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개미보살과 모기보살, 그리고 돼지보살

운명을 뛰어 넘는 길. 채식명상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2. 12. 27. 11:14

본문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독특한 상징을 하나 들라면, 서슴없이 보살(菩薩)이 떠오른다. 대체 보살이 뭐길래? 흔히 보살 마하살(摩訶薩)을 덧붙여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라고도 부르는데, 사전의 해설로는 보살 보리살타(菩提薩陀)의 준말이고, ‘마하 마하살타(摩訶薩陀)의 준말이라고 한다. 그 의미는 대표적 대승 경전의 하나인 마하반야바라밀경(특히 금강품, 菩薩行品)과 그에 대한 주석인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아주 상세히 설해지고 있다.-주1)

먼저 보리 하면 떠오르는 얘기가 있다. 대학 때 조지훈님의 수필에선가 읽은 것으로 기억하는 짤막한 선문답 같은 대화인데, 참으로 인상 깊었다.

차는 찬데 왜 뜨거울까?

예 보리찹니다.”

농담도 수준이 있는 거라고 느꼈다.

부처님의 금구(金口) 설법에 따르면, ‘보리살타 보리 ()()법성(法性)실제(實際)명상언설(名相言說)제법실상(諸法實相)제불정변지(諸佛正徧知) 등을 가리키는데, 아누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준말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해, ‘보리 모든 부처님의 도(諸佛道) 또는 위없는 지혜(無上智慧)를 뜻하는데, ‘살타 중생 또는 큰마음(大心)용맹심(勇心)을 뜻하므로, 보살이란 위없는 지혜를 위해 큰마음을 낸 사람, 모든 부처님의 도와 공덕을 죄다 얻고자 발원하여 그 마음이 금강산처럼 굳세고 큰 사람을 가리킨다.  살타 은 좋은 법을 칭찬함이고 는 좋은 법의 본체와 현상을 뜻하기도 하여서, ‘보리살타는 일체 법 중에서 최고 제일인 불법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일체 성현이 칭찬한다는 뜻도 함축하고 있다.

일체 모든 부처님의 법과 지혜 및 계율선정은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으니, 이를 일컬어 보리라 하고; 그 마음이 움직일 수 없고 끊어지지도 깨트려지지도 않으며, 모든 걸 참고 불도를 이룰 수 있으니, 이 마음을 살타라 일컫는다.”

한편 마하살타 마하 크다()는 뜻이며, ‘살타 보리살타 살타와 마찬가지로 중생 또는 큰마음(大心)용맹심(勇心)을 뜻하여서, ‘마하살타는 마음이 큰일을 위해 결코 물러서지 않는 용맹심을 지닌 사람이란 뜻이며, 많은 중생 중 최고 제일의 지(上首)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 마하반야바라밀경 금강품에서 부처님은 수보리의 질문에 대해 답하면서, ‘마하살이라고 부르는 연유에 대해 아주 상세히 설하고 계시는데, 요점만 간추리면 대강 이러하다.

이 보살은 반드시 열반에 이를 대중 가운데서 으뜸이기 때문에 마하살이라고 부른다. 보살마하살은 이 가운데서 금강처럼 부서지지 않는 대심(大心)을 내고, 대쾌심(大快心)을 내며, 부동심(不動心)을 내고,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고 안락케 할 마음을 내기에, 반드시 열반에 이를 대중 가운데서 으뜸이다.”

결국 보리살타 마하살타는 대체로 보아 상통하는 뜻으로, ‘대승을 강조하기 위해 동어 반복한 거나 거의 다름없다. 그래서 보살이기 때문에 마하살이라 부르고, 마하살이기 때문에 보살이라 부른다고 하는 형편이다.

우리한테 친숙하게 전해지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이라는 명구는 천태(天台)대사의 지관(止觀) 법문에 처음 등장하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바로 보리살타를 중국 한문식 게송으로 아주 간단명료하게 풀이한, 이른바 보살의 개념정의인 셈이다. 우리 한글의 묘미를 살려 재치 있게 새로운 정의를 내려본다면, 나는 보살이란 중생을 자신처럼 잘 보살피는 분(수행자)이라고 일컫고 싶다.

그런데 이토록 장엄한 보살의 명호 앞에서, 갑자기 삼악도 축생 가운데서도 아주 하찮은 미물에 불과한 개미와 모기를 들먹이며 보살이라고 일컫다니, 무슨 황당무계한 잠꼬대 같은 소리인가? 사실 앞서 정리한 대승불교의 권위 있는 모범 정의와는 조금 달리, ‘보살의 개념을 나름대로 확장해석하고 싶은 인연이 있다.

보살이 몸소 자신의 보리심과 자비심을 일으켜 직접 중생을 제도하는 적극적 원력과 수행의 차원보다는, 조금 소극적인 시각에서, 아니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간 견지에서 관찰하다 보니, 어리석고 갑갑한 중생한테 보리심과 자비심을 불러일으켜 스스로 보살도를 수행하도록 일깨우고 이끌기 위하여, 언뜻 보기에는 중생한테도 자기한테도 아무런 이익이 없는 듯한데도, 마치 불을 지피는 불씨(火種)처럼, 또는 새로운 수십 수백 알의 열매를 맺기 위해 자기 한 몸 기꺼이 흙 속에 묻히어 썩는 씨앗처럼, 오히려 자신을 묵묵히 희생하는 보살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 보살은 전연 새로운 범주라기보다는, 오히려 전통 개념에서 출발해서 조금 시각을 달리해서 넓힌 범주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자신은 이미 보리심을 내어 보리를 구했으니, 이제 그 보리로 중생의 보리심을 일깨워 당신과 같이 보리를 구하도록 이끌어 교화하여야 하는데, 다만 그 방식이 자신을 가장 미천한 모습으로 나토시어 철저히 희생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보살님은 아신다. 이 사바고해 오탁악세에서 아둔하면서도 억세고 교만하며 완고한 중생을 조복(調伏)시켜 교화하고 제도하기 위해서는, 단지 부드럽고 미묘한 설법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보살 당신을 철저히 낮추고 희생하여 중생의 동정심과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저절로 일도록 이끄는 방법이 그나마 조금 효과 있는 방편이라는 걸!

