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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성품[心性]

인광대사가언록. 궁금증 풀고 정견으로 정진하세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1.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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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음과 성품[心性]

 

무릇 마음이란, 고요하게 비추면서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확연히 뚫려 신령스럽게 통하고 걸림없이 원만하게 생기발랄하며, 세간과 출세간의 일체 모든 법의 근본이 되오. 비록 미혹으로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범부 중생의 처지에 있더라도, 마음의 본 바탕은 곧장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전혀 다름없이 똑같다오. 그래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오.

다만, 모든 부처님은 궁극의 경지를 증득하여, 그 공덕과 위력의 작용이 철저하게 온전히 드러나는데, 범부 중생은 온통 미혹과 위배(違背: 불성을 어기고 등짐)로 뒤얽혀, 이러한 공덕과 위력의 작용을 가지고 육진(六塵)의 경계 속에서 탐욕·성냄·어리석음을 일으키고, 살해·도적·사음 따위의 죄악을 짓는 것뿐이오. 그래서 미혹과 죄업과 고통의 세 가지는 서로 끌어당겨 일으키면서, 원인과 결과가 끊임없이 뒤바뀌며 이어진다오. 그러니 영겁토록 윤회 고해를 빠져 나올 길이 있겠소? 마치 캄캄한 방에서 보배에 부딪치면, 보배를 알아보고 쓰기는커녕, 도리어 몸만 다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오. 미혹한 마음이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 속에 뒤섞이는 것도 이와 같소.

여래께서 이러한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어, 중생이 허망에서 빠져나와 진리로 되돌아오고, 본래의 마음과 성품을 회복할 수 있도록 미묘한 법을 설하셨소. 처음에는 허망 가운데 진리를 궁구하다가, 나중에는 전체 허망이 그대로 진리가 되오. 마치 바람이 자면 물결이 잔잔해지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얼음이 녹는 것과 같소. 물결과 얼음 자체가 물이 되는 것이니, 물결이나 얼음이 물과 더불어 본래 서로 다른 새 물질이 아니지 않소? 아직 물결이 잔잔해지고 얼음이 녹기 전과, 이미 잔잔해지고 녹은 뒤를 서로 비교해 봅시다. 그 본체와 성품은 전혀 다르지 아니한데, 각각 나타내는 작용은 정말로 현격히 차이 나는 것이오.

그래서 후천적인 수행의 덕이 쌓여야, 선천적인 성품의 덕이 바야흐로 드러난다[修德有功, 性德方顯]고 말하오. 만약 오직 선천적인 성품의 덕에만 의지하고, 후천적인 수행의 덕에 힘쓰지 아니한다면, 미래세가 다하도록 영원히 단지 불성만 지녔을 뿐, 조금도 믿고 기댈 게 없는 중생 노릇 밖에 못하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적에, 오온이 텅 빈 것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액(고통과 재앙)을 건넜다.”고 말씀하신 것이오. 무릇 오온(五蘊)은 그 전체가 바로 진여의 미묘한 마음[眞如妙心]이오. 다만 중생이 처음부터 줄곧 미혹하고 등져 왔기 때문에, 허망한 모습을 이루는 것이오. 허망한 모습이 일단 이루어지면 하나의 진여가 어두워지게 되고, 하나의 진여가 어두워지면 모든 고통이 함께 몰려들게 되오.

마치 바람이 불면 모든 물이 온통 물결을 이루고, 날씨가 추워지면 부드럽던 물이 금세 굳게 얼어붙는 것과 같소. 매우 깊은 반야(지혜)로 비추어 보면, 진리[佛性]를 잃어 허망[衆生]을 이루었기에, 허망 자체가 그대로 진리임을 분명히 알게 되오. 마치 바람이 멈추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물결과 얼음이 물의 본래 바탕을 회복하는 것처럼 말이오.

그래서 일체의 법이 모두 허망한 감정으로 말미암아 나타남을 알 수 있소. 만약 허망한 감정만 떠난다면, 그 자체가 완전히 텅 비게 될 것이오. 그런 까닭에 사대(四大: 地水火風)가 모두 본래 성품을 잃고, 육근(六根: ·····생각)이 서로 뒤바뀌어 쓰일 수 있소. 보살이 고요한 선정에서 일어나지 아니한 채 온갖 위엄과 행동을 나타내며, 눈으로 귀의 불사(佛事)를 하는가 하면, 귀로 눈의 불사도 하는 것이오.

