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경전(經典)
만약 천부의 자질이 뛰어나게 총명한 사람이라면, 법성(法性)이나 법상(法相) 같은 여러 교종을 연구해도 괜찮겠소. 그러나 그도 역시 정토 법문에 의지하고 귀착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원인만 있고 결과는 없는 헛수고로, 생사윤회 해탈의 미묘 법문을 입으로만 말 발림한 채, 별 이익도 얻지 못하고 놓쳐 버리기 때문이오.
그리고 반드시 마음에 정성을 품고 공경을 다하여, 경전이나 불상 대하기를 마치 산 부처님 대하 듯하며, 조금이라도 태만하거나 소홀해서는 안 되오. 그래야 자기가 바친 정성의 크기만큼 온갖 이익을 얻을 수 있소.
한편 근기가 다소 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오로지 정토 법문의 연구에만 몰두하는 게 좋소. 그래서 정말로 정토 법문을 믿고 흔들림 없이 지킨다면, 틀림없이 현생(금생)에 생사를 해탈하고 평범을 초월하여 성인의 경지에 들 것이오. 단지 경론(經論)에만 깊이 정통하고 정토 법문을 진실하게 수행하지 않는 사람과 서로 견준다면, 그 이익이 어찌 하늘과 땅 차이뿐이겠소?
무슨 신분과 자격이든 가리지 않고, 맨 처음에 이 약만 먼저 복용한다면, 어떠한 사견(邪見)이나 오류·이단·교만 방자·자포자기·열등의식 따위의 증상을 보이는 병이라도, 이 아가타(阿伽陀) 만병통치약으로 곧 낫고 말 것이오.
불법은 하도 넓고 깊어서, 제아무리 총명한 사람이 평생토록 마음과 힘을 다해 연구한다 할지라도, 모두 다 상세하게 통달할 수는 없소. 그러나 불법은 근기에 따라 가르침을 펼치기[隨機施敎] 때문에, 만약 진실한 이익을 얻고자 한다면, 특별히 탁월하면서 손쉬운 정토 법문을 연구해서 수행하는 게 좋소. 그것이 마음과 힘을 크게 절약하면서도, 진실한 이익을 듬뿍 얻는 가장 요긴한 길이오.
경전을 교감(校勘)하는 일은 정말로 쉽지 않소. 모름지기 특출한 식견을 지니고 아주 세심하게 정성을 다해 재삼 살펴보면서, 고증과 대비를 부지런히 되풀이해야, 비로소 잘못 하나 고칠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라오. 그렇게 해서 잘못과 군더더기를 말끔히 제거하여야, 경전의 본래 진면목이 철저하게 드러날 수 있소.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평범하게 본을 떠서 조롱박을 그리듯이 하여도, 본래 모습에서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오.
『화엄경』은 삼장(三藏) 중의 왕인데, 맨 마지막 한 편은 극락왕생을 권하는 원왕(願王)으로 매듭짓고 있소. 그러나 『화엄경』을 존중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경전을 경시해서는 안 되오. 모든 대승경전은 한결같이 실상(實相)을 경의 본체[經體]로 삼기 때문이오.
『화엄경』의 위대함은 사바세계 바깥의 큰 법을 성품 그대로 직접 말하면서, 성문이나 벽지불 같은 이승(二乘)은 아예 끼워 주지도 않는 데 있소. 반면 『법화경』의 미묘함은 삼승(三乘)을 한데 모아 궁극의 일승(一乘)으로 귀결시키면서, 방편적인 권법(權法)을 열어 실상(實相)을 드러내고, 현상적인 자취를 보여 본체를 드러내는 데에 있소.
천태종(天台宗)에서는 『법화경』이 순수하고 원만하며 독특하고 미묘하다[純圓獨妙]고 말하며, 『화엄경』에 오히려 방편적인 권법이 곁들여 있다고 말하오. 이는 『화엄경』에서 보살의 수행 경지를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등각(等覺)의 단계로 구분하는 것을 두고 일컫는 말이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에서는 『법화경』이야말로 경전 중의 왕이라고 찬탄하셨고, 또 『화엄경』에서는 마찬가지로 『화엄경』이야말로 경전 중의 왕이라고 찬탄하셨소.
[『화엄경』에는 모든 보살이 각자 자기가 최고 제일이라는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수행 교화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뜻을 문자에 집착해 오해하면, 각 종교간, 종파간에 벌어지는 독선주의와 배타성의 빌미가 된다.]
그런데 어찌하여 후세에 불경을 널리 전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5대부(五大部)로 나누어, 이것이 높고 저것이 낮다는 편견에 집착하기만 하고, 부처님처럼 경전 경전마다 높이 치켜세워 찬탄하기를 허용하지 않는지 모르겠소. 선종을 수행하는 이는 선종만 찬양하고, 정토를 수행하는 이는 정토만 찬양하고 있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신자·교도)들에게 독실한 믿음과 귀의의 마음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일 것이오. 그러나 그 본래 의미와 이치를 잘 이해해야 하지, 글자에 얽매여 뜻을 해쳐서는(왜곡해서는) 안 되오.
