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혜욱(兪慧郁)·진혜창(陳慧昶) 거사에 대한 답신
내신(來信): 제자들은 업장이 몹시 무겁고 타고난 자질이 어리석은데, 다행히 정토 법문을 듣고 좌하(座下: 인광 대사께 대한 존칭)께 귀의하였습니다. 오직 착실하게 염불하라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삼가 준수하여, 빨리 생사 해탈을 얻는 것이, 스승님의 노파심을 저버리지 않는 길입니다.
무릇 불자가 되었으면, 마땅히 자기를 제도하고 남도 제도하는 마음을 내야 할 텐데, 지금 제자들은 자신도 아직 제도하지 못한 처지에, 어떻게 남을 제도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친지나 벗을 만나 방편을 다해 믿음을 전하는 것 또한, 저희 분수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그들의 견해와 주장이 자신뿐만 아니라 남도 잘못 인도할 우려가 몹시 큽니다.
한 주장은 이렇습니다. “부처님은 욕심이 없는데,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극락세계의 각종 금은보화는 아직 욕심이 있는 듯하다. 『금강경』처럼 일체 모두 텅 비었다[空]는 것이, 훨씬 높고 우월하며 현묘(玄妙)하지 않은가?”그래서 정토 법문을 무시하고 믿지 않습니다. 이는 『금강경』과 『아미타경』의 뜻을 모르고서, 자기 멋대로 불도를 어지럽히는 자입니다.
또 한 주장은 이렇습니다. “부처님이 사람들에게 일체 모든 것을 간파하여 초월하라고 가르치면서, 어찌하여 자신은 도리어 이런 온갖 탐욕을 부리는가? (『아미타경』의 금은보화 지칭) 또 우리는 어찌 꼭 힘들게 눈앞의 실질 존재를 내버리고, 죽은 뒤 아득한 세계를 추구할 필요가 있는가?” 이 또한 사견(邪見)에 집착하여, 멋대로 부처님과 법을 비방하는 자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은 비록 높고 낮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과 남을 잘못 인도하는 사견임은 똑같습니다. 물론 제자들도 이들을 힘써 설득합니다.
“서방 극락의 각종 경계는 모두 아미타불의 공덕으로 나타나는 장엄한 실상(實相)이자, 자유자재로 누리는 복덕의 과보인지라, 오탁악세의 업력으로 이루어진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물며 사바세계의 존재는 모두 고통이고, 텅 비고, 덧없지 않은가? 그래서 마땅히 내버리고, 극락의 실제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저희같이 어리석은 범부의 말은, 설령 올바른 이치에서 벗어남은 없을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른 믿음을 끝내 열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스승님의 모든 언론은 마치 밝은 해가 중천에 떠서 어떤 어둠도 비치지 않음이 없음과 같습니다. 그러니 몇 말씀 다시 적어 이들 사견을 타파해 주십사고, 감히 구걸하옵니다.
답신(答信): 보내온 서신에서 말한 두 가지 사견은, 범부 중생의 지견으로 여래의 경계를 헤아리는 탓이오. 공자가 말한 ‘작은 재주 부리기 좋아하는 것’이고, 맹자가 말한 ‘자포자기(自暴自棄)’라오. 이런 사람들은 본디 더불어 이야기할 자격이나 가치도 없는 자들이오. 그러나 부처님의 자비가 워낙 광대무변하여 어떤 한 물건도 버림이 없기 때문에, 여기 한 방편을 들어, 그들의 미혹한 꿈을 깨우쳐 보겠소.
부처님께서는 조금도 탐욕심이 없기 때문에, 극락세계의 뭇 보배 장엄을 이룰 수 있소. 거기서 나토시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경영할 필요가 없는 수승한 경계라오. 어떻게 사바세계의 범부 경계와 견줄 수 있겠소? 비유컨대, 덕 있는 자선가는 마음바탕이 모두 광명정대(光明正大)하기 때문에, 그의 얼굴도 저절로 자선과 덕에 넘치는 환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과 같소. 그런 얼굴 모습을 애써 구하는 마음이 없어도 자연스레 나타나는 것이오. 반면 악업을 짓는 사람들은, 그 마음바탕이 더럽고 흉악하며 악착스럽기 때문에, 그 얼굴도 따라서 음험하고 흉악하게 변한다오. 단지 얼굴 모습만 좋게 보여, 남들이 자기를 광명정대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길 바라는 자는, 그 마음바탕이 선량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구해도 그런 모습을 얻을 수 없소. 이는 우리 범부 중생의 눈으로 보는 모습을 두고 말한 것이오.
