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12일 화요일, 중머리재서 중봉으로 오르던 도중 능선에서 문득 한 줄기 상념(想念)이 떠올랐다.
雨歇日輝山野靑 비긋자 해 부시고 산야가 짙푸르다.
旻高空碧白雲浪 하늘은 높푸르고 흰 구름 뭉게뭉게
我心亦如大自然 내 맘도 대자연처럼 맑푸르게 빛나길!
願放天眞靑淨光
장마 그친 사이 대자연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햇살 쬐고 습기 말리려는 중생 물결로 넘쳐 난다. 땅바닥에 온통 개미 기어 다니는 행렬, 메뚜기나 여치 등 어린 풀벌레들 폴짝거리는 군무(群舞)! 땅을 가려 발바닥 디디기가 여간 어렵고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세 그려. 그러니 산길을 무턱대고 빨리 다닐 수만도 없고, 천천히 발 밑 살피며 조심스레 다녀야만 하겠구먼. 경행(經行: walking meditation)은 하려고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겠구먼. 그동안 얼마나 빠르고 거칠고 딱딱하고 굳세게만 살아왔던가? 이젠 느리고 곱고 부드럽고 무르게 다니며 살아야겠다.
지금까진 산행 때 주로 쓰레기 줍는 데 시선이 많이 팔렸다. 이젠 개미보살과 기타 벌레보살들이 내 발길에 치이지 않도록 시선도 주고 마음도 써야 하겠구나. 근데 시력이 갈수록 약해져 발 밑 개미가 보이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랴?
조고각하(照顧脚下)라! 고대 그리스 어느 철학자가 하늘 별자리(天文) 관찰에 몰두하다가, 제 발 밑도 못 살펴 우물에 빠졌다고 하던가? 불교 승가에선 섬돌 위의 가지런한 신발 사진으로 선 수행의 성성적적(惺惺寂寂)한 마음가짐을 상징하며 “조고각하(照顧脚下)”라 하던가?
마흔 중반 산행 길 어느 날, 꼬막재 거쳐 무등산 허리를 절반쯤 돌아 규봉암에 거의 다 이른 돌계단 길에서, 산행하는 사람의 발에 밟혀 죽은 개미 시신을 보는 순간, “아! ‘照顧脚下’가 바로 이거구나!” 하고 절로 탄식이 나왔다. 나도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얼마나 수많은 개미와 미물을 밟아 죽였을까? 이 과실치사상죄는 얼마나 크고 무거울까?
올 여름 장마철을 지나면서 비로소 우기(雨期)가 안거(安居)수행에 적합하고 또한 마땅한 줄 처음으로 생생히 실감했다. 우기 중에는 바깥나들이를 삼가고 안거 수행하며, 또 비 온 뒤 성근 짚신 신고 다니는 이유도, 모두 개미나 미물을 밟아 다치는 일이 없게 하려는 자비심의 발로지 않은가?
얼마 전 새로 부임해 온 옆방 교수님한테 처음 들은 얘긴데, 인도 어느 수행교파인지, 남자들도 소변을 볼 때 여자처럼, 아니 대변 볼 때처럼 앉아서 본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 만약 서서 오줌을 싸다가는 그 폭포수의 엄청난 충격(운동에너지)에 어느 미물이 다치거나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생명의 희생 가능성을 예방하기 위해서란다. 새삼 신선한 충격을 받은 소식이었다.
어렸을 적 고향에서 어쩌다 시골버스를 타면 “오늘도 무사히!”라고 적힌 어린 서양소녀의 기도 모습 사진이 붙은 걸 보곤 했다. 그런데 요즘 나는 집 문을 나설 때, “오늘도 내 발에 밟혀 죽거나 다치는 생명이 없기를! 내 말과 행동과 생각에 상처받는 생명이나 사람이 없기를!” 하고 기도하는 마음이 가끔씩 일곤 한다. “照顧脚下 개미보살!” 아직도 오랜 업습 탓에, 바쁘게 정신 없이 망각하는 때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런데 마침내 불가사의한 업력에 이끌려 또다시 커다란 악업을 짓고 말았다. 2005년 11월 20일 일요일, 음력으로 시월 19일, 淸華큰스님 열반 2주기 기념법회에 참석하고 귀로에 아는 분 차에 편승해 국도로 오다가, 얼마 전 처음 방문한 담양군 대덕면 시목(柿木: 마을 이름 그대로 유기농 단감 특산지)리에 잠깐 들르자고 청했다. 헌데 마을 진입로 한가운데 최근 윤화(輪禍)로 역사(轢死)한 가엾고 불쌍한 고양이 시체가 한 구 놓여 있는 것이었다. 운전자가 발견하고는 나한테 좀 치우라고 부탁했다. 측은한 마음에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며 일단 길옆으로 옮겨 놓은 뒤, 마을 들어가 삽과 괭이를 구해 고양이 시체를 가져다 마을회관 뒤편 양지바른 빈터에 묻어 주려고 땅을 팠다. 실로 얼마만의 울력(더러 運力으로 표기)인가?