 

[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명칭은 세상의 소리를 본다는 뜻이고, 공자가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전제한 조문도(朝聞道) (진리)을 듣는다는 뜻이다. 바로 허망한 감정을 완전히 떠나 텅 빈 마음을 증득한 성인의 경지에서 가능한 일(표현)이다. 단순한 문학적 비유나 수사(修辭)로 치부하면 큰 오해이다.]

 

땅 속에 들어가기를 물속처럼 여기고, 물 위에 걷기를 땅 위처럼 한다오. 물에 젖지도 않고 불에 타지도 않으며, 허공에 마음대로 날아다니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오. 경계란 본디 자기 성품[自性]이 없으며, 모두 마음에 따라 움직이고 변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능엄경 만약 한 사람이 진여를 발하여 근원으로 돌아가면, 시방 허공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若有一人 發眞歸元, 十方虛空 悉皆消殞.].”고 말씀하셨소. 바로 오온이 모두 텅 빈 줄 비추어 본다는 실질 효과에 해당하오. 여기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빛을 되돌이켜 거꾸로 비춰 보고[廻光返照], 본래의 마음과 성품을 되찾는다[復本心性]는 뜻이오.

물론 빛을 되돌이켜 거꾸로 비춰 보고, 본래의 마음과 성품을 되찾으려 한다면, 먼저 마음을 삼보께 귀의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지 않으면 안 되오. 마음을 삼보께 귀의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받들어 행할 수만 있다면, 저절로 본래 마음의 근원을 되찾고 불성을 철저히 증득할 수 있소.

그렇게 본래 마음의 근원을 되찾고 불성을 철저히 증득하게 되면, 바야흐로 자기 마음이야말로 미혹 속에서도 결코 줄어들지 않고, 깨달았다고 조금도 늘어나는 법이 없는, 지극한 보배인 줄 알게 되리다. 부처는 단지 법성(法性)에 순응하는 까닭에 자유자재로 내어 쓸 수 있고, 중생은 법성에 위배하기 때문에 도리어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이오. 본바탕은 하나이면서, 그 작용으로 말미암은 이해득실은 천양지차가 나는 것이오.

중생이란 아직 깨닫지 못한 부처이고, 부처란 이미 깨달은 중생이오. 그 마음과 성품의 본바탕은 한결같이 평등하여, 둘도 아니고 차별도 없소. 그런데 받아 쓰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천양지차로 벌어지는 것이오. 부처는 성품에 맞추어 순조로운 수행을 하고, 중생은 성품에 등진 채 거스르는 수행을 하기 때문이오.

그 이치는 매우 심오하여 쉽사리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말을 아끼기 위해서 간단한 비유로 밝혀 보겠소. 모든 부처님께서 수행의 덕을 지극히 쌓아 성품의 덕을 철저히 증득함은, 이렇게 비유할 수 있소. 크고 둥근 보배 거울이 구리로 만들어졌는데, 광명이 있는 줄 알고 매일 갈고 닦는 일을 끊임없이 계속한다면, 해묵은 티끌과 녹이 다하는 순간 빛이 훤히 날 것이오. 이걸 높은 누각에 우뚝 걸어 놓으면, 크게는 천지부터 작게는 터럭 끝까지, 삼라만상 모두를 밝게 비추게 되오. 삼라만상의 모습이 일시에 나타나는 때에도, 거울 자체는 텅 비어 어떤 한 물건도 없소.

모든 부처님의 마음도 또한 이와 같다오. 번뇌와 미혹의 업장을 완전히 끊어 버려, 지혜와 복덕의 모습이 원만히 빛나는 것이오. 그래서 미래세가 다하도록 고요한 광명[寂光]에 안주하여 법의 즐거움[法樂]을 누리면서, 구계(九界) 중생이 생사에서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도록 제도하신다오.

반면 중생은 선천적인 성품의 덕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후천적인 수행의 덕도 전혀 쌓지 않고 있소. 마치 아주 귀중한 보배 거울이 온통 티끌에 뒤덮여, 전혀 광명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구리 몸통마저 녹슬어 거울인지도 알아 볼 수 없는 상태와 같소. 우리 중생의 마음이 바로 그러하오.

