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신통력(神通力)
도제(道濟) 선사는 정말 대신통력을 지닌 성인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올바른 신심을 북돋워 주기 위해서, 늘상 불가사의한 일을 나타내셨소. 그 분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잡수신 것은, 성인의 덕을 일부러 감추기 위함이었소.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가 미치광이처럼 법도와 계율을 지키지 않는 걸 보고, 그를 별로 믿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소. 그렇지 않았다면, 그 분은 세간에 머무를 수가 없었을 것이오.
무릇 불보살님께서 몸을 나토심에는, 일반 범부 중생과 똑같이 보이시면서, 오직 도덕으로 사람들을 교화할 뿐, 결코 신통력을 드러내시지 않는다오. 만약 신통력을 드러낸다면, 곧 더 이상 세상에 머무를 수가 없게 되오. 오직 미치광이 짓을 하는 분만이 신통력을 드러내도 무방하오. 수행인이 누구나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어도 좋다는 말은 결코 아니오.
[예수도 대신통력을 드러내어 수많은 기적을 행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은(殷)나라 말엽 주(紂) 임금의 포악무도한 시대에 세 성인이 있었는데, 미자(微子)는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숨어 버렸고, 기자(箕子)는 노예가 되었으며(나중에 풀려나 고조선으로 건너옴), 비간(比干)은 충직하게 간언하다가 죽었다.]
세간에 보통 착하다는 사람들도 술과 고기를 먹지 않는데, 하물며 불자들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을 수 있겠소? 중생을 교화한다고 발원하면서, 자기 자신조차 부처님 가르침대로 받들어 행하지 않는단 말이오? 그러면 남들에게 믿음을 내도록 이끌기는커녕, 도리어 있던 믿음도 후퇴하거나 잃게 하기 딱 알맞소. 그러므로 음주와 육식을 배워서는 안 되오.
도제 선사는 죽은 고기를 먹으면 산 짐승을 토해낼 수 있었소. 그러나 우리는 죽은 고기를 먹으면 원래 모양의 고기도 토해낼 수 없는데, 어떻게 그런 성인이 고기 먹은 걸 흉내 낼 수 있겠소? 그리고 그분은 술을 마시면 부처님에게 금(金)을 채워드리고, 수많은 큰 나무를 우물 속에서 끌어 올릴 수 있었소. 그러나 우리는 술을 마시고 나면 우물물도 제대도 길어 올리지 못할 텐데, 어떻게 그 분이 술 마신 걸 배운단 말이오?
제공전(濟公傳: 도제 선사 전기)은 몇 종류가 있는데, 취보리(醉菩提) 본이 가장 좋소. 근래 유통하는 게 8판본이라고 하는데, 대부분 후세 사람들이 덧붙이고 손질한 문장들이오. 오직 취보리 본만이 문장이나 내용 의미나 모두 좋으며, 서술한 일도 모두 당시 실제 있었던 사실들이오.
세상 사람들은 왜 그런지 이유와 유래를 잘 모르기 때문에, 덮어 놓고 무조건 따라 배우기 아니면, 함부로 훼방하기 일쑤라오. 덮어 놓고 무조건 따라 배우다가는, 결정코 지옥에 떨어질 것이오. 또 함부로 훼방하는 것은, 범부 중생의 소견으로 신통력 갖춘 성인을 추측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되는 건 분명하오. 하지만 무조건 따라 배우는 것에 비하면, 그래도 훨씬 더 가볍소.
성인들의 불가사의한 신통력에 관한 내용을 보거든, 마땅히 믿음과 공경심을 내어야 하겠소. 그러나 더러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은 특이 행동은, 보더라도 절대 따라 배우려 해서는 안 되오. 그렇게 해야 이익만 얻고 손해는 보지 않게 되오.
공자께서 “사람이 도를 크게 펼칠 수 있지, 도가 사람을 키워 주는 게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라고 말씀하셨소. 세상의 혼란은 중생이 죄악을 함께 나누기 시작하면서 초래한 공동 업장 탓이오. 세상에 난무하는 온갖 이단사설(異端邪說)도 그렇소. 세상 풍속의 변질도, 맨 처음에는 모두 한두 사람이 나서 일으키고 내세우기 마련이오. 다스림이나 혼란, 정도(正道)와 사도(邪道)도 모두 그렇지 않은 게 없소.
