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간디를 정치사회의 관점에서 조망하여, 비폭력․무저항의 독립 운동가 내지 정치지도자 상을 중심으로 관찰하고 기술한다. 그의 변호사 경력도 남아프리가의 교포 사회와 식민지 인도에서 처참하게 억압받고 가혹하게 착취당하던 동포 민중의 인권 옹호와 생존권 보장을 위해 노력한 대변인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진다. 말하자면, 밖으로 뚜렷이 나타난 눈부신 업적과 영광에 우선 주목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한 정치사회의 행적과 사상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했기 때문에, 나까지 끼여들 필요도 없고, 또 그럴 의향도 없다. 나는 간디의 무성한 잎이나 화려한 꽃과 열매에 가려 드러나지 않은 줄기나, 아예 땅속에 파묻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를 보고 싶다.
간디가 자서전에서도 밝혔듯이, 정치는 종교(철학)와 분리할 수도 없고, 또한 다를 수도 없다. 정치와 종교는 하나로 일치해야 한다. 종교(철학)의 이상은 정치현실에서 그대로 이루어져야 하고, 정치는 종교(철학)의 이상(자유․민주․평등․정의 등)을 구체로 현실화하여 평화롭고 거룩한 사회를 이루도록 힘써야 한다. 플라톤이 이상 국가로 제시한 철인왕 정치처럼, 궁극에는 철인이 정치를 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정치가가 철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동아시아 전통 사상에서, 안으로 도덕 수양을 완성한 성현이 밖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이 된다는 내성외왕(內聖外王)과 다를 바 없다. 또 불교에서 위로 진리의 도를 구해 닦은(上求菩提) 불보살이나 전륜성왕이, 아래로 어리석은 미혹(無明)에 싸여 있는 중생들을 교화한다(下化衆生)는 통치 이상과도 별로 차이나지 않는다.
간디 자신은 바로 그러한 이상을 마음에 품고 인민 대중 속에 들어가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헌신한 철인왕이자 내성외왕(內聖外王)이며, 불보살이나 전륜성왕의 화신(化身)이다. 간디 자신이 몸소 진리를 추구하며 도(道)를 닦고, 대중에게 솔선수범하여 그 진리를 보여주고 도를 일깨워 준 것이다. 자서전의 부제를 ‘진리 실험’이라고 붙인 것은 참으로 명실상부하다 할 수 있다. 자기 내면으로 도를 닦고 인격을 도야하면서, 그것을 밖으로 대중과 사회에 적용해 보고, 그 시행착오를 끊임없이 고쳐 나간 ‘진리 실험’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밖으로 나타난 정치사회의 행적(꽃과 열매)은, 안으로 간디의 종교철학․윤리도덕 수양(뿌리와 줄기)으로부터 저절로 피어난 것이다. 간디가 철저하게 비폭력․무저항으로 시종일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종교 수양으로부터 비롯한 아힘사(Ahimsa)라는 정신의 힘이다. 아힘사는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을 죽이거나 해치지 않는 비폭력을 뜻한다. 그러나 아힘사는 그런 소극 측면에만 머물지 않고, 나아가 적극 차원까지 저절로 확장․발전한다. 간디가 자서전에서 밝혔듯이, “아힘사의 정신이 모든 것을 포옹하게 되면, 그것은 접하는 일체의 것을 변화시킨다. 그 힘에는 한계가 없다.” 간디는 ‘비겁’보다는 차라리 ‘힘사(폭력)’를 택하라고 권하지만, “그러나 ‘아힘사’는 ‘힘사’보다 훨씬 나으며, 용서는 처벌보다는 한층 더 떳떳함을 알고 있다.”고 단언한다.
‘간디자서전’에 의하면, 간디의 아힘사 정신은 결정적으로 부친의 자비로운 용서에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간디는 형의 팔찌에서 금(金)조각을 몰래 훔쳐 판 뒤, 양심의 가책을 이길 수 없어 글로 써서 아버지한테 고백하며, 적당한 벌을 달라고 자청했다. 그런데 당시 병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는 글을 읽고 나서, 진주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생각에 잠겼다가, 그 종이를 찢고 아무 말 없이 용서했다. 부친의 사랑의 눈물에 간디의 마음이 순간 깨끗이 정화하면서, 간디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는데, 이것이 순수한 아힘사에 대한 산 교훈(실물교수)이었다고 간디는 술회한다. 확실히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잘 하고, 용서도 받아본 사람이 남을 잘 용서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숭고한 감동은 순수한 정신의 사랑이다. 그러나 아버지한테 받은 순수한 사랑의 용서는 간디한테 아힘사 정신의 씨앗일 따름이다.
이러한 아힘사의 씨앗을 간디의 영혼(마음)속에서 싹 틔우고 길러 무성하게 꽃 피우고 풍성한 열매를 맺은 데는, 또 다른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그 가운데 빠뜨릴 수 없고, 더구나 첫째로 꼽아도 손색없는 것은, 바로 채식과 단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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