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인광(印光) 대사의 간략한 전기
-영암산지(靈巖山志)의 고승전(高僧傳)에서 옮김-
대사의 휘(諱)는 성량(聖量)이고, 자(字)는 인광(印光)이며, 별호는 상참괴승(常慚愧僧: 항상 부끄러운 중)인데, 섬서(陝西) 합양(陽) 조(趙)씨의 아들이다. 어려서 형님으로부터 유가의 책을 배웠는데, 이를 성현의 학문으로 자못 자부하였으며, 한유(韓愈)와 우(구)양수(歐陽修)의 불교 배척론에 적극 찬동하였다. 나중에 병으로 몇 년간 고생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게 잘못인 줄 깨닫게 되었다.
대사는 나이 21세에 종남산(終南山) 남오대(南五臺) 연화동사(蓮華洞寺)에 들어가 도순(道純) 화상을 스승으로 출가하였는데, 그때가 청(淸) 나라 광서(光緖) 7년(1881)이었다. 이듬해 섬서(陝西) 흥안(興安)의 쌍계사(雙溪寺)에서 해정(海定) 율사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 전에 호북(湖北) 연화사(蓮華寺)에 잠시 들렀다가, 불경(佛經)을 햇볕에 쬐어 말리는 가운데 용서(龍舒)의 정토문(淨土文) 파본을 우연히 읽어 보고 염불 법문(念佛法門)을 알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눈에 병이 있어 거의 실명할 위기를 맞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육신이란 고통의 근본임을 깨닫고, 일심으로 염불하자 눈병이 갑자기 확 나아 버렸다. 한평생 오로지 정토(淨土)에 귀의하여, 스스로 수행하며 남을 교화하는 방편 법문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때부터 비롯하였다.
나중에 북경 홍라산(紅螺山) 자복사(資福寺)가 오로지 정토 법문을 수행하는 염불 도량이라는 소식을 듣고, 26세 때 스승을 하직하고 그곳으로 갔다. 이듬해 정월 오대산(五臺山) 참방을 마치고 다시 자복사로 되돌아왔는데, 상객당(上客堂)의 향등료원(香燈寮元) 직책 등을 맡아 보았다. 3년 동안 염불의 기본 수행(正行) 이외에 대승경전을 읽고 연구하였는데, 대장경전에 깊숙이 들어가 부처님 마음[佛心]을 미묘히 느끼고 지름길로 수행에 정진하여, 추상의 이치나 구체 사물 모두에 전혀 걸림이 없게[理事無礙] 되었다.
대사 나이 30세에 북경 용천사(龍泉寺)에 이르러 행당(行堂)으로 있었고, 31세에는 원광사(圓廣寺)에 머물렀다. 2년 뒤 보타산(普陀山) 법우사(法雨寺) 화문(化聞) 화상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곧 그 절의 장경루(藏經樓)에 안거하여 폐관 수행에 들어가 두 차례에 걸쳐 6년 동안 정진하였다. 폐관을 마친 다음 제한(諦閑) 스님과 함께 연봉(蓮蓬)에 머물렀다.
나이 44세 때 온주(溫州) 두타사(頭陀寺)를 위해 불경을 청한 일이 있는데, 일을 마치자 곧 남쪽으로 돌아와 다시 법우사 장경루에 머물렀다. 출가한 지 30여 년 동안 청(淸)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시종 자취를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는데, 남과 왕래 교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자기 이름을 아는 것조차 바라지 않았다.
민국(民國) 기원(紀元) 후에 고학년(高鶴年)이 처음으로 대사의 글 몇 편을 가져다가 상해 <불학총보(佛學叢報)>에 실었는데, 그때 상참(常慚)이라는 이름을 썼다. 민국 6년(1917) 서울여(徐蔚如)가 대사의 편지 세 통을 인쇄하여 『인광법사신고(印光法師信稿: 편지 원고)』라고 이름 붙였는데, 7년에는 20여 편을 얻어 북경에서 인쇄하면서 『인광법사문초(文鈔)』라고 이름 붙였다. 8년에 다시 속편(續編)을 인쇄하고, 9년과 10년에 또 증보하였으며, 11년부터 15년 사이에 차례로 계속 증보하여 『증광(增廣)인광법사문초』라고 이름 붙였다.