만약 구리 몸통조차 드러나지 않는 못 쓰는 거울이, 천지 만물을 비출 수 있는 광명을 머금고 있는 줄 알아차리고, 이를 내버리지 않고 매일 정성 들여 갈고 닦는다면, 처음에는 구리 바탕이 대강 윤곽을 드러내다가, 점차 거울 본연의 광명을 발하게 될 것이오. 계속해서 힘껏 갈고 닦아, 일단 티끌과 때를 말끔히 제거하기만 하면, 저절로 천지 만물을 모습 그대로 비추어 주는 훌륭한 거울의 본 모습이 회복될 것이오.

이 광명은 거울이 본래 지니던 것이며, 결코 밖에서 들어온 것도 아니고, 갈고 닦아서 얻어진 것도 아니오. 물론 갈고 닦지 않는다면 되찾을 수 없을 것이오. 중생이 티끌을 등지고 깨달음에 나아가며, 허망함을 되돌이켜 진여를 회복하는 것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라오. 점차 번뇌와 미혹을 끊어 가면서, 점차 지혜 광명을 늘려 가는 것이오.

그렇게 계속하여 공덕 수행이 원만해지면, 마침내 끊어도 더 이상 끊을 게 없고, 증득해도 더 이상 증득할 게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되오. 보리가 원만히 이루어져 얻을 게 없는 곳에 돌아가면, 신통 지혜와 공덕 상호(相好)가 모두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전혀 차이 없게 된다오. 비록 그러하지만, 이는 단지 본래 있던 바를 회복하는 것뿐이며, 결코 없던 바를 새로 얻는 것은 아니오. 그러므로 만약 오직 선천적인 성품의 덕만 믿고 후천적인 수행의 덕을 쌓지 않는다면, 미래세가 다하도록 항상 생사윤회의 고통을 받으면서, 본래 근원에 되돌아갈 날이 영원히 없을 줄 명심하시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는데도, 부처와 중생이 마음과 행동상 받아 쓰는 것이 전혀 같지 않음은 무슨 까닭이겠소? 부처는 티끌을 등지고 깨달음에 부합[背塵合覺]하는 반면, 중생은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과 영합[背覺合塵]하기 때문이오. 불성은 비록 같지만, 미혹과 깨달음이 판연히 다르기 때문에, 그 괴로움과 즐거움, 상승과 타락이 천양지차로 벌어진다오.

만약 세 가지 원인 불성[三因佛性]의 의미를 상세히 살펴 볼 줄 안다면, 풀어지지 않을 의심이 없고, 수행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없게 될 것이오. 세 가지 원인[三因]이란 바로 정인(正因요인(了因연인(緣因)이오.

정인불성(正因佛性)이란, 곧 우리 마음 자체에 본래 갖추어진 미묘한 성품이자, 모든 부처님이 증득하신 진여 항상의 법신[眞常之法身]이오. 이는 범부에게도 줄어듦이 없고, 성인에게도 늘어남이 없이 항상 불변이오. 생사윤회에 처박혀서도 오염되지 않고, 열반에 안주해서도 더 청정해지지 않소. 중생은 이를 철저히 등지고 잃은 반면, 모든 부처님은 궁극 경지까지 원만히 증득하셨소. 그렇게 미혹과 증득이 판연히 다르지만, 이 불성은 항상 평등하오.

다음으로 요인불성(了因佛性)이란, 정인불성이 발생시키는 올바른 지혜[正智]를 가리키오. 즉 더러는 선지식을 통해서, 더러는 경론의 교법을 통해서, 정인불성의 의미를 보고 들어 이를 완전히 깨닫는 것을 뜻하오. 그런데 중생은 일념의 무명[一念無明]이 마음의 근원[心源]을 뒤덮어 버리기 때문에, 육진(六塵)의 경계가 그 자체 본래 텅 빈 줄을 모르고, 실제 있는 걸로 착각하오. 그래서 탐욕·성냄·어리석음의 삼독을 일으키고, 살해·도적·사음의 죄악을 짓는 것이오. 미혹으로 말미암아 죄업을 짓고, 죄업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거라오. 그래서 정인불성(正因佛性)으로 하여금, 도리어 미혹을 일으키고 죄업을 지어, 고통을 받는 근본 원인이 되게 만드는 거라오. 이러한 이치를 철저히 깨달아, 마침내 허망을 되돌이켜 진여로 돌아가고자[反妄歸眞] 한다면, 본래 성품[正因佛性]을 회복할 가망이 있소.

