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양기(楊歧)의 등잔은 천추를 밝히고,
보수(寶壽)의 생강은 만고에 맵도다
혜원(慧圓) 거사 보시오.
보내 온 편지는 잘 받았소. 어제 명도(明道) 법사가 나가는 길에 그대에게 160원(元)을 송금하여, 자네 일을 끝마치도록 부탁했소. 그대는 나를 안 지 몇 년이나 되었으면서,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소. 그래서 내가 부득이 그대에게 나에 대해 간략히 말해야겠소.
나는 두 가지를 끊어버린[二絶] 고뇌에 찬 자식이라오. 그 두 가지란, 집안에서는 후사(後嗣: 자손)를 끊어버렸고, 출가해서는 불법의 후사도 끊어버린 불효를 말하오(출가 제자를 평생 하나도 받지 않았음.).
또 고뇌를 말하는 것은, 내가 본디 태어난 곳은 글공부하는 유생들이 평생 부처님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하고, 단지 한유·우(구)양수·정자·주자 같은 유학자들이 불교를 배척한 학설만 알았는데, 멋모르고 사람들은 이를 지상 최고의 신조로 받들었다오.
그런데 나는 그들보다 백 배 이상 미친 듯이 날뛰었소. 다행히 십 년 남짓 지나는 동안 지겹게도 많은 병치레를 겪으면서, 나중에야 바야흐로 이들 옛날 유학자들의 척불(斥佛) 사상이 본받을 만한 게 전혀 못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나는 한 번도 선생님에게서 배운 적이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형님이 가르쳐 주셨다오.)
처음 몇 년간은 형님이 장안(長安)에 계셔서 쉽게 기회를 얻을 수 없었는데, 광서(光緖) 7년(1881: 21세) 형님이 집에 가 계시고 나 혼자 장안에 있는 틈을 타서 (집은 장안에서 420리 떨어진 곳에 있었음), 마침내 남쪽 오대산(五臺山)에 출가하였다오.
스승은 내가 분명히 모아 둔 재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출가야 받아주지만, 의복은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나에게 단지 장삼 한 벌과 신 한 켤레만 주셨소. 그러나 방에 머물며 밥 먹는 것은 돈을 내지 않아도 되었소.(그 곳은 매우 춥고 힘든 곳인데, 밥 짓는 일 따위는 모두 손수 하여야 했소.)
그 뒤 석 달이 채 못 되어 형님이 찾아 왔는데, 꼭 집에 돌아가 먼저 어머님께 하직 인사를 올린 다음에, 다시 와서 수행하면 괜찮다고 말씀하셨소. 나는 그 말이 속임수인 줄 알면서도, 대의명분상 일단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소. 가는 길에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는데, 어머님께서는 뜻밖에도 출가를 특별히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으셨소.
이튿날 형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소. “누가 너에게 출가하라고 시켰냐? 너 혼자 스스로 출가한 거냐? 오늘부터는 출가할 생각일랑 아예 내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아주 혼내줄 거다.”
나는 단지 그를 속이는 수밖에 없었소. 그렇게 집에서 80여 일을 머무는 동안, 도무지 기회를 얻지 못했소. 하루는 큰형님은 친척을 만나러 가고, 둘째 형님은 밖에서 곡식을 말리는데, 닭이 쪼아 먹지 못하도록 지켜야 하게 되었소. 이제 기회가 온 줄 알고, 학당(學堂)에 가서 관음(觀音) 점괘를 하나 뽑아 보았는데, 그 내용도 딱 맞아 떨어졌다오.
“고명(高明)한 분이 복록(福祿)의 자리에 있으니, 새장에 갇힌 새가 달아날 수 있다. 마침내 스님의 장삼을 훔쳐 돈 2백전과 함께 가지고 갈 것이다.”(그 전에 형님은 나의 장삼을 바꾸려고 했는데, 내가 만약 스님이 사람을 보내 찾으러 오면 원물로 반환해야 탈이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소송을 제기해 적지 않은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해서, 장삼을 그대로 보관할 수 있었소.)
