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치와 사물(理事)
[리사(理事): 인연에 따라 생겨나는 유위법(有爲法)을 사(事)라 부르고, 인연을 떠난 불생불멸의 무위법(無爲法)을 리(理)라 한다. 사는 삼라만상의 모습이고, 리는 진여(眞如)의 본체이다. 노자(老子)의 유(有)와 무(無), 유위와 무위에 대체로 상응하는 범주이다.]
세간과 출세간의 이치는 마음과 성품(心性)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고, 세간과 출세간의 사물은 원인과 결과[因果]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소. 중생이 구계(九界: 육도와 성문·벽지불·보살)를 허우적거리나, 여래가 일승(一乘)을 증득하거나, 마음과 성품에는 조금도 줄어들거나 늘어남이 없소. 그런데 향상과 타락이 천양지차이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판이한 까닭은, 도대체 무엇이겠소? 원인의 자리[因地)에서 덕을 닦은 게 같지 않기 때문에, 결과의 자리[果地]에서 받아 누리는[受用] 보답이 각각 다른 것이라오.
불법을 펼쳐 전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소. 오직 이치와 성품만 따진다면, 중하근기의 보통 중생이 실제 이익을 받을 수 없게 되오. 그렇다고 인과의 사실만 오로지 말한다면, 최상근기의 선비들이 매번 듣기조차 싫어하게 되오. 그런즉, 인과와 심성을 서로 분리시키면 양자 모두 손상하고, 서로 합치면 둘 다 아름답게 되오.
그래서 몽동(夢東: 徹悟) 선사는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소.
“마음과 성품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인과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며, 인과 법칙을 깊이 믿는 사람은 결국 틀림없이 마음과 성품을 크게 밝힐 것이다.”
이는 이치로나 대세로나 당연한 말씀이오. 그런데 말법 시대의 중생은 근기가 형편없이 낮소. 선종이나 교종의 모든 법문은 오직 자기 힘에만 의지하기 때문에, 해오(解悟)조차 오히려 어렵다오. 하물며 증득하여 생사 해탈하기야 말할 나위가 있겠소? 오직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는 정토 법문만이,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을 지닌 자면 누구나, 오역(五逆) 십악(十惡)의 죄인까지 윤회를 영원히 벗어나 극락왕생하도록 이끌 수 있소. 이처럼 불가사의한 최상승의 법문은, 이치와 사물을 함께 언급하여 훈계하고 권장하여야 마땅하오.
정토 법문은 네 법계[四法界]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모든 사물의 모습[事相]은 전부 사사무애의 법계[事事無礙之法界]임을 모름지기 알아야 하오. 그래서 정토 법문을 배워 수행하는 사람은, 추상(관념)적인 이치에 집착하여 구체(실제)적인 사물을 팽개쳐서는[執理廢事] 절대로 안 되오.
[네 법계[四法界]: 법계란 범어로 달마타도(達磨駝都)로, 일체 중생의 몸과 마음의 본바탕을 뜻한다. 법계는 종파에 따라 다양한 관점과 종류로 구분하는데, 우선 크게 두 가지로 풀이된다. 첫째, 구체적 사물로 보면, 법은 모든 법(사물)을 뜻하고, 계는 구분 경계를 뜻한다. 모든 법이 각자 자기 바탕[自體]을 지니고 서로 나눠지는 경계가 있어 독자의 법계를 이루면서, 삼라만상의 총체도 또한 한 법계가 된다. 둘째, 추상적 이치로 보면, 진여(眞如)의 이성(理性)이 법계가 되는데, 진여 법성(眞如法性)·실상(實相)·실제(實際)라고도 부른다. 법상종과 화엄종의 해석인데, 여기서 계(界)는 원인[因)의 뜻과 성품[性]의 뜻을 함께 지닌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거룩한 진리[聖道]가 생겨나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법이 의지하는 불변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화엄종에서는 네 법계를 설정한다.
첫째, 모든 중생의 빛깔[色: 물질]과 마음[心] 등이 하나하나 다르게 나누어지는 사물의 법계[事法界], 둘째, 모든 중생의 빛깔과 마음 등 법이 비록 다르게 나누어지면서 동일한 바탕과 성품[同一體性]을 공유하는 이치의 법계[理法界], 셋째, 구체적 사물로 말미암아 추상적 이치가 드러나고, 이치에 근거하여 사물이 이루어져, 이치와 사물이 서로 걸림없이 융합하는 법계[理事無礙法界], 넷째 천차만별의 사물 법계 모두가 성품에 맞게 서로 회통 융합하여, 하나와 다수가 서로 같고, 큰 것과 작은 것이 서로 포용하면서, 끝없이 중첩하는 사물마다 걸림없는 법계[事事無礙法界]이다.]
