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경계(境界)
염불하는 사람이 임종 때 부처님의 영접 인도를 받는 것은, 중생과 부처님 사이에 감응의 길이 서로 트였기 때문이오. 물론 이러한 감응이 생각과 마음을 떠나지는 않소. 그렇다고 단지 생각과 마음이 나타내는 관념이나 환상에 지나지 않을 뿐, 부처님이나 성인이 실지로 와서 영접하는 일은 결코 없다고 말할 수는 없소.
마음이 지옥을 지으면 임종 때 지옥의 모습이 나타나고, 마음이 불국토를 지으면 임종 때 불국토가 나타나기 마련이오. 모습이 마음에 따라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오직 마음상의 관념일 뿐, 실지 그런 경계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안 되오. 오직 마음일 뿐 실지 경계는 없다[唯心無境]는 말은, 모름지기 유심의 도를 크게 깨닫고 원만히 증득한 세존(世尊)께서 말씀하셔야 허물이 없소.
만약 일반 범부중생이 그런 말을 지껄인다면, 단멸(斷滅)의 지견(知見)에 떨어지게 되고, 여래께서 닦아 증득한 법문을 파괴하는 삿된 이단일 뿐이오. 그러니 삼가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소? 하나하나 자세히 말하자면 밑도 끝도 없으니, 한 귀퉁이를 들어 보이면 나머지 셋은 알아서 잘 헤아리기 바라오.
시간이란 일정한 법이 없고, 사람이 보기에 따라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불보살님의 경계는 제쳐 놓고라도, 우선 평범하고 조그만 경계를 가지고 한 번 살펴봅시다.
주(周) 영왕(靈王)의 태자인 진(晋)이 신선도(仙道)를 배운 지 7일만에 구산(緱山)에 출현했는데, 그때 이미 세상은 진(晋)나라 시대가 되었다고 하오. 그래서 이런 시가 전해 오지 않소?
왕자가 신선술을 배우러 가서, 王子去求仙
단(丹)이 이루어져 구천에 들었네. 丹成入九天
동굴 속에 바야흐로 이레 있었건만, 洞中方七日
세상은 벌써 천 년 가까이 흘렀다네. 世上幾千年
(주 영왕은 재위 기간이 B.C. 571~545년이고, 진나라는 A.D. 265~420년 동안 존립했으니, 그 사이에 천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셈: 옮긴이)
또 여순양(呂純陽)이 종리권(鍾離權)을 한단(邯鄲)의 한 주막에서 만났는데, 종리권이 그에게 신선술을 배우라고 권했다오. 그런데 여순양이 부귀영화를 얻은 뒤에 배우겠다고 하자, 종리권이 그에게 베개 하나를 주면서 베고 자 보라고 시켰소. 그래서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그가 어릴 적부터 자라서 재상이 될 때까지 무려 50년 동안, 세상에 보기 드문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오. 자손이 집안에 가득 차고 온갖 즐거움이 넘쳐나는데, 나중에 어떤 사소한 일 하나로 임금과 뜻이 맞지 않아, 마침내 스스로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잠에서 깨어났다오. 처음에 그가 잠들 때, 주막집 주인이 누런 좁쌀로 밥을 짓기 시작했다오. 그런데 꿈속에서 재상이 되어 국가 정사를 돌보기까지 50년 세월을 거친 뒤 깨어나 보니, 주인이 짓던 좁쌀밥이 아직 뜸도 덜 들었더라오.
[여순양(呂純陽 :798~?): 중국 민간 전설의 8신선 가운데 하나로, 보통 여동빈(呂洞賓)이라 불림. 이름은 암(嵒 또는 巖), 순양은 호. 당나라 경조(京兆) 사람으로, 무종(武宗: 841~846 재위) 때 두 차례 진사에 급제하지 못한 뒤 유랑하다가, 종리권을 만나 신선술을 배운 게 64세 때임. 종남산(終南山) 등에 은거하여 수도한 뒤, 각지를 다니며 숱한 신통으로 사람들을 제도함.]
이는 선인(仙人)의 경지에 불과한데도, 일념(一念) 동안 50년의 경계와 사업을 펼친 것이오. 하물며 천상 중에서 가장 높은 천상에 속하고, 성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이신 우리 부처님이나, 이미 법신을 증득한 여러 대보살님들의 경계야 오죽하겠소?
