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
이른바 믿음이란, 사바세계가 정말로 정말로 고통스런 바다이고, 극락세계는 진실로 진실로 즐거운 뜨락임을 모름지기 믿어야 함을 가리키오. 사바세계의 고통은 한없고 끝없지만, 한 마디로 종합하면 팔고(八苦)를 벗어나지 않소. 이른바 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고[死], 사랑하면서 헤어지고[愛別離], 미워하는 자를 만나고[怨憎會], 구해도 얻지 못하고[求不得], 오음의 번뇌 망상이 치열하게 무성한[五陰熾盛] 것이오.
이러한 여덟 가지 고통은, 세계에서 최고 부귀한 자로부터 가장 비천한 거지까지, 모두가 지니는 것이오. 앞의 일곱 고통은 지나간 세월 동안 지은 죄업으로 불러들이는 과보이므로, 잘 생각해 보면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오. 말하기로 하면 종이와 먹물의 낭비가 너무 많을 것이므로, 상세한 언급은 피하겠소.
마지막 여덟째 오음치성의 고통은, 현재 마음을 품고 생각을 일으키며 육신으로 움직이고 말하는 모든 행위들이, 미래에 고통을 얻는 원인이 됨을 뜻하오. 원인과 결과가 서로 뒤엉켜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까마득한 과거부터 아득한 미래까지 벗어날 길이 없는 거라오.
오음(五陰: 五蘊)이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오. 색은 죄업의 과보로 받은 몸을 뜻하고, 수상행식은 바깥 사물 경계에 부닥쳐 일으키는 허망하고 허깨비 같은 마음을 가리키오. 이러한 허망하고 허깨비 같은 몸과 마음의 법들이, 빛[色]·소리[聲]·냄새[香]·맛[味]·맞닿음[觸]·생각[法]의 육경(六境: 또는 六塵)에 대해서 미혹을 일으키고 업장을 지음으로써, 번뇌 망상이 불길처럼 치성하게 일어나 그칠 줄 모르기 때문에, 오음치성의 고통이라고 한다오.
또 음(陰)에는 뒤덮는다[蓋覆]는 뜻이 있는데, 발음과 뜻이 음(蔭)과 같소. 이 다섯 가지는 진실한 성품[眞性]을 뒤덮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오. 마치 짙은 구름이 해를 가리면, 해가 제 아무리 눈부신 빛을 조금도 줄지 않게 계속 비추고 있다 할지라도 구름장에 걸려, 지상의 사람과 만물은 그 빛을 볼 수 없는 거와 같소.
범부 중생이 미혹의 업장을 끊지 못하고 이 오음의 장애에 뒤덮여, 본래 성품의 하늘에 항상 떠 있는 지혜의 햇빛[性天慧日]을 드날릴 수 없는 이치도, 또한 이와 같다오. 이 여덟째 고통이야말로, 일체 모든 고통의 근본이라오. 도를 닦는 사람은 선정(禪定)의 힘이 깊고 강하여, 여섯 가지 티끌경계[六塵境]에 대해 조금도 집착이 없고, 미움이나 사랑 같은 분별 감정을 일으키지 않게 되오. 여기에서 공력을 배가하고 용맹 정진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면, 미혹의 업장을 깨끗이 제거하고 생사윤회의 근본을 단박에 끊어 버릴 수가 있소.
그렇지만 이러한 수행 공부는 정말로 결코 쉽지 않으며, 특히 지금 같은 말법 시대에는 이루기가 더더욱 어렵다오. 그래서 모름지기 정토 법문의 수행에 전념하여,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으로 서방극락에 왕생하길 구해야 하오. 일단 왕생하게 되면, 연화 봉오리 안에 저절로 생겨나기[蓮華化生] 때문에, 나는 고통[生苦]이 전혀 없소. 순전히 어린 남아[童男] 모습을 지니고, 수명이 허공같이 끝없으며 몸에 어떠한 재난이나 변화가 없기 때문에,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이름조차 들어볼 수도 없다오. 하물며 그런 고통의 현실이 존재하겠소?
[극락정토 ‘왕생(往生)’을 무심코 한글로 ‘태어나다’고 옮기는 분이 많은데, 이는 자칫 ‘태에서 생겨나는’ ‘태생’을 연상할 수 있으므로,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느껴진다. 한글 ‘태어나다’는 ‘태에서 나오다’는 뜻일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극락‘왕생’은 그냥 한자어로 쓰든지 아니면 ‘저절로 생겨나다’로 옮긴다.]