일단 집착하면, 사물과 이치를 모두 상실하기 때문이오. 마치 사람들이 의근(意根: 생각하는 감각 기관)이 가장 훌륭한 줄만 알고서, 나머지 다섯 감각 기관(五根: 눈·귀·코·혀·몸)을 내팽개쳐 버린다면, 그 의근마저 존립할 여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오. 오직 구체적 사물을 통해 추상적 이치를 밝히고, 추상적 이치를 가지고 구체적 사물을 융합 회통(체계화)시켜야만, 비로소 허물이 없게 되오. 이른바 정토 법문의 요지는, 바로 사물을 온전히 갖추면서 이치를 꿰뚫는[全事卽理] 것이오. 이치와 사물이 원만히 융합(조화)할 때, 비로소 본체에 딱 들어맞게 되오. 대사께서 이미 임금의 진수성찬을 포식하신 줄 알면서도, 애써 초라한 나물 반찬 올리려 하는 뜻은, 단지 궁핍한 자식이 고향에 돌아가길 바라는 한 조각 성의이며, 또한 지난날 불법을 비방했던 허물을 깨끗이 씻어내려는 참회일 따름이오.
[대사: 인광(印光) 대사는 출가 스님에게 편지 쓰는 경우, 비록 당신보다 나이가 훨씬 적더라도, 반드시 ‘대사(大師)’ ‘사(師)’라는 호칭을 써 공경하였다. 이 글은 아마도 수행의 체험과 의문을 여쭌 젊은 스님의 서신에 대한 답신인 듯하다.]
요즘 총명한 사람들은 비록 불법을 배울지라도, 진정한 지혜의 눈을 갖춘 선지식을 가까이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의 다 추상적인 이치와 성품에만 오로지 치중하고, 구체적 일을 통한 수행[事修]과 인과 법칙은 내팽개치고 있소. 그렇게 구체적 일을 통한 수행과 인과 법칙을 내팽개치면, 이치와 성품도 함께 상실하기 마련이오. 그래서 으레히 재주가 뛰어난 인재들이 말과 글은 귀신을 깜짝 놀라게 하면서도, 그 행실을 살펴보면 길거리의 무식한 중생과 다를 바가 없소. 그 병폐의 근본 원인은, 모두 구체적 일을 통한 수행과 인과 법칙을 내팽개친 데서 비롯하오. 그래서 최상의 지혜로운 이들이 보면 단지 안타깝게 연민할 수 있을 뿐이며, 중하의 어리석은 이들이 보면 그를 본받아 망령된 짓을 따라하게 된다오. 이것이 이른바 ‘몸으로 불법을 비방[以身謗法]’하는 짓이니, 그 죄가 한량없소.
알기는 어렵지 않은데, 행하기가 정말 어렵소. 세상에 헛된 명예를 훔치려는 자[掠虛漢]들은, 마음과 부처와 중생 세 가지가 본래 차별이 없다는 이치를 주워듣거나, 또는 교법(경전)을 뒤적이거나 참선 좀 하여 이러한 이치를 깨닫게 되면, 바로 나와 부처가 같기 때문에 수행이나 증명(증득)이 더 이상 전혀 소용없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소. 그래서 모든 바깥 경계와 인연 가운데서 마음 내키는 대로 방종하면서, 제멋대로 지껄여 대기 일쑤라오.
“여섯 티끌[六塵: 빛·소리·냄새·맛·감촉·법]이 곧 깨달음이고, 탐욕·성냄·어리석음의 삼독이 바로 계율·선정·지혜의 삼학이거늘, 어찌 마음을 통제하고 몸을 단속할 필요가 있겠는가? 스스로 자신을 묶을 밧줄은 본디 없다.”
이러한 견해야말로, 이치에 집착해 사물을 내팽개치고, 인과 법칙을 부정하는 가장 나쁜 편견이오. 마치 떡을 그려 굶주림을 채우고, 허공을 휘저어 집을 만들려는 것과 같소. 자신만 그르칠 뿐 아니라, 남들도 망치게 하니, 그 죄가 어찌 끝이 있겠소? 이는 착한 원인으로 나쁜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에,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불쌍한 중생’이라고 부른다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텅 빈 말[空談]만 숭상할 뿐, 실천에는 힘쓰지 않는구료. 정토 법문 수행을 권함에는 마땅히 이치와 사실을 함께 병행하되, 특히 구체적인 사실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야 하오. 왜 그렇겠소?
