐이오. 도를 깨달은 성인은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훤히 아신다오. 천지간의 귀신들도, 비록 도를 얻지는 못했지만, 타심통(他心通)의 과보를 받았기 때문에, 마음속 구석구석을 다 안다오. 하물며 성문·벽지불·보살과 모든 부처님처럼 삼세(三世: 과거·현재·미래)를 원만히 꿰뚫어 보시는 타심통의 도안(道眼)을 갖추신 분들이야, 마치 손바닥 굽어보듯 하지 않겠소?
알지 못하기를 바라는 자는, 오직 자기만 알지 못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오. 자기가 만약 스스로 알았다면, 천지 귀신과 불보살님들은 모든 것을 보고 아시지 않음이 없소. 이러한 이치를 안다면, 비록 캄캄한 골방에 혼자 있더라도, 감히 느슨하게 게을러질 수 없고, 설령 남들이 전혀 모르는 곳이라도, 감히 사악한 생각이 싹틀 수 없을 게오. 천지 귀신과 불보살님들이 함께 보고 아시기 때문이오. 설사 부끄러움을 모르는 철면피라도, 만약 이러한 이치만 안다면, 부끄러워 몸둘 곳이 없을 것이오. 하물며 진실하게 수행하는 선비들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소?
그러므로 허물이 적기를 바라는 사람은, 모름지기 먼저 모든 성현과 귀신들이 다 보고 아시는 것을 두려워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오. 공자가 요순 성왕을 국 그릇 속과 담장 위에서 보았고, 홀로 있을 때 조심했는지[愼獨]는 이부자리 흔적에서 알 수 있다고 하오. 전해 오는 말들은 세간 범부들의 보통 감정과 생각을 염두에 두고, 비근한 예로 거론하는 것뿐이오.
사실은 내 마음과 시방 법계가 보는 눈이 완전히 딱 들어맞소. 단지 우리가 미혹해 있기 때문에, 알아보는 눈이 자기 한 몸에 국한하는 것뿐이오. 반면 시방 법계의 모든 성인들은, 자기 마음이 본디 갖추고 있는 법계장심(法界藏心)을 철저히 증득했기 때문에, 법계 안의 감정 있는 중생의 마음 움직임과 생각 일으킴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친히 보고 아신다오. 왜냐하면, 똑같이 진여(眞如)의 성품을 받아, 나와 남이 결코 둘이 아니기 때문이오.
이러한 이치를 안다면, 스스로 전전긍긍하며 경각심을 곧추세우고, 정성과 공경을 가득 품을 것이오. 처음에는 애써 망상을 잠재우지만, 오래 계속하다 보면 망상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게 깨끗이 사라진다오. 사악한 생각[惡念]도 원래 망상에 속하는 것으로,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곧 진짜 죄악이 되고 만다오. 하지만 금방 알아차리기만 하면, 망상이 소멸하고 진실한 마음이 나타나게 되오.
허물을 적게 하는 수행은, 사실 유교와 불교에 공통하는, 절실하고 요긴한 공부라오. 거백옥은 50세가 되어서 49세 때의 잘못을 알아차렸으며, 공자에게 심부름꾼을 보냈을 때도 “허물이 적기를 바라고 있지만 능력이 모자란다.”는 말을 전했다오. 이는 정말 생각 차원[意地]에서 수행하는 것이며, 몸(행동)과 입(말)을 움직여 허물을 짓는다는 뜻이 아니오.
집안 생활을 하는 거사들도 일반 사람들과 왕래할 때, 마땅히 이처럼 수시로 생각을 예방하여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생각[意業]만 깨끗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몸과 입까지 더러 더러워질 수 있소. 자신과 남이 함께 이롭고자 한다면, 옛 사람들의 훌륭한 말씀과 행실을 많이 알아, 자기 수행의 귀감으로 삼는 것보다 나은 게 없다오.
부처님과 조사들이 생사 해탈하신 것을 배우려거든, 모름지기 부끄러움[慙愧]과 참회(懺悔]를 바탕으로, 악을 그치고 선을 닦는[止惡修善]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오. 바로 유가에서 말하는 자송(自訟)과 과과(寡過),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뜻하오. 자신에게 잘못이 있는 경우, 얼른 사실대로 알아차린 다음, 자기 양심 안에서 스스로 소송·심판하는 자송(自訟: 자아 비판)을 하게 되면, 저절로 허물이 적어지게[寡過] 될 것이오. 허물을 줄이는 것이 곧 자신을 이기는[克己] 실행이며, 자신을 극복하다 보면 저절로 예법으로 복귀할[復禮] 것이오.