귀신 같으면, 보는 눈이 또 다르오. 귀신 눈에는 선량한 사람의 몸에 광명이 보이는데, 광명의 크기와 빛깔은 그 도와 덕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오. 반면 악인의 몸에는 암흑과 흉살(凶煞)의 기운이 보이는데, 그 기운의 크기와 빛깔도 역시 죄악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오. 그리고 『금강경』이 텅 빈 공(空)을 말한다는 생각은, 『금강경』이 이치와 성품[理性]만을 밝히고 있으며, 그 이치와 성품을 증득한 결과 얻는 과보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오. 막힘이 전혀 없는 실보(實報) 국토(극락 4土 가운데 셋째)의 장엄이, 바로 『금강경』이 궁극으로 얻는 과보라오. 범부가 이 말을 들으면, 당연히 그럴 리 만무하다고 의심할 것이오.
『금강경』은 보리심을 낸 선남선녀에게, 마음이 형상에 머무름(걸림) 없이 중생을 모두 제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오. 비록 중생을 제도할지라도, 내가 제도하는 주체고, 중생이 제도 받는 객체(대상)이며, 그로 인해 구경열반(究竟涅槃)의 법을 얻는다는 사실을, 전혀 보지(의식하지) 말라는 뜻이오. 이른바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無所住而生心] 얻는 바 없이 부처가 된다[無所得而作佛]는 뜻이오. 그래도 『금강경』에서 성취한 부처(불도)와 그 부처가 머무르는 국토가, 우리 사바 고해의 오탁악세 경계와 같다고 생각한단 말이오? 정말 텅텅 비어 아무 것도 없단 말이오?
청정한 불국토는 사람들이 그 이름을 한번 듣기만 해도, 몸과 마음이 모두 청정해지오. 그런 불국토를 탐욕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매일같이 똥통 속에서 살면서, 스스로 향긋하고 청결하다고 여기는 똥 고자리(구더기)라오. 그들은 전단향(檀檀香)도 더럽고 악취 난다며, 자기 똥통을 벗어나 그 향기를 맡으려고 꿈에도 바라지 않는다오.
옛날에 도척(盜蹠)이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천하를 휩쓸며 도적질할 때도, 도리어 자기들에게 (도둑의) 도가 있다고 자부했다고 하오. 그들은 요 임금이 어질지 못하고, 순 임금이 불효했으며, 우(禹) 임금이 음란했고, 탕(湯) 임금과 무왕(武王)이 포악무도했으며, 공자는 허위과 가식으로 가득 차 도덕이 없다고 비방했소. 바로 위에서 말한 두 종류 사람의 삿된 지견과 아주 똑같소. 또 근래에 경전도 내팽개치고, 효도와 윤리 도덕도 모두 내팽개치며, 나체로 나돌아 다니는 자들이 있소. 그들은 인위적인 꾸밈이나 조작이 전혀 없이, 천지자연의 덕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떠들어 대오. 그러면 그들은 왜 여름에만 다투어 옷을 벗고, 겨울에는 벌거벗지 않는 것이오? 인위적인 꾸밈이나 조작이 전혀 없이 천지자연의 덕을 받아들인다면, 우물을 파 물을 마시고, 농사 지어 밥을 먹으며, 베를 짜서 옷을 입는, 의식주 생활 전부가 인위적인 조작 아니오?
사악한 자들이 사람들한테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방해하는 짓이, 언제나 늘 이 모양이라오. 그들은 선행은 모름지기 무심(無心)하게 행해야지, 마음을 두고[有心] 행하면 진실한 선행이 아니라고 비난한다오. 그러나 예로부터 모든 성현이 아침저녁으로 자신을 자극하고 경책하며, 깊은 연못에 임하듯 살얼음을 밟듯, 두려워하고 조심했소. 이건 무심(無心)이오? 유심이오?
결국 이러한 사악한 사람들은 수행하지 않는 것을 최고지상으로 여기고 살기 때문에, 이토록 지극히 어리석고 비열한 눈먼 논란으로, 자신의 똑똑함을 과시하는 것이라오. 남들이 자신을 정말 고명하고 크게 통달한 대가요, 명사(名士)로 알아주길 바라는 것이오. 그러나 자신의 온 몸이 똥통 속에 빠져 있는 줄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소. 그들과 똑 같은 사견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누가 인정하려 들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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