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깨달음과 증득[悟證]
예로부터 고승 대덕은 옛 부처 또는 보살의 화신(化身)으로 재림하신 분들이 많았소. 그분들은 모두 항상 자신을 범부 중생이라고 자처하셨지, 자신이 부처이고 보살이라고 말한 분은 결코 없소. 그래서 『능엄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가 열반한 뒤, 여러 보살과 아라한에게 미래 말법 세상 가운데 인연 따라 각종 형상의 몸을 나토어, 중생을 제도하는 법륜을 굴리도록 명하리라.(혹은 사문·백의거사·군왕·고관대작·동남(童男)·동녀(童女)가 되거나, 또는 창녀·과부나 간음·도둑·도살·장사하는 자가 되어,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불도를 찬양 칭송하여, 그들의 몸과 마음이 삼매에 들도록 이끌리라.) 그러나 스스로 자신이 진짜 보살이나 진짜 아라한이라고 말하여, 부처의 은밀한 인연을 누설하고, 말법 시대 천박한 공부를 가벼이 떠드는 일은 끝내 없을 것이다. 오직 임종에 은밀한 유언으로 부촉하는 경우만 제외하고….”
천태(天台) 지자(智者) 대사는 실로 석가 부처의 화신이오. 임종에 증득한 순위 차례를 질문한 제자가 있었는데, 이렇게 대답했다오.
“내가 대중을 거느리지 않았으면, 반드시 육근을 청정하게 닦았으리라. 자신의 수행을 덜어 남들을 이롭게 하느라, 단지 5품(品)까지밖에 오르지 못했다.”
이 말씀도 역시 범부로 자처한 것이오. 5품이란 곧 원교(圓敎)의 관행위(觀行位)요. 깨달은 바가 부처와 같은 범주에 속하고, 오주 번뇌(五住煩惱)를 원만히 조복했지만, 보는 미혹[見惑]도 아직 완전히 끊지 못한 상태라오.
지자 대사도 임종시까지 아직 본래 진면목을 다 드러내시지 않은 것이오. 후학들이 뜻을 더욱 굳게 다지고 수행에 정진하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였소. 혹시라도 조금 얻은 것 가지고 만족하거나, 범부 주제에 외람되이 성인으로 자처하여, 아만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훈계하시고자 함이었소.
그런데 지금 악마의 무리 가운데, 도를 얻었다고 기고만장하게 떠드는 자가 많소. 이는 모두 불법을 파괴하고 어지럽히며, 중생을 미혹시키고 호도하는 새빨간 거짓말쟁이[大妄語人]들이오. 이런 큰 거짓말의 죄악은 오역(五逆)이나 십악(十惡)보다 백천만 배 이상 더 중대하오. 그런 스승과 제자들은 모두 영원히 아비지옥에 떨어져, 모든 불국토의 티끌 수만큼의 겁[佛刹微塵數劫]이 지나도록, 벗어날 길 없이 항상 극심한 고통을 받을 것이오. 어찌하여 한 때의 뜬 구름 같은 명예나 이익을 위하여, 영겁토록 참혹한 형벌을 짊어진단 말이오? 명예와 이익이 이처럼 사람을 미혹시킨다오.
염불과 간경(看經)으로 두 가지 텅 빈 이치[二空理]를 깨닫고 실상법(實相法)을 증득한다 함은, 성찰하여 깨닫고 수행해 간다는 관점에서 현재의 원인과 미래의 결과를 보이는 것이오. 그러므로 아직 그릇을 다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현생에 바로 이와 같을 수 있다고 자부해서는 절대로 안 되오. 현생에 실상을 증득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선근(善根)을 지닌 이가 그리 많지 않소.
만약 이러한 사실을 상세히 알려 주지 않아, 어설픈 수행자들이 성인의 지위를 증득하려고 과대망상에 빠지게 내버려 둔다면, 뜻만 높고 행실이 따라가지 못하게 될 것이오. 그렇게 오래 지속하다 보면, 제 정신을 잃고 미쳐 날뛰면서, 얻지도 못했는데 얻었다고 떠들고, 증득하지도 못했는데 증득했다고 지껄일 것이오. 그래서 향상하려다가 도리어 타락하고, 잔재주 부리다가 더 졸렬해지는데, 궁극에는 영원히 삼악도에 떨어지는 과보를 피할 수 없게 되오. 그 결과 자기의 영혼만 고통에 파묻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부처님 은혜를 크게 저버리는 게 되오.
