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 다닐 적만 해도 신림동(新林洞)은 서울의 한적한 변두리로서, 문자 그대로 풋풋한 새숲 내음이 나는 전원 풍경이었다. 그 뒤로 20여 해가 지나면서 그야말로 눈부시게 변모했건만, 그 동안 나는 그러한 환경의 변화에 매우 둔감하게 지내 왔다. 그 사이 대만(臺灣)에 3년간 유학 다녀오고, 그 때 배워온 채식 실험에다 박사논문 집필에 몰두하느라, 세상 물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보통 이틀마다 운동 삼아 관악산에 다니는 걸 빼고는, 10년가량 거의 칩거(蟄居)하다시피 했으니, 내 눈에 띄는 것은 고작 신림동 거리뿐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조용하고 평온하게만 느껴지던 신림동에 최근 몇 년 전에 갑자기 이상한 바닷바람이 불어 닥쳤다. 남부순환도로 가에 2-3층짜리 대규모 가건물 같은 철골 구조가 올라서고 어느새 근사한 모습으로 단장하더니, 인천부두 가에나 있을 법한 ‘회집’이 여기저기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가끔씩 등산 갔다 귀가하는 길에 보면, 거의 언제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인파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 갯바람과 비린내 속에서 보낸 인연으로 낯설지 않은 생선 음식문화이련만, 채식 실험을 하기 시작한 뒤로는, 알게 모르게 마주치지 않고 피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작년(2001년) 3월 대학에 취직하여 이 곳 빛고을(光州)에 내려오면서, 내 생활에는 상당한 진통 어린 변화의 압박(stress)이 닥쳤다. 신임교원 연수차 외박하는 일도 큰 고통이었거니와, 마지막 날 회식 장소인 무슨 생선회집은, 들어가기조차 몹시 싫고도 힘든 수난 그 자체였다. 취직 자체를 하나의 실험으로 여기고 받아들인 터라, 남들한테는 희색만면의 환영식이었을 통과의례조차, 내게는 선택의 대가로 치러야 할 불가피한 십자가일 수밖에 없었다. 직장 선배님들한테는 술 안 마시고 채식한다는 내 기본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양해를 구했지만, 그래도 가끔씩 열리는 회식은 아예 참석하지 않기는 좀 뭐해서, 일단 같이 따라가서 내 본분만 스스로 지키기로 했다. 그런데 웬 놈의 고기 집과 생선 집은 그리도 많은지? 작년 한해 동안 글쎄 스무 번 가량 내키지 않은 나들이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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