마지막으로 연인불성(緣因佛性), ()이 바로 보조 연분[助緣]이오. 이미 이러한 이치를 철저히 깨달았다면, 모름지기 각종 착한 법[善法]을 닦고 행하여, 미혹과 업장을 소멸시키고 복과 지혜를 증진시키려고 노력해야 하오. 깨달은바 본래 갖추어진 이치(불성), 기어코 궁극 경지까지 몸소 증득하고야 마는 것이오.

이제 간단한 비유로 설명합시다. 정인불성(正因佛性)이란 마치 광맥 중의 금[]이나 나무 속의 불[]과 같으며, 또 거울 속의 빛[]이나 곡식 종자 중의 싹[]과 같소. 이러한 것들이 비록 본래 갖추어져 있지만, 만약 그런 줄 몰라서, 금광을 제련하고 나무를 마찰하며 거울을 갈아 닦고 곡식을 심어 물을 주는 등의 보조 연분을 조성해 주지 않는다면, 금과 불과 빛과 싹은 영원히 피어날 기약이 없을 것이오.

그래서 비록 정인(正因)이 제아무리 훌륭히 갖추어져 있더라도, 그런 이치를 깨닫지[了因] 못하거나, 보조 연분[緣因]이 더불어 주지 못한다면, 제 기능을 발휘하거나 사용할 수가 없게 되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인 줄 알아보시고, 해탈하도록 제도하시려는 것이라오. 그런데도 중생은 아직 깨닫지 못해, 착한 법을 닦고 행하려 하지 않으며, 영겁토록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고통받는구료. 이에 여래께서 대자비로 불쌍히 여기시고, 온갖 방편 법문을 널리 펼치시어 근기에 맞는 길을 열어 주셨소. 그리고 모든 중생이 하루 빨리 허망을 되돌이켜 진여로 되돌아오며, 티끌을 등지고 깨달음에 합치하기를 손꼽아 기다리신다오.

옛 사람들이 생사는 참으로 큰 문제이니, 어찌 비통하지 않으리오?”라고 탄식하셨소. 그런데 나는 그 이유를 모르면, 비록 비통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싶소. 일체 중생은 업장에 따라 육도를 윤회하면서 생사를 받는 것이라오. 생겨나면서도 오는 곳을 모르고, 죽으면서도 가는 곳을 모르오. 단지 죄악과 복덕의 인연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뿐이오.

여래께서 이를 불쌍히 여기시어, 중생이 미혹으로 말미암아 악업을 짓고 악업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불러들이는 인연과, 항상[안락[대아[청정[]의 네 덕성을 갖추고 고요히 비추며 원만히 융통하는[寂照圓融] 본체를 함께 보여 주셨소. 중생이 무명 때문에 이 몸을 받은 줄 알라고 일깨우신 것이오.

 

[네 덕성[四德]: 대승의 열반의 본체가 갖추는 네 덕이다. 첫째, 열반의 본체는 생멸(生滅)이 없이 항상 불변하며 인연 따라 변화 작용 또한 항상 끊이지 않아서 상()이고, 둘째, 고요히 안락하며 마음에 맞게 자유자재로 운용하니 낙()이며, 셋째, 본체가 진실한 주체이며 작용이 자유자재롭기에 아()라고 부르고, 넷째, 일체의 때와 티끌을 벗어나고 인연 따라 오염되는 법도 없으니 정()이라 한다. 반대로 중생의 생사(生死) 윤회는 무상(無常무락(無樂무아(無我무정(無淨)이다. 범부가 열반의 네 덕과 생사의 네 무()를 서로 뒤바꾸어 생각하는 망견(妄見)을 사도(四倒)라고 한다.]

 

결국 물질로 된 이 몸[色身]은 완전히 허망한 환영(幻影)에 속하는 것이오. 사대(四大)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온 또한 모두 텅 비었소. 오온이 텅 빈 줄만 안다면, 진여 법성(眞如法性)과 실상 묘리(實相妙理)가 철저하고 원만히 나타나게 되리다.

연분에 따르기[隨緣] 때문에, 사성(四聖: 부처·보살·벽지불·성문)과 육범(六凡: 육도 중생), 생사의 고통과 열반의 즐거움이 현격히 차이 나는 것이오. 연분에는 오염과 청정이 있어, 반드시 어느 하나에 따르게 되어 있소. 오염된 연분에 따르면, 미혹을 일으키고 악업을 지어 육도 윤회하게 되오. 반면 청정한 연분에 따르면, 미혹을 끊고 진여를 증득하여, 항상 열반에 안주하게 되오.