그리고 재계(齋戒)를 지키며 스스로 경책(警策)하고, 뜻을 몹시 진실하고 간절하게 지녀야 하오. 그렇지만 발은 현실의 바탕을 착실히 디디고 서서, 힘을 다해 실행해 가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거짓말[妄語] 중의 거짓말이 되고 말 게오. 알기는 어렵지 않지만, 실행하기가 정말 힘든 법이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총명한 사람들이, 단지 말만 지껄이고 실행은 안 하면서 한평생을 끝마치는 줄 아시오? 보물산에 힘들게 들어왔다가, 그냥 빈손으로 되돌아가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소? 어찌 안타깝지 않겠소?
범부 중생은 미혹해 있어, 신심이 견고하지 못하오. 그래서 믿음을 내었다가 물러서기를 거듭 반복하며, 수행에 정진하다가 그만두기를 누차 되풀이하는 모습들을 보이기 마련이오. 이는 최초에 가르친 사람이, 그에게 적합한 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오. 가령 맨 처음에 손쉽게 알 수 있는 인과 법칙 등으로부터 시작했다면, 이처럼 미혹해 갈팡질팡 방황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나 지나간 죄악이 비록 지극히 크고 무겁더라도, 단지 마음과 뜻을 다해 참회하고 고치며, 올바른 지견[正知見]으로 청정한 수행을 닦아, 자기와 남을 함께 이롭게 하려는 뜻만 세우고 실천해 가면 되오. 그러면 제 아무리 커다란 죄악의 업장이라도 안개 걷히듯 사라지고, 본래 성품의 하늘이 맑게 확 열릴 것이오. 그래서 불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소.
“세간에 두 종류의 씩씩한 사람[健兒]이 있다. 하나는 애시당초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죄를 지은 다음 뉘우칠 줄 아는 사람이다[世間有二健兒, 一者自不作罪, 二者作已能悔.].”
뉘우침[悔]이란 글자는 마음[心]으로부터 일어나야 하고, 마음에서 진실로 뉘우치지 아니하면, 아무리 입으로 말해도 이익이 없소. 비유하자면, 처방전을 읽기만 하고 약을 지어 먹지 않으면, 결코 병이 나을 가망은 없는 것과 같소. 처방에 따라 약을 지어 먹어야만, 병이 나아 몸이 건강해질 게 아니오? 단지 걱정하는 것은, 뜻을 견고하게 세우지 않아서, 하루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열흘 차갑게 식어 버리는 중도 포기요. 그러면 빈 말만 그럴 듯하게 화려하지만, 실속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오.
바깥 사물 경계는 본래 자기 성품이 없으며, 그로 말미암아 받는 손해와 이익은 오직 사람에게 달려 있소. 몸·입·생각의 삼업(三業)과,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사의(四儀)에, 항상 안연(顔淵)의 사물(四勿)을 지키되, 오계(五戒)와 십선(十善)은 반드시 증자(曾子)의 삼성(三省)을 본받아야 하오. 어두운 방 안에 비록 보는 사람은 없을지라도, 천지 귀신은 다 알고 있소. 생각이 은밀한 마음속에서 처음 싹틀 때부터, 죄와 복은 이미 천양지차로 크게 벌어진다오.
[『논어(論語)』 「안연(顔淵)」편의 첫 장(章)에 나오는 내용. 안연이 인(仁)을 묻자, 공자가 “자기를 이기고 예로 되돌아가는 것이 인이다[克己復禮爲仁.].”라고 답하였다. 그런데 안연이 다시 극기복례의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묻자, 공자가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는 네 조목을 말해 주었다. 여기의 네 가지 금지를 사물(四勿)이라고 표현한다. 불교 수행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가 아니면 생각지도 말라!”고 한 구절로 간추릴 수 있겠다. ‘비례물념(非禮勿念)!’]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증자 말씀. “나는 매일 세 번(또는 세 가지로) 나 자신을 반성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함에 충실하지는 않았는지? 친구들과 사귐에 미덥지는 않았는지? 스승님께서 전해 주신 (또는 자신이 전공하는) 학업을 제대로 익히지는 않았는지? (‘자신이 제대로 익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전해 주었는지?’로 해석하는 異見도 있음.)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만약 이와 같이 반성하고 수행하기만 하면, 장차 모든 행동거지가 다 착하고, 악이 생겨날 틈이 없게 될 것이오. 이것이야말로 진짜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心]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誠意] 「대학(大學)」의 위대한 수양 법도라오. 그렇지만 혹시라도 불교의 가르침은 자질구레하게 중언부언하여, 유교의 간단명료하고 직접적인 표현만 못하다고 비판하지는 절대 마시오.
