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선종과 교종
말세에 강설(講說)하는 사람들은 으레히 선종을 말하기 좋아하오.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청중들이 대부분 말에 따라 겉돌기 마련이오. 그러나 내 생각에, 선가(禪家)의 기어(機語: 논리나 뜻으로 풀이할 수 없는 機微의 언어)는 어떠한 의미도 전혀 없소. 오직 찾아오는 기미(機微)에 대하여 향상(向上: 선가의 지극한 곳)의 길을 가리켜 줄 뿐이오. 이러한 기어는 단지 참구할 수 있을 뿐이거늘, 어찌 강설할 수 있단 말이오?
만약 이와 같이 경전을 강설한다면, 오직 격식을 초월하는 최상근기의 선비만 이익을 얻을 수 있소. 그 나머지 중하류의 범부 중생은 모두 오히려 그 병폐(부작용)를 받기 마련이오.
선종에서는 기봉전어(機鋒轉語: 근기에 따라 날카롭게 내던지는 말, 화두)를 힘써 참구할 줄은 모르고, 망령되이 자기의 논리와 의미로 풀이하려는 폐단이 많소. 또 교종에서는 실제의 이치와 사물을, 자기가 몸소 경험한 경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믿지 않고, 그것이 단지 비유적인 의미로 불법을 표현한 것이라고 오인하는 경향이 크오. 그러면서 교종으로 선종을 공격하고, 선종으로 교종을 공격하고 있소. 그래서 근래 종파간의 갈등과 비판은 전에 없이 막대하오.
조계(曹溪: 육조 혜능이 주석한 곳으로 이곳에서 선풍을 크게 드날렸다) 이후에 참선의 도가 크게 일어나,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不立文字]는 말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소. 그래서 뜻으로 이해하려는 길이 날로 넓혀지면서, 깨달음의 문은 거의 막혀 닫힐 지경에 이르렀소. 그래서 남악(南嶽)이나 청원(靑原) 같은 여러 조사들은 모두 기어(機語)로써 사람들을 맞이하였소.
설사 부처님이나 조사들이 나타나 말씀을 하신다고 해도, 그 질문에는 전혀 대꾸할 길이 없소. 정말로 딱 들어맞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말은 짐작도 할 수 없는 것이오. 이걸로 시험해 보면, 황금과 투석(鍮石: 금과 비슷한 自然銅의 精鍊品)이 금방 판가름 나고, 옥과 돌이 확연히 구분되오. 그래서 가짜로 대충 법도(法道)를 흉내 낼 수가 없는 것이오. 이것이 바로 기봉전어(機鋒轉語: 화두)가 생겨난 유래라오.
그 후로 이러한 선종의 법이 날로 치성해지면서, 선가의 선지식들이 행세하며 남들의 화두를 답습하면, 판에 박힌 격식으로 전락하여, 수행자들을 잘못 이끌고 선종의 가풍을 어지럽힐까 염려스러웠소. 그 결과 기어(機語)를 갈수록 날카롭고 준엄하게 쓰게 되었소. 그래서 근기에 따라 내던지는 화두가 일정한 방향 없이 변화무쌍하여, 사람들이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을 꾸짖고 조사를 욕하는가 하면, 경전과 교법을 배척하고 정토와 염불을 부정하기에 이르렀소. 이와 같은 작용은 남악(南嶽) 혜사(慧思) 대사의 두 구절에 확연히 나타나 있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임제(臨濟) 선사의 말이 널리 퍼져 있다. 또 한겨울에 절의 땔감이 떨어지자, 스님이 나무로 만든 불상을 갖다 도끼로 쪼개 불을 때면서, 이를 의아하게 여기고 나무라는 사람에게, “부처님 사리가 얼마나 나오는지 보려고 그랬다.”고 대답했다는 식의 일화도 잘 알려져 있다.]
超群出衆太虛玄
指物傳心人不會
무리를 빼어나고 대중을 벗어나니 큰 허공이 그윽하고
사물을 가리켜 마음을 전하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네.