그렇게 도망쳐서 다시 스승 계신 곳에 도착했으나, 형님이 다시 찾아올까 두려워 그 곳에 감히 머물지 못하고, 하룻밤 묵은 뒤 떠나야 했소. 그때 스승께서 여비로 1원짜리 양전(洋錢)을 주셨는데, 당시 섬서(陝西) 사람들은 아직 그 돈을 본 적이 없어, 상점에서도 받지 않았소. 그래서 은(銀)과 바꾼 뒤 8백 문(文)에 팔았는데, 이것이 내가 스승에게 받은 것이라오.
호북(湖北) 연화사(蓮花寺)에 들어가 가장 힘든 일감을 달라고 했소.(밤낮 끊임없이 석탄을 때서 40여 명이 먹고 쓸 물을 끓이는 일이었는데, 물도 스스로 길어 와야 하고, 탄재도 직접 퍼내야 했소. 아직 계를 받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절에 묵을 수 있게 해 준 것만도 이미 커다란 자비였다오.)
이듬해 4월 부사(副寺: 절의 부책임자)스님이 돌아가시고 고두(庫頭: 창고 담당, 재무)스님이 병 나자, 주지스님은 내가 성실한 것을 보시고 창고(재무)를 돌보도록 분부하셨소. 은전(銀錢)의 회계는 주지스님이 직접 하셨소.
나는 처음 출가했을 때, “양기의 등잔은 천추를 밝히고, 보수의 생강은 만고에 맵도다[楊歧燈盞明千古, 寶壽生薑辣萬年.].”는 대구를 보았소.
또 사미계율(沙彌戒律)에 상주(常住: 절간) 재물을 훔쳐 쓰는 과보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몹시 두렵고 조심스러웠소. 그래서 단(甘) 음식 하나 정리하면서도, 손에 가루나 맛이 묻으면 감히 혀로 핥아 먹지 않고, 그냥 종이로 닦아낼 뿐이었소.
양기 등잔이란, 양기 방회(方會) 선사가 석상(石霜) 초원(楚圓) 선사 아래에서 감원(監院: 지금 우리나라 절의 원주 스님)을 할 때, 밤에 경전을 보는데 스스로 기름을 사서 쓰고, 상주 기름을 몰래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라오.
보수 생강이란, 동산(洞山) 자보(自寶) 선사(寶壽는 그의 별호)가 오조(五祖) 사계(師戒) 선사 아래에서 감원을 할 때, 스승이 차가운 병[寒病]이 있어 생강과 노란 설탕을 끓여 고약(膏藥)으로 늘 먹곤 했는데, 스승을 시중드는 스님이 와서 이 두 물건을 달라고 하자, 그는 “상주의 공유물을 어찌 개인 용도로 쓸 수 있소? 돈 가지고 가서 사다가 쓰시오.”라고 답하며 거절했다는 거라오.
이에 사계 선사는 곧장 돈을 가지고 사오라고 시키면서, 그 제자를 몹시 기특하게 여겼다오. 나중에 동산(洞山)의 주지가 사람이 필요해, 사계 선사에게 아는 사람이 있으면 추천하라고 부탁하자, 사계 선사가 생강을 사도록 한 사나이면 될 거라고 답했다는 것이오.
『선림보훈(禪林寶訓)』 중권(中卷)에는 설봉(雪峯) 동산(東山)의 혜공(慧空) 선사가, 서울에 과거 보러 가는데 마부가 필요하다고 빌려달라고 요청한 여재무(余才茂)에게, 답장한 편지가 실려 있소. 대강의 내용은 이러하오.
“내가 비록 주지이긴 하지만, 역시 한낱 빈궁한 선승에 불과하오. 이 마부는 상주에서 나온 것이고, 공(空)에서 나온 것이오. 상주에서 나온 것이니 곧 상주를 훔치는 게 되고, 공에서 나온 것이니 텅 비어 하나도 없는 것이 되오. 하물며 귀하가 서울에 가서 부귀공명을 얻으려고 함에, 필요한 물건을 삼보(三寶)에서 구한단 말이오? 주는 이나 받는 이 모두 죄를 짓는 일은 없어야 될 줄 아오. 설사 다른 절에서 준다고 할지라도, 사절하고 받지 않는 것이, 바로 앞날의 복이 될 것이오.”