염불하는 사람은 반드시 모든 일마다 항상 충실과 용서[忠恕]를 간직하고, 모든 생각마다 늘 허물과 잘못이 없도록 예방하여야 하오. 잘못을 알면 반드시 고치고[知過必改], 정의를 보면 용기 있게 행하여야[見義勇爲], 바야흐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합하게 되오.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극락왕생하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부처님 가르침과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감응이 통하기가 매우 어렵소.
『법화경』에 “삼계가 편안함 없이 불타는 집과 같아서, 뭇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니, 몹시 무섭고 두렵도다[三界無安, 猶如火宅, 衆苦充滿, 甚可怖畏.].”는 말씀이 있소. 하늘이 사람을 성취시키는 방편에는, 괴로움도 있고 즐거움도 있으며, 거스름도 있고 순조로움도 있으며, 화도 있고 복도 있소. 이들 방편은 본디 어느 하나로 정해진 게 없으며, 오직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오. 만약 확 트인 지혜의 눈을 지니고 하늘의 마음을 잘 헤아려 살피면, 즐겁지 않은 고통이 없고, 순조롭지 않은 역경이 없으며, 축복스럽지 않은 재앙이 없게 되오.
그래서 군자는 하늘의 뜻을 즐거이 받아들이고 분수를 알아[樂天知命],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을 탓하지 않으며[不怨天, 不尤人], 만나는 대로 편안히 여긴다오[隨遇而安]. 그러니 가는 곳마다 자유자재롭게 노닐 수 있는 게요.
본디 부귀한 자는 부귀한 대로 가난한 사람을 널리 보살피고, 군주를 잘 보필하여 백성을 이롭게 하는 수행을 한다오. 가난한 이는 가난한 대로 분수에 맞게 절약하고, 부질없는 짓을 하지 않으며 몸과 마음을 닦는다오. 또 환난을 당한 이는 환난에 처한 대로 평안한 심기(心氣)로, 주어진 고통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의 과보로 달게 받아들이고, 군주(국가)나 하늘, 자신을 포함한 간사한 무리까지 조금도 원망하지 않으면서, 일체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따른다오. 이러한 사람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하늘도 그를 보호하기 때문에, 현생에서나 내세에, 아니면 그 자손 대에 이르러, 틀림없이 그 덕성에 걸맞는 복을 한없이 받게 될 것이오.
무릇 사람이 개과천선하여 청정한 수행을 닦아가려면, 오직 진실과 정성을 존귀하게 여기며, 거짓과 꾸밈을 가장 금기시해야 하오. 겉으로는 선을 쌓고 청정하게 수행한다는 이름만 떠들썩하게 드날리면서, 속으로는 충실하지도 못하고 용서하지도 않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오. 거백옥처럼 50세 때 49세의 잘못을 알아차릴 정도가 되어야, 성현을 바라볼 수 있고 부처와 조사를 뒤이을 수 있으며, 유교의 일등 공신이 되고 여래의 진짜 제자가 된다오.
염불 수행으로 서방 극락에 왕생하려면, 반드시 인과응보의 법칙을 잘 알아야 하오. 그래서 몸으로 행동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가, 모두 부처님과 합치해야 하오. 만약 부처님 가르침과 어그러지게 되면, 설령 염불을 제아무리 많이 한다 해도, 왕생하기 어렵소. 부처님과 서로 감응의 길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오. 만약 크게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어, 마치 독 있는 종기를 제거하듯 허물을 고치고, 흡사 흰 보옥을 지키듯 뜻을 견고히 세운다면, 만 사람 가운데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왕생할 수 있다오.
장기간 재계(齋戒)하며 염불하는 수행 이외에, 마땅히 지켜야 할 규율이 있소. 바로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실행하고, 윤리도덕[倫常]을 공경히 다하는 일이오. 어떠한 죄악도 짓지 말며, 뭇 선행을 두루 받들어 행하되, 마음가짐과 생각 품음에 사악이나 편벽·허위·가식이 끼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오. 사람과 함께 일을 함에는 자기 직분을 다하고, 인연 있는 이를 만나거든 정도(正道)의 문에 들어서도록 권장하되, 갖가지 수행의 모습에 표시를 낼 필요는 없소.