그러나 이러한 말을 실제 법[實法]으로 오인하면, 그 죄가 오역(五逆)과 같게 되오. 이러한 말은 사람들의 감정과 선입견을 도려내고, 논리적 사고와 지식적 이해의 길을 막아 버리는 것이오. 근기가 뛰어나고 인연이 무르익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가리키는 뜻을 알아채고, 향상(向上)의 이치를 철저히 깨달을 수 있소. 또 근기가 좀 살아있는 자는, 진실하게 힘써 참구하여 반드시 확철 대오하고야 말 것이오.
당시에는 선지식이 많았고, 사람들의 근기도 아직 괜찮았으며, 교리(敎理)도 분명하고, 생사 해탈에 대한 마음도 간절하였소. 때문에 설령 그 자리에서 곧장 훤히 깨닫지는 못할지라도, 비천한 열등심은 결코 내려고 하지 않았다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서부터 유가의 글을 공부하여, 세상의 이치도 잘 모르고 불법의 교리도 알지 못하면서, 처음 발심하면서부터 곧장 선종의 문에 들어가기 일쑤요. 선가의 선지식이라는 분들도 단지 자기 문중을 지탱하면서 옛 사람들의 거동을 흉내 낼 뿐, 전법과 불도의 이해득실은 따지지도 않고 있소.
또 그 밑에서 공부하는 수행자들도 진실한 의문의 감정을 내지 아니하면서, 하나하나 실제 법[實法]인 걸로 생각하고 있소. 더러는 요즘 사람이 내던진 말이나 모든 옛 사람들의 기록 가운데서, 자기 생각으로 조그만 이론 체계를 그럴듯하게 꾸며 본다오. 그게 결국은 문자에 따른 의미 해석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데도, 스스로 궁극의 향상(向上) 이치를 완전히 깨달아 더 이상 참구할 게 없다고 자부하고 있소.
그리고는 선지식의 행세를 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문중을 지키는 것이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자신을 통달한 대가가 아니라고 볼까 두려워하여, 참선과 강설을 함께 펼치는구료. 참선과 교법을 아울러 통달했다고 일컬어지기 바라는 것이오.
그런데 참선을 말할 때는, 고승 대덕들이 궁극의 향상(向上)을 가리킨 말(화두)에 대해서, 문자상의 뜻이나 풀이하는 말을 지껄이는 게 고작이오. 또 교법(敎法)을 말할 때는, 여래께서 원인 자리를 닦아 과보의 지위를 얻은 도(道: 진리)에 대해서, 도리어 형식적인 표면상의 법이나 상징적인 비유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소.
결국 교법으로 참선을 파괴하고, 참선으로 교법을 파괴하는 거라오. 눈 먼 길잡이가 눈 먼 대중들을 이끌고, 함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셈이라오. 후학들에게 옛 사람들의 향기롭고 훌륭한 수행 규범은 들려주지 못하고, 도리어 부처님을 경시하고 조사들을 능멸하며 인과응보의 법칙을 부정하는 죄악만 본받게 하는 것이오.
교법은 상중하 세 근기의 중생이 두루 혜택을 입고,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를 모두 포괄하오. 마치 성왕의 현명한 법령을 온 천하가 높이 받들어 칭송하고, 잘나거나 못나거나 똑똑하거나 바보거나, 모든 백성이 잘 알아 지켜야 하는 것과 같소. 법령에 복종하지 않는 백성이 하나라도 있으면 엄형에 처하듯이, 부처님의 교법도 믿고 따르지 않는 중생이 하나라도 있으면 삼악도에 떨어지게 되오.
선종은 오직 상근기만 혜택을 입고, 중하근기의 중생은 포섭하지 못하오. 마치 장군이 비밀스런 특명을 내리면, 아군의 진영 안에서만 알 수 있을 뿐, 진영 밖의 사람은 설령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아는 지혜가 있더라도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과 같소. 그래서 전군(全軍)이 적군을 섬멸시키고 천하태평을 가져올 수 있소.
