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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낙지와 히딩크

채식명상 20년. 활어회와 능지처사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2. 12. 2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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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어회의 대명사처럼 느껴지는 전형적인 예로 산 낙지가 있다. 마치 남성다운 야성미나 용기를 과시라도 하려는 듯한 산 낙지회, 실은 지극히 잔인무도한 야만성의 발로(發露)이리라. 생명의 기운이 펄펄 넘치는 여덟 다리(八肢)는 칼로 싹둑싹둑 잘라도 여전히 생기 넘치게 꿈틀거린다. 온몸의 살점을 샅샅이 회친 뒤에도 활어의 아가미가 벌름거리듯, 온몸의 근육을 뼈만 남기고 저민 다음에도 능지처사형을 당하던 죄수의 염통은 아직도 폴딱폴딱 고동치듯이. ! 자연의 생명력이 얼마나 강렬한가?!

그런 산 낙지의 다리 토막을 초장에 찍어 입 속에 넣고 오물오물(汚物汚物) 씹어 먹는 것을, 흡사 개선장군의 승전 나팔이라도 부는 듯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는 모습들은 과연 어떤? 아마도 신성(神性)은 죄다 어디로 온데간데없, 동물성(動物性), 그것도 다른 약한 짐승을 사냥하여 피비린내 나게 씹어 먹는 흉포한 맹수성(猛獸)만 악마처럼 활개 치는 야만인의 얼굴로나 보일 것 같.

지난 월드컵 경기 직전에 대한축구협회인지 그 주변 관련단체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축구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던 히딩크 감독의 노고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선전을 기원하는 자리를 마련했던 모양인데, 거기서 바로 이 산 낙지회가 등장하여 우리측 사람()이 히딩크 감독과 코치 일행한테 먹어 보라고 권한 적이 있었단다. 그러나 이 점잖은(?) 유럽 신사들은 이 난처한 위기상황을 나름대로 재치 있게 모면한 듯하다. 한 코치가 우리 한국 대표팀이 ‘8인지 ‘4인지 올라가면 그때 가서 먹겠다는 답변으로 사양했다고 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히딩크 감독은 과연 명장’(?)답게 사나이 대장부가 고작 4(8)? 적어도 우승하면 먹겠다고는 해야지? 라고 말했단.(라디오를 통해 번역 소개한 내용인데, 들은 지 꽤 지나 정확한 표현은 기억할 수 없고, 대강 대화의 핵심 줄거리만 간추린 것임.)

그 당시 이 일화를 전한 사람(아마도 스포츠 기?)의 말투는, 다분히 역시 히딩크다운 뱃장(뚝심)이다는 어감이 강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 대화내용을 전해 들으면서, ‘이런 야만적이고 무례한 대접이 어디 있는? 라는 수치심이 들면서, 우리나라가 적어도 우승까지 하기는 정말 어렵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히딩크 감독이나 코치나 산 낙지는 결코 먹고 싶지 않을 테고, 또 절대(?) 먹지 않겠다는 의사가 분명해 보이며, 그 의사에 반하여 산 낙지를 먹도록 강요당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아주 높은 수준의 조건을 내세운 것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만, 감독은 코치보다 한국 팀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포부(의욕)가 두어 단계 높았고, 또 우리나라가 선전(善戰)한 결과 감독이 코치보다 선견지명의 지혜가 앞선 것으로 판가름났을 따름이다.

극악무도한 죄인을 가장 잔인무도하게 처형하는 방법으로 택한 능지처사를 집행하면서, 죄악에 대한 증오(憎惡)를 한층 더 강력히 과시하기 위해서, 칼로 저며 낸 죄수의 살을 개한테 먹으라고 던져 주었다는데, 죄 없는 산 낙지의 팔다리를 잔인무도하게 싹둑싹둑 잘라 코쟁이 양놈(양키)한테 반미(反美) 감정의 분풀이로나 던져주었다면 또 혹시 모르지만, - 물론 그래서도 절대 안되겠지만 -, 중대한 결전(決戰)을 앞둔 국빈(國賓)급 사령탑한테 축원의 의미로 권했다니, 이건 정말 어처구니없는 무식(無識)이 용감(勇敢)에 지나지 않는다.

외국인 감독과 코치가 요령껏 사양하고 더 이상 권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지, 만약 우리 측에서 강권했거나, 외국인 감독과 코치가 우리 인심과 인정(人情)을 이해하고 또 체면상 존중해서 그 산 낙지를 먹었더라면, 아마도 십중팔구는 ‘4은커녕 ‘16 진출도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칼로 잘리고 이에 씹힌 산 낙지의 꿈틀거리던 다리 토막들이 우리 대표팀 감독과 선수들의 축구판을 온통 흐물흐물 휘저어 보복하지 않았을?

서양 속담에 기호(嗜好)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취미에는 이유가 따로 없다.)(There is no accounting for tastes.)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이 많고 사랑이 많은 건 좋으나, 남한테 술이나 노래를 강권하는 따위의 풍습은 이제 개선할 때가 되었다. 낙지 다리처럼 두 동강이 난 뒤에도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는 산 지렁이까지도, 사람들은 낙지처럼 초장 찍어 먹을 비위가 과연 있을? 食習維新!

*이 글은 2002. 10. 17. 떠오른 영감을 바탕으로 기초(起草)하여, 계간 불교잡지 ?光輪?, 2003년 가을호(통권 제7)부터 2004년 여름호(통권 제10)에 걸쳐 네 차례 연재하였고, 사법행정학회의 ?司法行政?, 2004 2월호(통권 제518) 60-66쪽에 발표하였는데, 그 원고를 조금 손질하고, 특히 공자가 거문고를 탄 지음(知音)’ 고사는 한시외전(韓詩外傳)’의 원전을 찾아 원본에 맞게 고쳐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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