불자로서 행하는 모든 행위가 반드시 세속 사람들의 행위를 크게 초월하여야만, 비로소 자기도 진실한 이익을 얻고, 남들도 보고 서로 권하여 착해질 수 있음을 꼭 염두에 두시오. 만약 입으로는 수행한다고 말하면서, 마음에는 착하지 못한 생각을 품고, 부모 형제나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본분을 다할 수 없다면, 이런 사람은 위선자라 할 것이오. 원인(수행)의 자리가 거짓인데, 어떻게 진실한 이익(결과)을 얻을 수 있겠소?
성현의 학문은 모두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으로부터 시작하오. 하물며 생사를 해탈하고 평범을 초월하여 성현의 경지에 들려고 하는, 진실한 수행이야 말할 게 있겠소? 격물과 치지에 관하여는 사서우익해중각서(四書蕅益解重刻序)와 요범사훈서(了凡四訓序)를 보면 될 것이오.
어떠한 악도 짓지 말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모름지기 마음 바탕[心地]에서 논해야 하며, 단지 구체적인 일에 표출해 내는 행위만 가리키는 것은 결코 아니오. 마음 바탕에서 전혀 죄악을 일으키지 않으면, 전체가 온통 선(善)이 되어, 그 마음으로 염불하는 공덕은 보통 사람보다 백천만 배 이상 뛰어나게 되오. 마음 바탕이 오직 선하기만 하고 악이 없기를 바란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마치 부처님이나 하늘을 눈앞에 대하듯이 정성스럽고 공경스러워야 되오. 마음이 한 번 풀어지면[放縱], 불법에 어긋나는 염두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오.
염불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발심(發心)을 잘하여, 마음이 수행의 주인이 되어야 하오. 마음이 만약 사홍서원과 합치할 것 같으면, ‘나무 아미타불’을 한 번만 염송하고 착한 일을 한 가지만 하더라도, 공덕이 끝없고 한없다오. 하물며 몸과 입·생각의 삼업(三業)이 항상 염불로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일삼으면 오죽하겠소?
그러나 마음이 오직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고, 남을 이롭게 하려고 발원하지 않으면, 행한 일이 제아무리 많더라도, 얻는 공덕은 몹시 적게 되오. 하물며 혹시라도 남을 넘어뜨리고 해치려는 생각을 일으키거나, 자기를 과시하고 자랑하려는 마음을 품는다면, 대관절 어떻게 되겠소? 그가 한 염불과 선행은 전혀 공덕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정말로 백천만억 분의 일이나 얻으면 다행일 것이오. 게다가 그가 품은 나쁜 생각[惡念]의 허물 또한 적지 않을 것이오. 그래서 단지 염불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수행인들은 모름지기 발심(發心)을 잘 해야 한다오.
불법은 원래 세간법(世間法)을 떠나 있지 않소. 따라서 모든 불자와 법우들은 반드시 각각 자기 본분을 다해야 하오. 부모는 자애롭고 자녀는 효성스러우며, 형제자매는 서로 우애하고, 부부간에는 사랑과 공경으로 화목해야 하오. 또 어떠한 죄악도 짓지 말고, 뭇 선행을 받들어 행하며, 생명을 살해하지 않고 보호하며,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아야 하오. 정성을 간직하여 사악함을 막고, 자기(감정·욕망)를 극복하여 예법으로 되돌아가야 하오. 그래서 자기와 남을 두루 이롭게 하는 일로, 자기의 사명과 임무를 삼아야 하오. 이렇게만 한다면, 그 기초가 올바르고 튼튼하게 닦여, 불법의 윤택한 이익을 받을 수 있소. 여기다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까지 갖춘다면, 틀림없이 극락세계에 상품(上品)으로 왕생할 것이오.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대부분 진실한 수행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진짜 도 닦는다’는 헛된 명성만 얻으려고 애쓴다오. 그래서 온갖 방법을 고안하여 그럴 듯하게 꾸미고 허세 부리며, ‘마치 진짜인 듯하면서 가짜인[似是而非]’ 모습으로, 남들이 자기를 칭찬해 주기 바란다오. 그 마음과 행실이 이미 말할 수 없이 더럽고 지저분하여, 설사 수행이 있더라도 그 마음에 오염되어, 진실한 이익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오.