거룩한 대중[聖衆]을 뒤따라 몸소 아미타불을 모시면서, 새나 물이나 나뭇가지조차 모두 진리의 소리[法音]를 연주하기 때문에, 각자 자기 근기와 성품에 따라 법문을 듣고 증득하게 되오. 친근한 사람의 감정도 느껴볼 수 없거늘, 하물며 미움과 원망이 있기나 하겠소?
옷을 생각하면 옷이 생기고, 음식을 생각하면 음식이 나오며, 누각이나 집이 모두 칠보[七寶]로 이루어져 있다오. 이 모두가 사람의 힘을 조금도 들이지 않고, 모두 저절로 변해 생겨나는[化作] 것들이오. 그러니 사바세계의 일곱 가지 고통도 금세 일곱 극락으로 바뀌게 되오.
몸은 막대한 신통과 위력을 갖추기 때문에, 그 자리를 한 치도 떠나지 않은 채, 일념(一念) 가운데 시방제불의 세계에서 두루 온갖 불사(佛事)를 하며, 위로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할 수 있소. 마음은 위대한 지혜와 말재주[辯才]를 지니기 때문에, 한 법으로도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實相]을 두루 알아, 근기에 따라 조금도 어그러짐 없고 막힘없이 설법하게 되오. 비록 세간의 언어로 말할지라도, 모두 진실한 법과 미묘한 이치에 딱 들어맞게 되오.
이처럼 오음치성의 고통은 전혀 없고, 몸과 마음 모두 고요한 열반의 즐거움을 누린다오. 그래서 『아미타경』에서 “어떠한 고통도 전혀 없고 단지 온갖 즐거움만 받기 때문에 ‘극락’이라고 부른다.”고 말씀하셨소. 사바세계의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고, 극락의 즐거움 역시 결코 어디에 비유할 수가 없소.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을 깊이 믿고, 전혀 의심이나 미혹을 일으키지 않아야, 비로소 진실한 믿음[眞信]이라고 일컬을 수 있소.
혹시라도 범부 중생이나 다른 외도(外道)들과 같은 알음알이 편견[知見]을 가지고, “극락정토의 온갖 불가사의한 미묘 장엄의 경관은, 모두 마음의 법[心法]을 비유하는 우화(寓話)에 속하며, 진실한 경지가 정말로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망령된 추측과 단정을 내려서는 절대로 안 되오. 이러한 삿된 편견과 오류는 극락왕생의 진실한 이익을 놓치도록 만들기 때문에, 그 해악이 몹시 크다오. 이 점을 분명히 잘 알지 않으면 안 되오.
이렇게 사바세계가 고통의 바다이고, 극락세계가 즐거움의 뜨락임을 알았다면, 이제 마땅히 사바의 고통을 떠나 극락의 즐거움을 얻으려는, 간절하고 절실한 서원을 발해야 하오. 그 발원의 간절함은, 마치 똥구덩이에 빠진 자가 어서 빨리 빠져 나오려 몸부림치고, 또 감옥에 갇힌 죄수가 한시 바삐 풀려나 고향 집에 돌아가길 생각하는 것처럼 해야 하오. 자기 혼자 힘으로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다면, 반드시 막대한 권세나 능력 있는 분께 자기가 풀려나도록 힘 좀 써달라고 부탁해야 할 것이오.
사바세계에서는 모든 중생이, 순탄한 때나 역경(逆境)을 가릴 것 없이, 늘 탐욕·성냄·어리석음을 일으켜, 살생·도둑질·간음의 죄악을 저지른다오. 그래서 사바세계는 본래 지닌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妙覺明心]을 더럽히는, 바닥없는 똥구덩이와 다름없소. 일단 죄악을 지으면, 반드시 그 악업의 과보를 받아, 장구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육도 윤회할 것이 틀림없소. 그러니 이는 사면(赦免)이 없는 철옹성의 감옥과 같소.
아미타불께서는 과거 세상에 48대 서원을 세워 중생을 제도하기로 작정하셨는데, 그 가운데 한 서원은 이러한 것이오.
“만약 중생이 나의 명호를 듣고 나의 국토에 생겨나길 원하여, (나의 명호를) 단지 열 번만 염송할지라도 (그가 소원대로 나의 국토에 생겨나야 하며), 만약 그가 생겨나지 못한다면 (나는)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얻지 않겠다.”
아미타불께서 이처럼 중생을 제도하시기로 서원을 세우셨지만, 만약 중생이 아미타불의 영접을 바라지도 않는다면, 부처님 또한 어찌할 수가 없소. 온 뜻과 마음을 다해 아미타불의 명호를 염송하며, 사바 고해를 벗어나기를 발원하기만 하면, 자비로운 영접을 받아 왕생하지 못하는 이가 하나도 없을 것이오.