그래서 선재(善財)동자가 미륵보살의 누각 안에서 보현보살의 털구멍[毛孔]에 들어갔는데, 모든 구멍마다 시방세계에서 불국토의 가는 먼지 수[佛刹微塵數]만큼의 무량겁이 지나도록 6바라밀로 만 가지 수행을 행하고 나왔다고 하지 않소? 『화엄경』의 이 구절은 우리가 또 어떻게 그 경지를 헤아릴 수 있겠소?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은 실체(實體)가 없음을 모름지기 알아야 하오. 범부 중생의 지위에서는 단지 범부 중생이 보아야 할 경계밖에 볼 수 없소. 그러니 범부가 본 경계를 가지고, 불보살님의 경계도 아마 조금도 다름없이 그러할 것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되오.
이제 쉬운 비유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거울에 수십 겹의 산수와 건물 풍경이 비치는 모습을 보면, 실로 원근의 차이가 전혀 없으면서도, 원근의 느낌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소? 세간의 빛깔에 관한 법[色法]도 오히려 이와 같을 수 있거늘, 하물며 유심자성(唯心自性)을 이미 증득한 마음의 법[心法]이야 오죽하겠소?
그래서 한 터럭 끝에 보왕(寶王)의 국토를 드러내고, 미세한 티끌 속에 앉아 큰 법륜을 굴린다[於一毫端, 現寶王刹, 坐微塵裏, 轉大法輪]고 하오. 삼세 고금(三世古今)이 시종 지금 한 생각을 떠나지 않으며, 시방 우주가 나와 남 할 것 없이 터럭 끝만큼도 떨어져 있지 않소.
무릇 불가사의한 경계에 속하는 것은, 모두 단지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며, 함부로 헤아리거나 판단하지 마시오. 정말로 정성이 지극하고 간절하다면, 저절로 모든 것을 분명히 알게 되리니, 구태여 남들에게 물어 볼 필요도 없소.
만약 지성으로 간절히 예배올리고 독송 염불하는 데는 힘쓰지 않고, 종일토록 범부 중생이 헤아릴 수 없는 경계만 망령되이 추측하고 상상한다면, 요술쟁이 마법사와 똑같은 꼴이 되고 말 것이오. 그런 자가 부처님을 비방하고 정법을 비방하며 수행승을 비방하는 죄악의 과보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소?
수행을 정성스럽게 하다 보면, 영험한 감응이 있기 마련이오. 더러는 관세음보살이 계시다는 보타산(普陀山) 범음동(梵音洞)이 보이기도 하는데, 중생의 신심을 북돋워 주기 위해 나타나는 감응이라, 누구든지 지성이면 볼 수 있다오. 따라서 대단히 특별한 예로 여기고 자랑할 필요는 없소. 그런다면 모든 사람이 죄다 시끄럽게 떠들어 댈 것이오.
오대산(五臺山)의 문수보살도 예로부터 친견했다는 사람들이 자못 많소. 그분들은 모두 큰 인연이 있거나, 또는 수행 공부가 깊어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뒤 반드시 큰 깨달음이나 증득이 있었소. 나도 광서(光緖) 12년(1886)에 오대산을 참방 순례한 적이 있소. 그 전에 북경의 유리 공장에서 청량산지(淸凉山志)를 두루 수소문하여, 겨우 한 부를 구해 매일같이 보고 있었소.
당시 날씨가 제법 추워, 3월 초에야 비로소 오대산에 이르렀소. 산에 40여 일 머무르는 동안, 산에 찾아와 순례하는 사람 가운데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참 많았소. 그런데 보아 하니 진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은 정말 적었소. 그걸 보면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는 참배객들은, 대부분 옛사람들의 기록에 나오는 행적을 보고 덩달아 자기 자랑 해대는 허위 과장임을 알 수 있소.
설사 진짜로 친견했더라도, 그들의 자랑은 틀림없이 세간 조류에 편승해 분별없이 떠들어대는 것이니, 금과 가짜 금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소. 그렇지 않고 그들의 말이 전부 진짜라면, 이는 문수보살이 자중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아무에게나 당신을 드러낸 것이니, 이 무슨 당치 않은 일이겠소?
이치와 성품상 부처를 말한다면 일체 중생이 모두 해당하지만, 홍진의 번뇌를 등지고 깨달음에 합치한 수행의 경지를 본다면 빈이름뿐이라오. 어떤 사람이 선정에 들면 자신이 비로자나불[法身佛]과 같다고 자랑하는가 보오. 그도 선정에서 나오면 여전히 범부 중생일 텐데, 부끄러운 줄 모르고 큰소리치며 사람들을 속이고 있소. 가령 정말로 비로자나불과 같다면, 여전히 범부 중생으로 되돌아오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