두 가지 텅 빈 이치[二空理]는, 오직 깨달음으로만 말한다면, 근기가 좀 뛰어난 범부도 가능하다오. 예컨대, 원교(圓敎)의 명자위(名字位) 가운데 속한 사람도, 비록 오주번뇌(五住煩惱)를 터럭 끝만큼도 조복시키거나 끊지는 못했지만, 깨달은 내용은 부처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오.(五住에는 보는 미혹[見惑] 하나와 생각하는 미혹[思惑] 3개가 세계 안에 있고, 진사혹(塵沙惑)과 무명혹(無明惑)이 합쳐 1개로 세계 밖에 있소.)
선종으로 말한다면 확철대오라고 부르고, 교종으로 말한다면 대개원해(大開圓解: 원만한 해오를 크게 열음)라 부르오. 여기서 말하는 확철대오와 대개원해는 그저 희미하게 대강 명료함이 결코 아니오.
예컨대, 방(龐) 거사는 “그대가 한 입에 서강(西江)의 물을 다 들이마시면, 그 뒤에 곧바로 그대에게 말해 주겠다.”는 마조(馬祖) 대사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단박 현묘한 이치를 깨쳤다오. 또 대혜(大慧) 종고(宗杲) 선사는 “훈훈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대웅전 법당이 조금 시원해진다.”는 원오(圓悟) 대사의 말을 듣고, 역시 단박에 깨달았다오.
그리고 지자(智者) 대사는 『법화경』을 독송하다가, 「약왕본사품(藥王本師品)」의 “이것이 바로 진짜 정진이고, 이것을 여래께 대한 진짜 법공양[眞法供養如來]이라고 부른다.”는 구절에 이르러, 활연히 크게 깨달았다오. 그리고는 고요히 선정에 들어, 영산법회(靈山法會)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습을 친견했다오.
이와 같이 깨달아야만, 비로소 확철대오나 대개원해라고 부를 수 있소. 실상법을 증득하는 것은, 보통의 범부 중생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오. 남악(南嶽) 혜사(慧思) 대선사는 지자 대사가 법을 전해 받은 스승이시오. 대지혜와 대신통을 지니셨는데, 임종에 어떤 제자가 증득한 내용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오.
“나는 애당초 동륜(銅輪)에 이르려고 뜻을 두었네. 그러나 대중을 너무 일찍 거느린 탓에, 단지 철륜(鐵輪)을 증득하는 데 그쳤네.”
(동륜이란 곧 십주위(十住位)로, 무명을 깨뜨리고 실상을 증득하는 경지인데, 처음에 실보(實報)에 들어가서, 점차 적광(寂光)을 증득하게 되오. 초주(初住)만 해도 무려 백 개의 삼천대천세계에 부처의 몸을 나토어 중생을 교화하며, 2주(二住)는 천 개, 3주(三住)는 만 개의 삼천대천세계로, 주위(住位)에 따라 점층적으로 확대되어 가니, 어찌 작다고 하겠소?
철륜이란 곧 제 10신(第十信)의 지위인데, 초신(初信)에서는 보는 미혹[見惑]을 끊고, 7신(七信)에서는 생각하는 미혹[思惑]을 끊으며, 8, 9, 10신에서는 진사혹(塵沙惑)을 깨뜨리고 무명혹(無明惑)을 조복시킨다오. 남악 혜사 선사가 제 10신에 이르렀다고 밝혔으니, 아직 실상법을 증득하지 못한 것이오. 만약 1품의 무명을 깨뜨려 초주(初住)의 지위를 증득했더라면, 비로소 실상법을 증득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오.)
지자(智者) 대사는 석가모니불의 화신이신데, 임종에 한 제자가 대사께서 어느 과위(果位)까지 증득하셨는지 여쭙자, 이렇게 대답했다오.
“내가 대중을 거느리지 않았다면, 반드시 육근이 청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덜어 남들을 이롭게 하느라, 단지 오품(五品)에 올랐다.”
또 우익(蕅益) 대사는 임종에 열반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명자위 가운데 진짜 부처님 안목을, 끝내 어떤 사람에게 당부해야 할지 모르겠다[名字位中眞佛眼, 未知畢竟付何人.].”
(명자위에 오른 사람은 여래장 성품을 원만히 깨달음이 부처와 똑같은 정도인데도, 보고 생각하는 미혹을 아직 조복 받지 못했으니, 하물며 끊었겠소? 말세에 확철대오했다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러한 신분이라오. 이치상으로는 비록 단박 깨달았다[頓悟]고 하지만, 미혹을 아직 조복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번 다시 생명을 받으면 자칫 길을 잃기 십상이오.)