아미타불께서는 위대한 권세와 능력을 지니셨소. 그래서 사바세계의 밑바닥 없는 똥구덩이와 사면(赦免) 없는 철옹성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곧장 그 안에서 벗어나, 극락세계의 본래 고향 집에 평안히 되돌아가, 부처님의 경계를 즐겁게 맛보고 쓸 수 있도록 건지실 수 있다오.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위해 서원을 세우고 수행을 해서 부처가 되셨소. 그런데 우리는 아미타불의 수행 서원에 어긋나게 살아왔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육도 윤회에 빠져, 영원히 중생 노릇을 하고 있소. 본래 아미타불은 우리 마음속의 부처이고, 우리는 또한 아미타불 마음속의 중생이라오. 마음이 이미 하나인데도, 범부와 성인이 하늘과 땅처럼 크게 차이나는 것이오. 이는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줄곧 부처를 등지고, 미혹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오.
이렇게 믿는 마음을 진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소. 이러한 믿음 위에 결정코 극락에 왕생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염불 수행을 틀림없이 행해야 하오.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마음이 없다고들 쉽게 말하지만, 간절함이 없이 과연 그럴 수 있겠소? 또 믿음과 발원이 없는데도 정말 그럴 수 있겠소?
염불 수행의 가장 요긴한 목표는, 바로 생사윤회를 끝마치는 데에 있소. 생사윤회를 끝마치기 위해 염불한다면, 생사의 고통에 대해서 저절로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서방 정토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기뻐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야 할 것이오.
이처럼 믿음과 발원의 두 가지가 원만히 갖추어지면, 이제 지성스럽고 간절하게, 마치 자식이 어머니 그리워하듯 염불해야 하오. 그러면 부처님의 힘과 법의 힘이, 자기 마음이 내는 믿음 및 서원의 공덕력과 함께 삼위일체로 어우러져, 효험을 크게 드러낼 것이오. 청정한 법계에 깊숙이 들어가, 금생에 단박 윤회를 뛰어넘고 여래 경지에 동참하여, 마치 어머니와 어린 자식이 서로 만난 듯, 천상의 극락을 영원히 누리게 되리다.
무릇 정 있는[有情] 우리 중생은 정토 법문을 듣고 나면, 사바세계가 지극히 고통스럽고 서방세계가 지극히 즐거운 줄 믿어야 하오. 또 오랜 전생부터 지어온 업장이 몹시 두텁고 무거워,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단박에 거기서 벗어나기 어려운 줄 믿어야 하오. 그리고 극락왕생을 구하기만 하면 금생에 확실히 왕생할 수 있고, 염불하기만 하면 부처님의 자비로운 영접을 받을 수 있음도 믿어야 하오.
그래서 한 마음 굳건히 먹고, 마치 죄수가 지긋지긋한 감옥을 벗어나려 하는 듯한 마음으로, 사바세계 벗어나기를 간절히 발원해야 하오. 서방세계에 왕생함은 나그네가 그리던 고향에 돌아가는 것과 같을진대, 어찌 구차하게 머뭇거리는 생각이 일 수 있겠소? 이러한 각오로 각자 자기의 형편과 능력에 따라, 아미타불 성호를 지성으로 염송해야 하오.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다니거나, 손님을 맞이하거나 옷 입고 밥 먹거나, 어느 때를 막론하고, 부처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마음이 부처님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힘써야 하오.
『아미타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소.
“여기서 서쪽으로 십만억 부처님 땅을 지나면 ‘극락’이라고 부르는 세계가 있으며, 거기에는 ‘아미타’라는 이름의 부처님이 지금 설법하고 계신다.”
“그 땅은 무슨 까닭에 ‘극락’이라고 부르는가? 그 나라 중생은 어떠한 고통도 전혀 없이, 온갖 즐거움만 누리기 때문에 ‘극락’이라고 부른다.”
어떠한 고통도 전혀 없이 온갖 즐거움만 누리는 까닭은, 바로 아미타불의 복덕(福德)과 지혜(智慧), 신통력과 도력(道力)이 장엄하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오. 여기에 비하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3고(苦)·8고, 아니 무수한 온갖 고통이 두루 갖추어져 있고, 즐거움이란 조금도 없기 때문에, ‘사바’고해라고 부르오. 범어로 사바(娑婆)는 ‘참아낸다[堪忍: 인내를 감당하다, 감당하고 인내하다]’는 뜻이오. 이곳 중생은 이러한 모든 고통을 당하면서도, 용케도 잘 참아 견디기 때문이오.
