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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와 불교

인광대사가언록. 궁금증 풀고 정견으로 정진하세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1.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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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유교와 불교

 

무릇 사람이 숙세에 정말 착한 뿌리[善根]를 심었다면, 학문을 하든 도를 닦든 간에, 세상을 벗어나는 큰일의 새싹이 될 수 있소. 그런 사람에게는 탐욕·성냄·어리석음 따위의 번뇌와 미혹이나, 질병·사고 같은 악보(惡報), 모두 생사윤회를 벗어나 불법에 들어가는 인연이 될 수 있소. 다만 본인이 스스로 되돌아볼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소. 스스로 되돌아볼 수 없다면, 그저 보통 평범한 일반인처럼 세간의 관념에 얽매이고 말 것이오.

예컨대 회암(晦庵: 朱熹의 호. 11301200)·양명(陽明: 王守仁. 14721528)·정절(靖節)·방옹(放翁) 등은 비록 학문과 행실이 모두 남달리 탁월한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러나 궁극에는 자기 마음을 철저히 깨달아 생사윤회를 해탈하지는 못하였소. 그들의 학문과 행실의 경지가 비록 더할 나위 없이 미묘한 도[無上妙道]의 기초가 될 수 있었지만, 스스로 되돌이켜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불도에 들어가는 장애가 되고 말았소. 그러니 불도에 들어가기는 정말로 하늘에 오르기보다 훨씬 어려운 걸 알 수 있소.

 

[ 정절(靖節):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별칭. 동진(東晉) 강서(江西) 심양인(陽人), ()는 원량(元亮)인데 나중에 잠()으로 고침. 어려서 고상한 절개를 품고 박학하여 문명(文名)이 높음. 30세에 처음 임주(任州)의 제주(祭酒)직에 부임하고, 의희(義熙) 원년(405) 8월 팽택령(彭澤令)이 되었으나, 80여일 만에 독우(督郵)가 오자 쌀 다섯 말[五斗米] 때문에 허리를 굽실거리고 향리소인들을 섬길 수 없다고 스스로 탄식하며, 마침내 사직하고 현을 떠나며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음. ()이 송()으로 바뀐 뒤에는 부끄럽게 여겨 고향에 은거하며 주속지(周續之)류유민(劉遺民)과 함께 왕명을 피해, 세칭 심양삼은(陽三隱)이라 함. 영욕(榮辱)을 잊고 시주금서(詩酒琴書)에 탐락하며, 세상인연을 멀리하여 스스로 희황상인(羲皇上人)이라 부름. 정토염불수행의 비조인 여산(廬山) 혜원(慧遠) 스님과 교왕하여, 혜원 스님이 일찍이 그의 청일(淸逸)함을 존경하여 초청했으나, ()은 술이 없다고 이마를 찌푸리고 떠나갔음. () 원가(元嘉) 4년에 63세로 별세함. 저서로 도연명문집 9권이 전함.]

 

[방옹(放翁): 육유(陸游: 1125~1210)의 호. 남송대 시인이자 정치가. 북송 멸망 즈음에 태어나 소흥(紹興) 때 예부(禮部)에 응시했는데 진회(秦檜)한테 쫓겨났다가, 효종 때 진사가 되어 통판(通判)을 거쳐 왕염(王炎)의 막부에 들어가 군대생활하며 금나라와 결사항전 주장을 견지함. 정치포부와 인민고난을 탄식하는 다양한 시 9천여 수가 검남시고(劍南詩稿)에 전해지고, 유명한 시들이 인구에 회자함. 그밖에 위남문집(渭南文集) 남당서(南唐書) 등을 남김.]

 

부처가 보면 중생이 모두 부처이고, 중생이 보면 부처도 모두 중생이라오. 부처는 중생을 모두 부처로 보기 때문에, 근기와 인연에 따라 설법을 해 주어, 중생이 망상과 업장을 소멸하고 본래 지닌 성품을 몸소 증득하게 이끈다오. 그렇게 해서 일체 중생이 모두 궁극의 열반을 얻더라도, 부처는 결코 자기가 제도했다거나, 중생이 제도받았다고 보지 않소. 중생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이오.

반면 중생은 부처도 모두 중생으로 보기 때문에, 서역(인도) 95종 외도(外道)나 이곳(중국)의 자잘한 유생들이, 마음과 힘을 다해 온갖 방법으로 비방과 훼손을 일삼아 왔소. 기필코 불법이 완전히 끊어져 아무런 소리나 자취도 없이 사라져야, 비로소 마음이 후련한 자들이오.