우익 대사가 명자위(名字位)를 보이셨고, 지자 대사는 오품(五品)을 보이셨으며, 남악 대선사는 십신(十信)을 보이셨소. 비록 세 대사의 본바탕은 모두 헤아릴 길이 없지만, 그분들이 보이신 명자(名字)·관행(觀行: 五品)·상사(相似: 十信)의 세 과위를 보면, 실상(實相)을 증득하기가 결코 쉽지 않고, 후학이 선배를 초월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소.
이분들은 진실로 후학들이 증득하지도 못했으면서 증득했다고 착각하고 자랑할까 염려하여, 몸소 자신의 과위로 설법하셨소. 후학들이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고, 감히 망령된 자만심에 빠지지 못하도록 예방하기 위해서였소. 그러니 세 대사께서 임종에 당신들의 과위를 몸소 보이신 은덕은, 뼈가 가루가 되도록 몸을 부숴도 다 보답할 수 없다오. 과연 그대들이 이 세 대사를 초월할 수 있는지,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보시오.
만약 염불과 독경으로 선근을 잘 심고 가꾸어, 서방 극락에 왕생한 뒤에 항상 아미타불을 모시며 청정해회(淸淨海會)에 동참한다면, 그 공덕과 수행의 정도에 따라 빠르고 높은 차이는 있겠지만, 반드시 실상(實相)을 증득할 것이오. 이는 전혀 의심할 나위 없는 틀림없는 이치이며, 지금까지 극락왕생한 모든 분들이 함께 얻고 증명하는 사실이오.
깨달음[悟]이란 분명히 훤하게 아는 것이오. 마치 문을 열어 산을 보고, 구름이 걷혀 달이 보이는 것과 같소. 또 눈이 맑은 사람이 돌아갈 길을 몸소 보는 것과도 같고, 오랫동안 가난했던 선비가 갑자기 보물 창고를 연 것과도 같소. 증득[證]이란 마치 그 길을 걸어 집에 돌아가, 발길을 멈추고 편안히 쉬는 것과 같소. 또 얻은 보물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과도 같소.
깨달음은 마음이 큰 범부[大心凡夫]만 되어도 부처와 같을 수 있소. 그러나 증득은 초지(初地)에 오른 사람이라도, 바로 위의 이지(二地)가 어떻게 발을 들고 어디에 발을 딛는지조차 모른다오. 깨달음과 증득의 이러한 이치 차이를 안다면, 저절로 증상만(增上慢)도 일지 않으며, 후퇴 타락도 생기지 않을 것이며,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발원하는 마음은 만 마리의 소[牛]라도 만류하지 못하리다.
지자(智者) 대사는 세간에서 석가불의 화신이라고 일컬어지니, 증득하신 경지를 누가 알 수 있겠소? 그런데도 부처께서 중생을 위해 몸을 나토어 모범을 보이시면서, 몸소 범부로 자처하셨다오. 임종에 “내가 대중을 거느리지 않았다면, 반드시 육근이 청정했을 것이다.”고 하신 말씀은, 자신의 경지로 후학들을 훈계한 현신설법(現身說法)이오.
대사는 애시당초 미혹을 끊고 진여를 증득하여, 곧장 등각(等覺)의 경지에 오르려고 뜻을 세웠다오. 그런데 불법을 펼쳐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당신의 선정(禪定) 공부를 많이 거르게 되어, 원교(圓敎)의 오품 관행위(五品觀行位)를 증득하는 데 그치셨소. 그래서 “자신을 덜어 남들을 이롭게 하느라, 단지 오품밖에 오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소.
오품(五品)이란 수희(隨喜)·독송(讀誦)·강설(講說)·겸행육도(兼行六度: 육바라밀을 아울러 행함)·정행육도(正行六度)의 다섯 가지라오. 원교의 오품위(五品位)는, 여래장의 성품을 깨달음이 부처의 깨달음과 전혀 다르지 않소. 보는 미혹·생각하는 미혹·진사혹(塵沙惑)·무명 등의 번뇌를 원만히 조복하였으되, 보는 미혹조차 아직 완전히 끊지는 못한 경지라오.
