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중음(中陰)
중음(中陰)이란 식신(識神)으로, 세속에서 말하는 영혼(靈魂)이오. 중음이 7일에 한 번 죽고 산다든지, 7×7(=49)일에 반드시 다른 생명으로 투탁(投生)한다든지 따위의 말은, 꼭 문자 그대로 집착할 필요가 없소. 중음이 죽고 산다는 것은, 그의 무명심(無明心) 가운데 나타나는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습[生滅相]을 두고 일컬으니, 꼭 세간 사람의 낳고 죽는 모습으로 여길 수는 없소.
중음이 다른 생명을 받는 것은, 빠르게는 눈 깜박할 사이에 즉시 육도(六道) 가운데로 윤회해 나가고, 더디게는 더러 7×7(=49)일에 이르거나, 또는 이를 더 지날 수도 있소. 막 처음 죽은 사람이, 서로 알고 지내던 자에게 밤 또는 낮에 자신을 내보이거나, 또는 다른 사람과 서로 접촉하고 말을 주고받는 일이 있소. 그런데 이는 단지 중음만 그러한 게 아니오. 이미 육도 중에 다른 생명을 받은 경우에도, 서로 알고 지내던 친지 앞에 한 번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오.
이는 비록 본인의 뜻과 생각[意念]이 드러나는 것이지만, 그 권한은 사실 조화(造化)를 주관하는 신령[神祗]에게 달려 있다오. 이는 사람이 죽어도 신명(神明)은 결코 소멸하지 않으며, 선악의 과보도 전혀 헛되지 않다는 진실을 뚜렷이 밝혀 주기 위함이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이승[陽間]사람들이 어떻게 저승[陰間] 일을 알 수 있겠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 제자들에게 모습을 나타냈다는 부활도, 이와 비슷한 원리에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조화조차 전혀 없다면 어찌 되겠소? 사람이 죽으면 육신이 썩어 문드러짐과 동시에, 정신[神: 영혼]도 바람결에 나부껴 흩어지고 만다는, 터무니없는 허무주의가 고개를 쳐들 것이오. 그러면 틀림없이 식견 없는 중생이 앞다투어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함께 인과응보도 없고 내생이나 후세도 없다는 사견(邪見)의 수렁에 깊이 빠져들 것이오. 선행을 보고도 스스로 자극을 받아 그를 본받고 함께 덕행을 닦을 생각은 안하며, 죄악을 보고도 거리낌이나 두려움이 전혀 없이, 욕망을 채우려고 온갖 흉악을 자행할 것이 분명하오.
비록 부처님의 말씀이 있더라도 증명할 길이 없으니, 과연 누가 믿고 받아들이려 하겠소? 그런데 이런 조화(造化)로 죽은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어 뭔가 계시해 준다면, 부처님 말씀이 전혀 허망하지 않고, 인과응보도 분명히 존재함을 증명하기에 충분하겠소. 그러면 단지 착한 사람들만 더욱 열심히 선행을 닦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도 그 마음이 이러한 조화의 사실과 이치에 저절로 조복(調伏)되어, 적어도 완전히 제멋대로 개망나니 짓을 계속하지는 못할 것이오.
천지신명이 우리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과 이치를 분명히 알게 하려고, 죽은 사람이 인간 세상에 잠깐 모습을 드러내도록 허락하는 것이오. 이승에 살아 있는 사람이 저승[幽冥]에 가서, 죽은 자의 죄를 재판하고 형벌을 내린다는 일화 등은, 불법(佛法)을 보필하고 정치 도덕을 부축하는 긍정 효과가 있소. 이치로 보면 매우 미세하여 하찮게 보이지만, 사람 마음을 교화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아주 중대한 관계가 있소. 이러한 일은 고금의 서적에 몹시 많이 실려 전해 오고 있소. 다만 그 권한의 귀속(유래)이나, 그러한 일에 관련하는 사회적 이익(기능)은 분명히 언급하지 않고, 그저 권선징악의 일화 정도로 여기는 것이 아쉬울 뿐이오.