그러나 찬란한 태양이 하늘 한복판에 떠 있는데, 어떻게 한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겠소? 그래 봤자, 오히려 불법의 광명만 더욱 떨치고, 아울러 자기의 비천함과 고루함을 드러내기에 안성맞춤일 뿐이오. 물론 숙세에 선근(善根)을 심은 사람은 불법을 비방하고 배척한 인연으로, 마침내 불법에 귀의하여 불제자가 되고, 부처님을 대신해 불법을 전하기도 하오.

하지만 숙세의 선근이 없는 사람은, 비방한 업력으로 영원히 아비지옥에 떨어지게 되오. 그 업보가 다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랜 과거에 부처님 명호를 들었던 선근이라도 피어나면, 그제서야 비로소 불법에 들어와 점차 선근을 심어 가다가, 업장이 다하고 감정이 텅 비게 되면, 본래 지닌 성품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는 것이오.

그러니 부처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넓고 깊은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소. 부처님 명호 한 구절이 귀를 통해 정신에 배인 것이 영원토록 도의 씨앗[道種]이 되는 것이오. 마치 독약 바른 북 소리를 들으면 원근의 사람이 두루 목숨을 잃고, 금강(金剛)은 조금만 먹어도 결코 소화시킬 수 없는 이치와 같소. 이와 같이 믿음을 내는 것이 바로 올바른 믿음[正信]이오.

불법은 크게는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고, 작게는 관련되지 않는 게 없소. 마치 비가 한번 내리면 대지를 두루 적셔, 모든 풀과 나무가 함께 무성히 자라는 것과 같소. 불법에는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친민(親民) 같은 유가의 도도 갖추어지지 않은 게 없소.

예로부터 지금까지 문장이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날리고 공적이 우주에 찬란히 빛나는 사람들이나, 또는 지극히 효성스럽거나 어진 사람들을, 우리는 천추가 지나도록 우러러 존경하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 위인들의 자취만 알 뿐, 위대함의 근본은 잘 궁구하지 않소. 만약 위대함의 유래와 맥락을 상세히 살펴본다면, 위인들의 정신과 지조, 절개는 모두 불법을 공부하여 배양한 것임을 알 수 있소.

다른 것은 거론할 필요도 없이, 송나라 유학자들이 세우고 밝혀 놓은 성인의 심법[聖人心法: 朱子學으로도 불리는 宋明 性理學을 가리킴.] 같은 것만 보아도, 불법을 바탕으로 모범 체계가 이루어진 것이오. 하물며 다른 것은 말할 필요가 있겠소? 다만 송나라 유학자들은 기질과 도량이 편협하고 작았던 탓에, 성리학을 순전히 자기네 지혜로 세웠다고 후세 사람들이 칭송해 주기를 바라는 욕망에서, 마침내 스스로 불교를 배척하는 주장까지 내세운 것이라오. 이야말로 자기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는[掩耳盜鈴] 격이 아니겠소?

송나라부터 시작해서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하지 않음이 없었소. 세심히 살펴본다면, 과연 누군들 불법에서 자신의 이익을 얻지 않겠소? 정좌(靜坐: 坐禪에 해당)를 말하거나 참구(參究)를 말하는 것은 공부(수행)하는 게 드러나는 곳이며, 임종에 때가 된 줄 미리 알고서 말하거나, 웃으며 앉은 채로 서거하는 것은, 마지막 끝맺음이 드러나는 곳이오. 이러한 종류의 설화나 행적은 성리학 전기(傳記) 가운데 한두 번 나오는 게 아니오. 불법을 공부하는 게 어찌하여 사회의 근심이 된단 말이오?

유교와 불교의 본바탕은 진실로 둘이 아니오. 유교와 불교의 수행 공부는, 보통으로 얕게 논하자면 자못 같은 점이 많지만, 전문으로 깊이 논하자면 천양지차가 난다오. 왜 그런가 하면, 유교는 정성[]을 근본으로 삼지만, 불교는 깨달음[]을 으뜸으로 삼기 때문이오.

정성은 곧 밝은 덕[明德]이오. 정성으로 말미암아 밝음이 일어나고, 밝음 때문에 정성을 내게 되므로, 정성과 밝음은 하나가 되어[誠明合一] 바로 밝은 덕을 밝히는[明明德] 게 되오. 깨달음에는 본래 깨달음[本覺]과 처음 깨달음[始覺]이 있소. 본래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처음 깨달음이 일어나고, 처음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본래 깨달음을 증득하게 되니, 처음 깨달음과 본래 깨달음이 하나가 되면[始本合一] 곧 부처가 되는[成佛] 것이오.