군령의 기밀이 한번 누설되면 삼군(三軍)이 모두 몰살당하듯, 조사(祖師)의 법인(法印)이 한번 누설되면 다섯 종파가 모두 망하게 되오. 그래서 아직 깨닫기 전에는 오직 화두만 참구하도록 단속하고, 참선에 관한 책을 떠들어 보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이오. 조사의 본래 뜻을 오해하여, 미혹을 깨달음으로 착각하고, 가짜가 진짜를 어지럽힐까 정말로 염려하기 때문이오. 이러한 것을 누설이라고 부르는데, 그 해악은 정말 막대하오.
궁극의 근원은 둘이 아니지만, 거기에 이르는 방편은 여러 문이 있소. 선종 가문의 방편은 아주 특별한 예외여서, 모든 말과 글을 완전히 쓸어 없애버린 듯하오. 그래서 본의를 얻지 못한 자는, 말을 떠난다는 취지를 체득하지 못하고, 단지 술지게미나 핥는 격이오.
선종에서 뜻으로 이해하려는 길을 한번 열어 놓으면, 힘써 참구하려 들지 않을 것이오. 교종에서 원만하고 융통스런 경지를 섣불리 배우면, 사물의 모습[事相]을 모조리 파괴할 것이오. 오직 크게 통달한 선비만, 이 양쪽의 이익을 함께 얻을 수 있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제호[醍]와 감로(甘露)를 독그릇에 담아 독약으로 변하게 만드는 꼴이 되고 만다오.
교법은 비록 중하근기의 사람에게도 이익을 주긴 하지만, 최상의 근기가 아니면 크게 통달할 수 없소. 너무 광범위하고 방대하기 때문이오. 반면 참선은 비록 중하근기의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두기가 어렵지만, 상근기의 사람은 크게 깨달을 수 있소. 단순하게 지키기 때문이오.
교법은 세간법과 불법, 사물과 이치[事理], 성품과 형상[性相] 모두를 통달하고, 나아가 대개원해(大開圓解: 원만한 이해를 크게 열어젖힘. 선종의 확철대오에 해당함)하여야만, 비로소 인간과 천상을 모두 인도하는 스승[人天導師]이 될 수 있소. 반면 참선은 하나의 화두만 참구하여 깨뜨리면, 본래 진면목을 친견하여, 선종의 직지인심(直指人心: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 줌)의 가풍을 펼칠 수 있소.
불법이 크게 흥성하는 시대에 불법을 크게 통달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선종에 따라 참구하는 게 좋겠소. 마치 용을 다 그려 놓은 상태에서, 한 점 눈동자만 그려 넣으면 즉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과 같소. 그러나 불법이 쇠퇴한 때나, 타고난 근기가 다소 떨어지는 사람들은, 교법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마땅하오. 마치 보통 기술자가 기물을 만들면서 자와 컴퍼스를 팽개치면, 끝내 규격에 맞는 제품을 완성할 수 없는 것과 같소.
요즘 세상에 부처님 은혜를 갚고 중생을 이롭게 하고 싶다면, 선종에서는 선종의 가풍을 오로지 펼치면서 교종의 법인(法印)도 모름지기 존중해야 하며, 교종에서는 관행(觀行)을 힘써 닦으면서 선종의 말을 남용하지 말아야 하오. 진실로 마음이 미묘한 도리[妙諦]에 통달하면, 인연 만나는 대로 바로 선종이 된다오.
뜰의 잣나무, 마른 똥 막대기, 거위 울음소리, 까치 지저귐, 물이 흐르고 꽃이 피며, 기침하고 침 뱉으며, 비웃거나 욕설하는 등의 모든 법과 사물이, 한결같이 선종이 되어 왔소. 그런데 어찌하여 여래께서 황금 입으로 친히 설하신, 원만하고 미묘한 법문이 도리어 선종이 될 수 없단 말이오?
어찌하여 남의 집의 보잘것없는 막대기를 빌려 자기 집 문중을 떠받치며, 자기 집에 있는 아름답고 훌륭한 나무들은 쓰지 않고 내버린단 말이오? 법 자체는 본디 우열이 없어, 오직 하나의 도[一道]로 항상스럽다오. 그러나 중생의 근기는 설기도 하고 무르익기도 하여, 비록 하나의 법[一法]이라도 그로부터 얻는 이익은 달라질 수밖에 없소. 이 점을 잘 명심해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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