미혹과 악업에 경중의 차이가 있기에, 인간과 천상의 착한 곳[善道]이나, 아수라같이 선악이 뒤섞인 곳[善惡夾雜道], 축생·아귀·지옥의 세 나쁜 곳[三惡道]으로 나누어지오. 미혹으로부터 미혹을 일으키고, 업장으로부터 업장을 지어가며, 더러 착하기도 하고 더러 악하기도 하며, 일정한 모습이 없소. 그러면서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가듯, 잠시 위로 올라갔다가 금세 아래로 내려오는 변화 이동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소. 번뇌와 미혹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주인 노릇할 엄두도 못 내면서, 모두 업장에 따라 생사를 받아야 하는 운명에 얽매이는 것이오.

반면 사성(四聖)도 미혹을 끊고 진여를 증득한 깊이와 정도에 차이가 있소. 보고 생각하는 미혹[見思惑]을 끊으면 성문의 과위(果位)를 증득하고, 업습의 기운[習氣]을 뿌리 뽑으면 벽지불[緣覺]의 과위를 증득하며, 무명(無明)을 쳐부수면 보살의 과위를 증득하게 되오. 더 나아가 무명이 말끔히 사라져 복덕과 지혜가 원만히 이루어지고, 수행의 덕이 지극히 쌓여 성품의 덕이 완전히 드러나면, 곧 부처의 과위를 증득하오.

부처의 과위를 증득함도, 범부 중생의 지위에서 본래 갖추고 있던 마음과 성품의 공덕 위력을 궁극까지 철저히 증득하여, 그 전체를 고스란히 몸소 받아 쓰는 것에 불과하오. 실제로는 처음 바탕에 터럭 끝 하나도 덧보태는 게 없소. 성문·벽지불·보살 같으면, 비록 증득한 과위의 높낮이가 다르지만, 모두 부처처럼 본래 성품이 지닌 공덕 위력을 통째로 완전히 받아 쓰지는 못하는 경지라오. 물론 범부 중생은 이처럼 불가사의한 마음과 성품의 공덕 위력을 가지고, 도리어 육진(六塵) 속에 뒹굴며 탐욕·성냄·어리석음을 일으키고, 살해·도적질·사음 따위의 악업을 짓는다오. 그래서 삼악도에 떨어져 영겁토록 윤회하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무릇 시작도 없는 과거부터 끝도 없는 미래에 걸쳐, 태허(太虛: 우주 허공)를 감싸면서도 바깥이 없고, 미세한 티끌에 스며들면서도 안이 없으며, 청정하고 깨끗이 빛나며, 맑고 고요해 항상 존재하며,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으며, 모습도 떠나고 이름도 떠나서, 있음에 존재하되 있음이 아니고, 텅 빔에 머물되 텅 빔도 아닌 것이, 바로 진여성품[眞性]이라오.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루어진 몸을 뒤집어쓰고, 뼈와 힘줄··살이 모여 생겨났다 금방 사라지고, 한창 무성하다가 곧 시들어버리는 것은 무엇이오? 나무로 집 기둥을 세우듯 뭇 뼈가 지탱하고, 종이로 벽을 바르듯 한 겹 피부가 바깥을 둘러싸며, 그 안에 똥·오줌··고름을 담고, 밖으로 머리카락···때를 만들어 내며, ·벼룩·기생충으로 득실거리는 물건에, 사람[]이라는 거짓 이름[假名]을 붙이는 것 아니오? 진실한 나는 어디에 있소?

게다가 눈·····생각이라는 한가한 가재도구(감각 기관), ·소리·냄새··느낌·법이라는 가시덤불 속을 분주히 나돌아다니고 있소. 그래서 탐욕·성냄·어리석음의 무명(無明)을 일으키고, 계율·선정·지혜의 정지(正智)를 소멸시킨다오. 오온이 본디 텅 비었거늘, 누가 한번 비춰 보려고 하겠소? 육진이 본디 성품이 없지만, 사람마다 모두 진짜로 착각하오.

온갖 고통이 함께 몰려들어, 하나의 신령스런 물건[一靈]을 영원히 어리숙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허깨비 같은 몸뚱이와 망령된 마음이라오. 그래서 원각경(圓覺經)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소.

일체 중생이 각종 뒤바뀐 생각으로, 사대(四大)를 자기 몸의 형상으로 착각하고, 육진의 인연 그림자를 자기 마음의 모습으로 오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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