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승(愚僧) 거사에 대한 답신
방생(放生)이란 원래, 사람들에게 살생을 금지하고 생명을 보호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남에게 차마 해를 끼치지 못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실행하자는 데 있소.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과 행실이 각각 다르구료. 설령 모든 사람을 전부 감동시킬 수 없더라도, 한 사람만 감동시킨다면, 그 한 사람이 한평생 얼마나 많은 생명을 덜 죽이겠소? 한 사람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감동시킨다면, 그 파급 효과가 얼마나 더 커지겠소? 더러 작은 물고기를 놓아 주면 큰 물고기의 밥이 되고, 양자강에 방생해도 어부들의 그물에 걸리는 재앙을 피하기 어렵다고 말하는가 보오. 이러한 생각과 염려는 굉장히 합리적인 것처럼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실은 사람들의 착한 마음을 가로막고, 살생의 죄업을 짓도록 조장할 뿐이오.
그 사람이 다행히 사람 몸으로 태어나, 더러 살륙을 당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무리(無理)한 논리를 펼쳐 자신의 총명함을 자랑하고, 방생하는 사람들을 굴복시키는지 모르겠소. 그러나 가령 그가 물고기나 다른 짐승의 몸으로 생겨났다고 합시다. 그가 사람에게 도살당하게 된다면, 그때는 결코 이러한 생각을 하려 들지 않을 것이오. 오직 우선 당장 누가 자기 목숨 구해 주기만 간절히 바랄 것이오. 누가 자기 목숨을 구해 준 뒤, 나중에 다시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된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붙잡힐 염려까지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오. 차라리 지금 당장 기꺼이 살륙을 당하고 말지, 용케도 풀려났다가 나중에 다시 붙잡혀 죽는 비참한 운명은 싫다고 말하겠소?
설사 이러한 때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훌륭한 가르침은 될 수 없소. 하물며 본인이 이러한 때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없으면서, 지금 자신과 별로 관계없다고, 이 따위 논리로 남들의 착한 마음을 가로막고, 살생의 기회를 조장하는 말을 함부로 지껄인단 말이오? 그런 사람이 내생에 스스로 그 과보를 받지 않는다면, 해와 달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운행하고, 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뀔 것이오. 말이란 함부로 지껄이는 게 아니오.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일이야 정말 있소. 또 방생한 뒤 다시 붙잡히는 일도 없을 수는 없소. 그러나 작은 물고기가 전부 큰 물고기의 먹이로 남김없이 잡아먹힌다는 일이나 이치는 결코 없소. 또 방생한 생명이 죄다 사람들에게 다시 붙잡힌다는 일이나 이치도 결코 없소. 어찌하여 이처럼 지나친 염려로, 본말을 뒤바꿀 수 있단 말이오?
비유하건대, 난민을 구제하는데 더러 옷 한 벌 주거나 더러 밥 한 그릇만 주어도, 그가 죽지 않게는 할 수 있소. 그런데 그런 사람 같으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게 틀림없소.
“이 옷 한 벌과 밥 한 그릇이 어떻게 저들 난민을 평생토록 따뜻하고 배부르게 해 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까짓 것 주어 봤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차라리 저들을 지금 얼고 굶어 죽게 놔둔다면, 살아서 오랫동안 헐벗고 굶주리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게 더 낫지 않은가?”
또 강도가 사람을 겁탈하려고 할 때, 옆에 있던 힘센 사람이 강도를 막아 그를 구해 준다고 합시다. 이때도 그런 사람 같으면,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오.
“그대가 만약 저 사람을 한평생 막아 주고 보호해 줄 수 있다면, 정말 아주 훌륭하겠소. 그러나 단지 지금 한 때만 막아 줄 수 있다면, 궁극에 무슨 도움이 되겠소? 그러니 지금 강도에게 겁탈당해 빈털터리가 되도록 내버려 두어, 나중에 다시 겁탈당할 기회가 없도록 하는 게 차라리 낫겠소.”
그리고 부모는 자식이 다 자랄 때까지 줄곧 양육하는 게 보통이지만, 더러 자애로운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린 자식을 기를 수 없는 경우도 있소. 그런데 그런 사람 같으면, 이 경우에도 “부모가 기를 수 없는 자식은 차라리 죽여 버리는 게 낫지 않겠는가?”라고 지껄일 것이오.
군자가 덕을 닦음에는, 선행이 작은 것이라고 행하지 않고 내팽개치는 법은 없소. 또 죄악이 작은 것이라고 슬쩍 하는 법도 없소. 그런데 그런 사람같이, 반드시 만에 하나라도 잃어버림이 없어야 바야흐로 방생을 하겠다면, 어찌 되겠소? 그러면 세상 사람 모두, 목숨이 다하도록 방생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그런 사람은 장래에 어떤 사람도 자기를 죽음에서 구해 줄 기회가 전혀 없다고 확실히 장담할 수 있단 말이오? 너무도 애통하기 그지없어, 나도 모르게 잔소리를 늘어놓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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