만약 보는 미혹을 완전히 끊으면, 초신(初信)을 증득하오. 또 칠신(七信)에 이르면 생각하는 미혹도 완전히 끊기어, 육근을 마음대로 사용하여도 육진(六塵)에 오염되지 않는 실제 증명(實證)을 얻게 되오. 그래서 육근청정위(六根淸淨位)라 부르오. 또 각각의 근(根: 감각 기관) 가운데 육근의 공덕을 두루 갖추어 육근불사(六根佛事)를 할 수 있소. 그래서 육근호용(六根互用)이라고도 부르오. 『법화경』의 「법사공덕품(法師功德品)」에서 말한 대로라오. 남악 선사가 바로 이 경지에 이르렀다고 보이셨소.
[공자가 논어에서 자신이 “칠십 세에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게 되었다[七十從心所欲不踰矩: ‘마음이 종용(從容)스러워, 하고 싶은 게 법도에 어긋나지 않다’고 해석하는 이견도 있음].”고 술회한 경지가, 내용상 적어도 여기서 말하는 7신(信)의 육근청정위일 것으로 필자는 감히 추정해본다.]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고 본다는 ‘관세음(觀世音)’ 명호나, 공자가 ‘아침에 도를’ 얻거나 깨닫지 않고 단지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고 감탄한 말씀이 바로 육근호용의 대표적인 실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은, 단지 대지혜를 지닐 뿐만 아니라, 대신통도 가진다오. 그 신통력은 소승의 아라한이 감히 견줄 수도 없을 정도라오. 그래서 남악 선사는 생전이나 사후 모두 불가사의한 일(기적)들이 많아, 보고 들은 사람들에게 모두 깊은 신심을 불러 일으켰다오.
남악 선사와 지자 대사 같은 분은 모두 법신대사(法身大士)이시니, 그 분들이 실제 증득한 지위가 얼마나 높고 깊은지, 누가 헤아릴 수 있겠소?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단지 앞으로 도를 배우는 데 전념으로 정진할 후학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대강의 곡절만 밝히는 것뿐이오. 그분들이 어찌 정말로 십신상사위(十信相似位)나 오품관행위(五品觀行位)를 증득하는 데 그쳤겠소?
우리 같은 범부 중생이 어떻게 감히 그분들을 흉내나 낼 수 있겠소? 우리들은 그저 중요한 계율을 거칠게나마 대강 지키면서, 일심으로 염불하고, 아울러 세간의 선행을 두루 쌓는 것으로 보조 수행을 삼으면 충분하리다. 영명(永明) 대사나 연지(蓮池) 대사의 법문에 따라 행하기만 하면, 이롭지 않을 게 전혀 없을 것이오. 불교 모든 종파의 수행 법문은, 반드시 진실한 수행이 일어나 알음알이 분별이 끊어지는[行起解絶] 지경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실제 이익이 있게 되오. 단지 정토 법문의 관상(觀想) 수행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오.
선종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화두(話頭: 말머리)를 마음속에 간직하며, 마치 목숨이나 사주처럼 여기오. 시간과 날짜를 따지지 않고 늘상 참구하여, 몸과 마음 세계를 모두 알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바야흐로 확철대오하게 되니, 이 또한 수행이 일어나 알음알이가 끊긴 지경이 아니겠소? 육조 혜능 대사가 단지 『금강경』 한 구절을 듣고, 곧장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볼[明心見性] 수 있었던 것도, 수행이 일어나 알음알이가 끊긴 지경이 아니겠소?
내 생각에는 수행이 일어난다는 ‘기(起)’ 자는, 의미상 마땅히 수행이 지극해진다는 ‘극(極)’ 자로 써야 할 것 같소. 오직 지극하게 공부에 힘써야만 주체[能]와 객체[所: 사물 대상] 두 가지를 모두 잊고, 한 마음[一心]이 철저히 드러나기 때문이오. 만약 수행이 지극하지 못하다면, 비록 관상하고 염불할지라도 주체와 객체가 있게 되어, 완전히 범부의 감정으로 일하는 것이고, 완전히 지식 분별이 되고 마오. 완전히 알음알이 분별에 불과한데, 어떻게 진실한 이익을 얻을 수 있겠소?
오직 수행 공부가 지극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주체와 객체, 감정과 식견이 모두 소멸하고, 본래 지닌 진짜 마음[眞心]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오. 그래서 옛날에 죽은 나무 같던 사람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 도풍(道風)이 고금에 걸쳐 휘황찬란히 빛나게 된 것도, 모두 지극함[極] 한 글자에 있을 따름이오. 이익을 잘 얻을 줄 아는 사람은 가서 이익 아닌 게 없으며, 손해를 달게 받는 자는 가서 손해 아닌 게 없소. 요즘 사람들은 늘상 세간의 분별적인 총명 재주로 불학(佛學)을 연구하다가, 이치의 길[義路]만 조금 트이면 곧 몸소 증득[親得]했다고 일컫기 일쑤요.