이 글이 세상에 나와 퍼지자, 말마다 진리를 드러내고 글자마다 종지(宗旨)로 귀결하며, 위로는 부처의 가르침에 부합하고 아래로는 중생의 마음에 들어맞으며, 선종(禪宗)과 정토(淨土)의 오묘한 법문을 떨치면서 그 사이의 쉽고 어려움을 잘 가려내어, 실로 이전 사람들이 미처 찾아내지 못한 곳을 훤히 파헤쳤다는 칭송의 평론이 자자하였다.
또한 불교의 이치에만 정통한 것이 아니라,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대학(大學)」 팔덕목(八德目)을 비롯한 유가의 세상 경륜 도덕도 또한 극진히 발휘하였는데, 그 문장과 의리(義理)가 우아하고 품위 있어 낙양의 종이 값을 오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풍문을 듣고 대사를 흠모하여 알현하려 문 밖에 줄을 이었는데, 마치 샘물이 계곡으로 쏟아져 흐르는 것처럼, 그 기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대사가 후학들을 가르침에는 귀를 붙잡고 얼굴을 마주 대하듯 자상하고 간곡히 타이르되, 경론(經論)에 바탕을 두고 가슴속으로부터 쏟아내었는데, 그 내용은 인과 법칙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알맹이 없이 빈 말은 언급하지도 않았다. 마땅히 조복(調伏)시킬 자는 선가의 고참이나 유가의 우두머리조차도 심하게 꾸짖고, 아무리 고관대작이라도 조금도 보아줌이 없었다.
한편 마땅히 받아줄[攝受] 자는 아무리 어리고 하잘것없는 이라도 일찍이 물리친 적이 없으며, 설령 농부나 품팔이 아낙이라도 따뜻이 감싸 주었다. 한결같이 평등한 자비심으로 모든 근기의 사람들을 두루 이롭게 하되, 특별히 정을 더 가까이 하거나 멀리함이 없이, 오직 도리(道理)에 따라 대하였다.
무릇 가르침을 더 달라고 청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어떠한 악도 짓지 말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는 부처님 말씀과 인과응보 및 생사윤회의 진실한 사실과 이치로써 간곡히 일깨워 주어, 새로운 각오와 동경심을 내어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밑바탕을 튼튼히 세우도록 이끌었다.
나아가 정말로 생사(生死)를 위해 보리심(菩提心: 求道心)을 내고,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여 서방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넓고 평탄한 길을 가르쳐 주었다. 아울러 절실하게 실천하여 평범함을 뛰어 넘고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는[超凡入聖] 지름길로 닦아가라고 간곡히 당부하였다.
민국 11년(1922) 정해현(定海縣)의 도재동(陶在東)과 회계(會稽)의 황함지(黃涵之)가 대사의 도행(道行) 자료를 모아 정부에 신청하여, ‘오철원명(悟徹圓明)’이라는 휘호 액자가 하사되어 보타산으로 전해지고, 향과 꽃도 공양 받았다. 그리하여 대사의 도행과 덕망이 일시에 활짝 전성기를 맞이해, 평범한 백성들도 모두 흠모하였는데, 대사는 도리어 전혀 듣지도 못한 일처럼 대했다. 고두(叩頭)의 예를 올리며 이를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대사는 허공의 누각처럼 여기고, 스스로 그만한 큰 덕이 없는데 영광이 어디서 오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부끄러울 따름이라고 답하였다.
대사는 한평생 스스로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사람들에게 후하게 대했다. 선량한 남녀 신도가 공양 올리는 향경(香敬)은 모두 그들을 대신해 복전(福田)을 씨뿌려 주고, 개인의 호주머니로 집어넣는 법이 전혀 없었다. 교화를 펼침에는 홍화사(弘化社)를 열어, 좋은 책[善書]들을 인쇄하여 전국에 널리 배포하였다. 또 만물을 이롭게 함에는 각종 재난을 구휼하고, 개미나 곤충에게까지 두루 자비심이 미쳤다.