이치를 훤히 아는 사람은, 사물을 온전히 갖추면서 이치를 꿰뚫기[全事卽理] 때문에, 온종일 사물을 통해 수행[事持]해도, 곧바로 온종일 이치에 맞는 수행[理持]이 되오. 그러나 이치와 사물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범부중생은, 이치에 따른 수행을 한번 들으면, 곧 매우 심오하고 미묘한 이치라고 감탄하오. 거기다 자기의 게으름과 염송의 번거로움에 대한 두려운 감정이 합쳐져, 결국 이치에 집착하여 사실을 내팽개치게 되는 것이오. 그렇게 사실을 내팽개치면, 남는 건 단지 텅 빈 말장난뿐이오.
우익(蕅益) 대사도 『아미타경요해(阿彌陀經要解)』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사실을 통한 염불 수행[事持]이란, 서방 아미타불의 존재를 굳게 믿되, 아직 이 마음으로 부처를 삼고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이치를 통달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래서 단지 결연한 의지로 왕생을 발원하니, 마치 길 잃은 아이가 어머니를 생각하듯, 잠시도 잊지 않고 간절히 지속한다.”
이것이 이치와 성품을 아직 통달하지 못해, 단지 구체적인 사실(명호를 지송하는 염불)로 수행하는 것이오. 또 “이치를 통한 염불 수행[理持]이란, 서방의 아미타불은 바로 내 마음이 갖추고 있고, 내 마음이 만들어 내는 줄 믿는 것이다.”고 하셨소. 마음이 갖추고 있다[心具] 함은, 자기 마음에 본디 이러한 이치가 갖추어져 있음을 뜻하오. 또 마음이 만들어 낸다[心造] 함은, 마음에 갖추어진 이치에 따라 수행을 시작하여야, 이러한 이치가 바야흐로 눈부시게 드러날 수 있다는 뜻에서, 만든다[造]고 하오.
마음이 갖추고 있음은 이치의 바탕[理體]이고, 마음이 만듦은 바로 사실적인 수행[事修]을 뜻하오. 또 마음이 갖추고 있음은 이 마음이 곧 부처임[是心是佛]을 가리키고, 마음이 만듦은 이 마음으로 부처를 짓는 것[是心作佛]이오. 이 마음으로 부처를 짓는다 함은 성품에 맞추어 수행을 하는 것[稱性起修]이고, 이 마음이 곧 부처라 함은 수행이 온전해져 바로 성품과 같아지는 것[全修在性]이오.
수행의 덕[修德]이 쌓여야, 성품의 덕[性德]도 바야흐로 빛을 드러내는 법이오. 비록 이치를 깨달았다 할지라도, 사실을 내팽개치지 않고 지속해야, 비로소 진실한 수행[眞修]이 되오. 그렇지 않으면, 금방 이치에 집착하여 사실을 내팽개치는 망령된 사견(邪見)으로 타락하고 만다오.
[이것이 바로 선오후수(先悟後修)가 진실한 수행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이 본디 갖추고 있고, 또 만들어 내는 위대한 명호(나무 아미타불)를 마음 붙들어 매는 경계(방편)로 삼아, 잠시도 잊지 말라.”고 하신 거요. 이러한 해석 방법은 일찍이 천고에 없던 것으로, 정말로 중생의 근기와 불법의 이치에 모두 딱 들어맞으며, 추상적인 이치와 구체적 사실이 원만히 융합하는 탁월한 식견이오. 우익 대사 같은 법신대사(法身大士)가 아니면, 누가 이런 경지까지 이를 수 있겠소?
사실적인 수행이 설령 아직 이치를 깨닫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이치 바깥으로 벗어날 수 있겠소? 사실적인 수행 자체도 이치 안에 존재하지만, 다만 수행인의 마음이 아직 그걸 원만히 깨닫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오. 그러다가 깨닫는 경지에 일단 이르면, 사실이 바로 이치가 될 터이니, 깨달은 이치가 사실 가운데 존재하지 않을 수 있겠소?