그래서 예수보살님은 당시 인류의 죄악을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간디보살님은 전 인도인민의 총화단결을 통해 영국의 식민통치를 끝마치고 인도의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독립 후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로 갈라지는 인도를 하나로 합쳐 통일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시종일관 철저한 채식과 극기의 고행 속에 가끔씩 장기간 단식으로 무저항의 저항과 비폭력의 투쟁을 펼치면서 중생을 조복시키고 교화시켰던 것이리라. 아마도 나 같은 중생은 예수님이나 간디님 같이 이미 위대한 성현으로 추앙 받는 역사 속의 보살님들한테는 별 교화를 받지 못해서, 더욱 미천한 모습으로 바로 내 눈앞에 나타나, 그것도 직접 내 손발에 치여 죽기를 수없이 되풀이하는 모기보살이나 개미보살한테서나 겨우 뭔가 조금 느끼는가 보다.

정확한 때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인생을 이제는 좀 올바르고 착하게 살아보아야겠다고 의식으로 자각하여 수행이란 걸 시작한 뒤로, 언제부터인지 내 주위에 모기와 개미가 유난히 극성스럽게 나타나 귀찮게 굴면서, ‘어디 나 한번 죽여 봐라는 듯이 덤비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중국 속담에도 도가 한 자 높아지면 마장은 한 길이나 높아진다.(道高一尺, 魔高一丈.)고 하듯이, 이른바 도고마성(道高魔盛)이런가? 가만히 있을 땐 잠잠하던 공기도,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땐 상대적 역풍이 불어 닥치며,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 바람도 비례해 거세어지듯, 우리가 보리심을 내어 진리를 구하고 도를 닦겠다는 마음을 내는 순간, 벌써 마장은 절대치는 같고 방향만 정반대인 상대적 역풍으로 일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마음이 치열하고 강렬할수록, 마장 또한 억세고 거세어지는 건 당연하다. 전생의 원한이나 업장이 되었든, 아니면 보리심과 구도열을 시험하기 위한 마장이든 간에, 그야말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단지 내가 전생에 빚을 많이 져서 빚 갚으라고 달려드는가 보다라고만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나한테 뭔가 일깨워 주려고 현신설법(現身說法)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느낌마저 들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갈수록 메마르고 무디어 가는 내 마음에 어떻게든 한 줄기 자비광명과 한 점 보리의 불씨를 지펴 주려고, 의식인지 무의식인지 알게 모르게, 살신성인(殺身成仁)의 희생헌신을 무릅쓰고 열렬하게 부나비처럼 덤벼드는 것은 아닐? 마치 앞서 소개한 활어회(活魚膾)의 현실설법처럼 말이다! 근데 활어회는 남의 손에 난도질당해 내 앞에 나토었지만, 모기와 개미는 직접 내 손발에 치여 죽임을 당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 이럴 수가?

어려서 철없던 시절엔, 나도 여느 사람들처럼 내 피 빨아먹으려 왱왱거리는 모기들은 사정없이 때려죽이곤(打殺) 했다. 어렸을 적 시골에선 밤에 모깃불도 피우고 호마끼라고 불리는 모기약을 입으로 불어 풍기며 더러는 모기장도 치지만, 하룻밤 지나고 나면 온몸이 모기한테 물려 강제로 헌혈 당한 주사바늘 자국투성이 일쑤였다. 가렵고 따갑고 심지어 부어오르는 모기침질을 기꺼이 감수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고, 모기는 단지 내 피를 빨아먹는 해충으로서, 생존경쟁의 적()일 따름이었다.

대학원 들어가 송광사의 출가 45이라는 수련대회에 참석한 인연으로 생명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되었고, 재가 오계의 첫째인 산목숨 죽이지 말라(不殺生)는 아힘사(Ahimsa)의 계율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물론 육중한 업습(業習)의 관성력으로 말미암아 알게 모르게 자주 살생을 범하곤 했다. 내가 업장이 두터운지, 속된 말로 피가 달아서인지, 모기들이 유난히 나한테 많이 키스하러 몰려든다. 대만대학 유학시절에는 모기장을 준비해 갔는데도, (거기 가서 보니 개인 침대에 안성맞춤인 모기장이 일상용품으로 널리 쓰였다.) 그곳 모기들도 같은 방을 쓰는 대만 동학(室友) 셋보다는 나만 더 선호하여, 얘들이 농담으로 대만에서는 모기도 사람을 닮아서 수입품(原裝進口品)을 더 좋아한다.”고 놀릴 정도였다. 더러 모기 잡는 파르스름한 전등을 사용하는데, 나는 그런 살생무기는 물론 모기향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그 뒤 귀국해서도 여러 번 누추한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도 모기장은 항상 필수품으로 썼고, 나중에 방충망 시설이 된 방에서도 어쩌다 몰래 침투해 오는 모기들이 있으면 주저 없이 모기장을 치곤 한다. 처음에는 방에 들어온 모기를 손으로 조심히 생포해 밖으로 방출하였는데, 아무리 조심해도 자칫 손바닥 사이에 모기가 끼여 짓이겨지는 불상사가 생겨서, 나중에는 종이컵으로 모기를 덮어 사로잡아 방생하여 치사율이 별로 없게 되었다.

사실 파리란 놈은 덩치가 커서 쉽게 눈에 띄기도 하거니와, 또 감지력(안테나)이 아주 민감하고 몸놀림도 워낙 날렵하고 약삭빠르기까지 하여, 보통 사람의 둔한 손놀림에 쉽게 잡히거나 맞혀질 녀석이 아니다. 그에 비하면 모기는, 비록 몸의 선이 가늘어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몹시도 재빨리 날개를 수없이 떨어 왱왱거리는 특유의 소리로 말미암아, 깊은 잠에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선 누구나 쉽게 그 접근을 알아차릴 수 있다. 또 주둥이의 침을 우리 살에 찔러 박아야 피를 빨 수 있고, 앉은 상태에서 도망갈 땐 반드시 잠자리나 헬기처럼 일단 수직 상승한 뒤 날아가기 때문에, 사냥이나 공격의 위험에 상대적으로 더 드러나 있는 셈이다. 그래서 조금만 주의하면 빈 종이컵으로 생포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러는 정좌(靜坐: 좌선)하는 중에 모기가 접근하는데, 그 때가 가장 난감하다. 잠잘 때나 책 볼 때 몰래 와서 무는 건 그래도 견딜 만하다. 지금까지 경험 관찰에 의하면, 차분히 입정(入定)한 때는 모기도 잠잠한 게 보통이지만, 좀 산만할 때는 어떻게 알고 막무가내로 덤빈다. 좌선 때는 인과법칙이나 대승 보리심의 이법(理法)에 비추어, 그냥 모기의 처분에 맡기고 오롯이 마음을 집중해야 옳을 터인데, 아직 마음공부나 좌선수행이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해 참지 못한다. 남방의 수행승처럼 좌선용 모기장을 치기도 그렇고, (최근엔 그런 텐트 형 모기장이 나와 실제 쓰이기도 하는가 보다) 앉은 채로 태연히 헌혈하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시작도 없는 전생의 빚을 깨끗이 다 갚아야 끝날 것 같은데, 그렇게 더 이상 모기가 귀찮게 덤비는 일이 없는 때가 쉽게 도래할 것 같지는 않다. 결국, 빚을 갚거나 피를 보시한다는 보리심으로 차분히 임하는 길밖에 없을 것 같은데, 언제나 자연스레 그리할 수 있을지……