그런데 어찌하여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오로지 모든 것을 불보살님이 나토시는 신통 변화에 되돌리고 떠맡긴단 말이오? 불보살님께서 신통 변화를 내보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업장이 너무 크고 무거워 어찌할 수 없을 따름이라오.
[ 예수께서도 당시 신통력과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 시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신통과 기적을 볼 자격조차 없다.”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다. 인연 없는 중생은 부처님도 구제하시지 못하고, 부처님 눈에만 부처님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유컨대, 두터운 구름장과 짙은 안개가 끼어 하늘의 해를 희미하게도 보지 못할 때, 과연 우리는 하늘의 해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소?
사람이 하늘 및 땅과 더불어 삼재(三才)로 일컬어지고, 수행하는 스님이 부처님 및 부처님의 법과 더불어 삼보(三寶)로 불리고 있소. 이렇게 부르는 것은,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천지자연의 이치를 참구하여 만물의 성장 변화에 동참하고, 정법과 도덕을 널리 펼치기 때문이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의 힘(인간의 노력)은 내팽개친 채, 오로지 불보살님이나 천지자연의 힘(신통·가피·은총)에만 모든 것을 내맡기려 한다면, 그래도 도를 아는 수행자라고 말할 수 있겠소?
아주 혼란한 세상에 대자비의 보살이 나타나서 구제하고 보호하시는 것도, 모두 인연 있는 중생일 따름이오. 세상의 혼란은 중생의 공동 업장이고, 숙세의 원인과 현재의 연분은 각자의 개별적인 업력[別業]이오. 착한 인연으로 보살과 개별적으로 감응이 통하여, 그 자비 가피로 보호 구제를 받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로 뒤섞어 논할 수 있겠소?
보살이 역경과 순풍의 방편을 써서 중생을 구제하고 보호하시는 일은, 판에 박힌 고정 관념과 선입견을 지닌 자가 알 수 있는 게 아니오. 이제 한 가지 예만 들어 보면, 나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오. 역경으로 고난을 주는 보살은 원수라고 불평하지 말고, 도에 입문하고 부처가 되는 발판을 다져 주는 정말 훌륭한 스승임을 생각해 보시오.
모든 부처님은 여덟 고통[八苦]을 스승으로 삼아 위없는 도[無上道]를 이루셨소. 이는 고통이 성불의 근본이라는 뜻이오. 또 부처님은 맨 처음에 제자들에게 부정관(不淨觀)을 수행하도록 가르치셨소. 부정관을 오래오래 지속하다 보면,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 아라한이 될 수 있기 때문이오. 따라서 부정(不淨)이 곧 청정의 근본인 셈이오.
북구로주(北俱盧洲)의 사람들은 고통이 전혀 없어서, 도에 입문할 수가 없다오. 그런데 우리 남염부제(南閻浮提)에는 고통스런 일이 몹시 많아서, 불도에 입문하여 생사윤회를 끝마치는 사람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오. 세상에 생로병사와 전쟁·홍수·가뭄·화재 등의 고통이 전혀 없다고 해 보시오. 그러면 사람마다 모두 안일과 향락 속에 취생몽사(醉生夢死)할 터이니, 누가 기꺼이 세간을 벗어나 생사 해탈을 구하려고 마음먹겠소?
그렇다고 강한 병력을 쥐고 높은 자리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들도, 더러 대자비를 나토는 보살의 화신이 아니겠느냐고 섣불리 말해서는 안 되오. 이러한 이치는 오직 통달한 사람에게만 말할 수 있으며, 무지하고 무식한 자들에게는 말해서는 안 되오. 정말 통달한 사람이라면, 진짜 악마한테도 이익을 얻을 수 있소. 그러나 무지하고 무식한 자들은 이러한 이치를 들으면, 수행할 마음을 내기는커녕, 도리어 불법을 공격하고 비방하게 될 뿐이오.
비유컨대, 어린애에게 약을 먹여야 하는데, 어린애가 약을 먹으려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소? 그때 약을 엄마 젖꼭지에 발라 두면, 약을 억지로 먹이지 않고도 저절로 먹게 되오. 만약 그대가 통달한 사람처럼 행세하며 위와 같은 이치를 크게 떠들고 다닌다면,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은 별로 없으면서, 해악만 몽땅 끼칠 게 틀림없소. 그러니 입 딱 다물고 침묵을 지키며, 함부로 헛된 말을 지껄이지 마시오. 불보살의 경계는 일반 범부 중생이 헤아리고 짐작할 수 있는 게 아니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