이치는 사실을 떠나지 않고, 사실 또한 이치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사실과 이치가 본디 둘이 아니오. 마치 사람의 몸과 마음은 둘이 함께 동시에 운행하며, 결코 피차간에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과 같소(몸과 마음이 나누어지는 순간 죽음이 되어, 양자는 각기 시체와 귀신으로 변한다. 시체란 마음(영혼·식심識心)이 떠난 몸이고, 귀신이란 몸을 떠난 마음(영혼·식심識心)이다.). 통달한 사람[達人]은 이치와 사실을 융합하지 않으려고 해도, 결코 그럴 수 없소. 단지 미치광이의 망령된 편견만이 이치에 집착하여 사실을 내팽개치고, 이치와 사실을 융합하지 못하는 것이오.
이 마음은 본디 허공처럼 두루 퍼져 있으며(공간상의 무한) 또한 끊이지 않고 항상(시간상의 무한) 존재하오. 우리들이 미혹하고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온갖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오. 비유하자면, 허공을 잠시 어떤 물건으로 가로막는다면, 허공은 더 이상 두루 펼쳐지지도 못하고, 항상 존재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이오. 그러나 두루 펼쳐지지도 않고 항상 존재하지도 않는 것은, 집착으로 말미암은 착각일 뿐이오. 어떻게 허공이 잠시 가로막은 물건 때문에, 정말 두루 펼쳐지지도 못하고, 영원히 존재하지도 못할 수 있겠소?
그래서 우리 범부 중생의 마음도, 여래께서 증득하신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마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범부 중생이 미혹하고 오염된 소치일 따름이며, 마음 본바탕이 원래 변화한 것은 아니오. 아미타불과 극락정토는 모두 우리들의 일념(一念) 심성(心性) 가운데 있소. 즉 아미타불이 내 마음에 본디 갖추어져 있소. 정말 우리 마음 안에 본디 갖추어져 있다면, 진실로 항상 사념(思念)해야 하리다. 그리고 항상 사념할 수 있다면, 감응의 길이 서로 뚫리게 되오.
그래서 후천적인 수행의 덕[修德]이 점차 쌓여 선천적인 성품의 덕[性德]이 바야흐로 드러나며, 사실과 이치가 원만히 융합하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닌 경지에 이를 수 있소. 이런 까닭에 “내가 갖추고 있는 부처의 마음으로, 내 마음에 갖추어진 부처를 사념하라.”고 말하는 것이오. 내 마음에 갖추어진 부처가, 어찌 내가 갖추고 있는 부처의 마음에 감응하지 않을 리가 있겠소?
선종에서 말하는 것은, 오로지 이치와 성품만 가리키며, 구체적인 사실 수행은 언급하지 않소. 왜 그런가 하면, 수행자들이 원인과 결과[因果], 수행과 증득[修證], 범부와 성인[凡聖), 중생과 부처[生佛]에 전혀 관련되지 않은 이치를 먼저 안 뒤에, 그 이치에 따라서 원인을 닦아 결과를 증득하고[修因證果], 범부를 초월하여 성인에 들며[超凡入聖], 중생으로서 불도를 이루는[卽衆生而成佛道] 사실을, 차례로 해 나가길 바라기 때문이오.
불법의 큰 요체를 논하자면,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의 두 도리[二諦]를 벗어나지 않소. 진제는 한 법도 존재하지 아니하고[一法不立], 티끌 하나도 받지 아니하는[不受一塵], 이른바 실제 이치의 자리[實際理地]라오. 반면 속제는 갖추어지지 않은 법이 하나도 없어서, 불사의 문 안에서는 한 법도 내버리지 않는다[佛事門中, 不捨一法]는 말로 대변할 수 있소.
[이제(二諦: 두 도리): 세속 사물[有]은 진리를 깨달은 성인에게는 허망하지만, 범부 중생에게는 실질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에 속제(俗諦)라 부른다. 반면 고요한 열반[涅槃寂靜]의 도리[空]는 범부 중생에게는 허망한 무(無)로 여겨지지만, 성인에게는 진실한 존재이기 때문에 진제(眞諦)라고 부른다. 제(諦)란 본디 실(알맹이, 실질)의 뜻으로, 진실한 도리는 허망하지 않다는 진실불허(眞實不虛)의 의미이다. 그래서 진리(眞理)·도리(道理)의 뜻으로 쓰인다. 유명한 사성제(四聖諦) 이외에, 삼제(三諦)와 팔제(八諦)도 있다.]