2003년 가을엔 지리산 만복대에서 내 땀 냄새를 맡고 날라 드는 미세한 날벌레들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하루살이보다 더 작은데, 하루살이 아기쯤 되나, 여하튼 배낭 안과 옷 속까지 달라붙어 내 업장 빨아먹으려고 몸부림치더니, 조심스럽게 떨궈 내고 급히 만복대를 떠나 하산 길 재촉했는데도, 나중에 내려와서 보니 여러 마리가 가방 곳곳에서 치사체(致死體)로 눈에 띈다.

2004년 여름에는 처음으로 월출산에 올랐는데, 809m나 되는 천왕봉 정상에 무슨 연유일까 난데없이 수만 마리의 날타리들이 시커멓게 몰려 있는 게 아닌? 근데 정상 암반에 움푹 패인 타포니(tafoni)라는 풍화혈(風化穴)에 물이 좀 고여 있는데, 거기에 날타리들이 수 천 마리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게 아닌? 어차피 하루밖에 못 사는 날벌레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눈으로 보니 안됐다 싶어 익사하지 말라고 건져줘야겠는데, 한 마리씩 부드럽게 건질 수가 없어서 손으로 벌레 뜬 물을 바깥으로 품어내어, 바위 위에서 햇살에 몸을 말려 기운 차리도록 했다. 그렇게 수면 위의 날타리가 대강 품어 올려진 다음, 곧바로 몸을 돌려 하산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물에 빠져드는 벌레를 계속 건져 올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도록 얼른 자리를 피하자는 심산이었다. 일행과 다른 등산객들은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든 정도라 정상에 2-3분도 머물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리는 형편이었다.

 2004년 여름엔가는 아마 나한테 무슨 의미 있는 날이었던 듯한데, 밤에 불을 켜고 독경 좀 하려는데, 창문도 닫혀 있는데 어느 틈새로 들어왔는지, 난데없는 날개미들이 떼로 날아와 탁상 전등에 달라붙다가 책상 위며 방바닥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리저리 밟혀 죽기 십상이라, 독경을 멈추고 날개미를 한 마리씩 종이컵으로 담아 창 밖에 내보내는데, 알게 모르게 부주의로 여러 목숨이 희생당한 마음 아픈 기억도 있다. 근데 이 글을 막바지 손질하는 동안 올해 2009년 음력 7 29(양력 9 17)에 또 날타리 백여마리가 방안에 날라들어 담아내느라 고생했는데, 다음날 그믐날엔 2백마리 가량 날라들어 담아냈다. 아마도 원한업장이 몰려든 게 틀림없다.

모기와 날타리들만 아니라, 산에 다니다 잠시 앉아 쉬노라면 벌나비와 잠자리 등 여러 날벌레들이 날아들어, 더러는 옷에 앉아 땀기운을 빨기도 하고, 더러는 살갗에 내려앉아 핥기도 한다. 내 피땀에 단 냄새가 풍기는지, 내가 전생에 그 많은 중생들의 피땀을 빨아먹고 착취해 살아서인지, 그 업장과 빚 갚음을 톡톡히 하는 게 틀림없다. 그래서 하염없이 그들 핥는 모습을 지켜보며, 더러 염불해 주기도 하고, 더러 무념(無念)에 젖기도 한다.

모기와 날벌레는 그래도 양반이다. 더 골치 아프고 속수무책인 존재가 바로 개미보살이다. 어렸을 때 나도 무단히 개미집을 흙으로 덮어 막거나 아예 파헤치며 놀부짓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업보일까, 길가다 나도 모르게 발에 밟혀 죽는 개미는 놓아두고라도, 아직까지 방안에 수시로 나타나는 개미떼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콘크리트로 새로 지은 아파트 10층까지 개미떼가 출현하는 건, 참으로 자연의 신비요, 중생 업력의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바퀴벌레는 평소에 잘 나타나지 않기에, 외부로부터 침입해 오는 걸 예방하기 위해 정기적인 소독작업 시에 예방약을 곳곳에 놓는 걸 용인한다. 그렇지만 개미 집단살해 약제를 살포하도록 요청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강제로 방밖으로 이주시킬 수도 없는 문제이다. 작년 여름부터 연구년이라고 1년간 연구실을 비운 사이 어느새 개미가 떼지어 출몰하고 있었다.

한때는 내 손발에 치여 죽는 것보다는, 그래도 산 채 밖으로 내쫓기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해서, 눈에 띄는 대로 종이 위에 오르게 하여 창밖으로 내던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일도 차마 할 짓이 못되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조선시대 세종 때 개척한 사군(四郡)육진(六鎭)에 사민실변(徙民實邊) 정책을 시행하다가, 자원 이주자가 없고 마땅히 강제 이주시킬 명분도 궁색해지자, 나중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인을 감형한답시고 전 가족을 강제 이주(종신 유배)시키는 이른바 전가사변(全家徙邊) 3백 년 가까이 시행한 역사를 연구했던 내가 아니던가? 그런데 군거생활을 하는 개미 가족들을 방생의 명분으로 생이별시키고 강제로 내쫓는다면, 설령 과실치사는 면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고통은 얼마나 클 것이며, 또 밖에 내동댕이쳐진 개미들이 새로운 주거를 마련해 새 삶을 꾸려가지 못한다면, 강제축출은 고의치사나 다름없지 않은? 그래서 이젠 그 짓도 그만두기로 했다.