[중국에는 산 사람이 잠든 동안 그 식신(識神: 영혼)이 저승에 출장 가서 재판했다는 증언이 제법 많은 글로 전해 온다. 또 죽은 사람이 가족이나 친지에게 나타나 인과응보의 이치와 저승 사정을 일러주면서, 살아생전에 열심히 수행하고 공덕 쌓으라고 당부한 실화도 적지 않게 들린다. 옮긴이도 대만 유학 시절 생생하게 듣고, 또 글로 본 적이 있다. ]
중음은 비록 육신의 형체를 완전히 떠난 상태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육신의 감정과 식견을 가지고 있소. 그런 육신의 감정과 식견을 아직 가지고 있으니, 모름지기 옷과 음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함은 당연하오. 보통 사람은 업장이 너무 두텁고 무겁기 때문에, 중음에서도 오온(五蘊)이 본디 텅 빈 줄을 모르고, 여전히 세간 사람과 똑같이 생각하는 것이오.
만약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이라면, 죽는 순간 육신을 벗어나 의지함이 없어지게 되오. 오온이 텅 비었으니, 온갖 고통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하나의 참된 모습이 드러나면서, 온갖 공덕이 원만히 갖추어져 빛나게 되오. 그 경계야 비록 반드시 모두 똑같을 필요는 없지만, 각자 자신의 감정과 식견에 따라 갖추어 주는 게 무방하오.
예컨대 저승 옷[冥衣]을 불살라 줄 때, 산 사람 입장에서는 단지 돌아가신 분께 옷을 바치는 마음만 갖추면 충분하지, 어떻게 그 크기나 길이 등을 안성맞춤으로 맞출 수가 있겠소? 그렇지만 그런 산 사람의 감정이나 식견과 함께, 돌아가신 분의 감정 식견도 받들어서 적당히 맞춰 주는 것이 좋겠소. 여기서도 모든 법이 마음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이치를 확인할 수 있지 않소?
죽은 뒤에 아직 다른 육도의 생명을 받지 않은 상태를 중음이라고 부른다오. 만약 이미 다른 육도의 생명을 받았다면, 더 이상 중음이라고 부르지 않소. 중음 상태에서 산 사람에게 붙어 저승의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말하는 현상은, 모두 그 식신(識神)의 작용이라오. 다시 생명에 들어감[投生]은, 반드시 그 식신이 부모의 정자·난자와 화합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오. 이렇게 태를 받을[受胎] 때 그 식신은 이미 태중에 들어앉게 되오.
태어날 때 친지들이 더러 그가 어머니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부모가 결합할 때 대리로 태를 받았다가, 태가 완전히 성숙하여 출생하려 할 때 본래의 식신이 비로소 찾아오면서, 대리자가 물러가는 것이오.
원택(圓澤)의 어머니가 3년 동안 임신한 기이한 일을, 이렇게 비유하는 걸 보았소. 계란에는 유정란(有精卵)과 무정란(無精卵)이 있는데, 식신이 아직 찾아와 깃들지 아니한 태(胎)는 바로 무정란과 같다는 것이오. 그런 무정란은 어미닭이 아무리 품어 주어도 부화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오. 이는 단지 이치만 밝히려고, 다소 무리하게 비유한 일반 설명이오.
그러나 우리는 중생의 업력(業力)이 불가사의함을 알아야 하오. 청정한 염불 수행의 업이 이미 완성된 사람은, 육신이 아직 죽지 않았는데도, 그 정신이 벌써 정토에 나타나기도 하오. 반대로 악업이 몹시 무겁고 큰 사람은, 몸이 병들어 누운 상태에서도, 그 정신은 이미 저승에 가서 벌을 받기도 하오.
마찬가지로, 목숨이 비록 아직 다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의식이 이미 일부 빠져나가 다른 생명에 투탁했다가, 장차 그 생명이 태어나려고 할 즈음에 비로소 온 마음과 정신이 그 태에 들어갈 수도 있겠소. 이러한 이치가 정말로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소. 그러나 대리로 태를 받는 경우가 보통은 많다고 보아야 할 것이오.
시방 삼계의 모든 법이 오직 마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지 않소? 중생이 비록 미혹해 있긴 하지만, 그 업력이 불가사의한 것은, 바로 마음의 힘[心力]이 불가사의한 것이며, 또한 모든 부처님의 신통스런 도력(道力)이 불가사의한 것이기도 하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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