이것이 이른바 이름(명분)만 좋아하고 알맹이(실질)는 싫어하는 것으로, 수행에서 제일로 크게 금기시하는 병폐라오. 가령 앞서 언급한 행해야 할 바를 갖추고, 뒤에서 언급한 금기해야 할 바를 피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세속에서는 현인(賢人)이 되고, 불법에서는 개사(開士)가 될 것이오.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집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지방으로, 전국으로, 천하로 확대해 나간다면, 예절과 정의가 일어나고 창칼이 영원히 스러지며, 자비와 선행이 불어나고 재해와 사고는 생기지 않으리다. 그러면 저절로 천하가 태평스러워지고 인민이 안락해지지 않겠소?!
[개사(開士): 깨달아 마음(의 눈)이 열린(開悟) 선비, 또는 불법으로 중생의 눈을 띄워 주고 이끌어 주는 선비라는 뜻을 지닌 보살의 덕명(德名). 전진(前秦) 때 해오(解悟)하고 덕을 갖춘 스님에게 ‘개사’라는 호칭을 하사한 인연으로, 스님[和尙]의 존칭으로도 쓰임.]
염불로 극락왕생하기를 바란다면, 모름지기 자비심을 발하여 방편에 맞는 선행을 행하며, 탐진치 삼독을 그치고 살생·도적·사음의 죄악을 끊어야 하오. 그렇게 자기와 남을 함께 이롭게 하여야, 비로소 부처님 뜻에 부합하게 되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부처님과 등지기 때문에 서로 감응의 길이 막혀, 단지 미래의 원인 종자만 심을 뿐, 현세의 과보를 얻기는 어렵다오.
만약 지성으로 염불하며, 행실이 부처님 마음과 합치하고 마음과 입이 서로 호응한다면, 이런 사람은 임종 때에 틀림없이 아미타불께서 뭇 성현대중[聖衆]과 함께 몸소 마중 나오시어 서방 왕생을 이끄실 것이오. 일단 서방 극락에 왕생하면, 생사를 완전히 해탈하고 평범을 초월하여 성현의 경지에 들기 때문에, 모든 고통을 영원히 벗어나 뭇 즐거움만 누리게 된다오. 이는 공덕의 다소나 미혹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오롯이 부처님 힘에 의지하는 수행이기 때문이오. 단지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수행만 갖춘다면, 만 사람 가운데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틀림없이 왕생하는 법문이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마음가짐과 행실이 반드시 질박하고 곧으며 치우침 없이 올바라야[質直中正] 하며, 조금이라도 편협하거나 구부러지거나 사사로운 모습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되오. 만약 조금이라도 편협하거나 구부러지면, 마치 저울의 눈금이 맞지 않아 물건의 무게를 올바르게 달 수 없는 것과 같소. 또 마치 거울의 바탕이 매끄럽고 깨끗하지 못해, 사물의 모습을 뚜렷하고 정확히 비춰 줄 수 없는 것과 같소. 터럭 끝만한 차이가 천리의 오차로 벌어지고, 소문이 한 다리 건널 때마다 거짓과 과장이 뒤섞여 해명할 수조차 없게 되는 격이오.
그래서 『능엄경(楞嚴經)』에서는, “시방 여래께서 동일한 도로써 생사윤회를 벗어났으니, 모두 곧은 마음 때문일세[十方如來, 同一道故, 出離生死, 皆以直心.].”라고 칭송하였소. 마음과 말이 올곧기 때문에,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중간에 치우치거나 삐뚤어진 모습이 전혀 없는 거라오. 『서경(書經)』에도 말하지 않소? “사람 마음 오직 위태롭고, 도의 마음 오직 미약하나니, 오직 정성스럽고 오직 한결같이, 그 한가운데를 진실로 붙잡아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는 정토 수행의 올바른 원인[淨業正因]이 나와 있소. 부모께 효도로 봉양하고, 스승과 어른을 받들어 섬기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을 끊고, 열 가지 선업(善業)을 닦으며, 삼귀의를 받들어 지니고, 모든 계율을 갖추어 지키며, 위엄과 예의를 범하지 않고, 보리심을 발하며, 인과응보 법칙을 깊이 믿고, 대승경전을 독송하며, 수행에 정진하도록 서로 권하는 것이오. 이 열한 가지 조목 가운데 어느 하나만 있어도, 깊은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극락왕생에 회향 기도하면, 모두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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