진공청소기는 소음도 크고 먼지도 많이 날려 호흡기 위생에도 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칫 눈에 띄지 아니한 개미들까지 흡입해 죽여 버릴까 봐서도, 잘 쓰지 않는다. 물걸레로 방바닥에 가라앉은 미세 먼지를 가만히 닦아내는 게 가장 위생적인 청소법이지만, 내 깐에는 제법 조심한다고 해도, 걸레질하고 난 뒤 찰과상을 당하거나 이미 치사한 개미들이 가끔씩 눈에 띌 때면, 나는 금방 상심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시력이 나빠서 더욱 힘들고 어렵다.

내 피를 빨아먹으려는 것도 아니고 나한테 어떠한 해악을 끼치지도 않는 개민데, 단지 자기네 보금자리를 우연히 내 방에 마련했고 자기네 양식을 구하러 부지런히 노동 작업을 하는 것뿐인데, 어쩌자고 파리나 모기처럼 인기척을 잽싸게 알아채고 도망갈 줄도 모르며, 자기네 형제나 동료가 죽어 나자빠진 걸 보고도 피할 줄조차 모른단 말인? 혹시라도 나한테 전생에 목숨 빚을 진 개미가 이렇게도 많은 건 아니겠?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그렇다면 나한테 원수 척진 개미들이 나한테 살생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죽을 줄 번연히 알면서도 일부러 방바닥을 활보하는, 일종의 자살테러 특공대원이라도 된단 말인가? 이도 아니면, 개미들의 심산이 혹시 이런 건 아닐는?

말야, 보적거사란 작자가 무슨 도를 닦는다고 하는데, 어디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가 한번 시험해 보자. 어차피 한번 죽을 목숨인데, 천수를 다하고 자연사하면 어느 세월에 축생을 벗어날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가끔씩 염불도 하고 독경도 하고 참선도 하여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조금은 가피 받는 듯하니, 그 손발에 치여 죽으면 그 인연으로 얼른 축생을 벗어날지 누가 알아? 지가 우릴 치여 죽이면, 저도 사람이라면 자책감을 느껴 우릴 위해 염불이라도 몇 번 해주겠지. 전혀 맹탕이래도 다시 개미 몸은 받을 터이니, 어차피 밑져야 본전 아니겠어?

얼마 전에는 유명한 불교 월간지에서, 제법 이름난 재미(在美) 여스님이 고국을 방문해 어느 누추한 거처에 머물면서 모기를 수십 마리씩이나 손바닥이 빨갛도록 잡았다는 일화를 천연스럽게 묘사한 글을 읽고, 한참 의아스러운 적이 있었다. 최근 들어서는 어느 스님한테 쥐나 파리모기 같은 유해동물은 때려죽이고 대신 천도시켜 준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또 어떤 선배교수한테는 어느 스님이 모기를 손뼉으로 쳐 죽이면서, “살생 아니냐?고 묻는 말에, “몸 바꾸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를 농담처럼 웃으면서 들려주는 걸 듣기도 했다.

대승불교에서는 확실히 수행의 경지가 무척 높아 축생을 제도하기 위해 일부러 죽여줄 만큼 법력이 높은 보살님들이 계시기도 한가 보다. 몇 지() 이상의 보살님들은 죽은 고기를 먹어 산 모습으로 토하거나 똥 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또 요리해 온 물고기 공양을 어쩔 수 없이 받아서 먹지 않고 접시 째 물에다 놓아주니 살아나서 헤엄치고 갔다는 일화도 고승의 법문에서 읽은 적이 있긴 하다. 또 월명암의 부설거사 가족 수행담에는, 누이한테 음행을 거듭 요구하는 남자(머슴?), 처음 두어 번은 들어주다가 나중에는 수행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해, 시뻘건 아궁이에 처박아 태워 죽이고, 살인죄의 과보를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득도해 윤회를 벗어나는 길밖에 없음을 알고, 용맹정진해서 마침내 도를 이루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하지만 축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일부러 죽인다는 법문이나 방편은, 과문(寡聞)한 탓인지 아직까지는 경론이나 어록에선 읽지 못했다. 더더구나 내가 무슨 축생 천도를 운위할 만한 수행경지에 이른 건 어불성설이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가장 있을 법한 근사한 인연이라면, 그래도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불법을 공부한다는 수행자한테 과실치사의 죄업을 씌우고, 그 업장을 녹이기 위해서라도 염불독경의 기도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채찍질하는 원력으로, 개미보살님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몸을 나토어 설법하며 헌신 희생하는 게 아닐까? 대개는 내가 눈에 띄게 늘어지거나 게을러질 때 이런 불상사가 자주 일어나는 것 같았다.

어쨌든 개미들이 내 손발에 치여 죽은 걸 발견하면, 마음이 아파 그냥 견딜 수가 없다. 허다 못해 독경할 때 참회 발원하며, 죽은 개미가 삼악도를 영원히 벗어나고 얼른 극락왕생까지 하게 해달라고 회향 기도를 한참 계속해야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 마음도 평안해진다. 내 기도가 실제로 그럴 위신력은 없지만서도, 순수하고 간절한 참회발원 그 자체의 공덕으로나마 과실치사의 죄업을 조금이라도 보속(補贖)할 수 있으면 얼마나 다행일까 자위(自慰)하는 마음에서 그리한다. 전통시대 율령에서도 고의살인은 실형으로 엄벌하지만, 과실치사는 감형해주고 원칙상 벌금으로 속죄를 허용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고의살생은 아니니, 과실치사의 죄업은 염불이나 독경으로 부처님 자비광명의 위신력을 빌어 참회발원하면, 조금이나마 속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 이 얼마나 뻔뻔스럽고 번지르르한 자기 합리화의 말발림인가? 곧 죽어도 입만 살아있을 말쟁이나 글쟁이 지식분자들의 그럴듯한 변명 아닌가? 하지만 어떤 비난과 질타가 빗발처럼 쏟아진다 해도, 나로서는 이미 엎지른 물 주워담을 순 없지만, 개미를 보살의 화신으로 받들어 믿고, 그 현신설법의 뜻을 거듭 내 영혼 깊숙이 새기면서, 양심과 성의껏 죄업을 참회하고 발원 기도하는 수밖에 달리 뾰족한 수는 없다.