불법을 수호하고 사찰의 재산을 보전함에는, 여력을 남기지 않고 심혈을 다 기울여, 그 공덕이 더욱 컸다. 보타산의 법우사나 부양(阜陽)의 자복사(資福寺)나 오대산 벽산사(碧山寺)나 광제(廣濟)의 모봉사(茅蓬寺)들은, 모두 대사의 말 한 마디로 분쟁이 가라앉고 평화를 되찾았다. 대사는 정말로 권속(眷屬)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천하 사해를 모두 스승으로 삼았다. 대사는 또 사찰의 주지가 되지 않는 것이 본래 굳은 서원이었는데, 그 지팡이가 이르는 곳마다 모두 명산대찰이 되었다.
민국 7년(1918) 사정으로 말미암아 상해에 이르러 태평사(太平寺)에 머물렀는데, 민국 17년(1928) 번화함을 싫어하여 한시바삐 숨을 곳을 찾다가, 19년(1931) 2월 소주(蘇州)의 보국사(報國寺)에서 폐관했다.
폐관 수행 동안, 염불 공부하고 남은 시간을 이용하여, 보타(普陀)·청량(淸凉)·아미(峨嵋)·구화(九華) 등 산지(山志)를 편집 정리하였다. 26년(1937) 겨울 영암사(靈巖寺)로 자리를 옮겨 3년간 안거하였으니, 여기는 지적(智積) 보살이 현신한 사찰이자, 대사가 입적하여 극락왕생한 곳이 되었다.
대사는 입적하기 전에 미리 때가 이르렀음을 알았다. 29년(1940) 봄 어떤 사람에게 답장하는 편지에서, “지금 이미 여든 살로, 아침에 저녁을 기약하기 어렵소.”라고 말했다. 또 “나는 곧 죽을 사람인데, 어찌 이러한 법도를 남길 수 있겠소?”라고 적기도 했다. 그해 겨울 10월 27일에 약한 병세를 보이더니, 28일 오후 1시에 산중의 모든 직책 담당자들이 모인 가운데, “영암사의 주지 자리는 오랫동안 비워 둘 수 없으니, 묘진(妙眞) 스님이 맡는 게 좋겠다.”고 분부하였다.
대중이 모두 찬성하고 11월 9일을 취임 시기로 잡으니, 대사가 너무 늦다고 말하였다. 다시 초나흘로 바꾸었으나 역시 늦다고 하여, 나중에 초하루를 택하자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초사흘 저녁 평소처럼 묽은 죽 한 사발 가량 올리자, 다 드신 뒤 진달(眞達) 스님 등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정토 법문(淨土法門)은 별로 기특한 게 없네. 단지 간절하고 지성스럽게만 염불하면, 부처님의 자비로운 영접(迎接)으로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왕생하지 않는 자가 없다네.”
초나흘 새벽 1시 반 침상에서 일어나 앉으면서, “염불하면 부처를 보고 틀림없이 극락왕생한다[念佛見佛, 決定生西.].”라고 말한 뒤, 큰 소리로 염불하였다. 2시 15분 물을 찾아 손을 깨끗이 씻은 뒤, 반듯이 일어서서 말하였다.
“아미타불께서 영접하러 오시니, 나는 이제 가련다. 모두들 염불 열심히 하고 간절히 발원하여 서방 극락에 왕생하여야 한다.”
말을 마치고 의자에 옮겨 앉아, 서쪽을 향해 몸을 단정히 앉았다. 3시경 묘진 스님이 도착하자, “도량을 잘 유지하며 정토 법문을 널리 펼치고, 다른 거창한 법문을 배우려고 하지 말라.”고 부촉하였다. 그 뒤에는 단지 입술만 약간 움직일 뿐, 말은 더이상 하지 않았다. 5시가 되어 대중들이 큰 소리로 염불하는 가운데, 편안히 극락정토로 돌아가셨다. 초닷새 오후 2시 감실(龕室: 坐棺) 안에 모실 때에도, 얼굴 기색이 살아 계신 듯하였다.
대사는 청(淸) 나라 함풍(咸豊) 11년(1861) 신유년(辛酉年) 12월 13일 경진시(庚辰時)에 태어나, 민국 29년(1940) 경진년(庚辰年) 11월 초4일 묘시(卯時)에 입적하였으니, 세속의 수명은 80세이고 출가 승랍(僧臘)은 60년이다. 민국 30년(1941) 신사년(辛巳年) 2월 15일 부처님 열반일에 불을 지펴 다비식을 올렸는데, 수없이 많은 사리가 나왔다. 민국 36년(1947) 정해년(丁亥年) 9월 19일 영암사에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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