그때부터 스스로 높은 경지에 있는 걸로 여기고, 고금의 인물들을 모두 무시한다오. 현재의 사람들이 자기 안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소. 천수백 년 동안 계속 세간에 출현하신 고승 대덕들은, 대부분 옛 부처님들이 다시 오셨거나 법신 보살들이 나토신 화신(化身)이신데도, 그는 이런 분들조차 본받을 게 없는 평범한 인물로 치부하고 만다오. 아직 증득하지 못했으면서도 증득했다고 말하는 자가 오죽하겠소?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보면 구천(九天)을 꿰뚫을 정도로 고상하지만, 마음을 살펴보면 비열하기가 구지(九地: 황천) 아래로 떨어질 정도라오.
이렇듯이 더럽고 나쁜 버릇은 통절히 제거해야 마땅하오. 그렇지 않으면, 제호[醍: 우유에서 정련한 최고급 精味]를 독그릇에 담는 것처럼,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다오. 만약 한 생각을 되돌이켜 자기 마음을 살피고 궁리할 수 있다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문만이 유익한 게 아니오. 돌이나 벽돌, 등잔 갓과 이슬, 심지어 대지에 널려 있는 온갖 모습과 빛깔과 소리까지, 어느 것 하나 제일의제(第一義諦)의 실상 묘리(實相妙理)가 아닌 게 없다오. 독실하게 믿고 힘써 실행하기 바라오.
꿈속에서 불보살님의 가피를 받는 일은, 숙세에 착한 뿌리를 심었다고 할 수 있는 몹시 희귀한 체험이오. 그러나 모름지기 계속 전전긍긍하며 스스로 수행에 힘써야, 그러한 꿈이 끝내 헛되지 않게 되오. 만약 범부 중생의 식견으로 크나큰 자만심을 일으켜, “나는 이미 삼보의 가피를 받았으므로, 벌써 성인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망령된 말을 지껄이면서, 아직 증득하지도 못한 주제에 이미 증득했다고 자처한다면, 이는 착한 원인을 가지고 악한 결과를 불러들이는 게 되오.
말법 시대의 중생은 마음과 지혜가 너무 낮고 보잘것없어서, 늘상 이러한 병폐를 범하기 마련이오. 『능엄경』에서 “성인이라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곧 훌륭한 경계이다. 만약 성인이라고 생각하면, 곧장 뭇 사악의 침범을 당하리라[不作聖心, 名善境界, 若作聖解, 卽受群邪.].”고 말씀하신 게 바로 이것이오. 정토법문을 힘써 수행하는 데에 스스로 분발하고 격려하길 권하오. 그러면 장래에 틀림없이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될 것이오.
염불 수행의 중점은 극락왕생에 있소. 그렇지만 염불이 지극하면 또한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볼[明心見性] 수도 있으니, 염불 수행이 현세에 전혀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오. 옛날 명(明) 나라 때 교숭(敎崇) 선사는 매일 관세음보살의 성호를 십만 번씩 염송했는데, 나중에는 전혀 배우지도 않은 경서(經書)를 모두 알게 되었다오.
『정토십요(淨土十要)』와 『정토성현록(淨土聖賢錄)』을 읽어 보면, 비로소 염불의 미묘함을 알 수 있거니와, 나도 이미 누차 언급한 적이 있소. 그런데도 염불 수행이 현세에 전혀 이익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토 경론(淨土經論)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내 글도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대충 스쳐보고 만 까닭이오.
적광정토(寂光淨土)는 비록 바로 이 자리가 맞다[當處卽是]고 하지만, 그러나 지혜가 궁극까지 끊어 버리고 비로자나 법신을 원만히 증득한 자가 아니면, 철저하게 몸소 받아 쓸 수 없소. 원교(圓敎)의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등각(等覺) 등 41지위도 오히려 차례로 나누어 증득[分證]하는 단계라오. 만약 누가 비로자나 법신을 원만히 증득한다면, 이 자리가 바로 적광정토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오. 그러나 혹시라도 그렇지 못하다면, 이는 밥을 말로만 먹고 보배를 손으로 세기만 하는 것과 같아서, 굶주려 죽음을 면할 수 없소.
이치와 사물(理事) (0) | 2023.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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