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결단의 인연이 다가왔다. 취직한 지 꼭 1년쯤 되던 지난 2월말, 그 날도 교수회의 뒤끝으로 가까운 생선회집에 갔다. 그 날도 나는 맨 끝자리에 어정쩡하게 앉아, 남들 먹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마지못해 바라보아야(觀照) 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말 보지 말아야 할 잔인하고 참혹한 진풍경을 차마 눈뜨고 보고 말았다. 무슨 물고기인지 정확한 이름은 모르지만, 상당히 크면서 좀 넓적한 (도미나 넙치 류?) 생선회를 떠 왔는데, 회집에서 펄펄 살아 있는 생선임을 실물로 증명하기 위해서, 양쪽으로 회를 뜨고 남은 생선의 뼈대를, 즉 감지도 껌벅이지도 못하는 물고기 특유의 동그란 눈을 부릅뜬 채 머리와 꼬리 및 등배 지느러미, 그리고 앙상한 가시만 남은 척추뼈대의 몸통을 넓은 접시에 받쳐 깔고, 그 위에 회를 가지런히 담아 내 온 것이었다. 진짜 이런 ‘활어회(活魚膾)’는 처음이었다.
내가 눈이 나쁜데도 안경을 잘 안 쓰는 까닭은, 바깥 사물을 유심히 자세하게 관찰하고 싶지 않은 소망 탓이기도 하다. 헌데 이 날은 내가 안경을 썼는지 안 썼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으나, 보고 싶어한 것도 아닌데 진짜 활어회의 모습이 접시 통째로(全盤) 한눈에 확 들어온 것이다. 얼마나 예리한 칼날에 도대체 몇 번에 걸쳐 섬뜩섬뜩 온 몸의 살이 도려져 나갔을지 모를 생선이, 글쎄 추풍낙엽(秋風落葉)으로 알몸이 된 겨울나무처럼 이랄까,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산 해골 모습으로 아가미를 벌름벌름 거리며, 눈물도 못 흘리며 원한(怨恨)의 읍소(泣訴)를 하는지 체념(諦念)의 탄식(歎息)을 하는지, 여하튼 온 몸을 나토어-주1) 마지막 생명의 빛으로 뭔가 진리를 설파(說破)하는 것만 같았다. ‘현신설법(現身說法)’이란 말이 이토록 생생하고 절실하게 보인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끓는 탕 속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접시 째 들려 나갔다.
나는 내심 참으로 당혹스럽고 난처했다. 당장 그 자리를 일어나 박차고 뛰쳐나오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도록 잡아끄는 이상하고 미묘한 힘을 느꼈다. 선배 어른들의 즐거운 향연(香宴)의 분위기를 깰 수 없다는 세속의 인사예절도 알게 모르게 상당히 의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아니 그 이상의 어떤 무의식적인 정신(精神)과 심기(心氣)가 나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그 물고기가 전생(前生)에 나와 무슨 인연이 있었을까? 왜 금생(今生)에 그토록 처참한 모습으로 자신을 도마 위에 접시 위에 희생으로 바쳐 나를 사로잡았을까? 나한테 도대체 무슨 진리를 설하기 위해서? 나는 그 소식(消息)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분명히 모르지만, 그 때 그 접시 위에서 벌어진 사실과 모습을 그대로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는 마음은 이미 그 자리에서 확실해졌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
주1) 나토다: 화현(化現)의 뜻을 지닌 고어(古語)로서, 요즘말로는 자동사 ‘나타나다’와 타동사 ‘나타내다’를 함께 아우르는 단어다. 향가 찬기파랑가에서 “열치매 나토얀 이 흰 구름 조초 떠 가는 안디하?” 라는 용례가 나온다. 흔히 불교계에서 ‘나투다’로 잘못 쓰고 있는데, 언제부터 어떻게 와전되고 왜곡되었는지 궁금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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