말하자면, 대승 보살님들께서 짐짓 모기와 개미 같은 하찮은 미물의 모습으로 나토시어, 나같이 둔한 중생의 보리심과 자비심을 일깨우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치러 부나비처럼 막무가내로 덤벼드시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심각한 절규이자 처절한 몸부림이며, 이 얼마나 장중하고 엄숙한 현신설법인가?!

그 절규가 내 귀에 안 들리는 것은 너무 작아서일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달과 지구와 은하계가 자전하며 공전하는 소리가 너무도 큰 굉음이라서 안 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일 따름이리라. 나약한 우리 중생의 여린 고막이 터질까봐 안 들리도록 비밀히 감추어 둔 부처님의 자비와 우주의 섭리일 따름이리라! 개미보살님과 모기보살님의 원력이 여실히 들린다면, 아마도 우리 중생은 마음의 고막이 터져 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그 절규가 안 들리는 것은, 지구가 도는 소리가 안 들리는 것처럼, 실로 억만 다행의 축복이리라!

마하반야바라밀경에 보면 이런 법문이 나온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수행할 적에, 인간이건 비인간이건 간에 와서 보살의 신체나 팔다리를 달라고 요구하면, 줄까 말까 망설임 없이 선뜻 내준다.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몸을 받았거늘, 중생이 달라고 하지 않아도 자발로 줄 터인데, 하물며 달라고 하는데 어찌 안줄까 보냐?

내가 불안(佛眼)으로 시방세계의 갠지즈강 모래알 수만큼의 국토 가운데 있는 모든 보살들을 보니, 축생들을 위해 그 목숨을 내버리고 자기 몸을 토막내어 사방에 흩뿌리는데, 이 보살마하살의 고기를 와서 먹는 모든 중생(축생)들은 모두 한결같이 이 보살을 사랑하고 공경하는구나. 바로 보살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 덕분에, 곧장 축생도를 벗어나고 부처님을 만나 부처님 설법을 듣고, 말씀대로 수행하여 점차 성문벽지불부처의 삼승법으로 무여열반에 이르는구나.”

마찬가지로 보살은 아귀한테는 기갈의 고통을 풀어주는데, 이 아귀들이 모두 보살을 사랑하고 공경하기 때문에 아귀도를 벗어나고, 점차 삼승의 도로 수행한다. 천상 대중들한테 오욕락에 탐착한 걸 일깨우기 위하여, 불을 질러 궁전을 태우면서, ‘일체의 유위법은 이처럼 모두 덧없는데, 누군들 편안할 수 있겠느냐?고 설법을 한다.-주2)

중생이 보살의 육신을 잘라 그 고기를 먹으면 큰 죄가 되어 벌을 받아야 마땅할 터인데, 도리어 제도 받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이 보살은 본래 만약 중생이 내 고기를 먹게 되면 마땅히 제도 받게 하리라는 서원을 세웠고, 그에 따라 중생이 보살의 살을 먹으면 저절로 자비로운 마음(慈心: 愛敬心)이 생기고, 그래서 축생도를 벗어난다. 빛이나 소리나 냄새나 감촉 등과 마찬가지로, 맛도 화(瞋恚心)를 내게 하는 게 있는가 하면, 자애심을 일으키는 것도 있다. 예컨대, 수행인한테 오신채를 먹지 말라고 금하는 까닭도, 바로 익혀 먹으면 음욕을 돋구고, 날로 먹으면 화(瞋恚心)를 내게 하기 때문이다.

비마라길경(毘摩羅鞊經)에 보면, 향기로운 밥(香飯)을 이레간 먹어 도를 얻은 이도 있고 얻지 못한 자도 있다. 보살의 살코기를 먹어서 제도 받은 것이 아니라, 고기 먹고 자애심이 난 덕분에 축생도를 벗어나 좋은 곳에 태어나고 부처님 만나 제도 받는 것이다. 외물(外物)은 아무리 많이 보시해도 애지중지하는 게 아니라서 은덕이 크지 않지만, 육신 자체를 보시하면 경탄(驚歎)과 감동이 강렬하여, 보살이 육신 보시로 중생을 제도하겠노라고 서원을 세운 것이다.-주3)

또 이런 법문도 나온다.

보살마하살은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인연 따라 몸을 받고 이 몸으로 중생을 이롭게 한다.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축생이 될 때는 커다란 방편력이 있어서, 만약 원수나 적이 와서 살해하려고 하면, 더할 나위 없는 인욕과 자비심으로 기꺼이 몸을 바치며, 원수나 적을 조금도 괴롭히지 않는다. 너희들 성문승이나 벽지불은 이러한 능력이 없다. …… 보살마하살도 희고 깨끗한 무루법(無漏法)을 성취하였는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축생의 몸을 받아 이 몸으로 중생을 교화하며, …… 이 몸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도 고통은 전혀 받지 않는 것이다.”-주4)

예컨대, 석가모니 본생인연담에 나오는 여섯 상아 가진 흰 코끼리는, 사냥꾼이 쏜 독화살로 가슴이 맞아 쓰러지면서도, 오히려 다른 코끼리들이 사냥꾼을 보복하고 해칠까 염려하여 코로 감싸 보호하면서, 아내 코끼리한테 이렇게 타일렀다고 한다.

자네는 보살의 아내로서, 어찌하여 이런 일에 나쁜 마음을 내는가? 사냥꾼은 번뇌가 죄이지, 사람의 허물이 아닐세! 나는 장차 아누다라삼막삼보리를 얻어 그의 번뇌의 죄를 소멸시켜 주리라. 마치 악귀에 들린 사람이 찾아오면, 축원하는 주술사는 단지 악귀만 다스려 내쫓을 뿐, 그 사람한테 화내지는 않는 것처럼, 자네 또한 사냥꾼의 죄를 따지지 말게나.” (‘죄는 미워하되, 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법철학사상의 명언을 떠올리는 법문! - 글쓴이)

그리고는 사냥꾼한테 서서히 부드럽게 물었다.

그대는 왜 나를 쏘았는가?