근래 속된 스님들은 금전과 재물을 교유(交遊) 관계나 제자 또는 세속의 집안에 쓰는 일이 너무나 많소. 나는 한평생 교유를 맺지 않고, 제자를 받지 않으며, 주지를 하지 않기로 서원하였소. 광서 19년(1893년: 33세) 보타산(普陀山)에 이르러 밥 먹는 한가한 중이 된 이래, 30년 남짓 어떤 직책도 가져 본 적이 없소. ‘인광(印光)’이라는 두 글자는, 남을 위해 대신 수고하는 종이 위에 절대로 쓰지 않았소. 그래서 20여 년간 편안히 지낼 수가 있었소.
나중에 고학년(高鶴年)이 몇 편의 원고 조각을 속여 가지고 가서 <불학총보(佛學叢報)>에 실었을 때도, 아직 ‘인광’이라는 이름은 쓰지 않았소. 민국 3년(1014: 54세) 이후에 서울여(徐蔚如)와 주맹유(周孟由)가, 자기들이 내 글을 수집하여 북경에서 『인광문초(印光文鈔)』를 인쇄하겠다고 졸라, 민국 7년(1918: 58세)에 책이 나왔소.
그 후로 날마다 편지를 받고, 오로지 남들을 위해 바르게 살아 왔소. 그러다가 남의 말을 잘못 전해 듣고 나에게 귀의하겠다고 원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에, 단지 그들의 믿음에 내맡겨 두었을 따름이오. 부자에게도 나는 공덕을 쌓으라고 보시를 청하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나는 특별히 구휼이나 자선을 베풀 수가 없었소.
광서 12년(1886: 26세) 북경에 들어간 적이 있으나, 우리 스승에게서 역시 한 푼 받은 것도 없소. 그 뒤로는 도업(道業)에 진척이 없어 감히 서신 한 통 올리지 못하다가, 17년(1891: 31세) 스승께서 입적하신 후에는 여러 사형제(師兄弟)들이 각자 제 갈 길로 흩어졌다오. 그리하여 40년 동안 출가 동문과도 편지 한 구절이나 한 푼어치 물건을 서로 주고받은 적이 없었소.
우리 집안에는 광서 18년 한 고향 사람이 북경으로부터 귀향하는 길에 편지 한 통 부친 적이 있소. 그때는 아직 우체국도 없고 큰 길도 없어서, 그가 직접 전달해 주지 않으면 편지를 부칠 방법이 없었소.(지금은 비록 우체국이 있지만, 배달해 줄 사람이 없으면 역시 부칠 수 없소.) 이듬해 남쪽으로 내려와 소식이 완전히 끊겼소.
민국 13년(1924: 64세)에 이르러, 한 생질이 사람들 말을 듣고 산으로 나를 찾아왔소. 그때서야 비로소 후사가 이미 끊겨, 집안의 다른 손자가 양손(養孫)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소.(이 일은 나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오. 나중에 조상의 덕을 손상시킬 자가 없으니 말이오. 양손이 대를 이었지만, 이는 우리 부모의 친자손이 아니지 않소?) 그래서 그에게도 편지를 보내지 않았소.
민국 이래로 섬서 지방의 재난이 가장 심한데, 만약 그에게 편지를 했다가, 그가 남쪽으로 찾아온다면 어떻게 하겠소? 그를 편안히 정착시킬 땅도 없고, 그가 되돌아간다고 해도 수십 원은 필요할 테니, 그의 왕래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손해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오. 그래서 지난해에 합양(郃陽)의 재난을 구휼할 때도, 단지 현(縣) 당국에 송금하였으며, 감히 우리 마을 이름까지는 언급하지 않았소.(우리 마을은 현 소재지에서 40여 리 떨어져 있소.) 만약 언급했다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고 다치게 할 줄 모르기 때문이오.