교종에서는 진제와 속제를 함께 펼치지만, 대부분 속제로 말하게 되오. 반면 선종에서는 속제로 진제를 말하면서, 속제의 모습을 깡그리 쓸어내 버린다오. 그러나 진제와 속제는 본래 같은 몸으로, 결코 서로 다른 두 물건이 아님을 알아야 하오.
비유하자면, 크고 둥근 보배 거울이 본디 한 물건도 없이 맑고 밝게 텅 비어 있지만, 오랑캐가 오면 오랑캐 모습이 나타나고, 왜놈이 오면 왜놈이 나타나며, 삼라만상이 모두 오면 삼라만상 모두가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오. 비록 수많은 모습이 모두 나타나지만, 거울에는 여전히 어떤 한 물건도 전혀 없소. 또 어떤 한 물건도 없으면서, 수많은 모습이 아무 거리낌 없이 모두 나타나오.
선종은 수많은 모습이 모두 나타나는 곳에서, ‘어떤 한 물건도 전혀 없다’는 이치만 오로지 강조하오. 반대로 교종은 ‘어떤 한 물건도 전혀 없다’는 곳에서, 수많은 모습이 모두 나타나는 현상을 상세히 말하는 것이오. 이는 선종이 구체적인 사실 수행에서[事修] 추상적인 이치와 성품[理性]을 밝히므로, 구체적인 사실 수행을 결코 내팽개치지 않음을 뜻하오. 마찬가지로 교종도 추상적인 이치와 성품에서 구체적인 사실 수행을 논하기 때문에, 결국 이치와 성품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하오.
이것이 곧 성품에 맞추어 수행을 하고[稱性起修], 수행이 온전해져 바로 성품과 같아지며[全修在性], 변함없이 인연에 따르고[不變隨緣], 인연에 따르면서 변함없다[隨緣不變]는 경지가 아니겠소? 구체 사실과 추상 이치가 모두 원만하며, 선종과 교종이 둘이 아닌 것이오.
염불 삼매(念佛三昧)라는 것은 말하기는 쉬운 듯한데, 실제로 몸소 얻기는 정말 어렵소. 단지 마음을 추슬러 간절히 염불하기를 꾸준히 오래 지속하다 보면, 저절로 얻어지게 되리다. 설사 현생에 염불 삼매를 얻을 수 없을지라도,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마음을 추슬러 청정하게 염불한 공덕은, 틀림없이 부처님의 영접 인도를 확실하게 받아, 업장을 짊어진 채로 극락왕생하게 될 것이오.
사일심(事一心: 사실상의 한결같은 통일된 마음)도 우익 대사께서 판단하신 내용으로 본다면, 오히려 현세 수행인의 신분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이일심(理一心: 이치상의 한결같은 통일된 마음)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소? 보고 생각하는 미혹[見思惑]을 모두 끊어야 바야흐로 사일(事一: 사실상의 통일)이 되고, 무명(無明)을 완전히 쳐부수고 법성(法性)을 증득하여야만 리일(理一: 이치상의 통일)이라 부를 수 있소.
만약 안으로 은밀히 보살행을 닦으면서 밖으로는 범부 모습을 드러낸다면, 이 두 가지 일심(一心) 모두가 정말 그리 어렵지 않소. 그러나 실제로 범부 중생에 불과하다면, 사일심도 오히려 얻기가 어려운 법이오. 하물며 이일심을 얻으려고 생각한단 말이오?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은 뒤, 이를 호지(護持)하고 보임(保任)하면서 남은 업습(業習)을 녹여 버리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자기 스스로 분명히 알 것이오. 그러므로 미리 누구에게 물어 볼 필요도 없소.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 보면, 차고 뜨거움을 스스로 알 수 있는 것과 같소[如人飮水, 冷暖自知.]. 물을 마신 사람이 설령 100% 정확히 물의 상태를 묘사해 낸다고 할지라도, 물을 마시지 않은 사람은 그 물이 무슨 맛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법이오.
그러니 무생법인 깨닫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하여, 혹시라도 자기가 깨달은 뒤 보임(保任)과 호지(護持)를 잘하지 못하여, 남은 업습에 다시 뒤덮이고 얻은 무생법인을 도로 잃을까 미리 염려할 필요는 없소. 진실한 무생법인은 정말로 그렇게 작거나 쉬운 게 아니오. 무명을 쳐부수고 법성을 증득하는 경지요. 최하의 경우에도, 원교(圓敎)의 초주(初住: 十住 중 첫 번째 發心住) 보살로, 별교(別敎)의 초지(初地)에 해당하거늘, 쉽게 말할 수 있겠소?