나는 너의 상아가 필요하다.”고 답하자, 보살 코끼리는 스스로 바위에 부딪쳐 상아를 뽑아주면서, 피와 살이 함께 터져 나오는데도 아프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사냥꾼한테 양식을 주고 숲을 안전하게 빠져나갈 길까지 가리켜 주었다.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원수나 적이 와서 자기를 해치면, 비록 보복을 가하지는 않지, 보살처럼 자비심으로 애호하며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다 내주지는 못하는 것이다.-주5)

그렇다면 부처님 눈에는 자연계의 먹이사슬에 얽혀 천적한테 잡혀 먹히는 동물들이 모두 보살의 화신으로 보였을? 또 육식하는 인간들은 모두 축생으로 보였을? 그리고 인공으로 길러져 도살당하는 소오리돼지 등과, 밀렵꾼이 사냥하거나 사로잡는 꿩사슴멧돼지개구리 등 온갖 야생동물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중생한테 그래, 내 피와 살을 맛있게 먹고 정력도 왕성하고 기쁨도 충만하여, 하는 일마다 잘 성취하고, 부디 축생을 벗어나서 부처님 법 만나 해탈하여 지이다! 라고 축원하며 희생 헌신하는 대승 보살님들의 화신일? 우리 같은 범부중생의 지견과 속안(俗眼)으로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수수께끼고, 상상할 수도 없는 신비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만약 고기를 먹어 자비심과 지혜가 저절로 크게 는다면, 대승원력 보살이 우릴 제도하기 위해 짐승이나 물고기로 나톤 인연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고기를 먹어 마음이 거칠어지고 탐욕과 분노나 공격성이 자기도 모르게 인다면, 이는 살생의 업보가 틀림없다고 보아야 하리라. 스스로 속임 없이 잘 관조하고 반성할 일이다.

한편 근래 접한 소식에 따르면, 생명복제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황우석 교수는 앞으로 실험용 쥐처럼 깨끗한 무균(無菌) 돼지를 대량으로 사육하여, 그 장기를 불치병이나 난치병 환자들한테 이식하고, 나아가 해외로도 수출하여 적지 않은 외화 획득의 산업으로까지 발전시킬 청사진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그 꿈이 이루어지려면, 우선 우리 인간 현실에서 수많은 보조 연분들이 잘 화합하여 빈틈없이 준비를 진행해야 하겠지만, 무형(無形)의 천상 내지 신명의 영적 세계에서도 그 못지 않은 배려와 협조로 호응해야 할 것 같다.

바로 여러 불경의 도처에서 나오는 수많은 대승 보살님들처럼,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쳐 장기와 골수 등을 흔쾌히 보시할 원력을 세워서, 우리나라 황우석 교수단의 생명공학 자비원(慈悲苑)에 무균 돼지로 강생(降生) 화현(化現)하셔야 할 것이다. 시대가 크게 바뀌어서, 보살님들께서 같은 인간의 몸으로 나토시어 온갖 장기와 골수 및 생명까지 보시하기에는, 문화상의식상법률상 제약과 한계가 너무도 많고 크기 때문에, 이제는 첨단과학기술 발전의 인연에 따라 사람과 비슷한 돼지의 몸을 빌리셔야 하는 모양이다.

과학상으로나 다른 일반 종교 교리상으로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 내지 주인으로 추앙하고, 다른 동물은 인간이 지배하고 이용하며 잡아먹을 수도 있다고 여긴다. 그러기 때문에, 인류의 질병 퇴치용 의약품 개발이나 기타 복지 증진을 위해서, 동물을 실험용으로 사육하거나 사로잡아 실험하고 해부하고 죽이는 일은, 과학실험이란 명분으로 정당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인류평등 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닌 존재라는 중생평등을 강조하는 불교철학으로는, 다소간 논란의 소지가 잠재한다. 사람의 생명이 귀중하면 다른 동물의 생명도 귀중한 줄 알아야지, 사람이 좀 영리하고 잘났다고 해서, 어떻게 다른 동물을 부리고 실험도구로 사용하며, 그것도 모자라 잡아먹고, 이제는 사람의 난치병을 때우기 위해 장기만 떼어갈 수 있느냐고 비판할 수도 있다.

확실히 그렇다. 따라서 돼지를 무균 상태로 복제 사육해 장기만 떼어 쓰는 것도,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장기이식용으로 인간의 난자를 복제해 발육시키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생명윤리상의 비난거리가 충분히 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그 윤리적 곤궁을 타개하여 해소해 주기 위해 이런 엉뚱한 돼지보살론이란 궤변을 견강부회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적어도 진실한 불자라면, 자기 스스로 보살이 되어 자신의 장기를 기꺼이 보시하지는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나 동물더러 기꺼이 목숨 바쳐 장기 보시하는 보살도를 행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으리라. 공자님도 일찍이 자기가 하고 싶지 않는 일은 남한테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고 설법하지 않으셨던가?

다만, 황우석 교수처럼 자연과 생명의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도로서, 다른 불치병 환자들의 고통을 보고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면서 동정과 연민의 자비심에서 보살행의 서원을 크고 굳세게 세운 분한테, 만약 불보살님께서 가상하다고 인가하시고 증명하시어 그 뜻을 이루게 하신다면, 아마도 큰 보살님의 권속이 되어 함께 보살행을 펼치러 복제 돼지의 모습으로 희생하길 발원하고 강생하는 수많은 작은 보살님들이 계실지도 모른다는 뜻일 따름이다.

앞의 주장과 형식논리상 모순이 되고 양립할 수 없는 듯한 이 견해도, 대승불교철학에 크게 어긋날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의 사유와 논리를 뛰어넘는 반야공(般若空)의 지혜에서 보면, 외관상의 모순과 역설이 진리를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무균 돼지의 장기이식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적어도 그 장기를 이식 받고 생명을 이어갈 환자들은 그 무균 돼지를 생명의 은덕으로 여기고 감사하지 않겠는가? 그들한테는 복제돼지가 보살님의 화신으로 보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리라.