올봄 진달(眞達) 법사가 최근 이삼 년 동안 섬서 재해만 구휼해 온 주자교(朱子橋)를 통해 전해 온 소식에 따르면, 서너 거사와 함께 1천 원을 모아 자교에게 주면서, 특별히 우리 고향 동네에 나눠 주라고 부탁했다는구료. 그러나 수백 가구에 천원이 별로 큰 도움은 되지 못했을 것이오. 그리고 이 일로 말미암아 남쪽으로 오겠다는 사람이 생겼소.
우리 집안의 생질인 한 상인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아무개가 남쪽으로 찾아와 나를 방문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겠느냐고 물어왔소. 그래서 내가 답신하기를, 만약 그대가 보살필 수 있으면 그에게 좋은 일을 마련해 주는 것이 가장 좋고, 그렇지 않으면 왕래가 몹시 힘들고 본인에게 손해만 될 뿐 별 이익이 없을 것이라고 간곡히 말해 주어, 그들이 지쳐 죽게 하는 일은 없도록 잘 회답하라고 부탁했소. 이 일은 진달 법사가 한바탕 호의를 베풀면서, 그 영향까지는 세심하게 배려하지 못한 때문이오. 또 나에게는 말 한 마디 안 하여, 내가 알았을 때는 다 이루어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소.
전에 이런 얘기를 들었소. 수십 년 전 호남(湖南)의 한 갑부 노인이 생일잔치를 하는데, 참석자 한 사람에게 4백전씩 나누어 주겠다고 미리 알렸다오. 때는 겨울 농한기였는데, 시골 사람들이 수십 리씩 걸어 이 돈을 타려고 수만 명이나 모였다오.
그런데 관리자가 미리 좋은 방법을 마련하지 않아, 천천히 한 사람씩 나누어 주다 보니, 뒤에 처진 사람은 몹시 배고파, 실로 온힘을 다해 앞으로 밀치고 나섰다오. 그래서 넘어져 깔려 죽은 사람이 2백 명이 넘고, 다친 사람은 부지기수였다오.
그래서 현(縣) 당국에서 나서서 사람들에게 움직이지 못하게 명령한 뒤 사태를 수습했는데, 죽은 자에게는 1인당 24원과 관(棺) 한 구씩을 지급하고 시체를 찾아가게 했다오. 노인은 사람들이 놀라 소란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태를 안 뒤, 그만 한숨을 크게 쉬더니 죽어버렸다오. 며칠 안 되어 중앙 관료를 지내던 그의 아들도 서울에서 죽고 말았소.
그런 까닭에, 무슨 일이 되었든 간에, 먼저 그로 말미암을 부작용을 사전에 잘 예방하지 않으면 안 되오. 내가 어찌 우리 집안과 고향에 무심할 수 있겠소? 다만 능력이 미치지 못하니, 아예 실마리를 풀어 놓지 않는 것이 유익하고 손해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일 따름이오.
영암사(靈岩寺)에는 전에 단지 열 명 남짓밖에 없었소. 모두들 요(姚) 아무개가 병들었다고 거기에 머물도록 특별히 편의를 봐 주었는데, 이 일을 어찌 선례로 삼을 수 있겠소? 그 절은 농사가 잘 된 해라도 소작료가 천 원이 안 되고, 작황이 나쁘면 더 줄어들며, 이밖에는 전혀 별다른 수입이 없다오.
최근 3년 사이에 영암사가 정말 도를 열심히 닦는다고 평이 나서, 그 곳에 귀의한 신도들이 이레 염불 기도를 부탁하면서 약간씩 공양을 올리는 정도라오. 그래서 최근 상주 인원이 이삼십 명으로 불어났지만, 나는 절대로 그 곳에 요구하는 게 없소.