여기서 본래 깨달음[本覺]이란 유교의 정성[]이고, 처음 깨달음[始覺]은 유교의 밝음[]에 해당하오. 이렇게 본다면, 유교와 불교는 전혀 다르지 않소. 그래서 공자를 배우나 부처를 배우나, 이치상으로는 대학(大學)의 제 1장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틀림없이 확실한 견해라오. 이것이 보통으로 얕게 논한 유교와 불교의 관계라오.

그러나 수행하여 증득하는 공부의 수준(정도)을 나타내는 단계의 구분에 이르면, 비록 근본이야 같다고 하겠지만, 증득하고 도달하는 과정과 경지는 아주 크게 다르다오.

유교에서 밝은 덕을 밝힌다[明明德]는 것이, 부처님께서 세 미혹[三惑: 見思惑·塵沙惑·無明惑]을 완전히 끊고 두 장엄[二嚴: 智慧莊嚴·福德莊嚴]을 원만히 갖춘 경지와 같을 수 있겠소? 아니면 법신을 증득한 보살이 무명(無明)을 차례로 깨뜨리고 불성(佛性)을 차례로 보아 가는 경지에 해당하겠소? 그도 아니면 성문이나 벽지불이 보는 미혹[見惑]과 생각하는 미혹[思惑]을 완전히 끊는 경지에 속하겠소?

물론 세 단계의 경지 가운데, 보고 생각하는 미혹을 완전히 끊는 성문의 단계가 가장 낮지만, 그러나 이미 여섯 신통[六通]을 자유자재로 얻은 경지라오. 그래서 자백(紫柏) 대사 만약 그 자리에서 범부의 감정만 잊을 수 있다면, 산의 암벽도 그냥 통과할 수 있다.”고 말했소.

 

[자백(紫柏) 대사: 명나라 때 스님으로, 이름은 승가(僧可), 호는 달관(達觀). 연경(燕京)에서 불법을 크게 떨쳤는데, 후에 무고(誣告)를 당해 입적함. 자백노인집이 전해짐.]

 

수다원(須陀洹)의 초과(初果)는 아직 일곱 번 천상에 올라갔다가 다시 일곱 번 인간에 내려 와야 하는 윤회가 남아 있소. 그런데 그의 도력(道力), 마음대로 움직여도 살생 계율을 범하지 않는 경지라오. 그래서 그가 가는 곳마다 벌레들이 저절로 피한다오. 수다원이 땅을 파서 농사를 지으면, 흙 속의 벌레가 네 치[四寸] 이상 떨어지게 옮겨 간다오. 하물며 이삼사과(二三四果)야 말할 게 있겠소?

유교 가운데 공부하는 서생은 놓아두고, 성인(聖人)으로 말해 봅시다. 성인은 진실로 대부분 큰 권위[大權]을 나토시는 분이니, 그 근본은 말할 수가 없소. 만약 성인이 나토는 자취만으로 말한다면, 아마도 보고 생각하는 미혹을 말끔히 끊어 버린 경지에도 견줄 수 없을 것이오. 하물며 무명을 깨뜨리고 법성(法性)을 증득한 41지위의 법신(法身) 대사에게 비할 수 있겠소?

설사 밝은 덕을 밝히는[明明德] 것이 무명을 깨뜨리는[破無明] 것과 견줄 수 있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무명을 깨뜨리는 것도 41단계의 지위가 있으니, 맨 처음의 초주(初住) 지위에 견주겠소, 아니면 맨 마지막의 등각(等覺)의 지위에 견주겠소?

가령 맨 마지막의 등각 경지에 견준다고 하더라도, 아직 유교의 밝은 덕[明德]을 밝히는 수행은 궁극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이오. 다시 나머지 한 푼의 무명마저 말끔히 깨뜨려(서 부처가 되어), 비로소 정성과 밝음이 하나가 되고, 처음 깨달음과 본래 깨달음이 둘이 아닌 궁극의 경지가 되기 때문이오.

그래서 본바탕은 같지만, 수행 공부를 진행하여 증득하고 도달해가는 과정(단계)은 다르다고, 내가 말하는 것이오. 세간 사람들은 같다는 말만 들으면, 곧 유교가 불교를 완전히 포섭한다고 생각하오. 또 다르다는 말만 들으면, 곧 불교가 유교를 완전히 배척한다고 오해하기 일쑤요. 유교와 불교가 서로 같으면서 같지 않고,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은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오. 그래서 각자 자기 문중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서로 시끄럽게 논쟁하면서, 정작 불보살과 성인들이 세상을 다스리고 중생을 구제하시려는 본래 마음은 모두 깡그리 잃고 마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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