각설하고, 신라 때는 불교가 전해진 뒤 이차돈 보살님의 순교로 공인 받고 마침내 국교로 숭앙 받았다. 이조 때는 천주교 전래 초기에 103인의 백의 천사가 복음을 위해 순교하였는데, 얼마 전에 세계에서 유례 없이 대규모 집단으로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른 적도 있다. 이러한 생생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앞으로 만약 무균 돼지의 자비원 청사진까지 순조롭게 성공한다면, 종교신앙에서 뿐만 아니라 생명과학의 영역에서까지, 우리나라는 과연 진리와 중생을 위해 목숨조차 아끼지 않는, 명실상부한 대승보살의 자비도량임이 확실해질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어떤 미물이 밟혀 죽거나 다치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부터 여름 우기에는 수행승들이 밖에 나돌아다니지 않고 조용히 안거(安居)를 했다고 한다. 또 우리가 무심코 말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어떤 사람의 영혼과 마음이 상처를 입고 서운하거나 분노할지 알 수 없다. 내가 한 자리 앉겠다고 나설 때, 그 자리를 원하거나 탐내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이 경쟁하고 시샘하고 질투하며 증오할지? 그래서 예로부터 성현들도 어느 자리에 나아갈 때는 반드시 청을 받고, 그것도 세 번씩이나 정중히 사양한 다음에 부득이 수청(受請)하였다고 하지 않은가?

그렇다! 지장보살본원경에서도 설하신 바와 같이, 우리 염부제 중생은 손짓 발짓(一擧手 一投足)은 물론, 말 한 마디나 마음 속 한 생각 움직임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업장이 아니고 죄악이 아닌 게 없다.(南閻浮提衆生, 擧止動念, 無不是業, 無不是罪, 何況恣情殺害竊盜邪淫妄語百千罪狀?) 무심코 하는 생각이나 주의 깊게 정신 차려 하는 언행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제 멋대로 방자하게 구는 행동이야 오죽하?! 고등학교 때 알게 된 한문성어 중에 動輒見敗(동첩견패)가 유난히 인상 깊어 곧잘 화두처럼 떠오르곤 했는데, 이제사 철 좀 들어가면서 그 철학 함의가 매우 심오하여 지장경의 설법과 상통함을 느끼게 되었. 그저 단순히 움직이면 곧 낭패 본다는 문자의 의미에서, 이른바 안 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속담 정도로 억세게 재수 없고 운 나쁜 상황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바로 우리 사바고해 중생의 모습과 현상세계의 본질을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한 잠언이 아닐 수 없다.

(초등)학교 때 자유교양경시대회란 게 군 교육청 단위로 열려서, 학년별로 정해진 동서양 고전을 읽고 경시(競試)에 참가하곤 했다. 그런데 다른 건 전혀 기억나지 아니하고, 아마도 5-6학년 때 읽은 불경 이야기 중에, 세존(世尊)께서 길을 가다가 질그릇 굽는 도공(陶工)한테 흙을 불에 구우면 얼마나 많은 생명이 타죽는지 아느냐고 경책(警策)하신 내용만 또렷이 떠오른다. 이 일화는 세존이란 명호와 함께, 어린 나의 뇌리에 너무도 강렬히 인상 찍히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부처님의 혜안의 통찰력과 생명 사랑의 자비심에 감탄과 외경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교과서밖에 없던 그 시골벽지에서 그렇게 어린 나이에 처음 보게 되었고, 또 무딘 기억력에도 잊히지 않고 생생히 남아 있다니, 참으로 부처님 법의 신비스런 인연에 경탄과 감사를 바칠 뿐이다.

그런데 나중에 커서 보니, 부처님 생존 당시의 계율에는 물도 걸러 마시도록 했다는 조목이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덧붙여서, 물을 마실 때는, 범인의 육안으로만 볼 것이지, 도인의 천안으로는 보지 말라고 했다니, 더욱 경탄스러울 뿐이다. 그 많은 아라한 제자들이 물 속의 생명을 천안으로 보면서 어떻게 마실 엄두가 나겠는가? 질그릇 흙 속의 미생물을 보시듯이, 물 속의 뭇 중생들도 여실히 보시면서, 다만 사바세계 중생의 먹이사슬을 부득이 최소한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짐짓 방편으로 한계를 설정하신 중도실상의 자비와 지혜에 진실로 탄복하는 것이다.

흔히 엄격한 계율수행과 특히 채식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곧잘 극단론으로 반격하곤 한다.

일거수일투족과 한 생각 움직임까지 죄악 아닌 게 없다면, 어차피 중생은 죄를 피할 수 없는 법이거늘, 남들보다 조금 조심하고 참는다고 해봤자, 오십보로 백보 비웃는 격이 아니면 위선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우리가 물마시고 숨 쉴 때마다 어느 한 순간 미생물을 먹지 않는 때가 없고, 또 채식한다고 해봤자 곡식과 채소도 결국 생명이 아닌가? 어차피 살생과 죄업을 면할 수 없을 바에야, 먹고 싶은 대로 식성 따라 잘 먹고 잘살자?! 차라리 그게 진솔하고 정직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는 편협하게 극단에 치우친, 자기변명 내지 합리화의 구실로 내세우는 사견(邪見)일 뿐이다. 우리가 육신을 나토어 살아가는 상대적인 물리적 현상세계는 양()과 질()의 두 요소가 신비스럽게 화합하여 이루어져 있다. 이 조화에 따라 물리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순환변화를 되풀이한다. 자연법칙은 양이 일정한 한계를 초과하는 순간 질이 급변하곤 한다. 집이나 다리와 같은 건축물도 한계 하중까지는 멀쩡히 잘 견디다가, 하중이 한계를 초과하는 순간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도 바로 그 한계 하중을 조금 초과했기 때문에, 엄청난 인명 및 재산 손실을 초래하며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폭삭 붕괴했다. 멀쩡한 건물과 무너진 건물은 백짓장 한 장 차이 밖에 안 났는지도 모른다. 평형을 이루고 있는 저울의 팔을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데는 무거운 추가 필요한 게 아니다. 단지 머리카락 한 올로도 충분하다. 그 저울이 정밀도가 높고 민감할수록 그 무게는 더욱 미세해져, 이론상으로는 티끌 하나로도 팔은 기울어지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땅과 물과 공기 모두가 오염되어, 아무리 채식을 하고 유기농산물을 엄선해 먹더라도, 농약이나 중금속 기타 공해의 오염을 완전히 모면할 수는 거의 없다. 모발 검사를 해보면 아무리 깨끗하고 건강한 사람도 상당량의 중금속을 체내에 축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젊은 동안 건강한 듯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일부 사람들만 온갖 특이한 질병이 발작해 고생하고 요절하기도 한다. 개인의 체질이나 체력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적지는 않겠지만, 체내에 쌓인 중금속이나 기타 노폐물오염물질이 각 개인의 체질과 저항력에 상응하는 일정한 한계를 초과하는 순간, 건강은 와르르 무너지고 질병이 발작할 것은 틀림없는 병리(病理). 그런데 채식을 많이 하면 섬유질과 특히 현미의 휘친산인가 하는 성분이 중금속이나 독성물질을 흡착해 몸밖으로 배출하기 때문에, 현미 위주의 채식인한테 중금속 잔류량이 훨씬 적다는 실험 결과보고가 많다. 그래서였을까? 공자도 비록 고기가 아무리 많아도 곡식과 채소 기운을 웃돌지 않도록 식사했다고 한다.