그러므로 내 글에서 말한 대로 열심히 수행하여, 정토 법문의 근본 이치를 모두 알고, 믿음·발원·염불수행[信願行]을 함께 확립하시오. 그래서 어떠한 선지식이나 이단 학설에도 휩쓸리거나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매진하시오. 그런 다음에 남는 힘이 있거든, 비로소 뭇 대승경론(大乘經論)을 연구하여 지혜와 식견을 틔우고, 정토 법문을 널리 펼치는 방편 근거로 삼아도 괜찮겠소.
이와 같이만 한다면, 비록 범부 중생이라도 보살도를 행하면서, 근기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할 수가 있소. 절대로 지나치게 높고 먼 곳에 뜻을 두려는 망상일랑 하지 마시오. 혹시라도 사실과 이치도 제대로 모르고 악마에 붙들릴까 두렵소. 나도 정말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소.
깨닫고 난 사람과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은, 비록 그 수행이야 같지만, 그 마음 생각[心念]이 판연히 다르다는 것을 모름지기 알아야 하오. 무생법인을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은, 바깥 경계가 아직 이르기도 전에 먼저 나아가 맞이하려 하고, 경계가 눈앞에 나타나면 거기에 달라붙어 끌어안으며, 경계가 이미 지나간 뒤에는 되돌아보고 생각하기 일쑤요.
그러나 무생법인을 깨달은 사람은, 비록 경계가 생겨났다 사라지더라도, 마음은 전혀 생기거나 사라짐이 없소. 마치 맑은 거울에 어떤 형체가 다가와도 달라붙지 않고, 또 사라져도 흔적이 남지 않는 것과 비슷하오. 마음이 경계에 반응을 보이는 것은, 거울이 사물의 모습을 비춰주는 것과 같소. 터럭 끝만큼도 집착이나 미련의 생각이 없다오.
(『금강경(金剛經)』에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으면 얻을 수 없는 과거·현재·미래의 마음에 집착함이 없어져, 대자유를 누리는 해탈의 불심(佛心)·도심(道心)과 합치하고, 무생법인을 아직 깨닫지 못하면 과거·현재·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여 집착하니, 이것은 바로 번뇌망상에 사로잡힌 중생심(衆生心)이고 인심(人心)이 된다.)
비록 경계에 대해 무심(無心)할지라도, 무릇 세간의 윤리 도덕과 불도를 펼쳐 중생을 교화하는 일은, 반드시 하나하나 성실하고 진지하게 실행해야 하오. 비록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이걸 건너뛰려 해서는 안 되오. 경계에 대해 무심하다고 해서,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고 불도를 펼쳐 중생을 교화하는 일까지, 모두 내팽개치는 것으로 오해하면 절대 안 되오.
만에 하나라도 이런 그릇된 견해를 지닌다면, 이는 공의 악마[空魔]에 단단히 들러붙어, 완고한 공[頑空: 이른바 無記空: 서양의 허무주의)에 타락한 것이오. 여기서부터, 인과 법칙을 전면 부정하고 제멋대로 방자히 굴기 시작하여, 범부 주제에 외람되이 성인으로 자처하면서, 불법을 파괴하고 중생을 잘못 인도하는, 아비지옥의 종자가 싹트게 된다오. 이 문제는 너무도 중요하고 심오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부득이 그 이해득실을 대강 언급하는 것이오.
만약 실제 이치의 본체로 논한다면, 범부와 성인, 중생과 부처, 원인과 결과, 수행과 증득 따위는 모두 얻을 수 없소. 그러나 수행 법문에 근거하여 말한다면, 여래가 위로 불도를 성취하고, 중생이 아래로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모두 인과 법칙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오.
이치와 성품[理性]을 분명히 밝히되, 사실 수행을 내팽개치지 않는 것이, 바로 올바른 지견[正知]이오. 반대로 이치와 성품에 집착하여 사실 수행을 내팽개친다면, 이는 곧 삿된 견해[邪見]가 되고 마오. 터럭 끝만한 차이가 (千里의 차이나 하늘과 땅 차이 정도가 아니라) 부처와 지옥의 차이로 금세 우뚝 갈라진다오.
마음과 성품[心性] (0) | 2023.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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