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려태후(呂太后)의 잔인한 질투전(嫉妬戰)

채식명상 20년. 활어회와 능지처사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2. 12. 28. 01:01

본문

이러한 역사를 보면, 송나라 때는 네 팔다리를 차례로 자른 뒤 목을 친 능지는, 그래도 아주 점잖은 능지처참(凌遲處斬)이라고 말해야 할 판이다. 이러한 능지처참은, 비록 공식으로 명명한 바는 없지만, 일찍이 한고조(漢高祖)의 아내 려태후(呂太后) (?) 자행한 사실이 역사에 전해진다.

흉노(匈奴)에 투항한 리릉(李陵)을 위해 변론한 죄로 투옥 당하여, 사형 대신 거세(去勢: 宮刑腐刑蠶室刑, 영구불임형) 당한 뒤 풀려난 사마천(司馬遷), 발분(發憤)의 기개로 그 유명한 사기(史記)를 썼다. 이 책이 중국 정사(正史)의 효시(嚆矢)로서 불후의 명작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기(史記) 가운데, 한고조본기(漢高祖本) 뒤에 효혜제본기(孝惠帝本紀) 대신 쓴 려태후본기(呂太后本紀)의 앞머리에 보면, 류방(劉邦)의 조강지처(糟糠之妻)인 려태후와, 한왕(漢王)이 된 뒤 얻어 총애한 척희(戚姬) 사이에 벌어진 질투전이 나온다. 사마천은 그 시말을 대략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려태후가 낳은 효혜제(孝惠帝)는 사람됨이 어질고 물러 고조를 닮지 않고, 척희가 낳은 여의(如意)는 고조를 많이 닮아서, 고조가 항상 태자를 폐위시키고 여의를 대신 책봉하려 했다. 게다가 려태후는 나이가 들어 항상 본거지를 지키느라 고조를 가까이할 기회가 더욱 드물었고, 척희는 고조의 총애를 받아 늘 따라 다니며 밤낮 훌쩍거리며 자기 아들을 태자로 세워 달라고 보챘다. 특히 여의를 조왕(趙王)에 봉한 뒤에는 하마터면 태자에 책봉할 뻔한 기회가 여러 번이나 있었는데, 대신들의 간쟁과 류후(留侯: 張良)의 책략(策略)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그러다가 고조가 한왕(漢王)이 된 지 12, 항우(項羽)를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평정(平定)한 지 7년 만에 세상을 뜨고, 려태후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여 효혜제(孝惠帝)에 즉위하자, 려태후는 곧바로 가장 원한을 품어 왔던 척부인(戚夫人)과 그 아들 조왕(趙王)한테 손을 썼다. 고조가 천하를 평정할 때 려태후는 강인하고 억센 기질로 여러 대신을 제거하는 데 막강한 실력을 발휘할 정도였다. 그런 려태후가 남편이 죽은 뒤 자신의 연적(戀敵)을 처치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으리라.

먼저 척부인을 별궁(別宮)에 감금하고, 그 아들 조왕을 불렀다. 사신이 세 번이나 왕래했으나, 조왕의 승상 건평후(建平侯) 주창(周昌)은 려태후가 원한으로 조왕 모자(母子)를 함께 죽이려는 줄 알, 고조의 유명(遺命)을 내세워 사신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려태후는 노하여 다시 사신을 보내 먼저 조왕의 승상을 부르고, 그가 장안(長安)에 이르자, 또다시 사신을 보내 조왕을 불러 조왕이 한참 오고 있었다. 그때 인자한 효혜제가 그 사실을 알고, 조왕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패상(覇上)까지 마중 나가, 함께 입궁(入宮)한 뒤 자신과 함께 거처하도록 했다. 그토록 황제가 이복동생을 감싸 안자, 려태후도 어떻게 죽일 틈을 얻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 효혜제 원년(元年) 12월 어느 날, 황제가 새벽 일찍 활 쏘러 나가는데, 나이 어린 조왕은 함께 일찍 일어나지 못해 혼자 궁궐에 남았다. 조왕이 혼자 있다는 소식을 들은 려태후는 바로 이때를 놓칠세라, 곧장 사람을 시켜 짐독(酖毒)을 마시게 했다. 날이 샐 무렵 효혜제가 돌아와 보니, 그 사이 조왕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런 다음 려태후는 척부인의 팔다리를 자르고 두 눈알을 빼낸 뒤, 두 귀를 불태우고, 말 못하는 약을 먹여 측간(廁間: 변소) 속에 집어넣고는, ‘사람 돼지(人彘: 인체)라고 불렀다. (제주도에는 돼지를 변소 속에 집어넣어 사람 똥 먹고살게 한다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필자) 그리고는 며칠이 지나 효혜제한테 그 사람 돼지를 구경시켰다. 측간에서 기이한 광경을 본 효혜제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사람 돼지가 자기 서모(庶母)인 척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내 대성통곡을 한 뒤 곧바로 병이 들어 한해 남짓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자기 어머니 려태후한테 이렇게 여쭈었다.

이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은 태후의 아들로서, 이제 다시는 천하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효혜제는 이때부터 매일 먹고 마시는 향락에 빠져, 더 이상 정치를 돌보지 않고 폐인(廢人) 생활로 세월을 보내다가, 7 8월 가을에 마침내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