[불교의 각 종파간에도 그렇고, 세계 각 종교간에도 그렇다. 이제 모든 종교와 종파가 서로 같은 근본 뿌리를 확인·공유하면서 서로 다른 의식 문화는 존중하고, 일관회통(一貫會通)의 정신으로 대동화합(大同和合)을 추구할 때가 되었다. “같은 바는 사랑하고 다른 바는 존중한다[愛其所同, 敬其所異].”는 대동정신이 필요하다.]
맹자는 공자를 가리켜, 사람이 이 세상에 생겨난 이래 결코 없었던 최고의 성인이라고 칭송하였소. 그러나 그런 공자도 요(堯) 임금을 국그릇 속에서 보고, 순(舜) 임금을 담 벽에서 보며, 주공(周公)은 꿈속에서 보았다는 거 아니오? 앞선 세 성인을 사모하고 본받으려 함이, 어찌 그와 같이 지극하게 정성스러울 수 있단 말이오?
선도(善導) 화상은 사람들에게 한 마음[一心]으로 ‘나무 아미타불’ 명호만 지송(持誦)하고, 다른 법문은 수행하지 말라고 가르쳤소. 중하근기의 중생이 이것저것 잡다한 법문을 수행하다 보면, 마음을 오롯이 하나로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심수행[專修]을 가르친 것이오.
반면 영명(永明) 선사는 사람들에게 온갖 선행을 두루 함께 닦아 극락정토 왕생에 회향하도록 가르치셨소. 상근기의 사람들이 어느 한 법문 수행에만 외골수로 빠지다 보면, 자칫 복덕과 지혜가 균형 있게 원만히 갖추어질 수 없을까 염려한 때문에, 원만 수행[圓修]을 가르친 것이오.
닳아 떨어진 경전은 수리 보완하기 어려우면, 깨끗한 곳에서 불사르는 게 허물이 없소. 그러나 아직 손질해서 볼 만한 경우에는 불사르지 말아야 하오. 이런 변통의 도리를 모르고서, 볼 수도 없고 보관할 수도 없는 경전을 줄곧 불사를 생각조차 못하고 방치하면, 도리어 경전에 대한 모독이 되오.
현재 사람들의 증상에 대한 약 처방으로는 오직 인과응보의 법칙이 제일이며, 지금 사람들이 닦아야 할 법문으로는 오직 정토왕생의 법문이 제일이오. 어떤 근기와 성품의 사람이건 간에, 인과응보와 정토 법문이 제일 먼저 강구해야 할 필수불가결의 요건이오. 교상(敎相) 같으면, 모름지기 사람을 잘 선택해서 가르쳐야 하오. 만약 선천적인 근기가 천박한데 오로지 교상에만 힘쓰고 정토 법문을 뒷전에 밀쳐 두면, 장차 애써 씨앗만 뿌리고 열매는 없는 헛수고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오. 그러니 각자의 근기에 맞추어 법문을 베풀어야 하오.
[교상(敎相): 석가모니 부처님의 한평생 가르침을, 각 종파에서 자기 이론 주장에 따라 판단·구분한 것. 예컨대 천태종의 5시(時) 8교(敎), 법상종의 3시교(時敎), 진언종의 현밀(顯密) 2교와 같음. 관심(觀心)과 상대가 되는 문(門).]
지금 교상을 숭상하는 이들의 폐단도 대체로 이와 같소. 그들이 제창하고 추구하는 것은, 실로 생사윤회를 해탈하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법상(法相)에 통달하여 법문을 유창히 강의 설법하기 위함이라오. 가령 그들이 자기 힘만으로는 생사윤회를 벗어나기가 아주 어려운 줄 안다면, 결코 지금처럼 법상에만 오로지 힘쓰면서 정토 법문을 뒷전에 팽개치거나 비방하지는 못할 것이오.
이러한 사람들은 대체로 모두 높은 것만 좋아하고 훌륭한 것에만 힘쓰는 자들인데, 사실은 왜 높고 훌륭한지도 모른다오. 만약 그들이 정말로 이걸 안다면, 죽인다 해도 정토 법문을 내팽개치지 않고 열심히 닦을 것이오. 정말 도를 배우고 닦기가 이처럼 몹시 어렵다오.
중생의 근기는 한결같지 않고, 여래의 자비심은 무한하오. 과연 정말로 진실하게 정성과 공경을 다해 염불한다면, 임종에 이르러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 저절로 다가오게 되오. 자백(紫柏) 대사와 함(감)산(憨山) 대사 두 분이 지극히 친절하게 말씀해 놓으셨소. 그러나 두 분은 모두 선종의 선지식에 속하오.
그분들의 말씀은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을 함께 갖춘 이들에게 들려주면, 참으로 유익하오. 그러나 이제 조금 선근(善根)을 심은 데 불과하여, 아직 전심으로 수행할 수 없는 보통 중생에게 들려준다면, 아마도 자기들은 극락왕생의 자격이 없다고 지레 짐작하고, 물러서거나 자포자기하고 말 것이오. 아무리 훌륭한 설법이라도, 듣는 상대방의 근기에 맞지 않으면, 쓸데없는 한가한 잡담에 불과하다는 말이, 과연 진실하기 그지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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