영암사의 여러 법사들은 부모의 신위(神位)를 염불당에 모시는 이가 많은가 보오. 덕삼(德森) 법사나 그 친구 요연(了然) 법사들은 모두 효성으로 부모의 신위를 모시는가 본데, 나는 절대로 이 일은 언급하지 않고 있소. 만약 내가 언급했다가는, 그들이 정말로 몹시 기뻐하며, 인광 스님도 그러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자기들 공치사와 사심(私心)만 챙기려 들 것이오. 하물며 평소 얼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대가, 단지 편지 한 통으로 귀의해 놓고, 여기에서 종신토록 양로(養老)나 할 생각이란 말이오?
그렇다면 나에게 귀의한 어려운 사람은, 모두 나에게 찾아와 양로하겠다고 나설 것이오. 내 손에서 만약 금전이나 곡식이 나올 수 있다면, 이 또한 원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이러한 도력이 없소. 그러니 어떻게 그러한 대자대비를 베풀 수 있겠소?
예전에 복건(福建)의 황혜봉(黃慧峯)이 매번 시를 지어 부쳐 오면, 얇은 믿음이나마 다소 있는 듯하기에 내가 여러 책을 보내 주었더니, 그가 귀의하겠다고 자청해 왔소. 그는 나와 나이가 같았는데, 나중에는 다시 출가하겠다고 나서기에, 내가 재가 수행의 유익함을 적극 일러 주었소. 그가 스스로 보리심을 내어 출가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실은 그저 일없고 조용한 곳을 찾아 자손들의 양로비를 줄이려고 꾀한 것뿐이라오.
그가 하도 심한 말로 극성을 부리기에, 내가 이렇게 말했소.
“나는 남의 절에 30년간 머물러 오면서, 내 한 몸도 이미 많다고 느껴왔소. 하물며 당신까지 또 와서 나에게 출가한다면, 어찌 되겠소? 당신이 꼭 오겠다면, 내가 하산하는 수밖에 없소. 왜냐하면, 나 자신도 돌볼 겨를이 없거늘, 어떻게 당신까지 돌봐 줄 수 있겠소?”
그 후로 그는 편지를 뚝 끊고 말았소. 그러니 전에 큰소리친 도심(道心)은 진짜 보리심이 아니라, 자손을 위해 이익을 찾은 세속 마음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소.
그런데 그대는 머리가 제법 총명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의 속마음까지 헤아려 주지는 못하는구료. 자기한테는 어려운 줄 알면서, 남에게는 쉬울 것이라고 여기고 있지 않소? 내가 그대보다 더 고뇌가 많은 줄 모른다는 말이오. 앞으로는 그대 스스로 자기 능력을 헤아려 일하기 바라오. 만약 또 다시 나에게 대신 금전을 내달라고 요청하면, 목숨을 바쳐 상환해야 할 만큼 몹시 어렵게 되오. 왜냐하면 내가 그대 한 사람밖에 모르는 것이 아니며, 또 그대 한 사람만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오. 설령 그대 한 사람뿐이라고 하더라도, 몇 년 동안 사오백 원씩 쓴 것도 별로 요긴한 일도 아니었고, 또 이곳에 재난 구휼하랴, 저 곳에 자선 사업하랴, 내가 어떻게 다 감당하겠소?
좋은 책[善書]을 인쇄하여 법보시하는 일만 해도, 제멋대로 부쳐줄 수가 없소. 거기에도 본디 나름대로 규칙이 있는 것은 그대도 보았을 줄 아오. 만약 사람들이 요구한다고 모두에게 그냥 부쳐 주기로 한다면, 비록 수십만 가구가 나서도 다 처리할 수 없을 것이오. 하물며 모두가 조금씩 갹출하여 겨우 유지하는 형편인데, 오죽하겠소? 만약 꼭 하려는 경우, 원가에 따라 배포한다면 소원을 이룰 수 있소. 그렇지 않고 사람들에게 유익하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것처럼 부쳐 준다면, 금방 문 닫을 수밖에 없소.
<보타지(普陀志)>는 전에 불법(佛法)도 모르고 부처님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편집했는데, 더구나 나의 전기(傳記)까지 한 편 지어 덧붙인다기에, 내가 잘못 되었다고 극력 반대했소. 나중에 한두 가지 일로 말미암아 책임자가 내 의견에 따르지 않기에, 나는 그 일에서 완전히 물러나 더 이상 묻지도 않았소.