현상계에서 물질의 삼태(三態)변화를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면서, 비열도 만물 가운데 가장 높고, 생명체의 근원이자 만물의 표준이 되어, 자고로 도()에 가장 가깝다고 칭송 받는 물()을 보자. 0가 되기 전까지 상온에서는 줄줄 잘 흐르다가도, 영하로 떨어지는 순간 얼음으로 얼어붙고, 100에 다다르면 펄펄 끓어 수증기로 기화하여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에너지(온도)의 양이 일정한 한도를 넘어서면, 액체에서 고체나 기체가 되기도 하고, 거꾸로 얼음이나 수증기가 다시 물이 되기도 하는 게 물질세계의 법칙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정신과 심령(心靈)도 도덕적 에너지(온도)의 변화에 따라, 죄악 업장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지면 얼음장 같고 돌덩이 같은 삼악도로 떨어져 굳기도 하고, 지혜광명과 선행복덕으로 부풀대로 부풀어지면 수증기처럼 사뿐히 날아올라 천당에도 가고 극락정토에도 왕생한다. 일정한 범위까지는 여느 사람과 똑같이 평범하다가, 어느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판이한 질적 변화를 일으켜 천상극락도 가고 지옥도 떨어지는 것이다.

주역의 곤괘에는 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남아넘치고, 불선()을 쌓는 집안에는 재앙이 남아넘친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는 명언이 전해 온다. 재앙도 죄악의 봇물이 터져 넘칠 때까지는 나타나지 않고, 복덕도 선행의 꽃이 활짝 피어날 때까지는 잠잠히 감추어져 있는 법이다. 성인은 길흉의 조짐이 겉으로 드러나기 전에, 그 낌새(機微)를 혜안으로 미리 보고 일깨워주는데, 우리 중생의 속안은 가리개가 많이 끼어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헛소리나 미신 또는 우연이라고 치부한다. 따라서 복()이 장차 이를 것은 그 선()을 보면 미리 알 수 있고, 반대로 화()가 장차 닥칠 것도 그 불선(不善)을 보면 미리 알 수 있다.-주6) 다만 언제 그 한계를 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나를 위해 흘리는 눈물은 중생의 참회심이오,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보살의 자비심이라! 마하트마 간디는 모든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게 평생소원이요 꿈이라고 했다는데, 과연 대승 보살님이시다. 그러니 과격파 괴한한테 총격을 당해 쓰러지는 순간조차, ‘, 신이시여!라고 외치신 것도 자연스러운 보살심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는 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마음에서 눈물이 흐르게 만들며, 많은 중생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게 한단 말인가? 나의 무디어진 보리심과 자비심을 일깨우기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기꺼이 내버리는 뭇 대승 보살님들이시여! 대 선지식들이시여! 참 스승님들이시여!

그렇지만 기실(其實), 수다원인지 사다함인지만 증득해도, 농사를 짓기 위해 땅을 갈 때, 흙 속의 미물 곤충들이 스스로 그 땅에서 얼마 이상 멀리 떨어지게 피해 가므로, 살생의 업을 지을 인연이 애시당초 전혀 닿지 않는다는 소식을, 고승 법문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 어느 훌륭한 도인의 법력과 복덕 인연으로 말미암아, 천신(天神)들이 그 어머님을 위해서 그 주위의 모기들을 멀리 옮겨 버려, 그곳에는 지금까지 모기가 전혀 없다는 일화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난다. 자신의 수행력으로든지, 아니면 불보살님의 가피나 천신들의 호념으로든지, 살생의 죄업 인연을 짓지 않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축복과 공덕이 어디 있으?!

그런데 내 자신을 돌이켜보면, 스스로 각성하여 채식을 발원하고 실천해 온 지 이제 만 15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가끔씩 고기나 생선찌개 요리 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지고 미각을 당기는 걸 보면, 전생과 금생에 걸친 살생과 육식의 업습(業習)이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 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아직도 모기와 다른 수많은 곤충들을 수시로 알게 모르게 죽거나 다치게 하고 있지 않은가? 어찌 곤충 미물들뿐이랴? 내 말과 행동과 생각에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이 상처받고 있겠는가? 그러니, 아아! 어느 세월에나 보살님들의 마음과 눈에서 피눈물이 마르며, 또한 거룩한 보살님들의 생명이 더 이상 내 불찰로 앗기지 않을 때는 그 언제이런?

 

주1) 龍樹보살 , 鳩摩羅什, 大智度論, 4 : 初品 중 보살의 해석; 5 : 初品 중 마하살의 해석; 44 : 句義品의 해석 ; 45 : 摩訶薩品의 해석; 53 : 無生三觀品의 해석; 85 : 菩薩行品의 해석 등을 참조.

주2) 鳩摩羅什, 마하반야바라밀경, 四攝品.

주3)  龍樹보살 , 鳩摩羅什, 대지도론(大智度論), 88 四攝品의 해석

주4)  鳩摩羅什, 마하반야바라밀경, 必定品.

주5)  龍樹보살 , 鳩摩羅什, 대지도론(大智度論), 93 必定品의 해석.

주6) 원황 저, 김지수 옮김, 운명을 뛰어넘는 길(了凡四訓), 불광출판부, 2000, 40쪽 참조.

 

 

*이 글은 계간 불교잡지 ?光輪?, 2005년 봄호(통권 제13)부터 가을호(통권 제15)에 걸쳐 세 차례 연재한 원고를 조금 손질한 것이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