물론 여기에도 즐거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모든 즐거움은 거의 다 고통이오. 중생이 어리석고 헷갈려서, 즐거움으로 착각하는 것일 뿐이오. 예컨대, 술 마시고 여색에 빠지거나 수렵·오락(스포츠)에 열광하는 것들이, 어찌 즐거운 일이라고 하겠소? 어리석은 중생이 일시적인 감각성의 쾌락에 탐착하여, 차마 놓지 못하고 피곤한 줄도 모르니, 정말로 불쌍하고 안타까울 뿐이오.
설사 진짜 즐거움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이 또한 오래 지속하기가 어렵소. 예컨대, (유가의 거장 孟子가 君子의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첫째로 꼽은) 부모님 모두 생존하시고 형제자매 무사한 (天倫의) 즐거움이, 어떻게 항상 이어질 수 있겠소? 즐거운 순간이 한번 지나고 나면, 뒤이어 슬픈 마음이 강하게 일어날 것이니, 즐거움이 전혀 없다는 말도 지나친 주장은 아니리다.
이 세상의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3고와 8고로 빠짐없이 망라할 수 있소. 3고란, 첫째 보통 고통은 고고(苦苦)이고, 둘째 즐거움은 괴고(壞苦)이며, 셋째 고통스럽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행고(行苦)라고 분류함을 가리키오. 고고(苦苦)란 오음(五陰)으로 이루어진 우리 몸과 마음이 본디 핍박당하는 성질을 지니기에 고통이라고 하는데, 게다가 늘 생로병사 따위의 고통을 받기 때문에, ‘고고’라고 일컫는 것이오. 괴고(壞苦)란 즐거움이 무너지는 고통을 뜻하오. 세상에 어떤 일이 오래 계속할 수 있겠소? 하늘(자연)의 도가 이러할진대, 하물며 인간 세상의 일이야 오죽하겠소? 즐거운 상황이 언뜻 나타나는가 싶더니, 금세 괴로운 처지가 들이닥치지 않소? 즐거운 상황이 무너져 사라질 때, 그 고통은 더욱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큰 것이오. 이를 ‘괴고’라고 한다오. 행고(行苦)란, 비록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아 적절한 듯 보이지만, 그 본성이 항상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흘러 변하기 때문에, 행고(운행하는 고통)라 부르는 것이오. 이 세 고통을 거론하면,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 고통이 없게 되오. 8고는 앞에서 이미 자세히 언급한 것과 같소.
[보통 고고(苦苦)는 괴로운 일이 이루어져 생기는 고뇌이고, 괴고(壞苦)는 즐거운 일이 사라져서 생기는 고뇌이며, 행고(行苦)는 일체의 법이 변화무상하게 흘러가기 때문에 생기는 고뇌라고 정의한다. 욕계(欲界)에는 이 3고가 모두 있고, 색계(色界)에는 고고가 없으며, 무색계(無色界)에는 행고만 있다고 한다.]
만약 이 세상의 이런 고통들을 알아차린다면, 사바고해를 싫어하며 떠나려는 마음이 저절로 솟구쳐 일 것이오. 그리고 서방세계의 즐거움을 안다면, 기꺼이 극락왕생하려는 염두가 강렬히 생길 것이오. 이러한 마음가짐을 바탕으로, 어떠한 죄악도 짓지 않고 뭇 선행을 받들어 행하여[諸惡莫作, 衆善奉行] 그 기초를 튼튼히 다지면서, 다시 부처님 명호를 지성으로 간절히 염송하여 서방 왕생을 발원하면, 이 사바세계를 벗어나 극락세계에 가서 아미타불의 제자가 될 것이오.
이 사바세계가 똥통보다 더 더럽고 사악한 줄 통찰하며, 서방 정토가 우리들의 본래 고향 집임을 믿어야 하오. 그래서 금생이나 내생에 인간 세상이나 천상 세계에서 복락을 누리길 바라지 말고, 오직 이승의 과보가 다하여 목숨이 다하는 때 부처님의 자비로운 영접을 받아 극락왕생하기만을 발원하는 것이오. 아침이나 저녁이나 오직 이 염불에만 마음을 두어 염송이 지극하고 공덕이 순수해지면, 우리 정성의 감동과 부처님의 응답이 한 길로 서로 통하게 되오. 그러면 목숨이 다할 때 반드시 소원을 성취할 것이오. 정토에 왕생하면 단박에 무생법인을 깨닫게 되오. 그때 이 사바세계의 부귀영화를 되돌아본다면, 단지 불길이나 허공의 아지랑이 같을 뿐만 아니라, 감옥과 독약의 바다나 다름없을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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