그가 편집을 마쳐 다른 스님에게 부탁했다가 반 년 이상 묵힌 다음, 나중에사 나에게 감수(監修)해 달라고 다시 요청해 왔는데, 나 또한 겨를이 없어 몇 년 동안 미루어 왔소. 그래서 이 책에는 내 이름이 전혀 없소. 거기에 수록할 내 글과 이름을 모조리 빼버리고, 하나도 남기지 않은 것이오.
그가 다른 사람에게 써 달라고 청탁해 인쇄를 마쳤는데, 산중에서 그 책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종이 값과 인쇄비를 합한 원가에 따라 권당 6각(角)씩 셈하여, 모두 3천부를 인쇄했다오. 신청한 물량 1천여 부를 빼면 단지 천여 부 남는데, 나도 사람들에게 조금 보낼 생각이오. 그대도 몇 부 가져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생각이 있다면, 그 마음은 아주 좋소. 다만 얼마나 어려울지는 잘 모르겠소.
앞으로는 “자기에게 생기기를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베풀지 않는다[己所不欲, 勿施於人.].”는 마음을 늘 간직하기 바라오. 만사에 자기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또 남의 마음을 미루어 내 마음을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하오. 그렇게만 한다면, 그대는 앞으로 틀림없이 광명(光明)이 휘황찬란하고, 인간과 신명이 모두 기뻐하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오.
이렇게 입에 쓴 약을, 정말로 그렇다고 여기고 달게 받아 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소. 아무쪼록 지혜롭게 살피길 바라오.
그리고 인쇄 원판은 절대로 홍화사(弘化社)에 보관하지 말기 바라오. 이 일이 1~2년 안에 끝날지 미정이고, 기금이나 일정한 수입도 없으며, 시국도 좋지 않소. 게다가 사람들도 서로 협조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고 어떻게 계속 유지할 수 있겠소? 불학서국(佛學書局)은 유통망도 넓고 영업성을 띠어 오래 계속할 수 있으니, 거기에 맡기면 거기나 그대에게 모두 유익할 것이오.
수신인(受信人) 해설
이 편지는 민국 21년(1932: 72세) 임신(壬申) 봄에 대사께서 혜원(慧圓)에게 답장을 내리신 것인데, 대사의 도행(道行)이 굳세고 뛰어나, 제자로 하여금 경탄과 오체투지의 예배를 절로 하도록 만듭니다. 편지 안에서 지시하신 각 단락이, 모두 대체(大體)를 힘써 유지하면서, 홀로 외눈을 갖추신 세상의 모범이 되시기에 충분합니다.
제가 능력을 헤아리지도 않고 일을 벌이거나, 남을 대함에 내 마음같이 살펴보는 용서의 아량이 부족한 점에 정문일침을 찌르신 것은, 더욱이 구구절절 뜸돌[藥石] 같고 보배 같은 가르치심입니다.
지금까지 9년간 은밀한 상자에 소중히 보관해 왔는데, 대사께서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신 지금도, 제자가 가르치심을 제대로 힘써 실행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잘못을 벗어나지 못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친필 서신에 배인 대사의 마음을 우러르니, 어찌 비통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대사의 문집 편찬에 공개 발표하여 제 잘못을 드러내면서, 아울러 대사께서 사람들 가르치시기에 싫어함 없이 열성껏 쏟으신 자비 은혜를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합니다.
경진년(庚辰年: 1940) 섣달 초여드레 제자 소혜원(邵慧圓) 삼가 적음.
소혜원(邵慧圓) 거사에 대한 답신 (0) | 2022.12.29 |
---|---|
왕심선(王心禪) 거사에 대한 답신 (0) | 2022.12.29 |
인광(印光) 대사의 간략한 전기 (0) | 2022.12.29 |
옮기고 나서 (0) | 2022.12.29 |
제2쇄에 즈음하여 (0) | 2022.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