아!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더란 말인가? 잡초 무성한 빈터 땅속에 깃들어 있던 지렁이 한 마리가 이미 동강 나 꿈틀거리고, 게다가 많은 개미들이 흙 속에서 난리 난 걸 보니 벌써 개미집이 파헤쳐진 게 분명했다. 개미가 몇 마리나 죽고 다쳤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뿔싸! 죽은 고양이 한 마리 가엾어 묻어 준다고, 산 지렁이와 개미들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난데없는 난리를 당하였구나. 삽시간에 내 마음은 칠흑처럼 온통 어두 깜깜해졌다. 이미 엎지른 물! 돌이킬 수 없는 살생의 업을 저질렀으니, 어떻게 참회하고 보속(補贖)할 것인가? 염불과 독경으로 참회발원하고 축생해탈을 회향 기도하는 수밖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마하살!
그렇다. 만물일여(萬物一如: 齊物論)의 무위자연의 도에서 보면, 사람의 시신을 산에다 내버려 들짐승이나 날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는 것이나, 땅속에 묻어 흙 속의 미물이나 세균의 숙주가 되게 하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다만 세속의 인지상정에 비추어, 측은지심과 혐오감 및 보건위생 등을 이유로, 눈에 안보이게 매장하는 게 일반 장례문화가 되었을 뿐이다. 그런 세속 인간의 눈으로 동물의 죽음을 대하고 처리하는 것이, 과연 인도주의 예법이고 동물사랑이자 자연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문화우월주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그 대가로 다른 미물의 무고한 희생을 강요하고 정당화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 생명체는 직간접으로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 치밀하게 얽혀 있다. 매끼 먹는 음식이나 늘상 입고 쓰는 옷과 생필품들, 그 어느 것 하나 다른 생명체의 희생 없이 얻어질 수 있으랴? 농부의 수고는 그나마 부담이 아주 가벼운 업장이다. 그 농부가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논밭을 갈 때 얼마나 많은 지중 생물이 다칠 것이며, 요즘같이 화학비료와 농약 범벅인 시대에 그로 인해 죽거나 다치는 곤충과 미물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유기농법은 살상죄가 좀 적을까? 언뜻 생각하면 그럴 것 같았는데,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퇴비를 썩히는 동안 발생한 미물이나 세균이 거름 주는 과정에서 다칠 것은 자명하다.
근데 근래 유기농법단지 현장에 가볍게 놀러 갔다가, 뜻밖에 충격을 목격하였다. 다른 지역에서 농약을 피해 몰려든 것인지, 가축의 대량사육으로 인한 분뇨나 퇴비 때문에 집단 서식하는 건지, 아니면 유기농법 과일이나 곡식이 특별히 달고 향그러워 모이는 건지는 몰라도, 엄청난 날벌레들이 유기농법을 괴롭히는 듯했다. 이 벌레를 제거하기 위해서, 야간조명을 이용해 벌레를 유인하고 흡입해서 죽이는 기구들이 곳곳에 걸려 있는 것이었다. 백만대군의 곤충이 몰살당하는 전장(戰場)이었다. 무심코 설명해 주는 농부의 말을 듣고 이를 보는 순간,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듯 무표정했지만, 내면의 심령은 충격과 경악으로 소름과 전율이 끼쳤다.
우리가 수확량을 늘려 농가소득을 올리고 식량을 자급하기 위해 화학 비료와 농약을 대량 살포할 때마다, 수많은 생명체가 중독사해 왔다. 그런데 이제 환경오염을 줄이고 건강하게 잘먹고 잘살자고 전통으로 복귀하는 유기농법에도, 또 다른 살생의 함정이 커다랗게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농약 친 곡식채소나 과일을 먹든, 유기농산물을 먹든, 간접살생의 공동 업장을 분담하기는 매일반인 셈이다. 참으로 진퇴유곡이요, 사면초가다. 백척간두 위에 선 삶 자체가 과연 악업이고 고통이다! 한 걸음 훌쩍 내디뎌 용맹정진으로 생사윤회를 해탈하지 않는 한, 이 먹이사슬의 숙명과 업장을 어찌 피할 수 있으랴?!
명나라 때 원황(袁黃)선생께서 남기신 료범사훈(了凡四訓)에 보면, 선행의 열 가지 방법 중 마지막으로 “만물의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愛惜物命)” 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무릇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바로 중생을 측은하게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인(仁)을 구하는 자는 바로 이것을 구하고, 덕(德)을 쌓으려고 하는 사람은 바로 이것을 쌓아야 한다. 주례(周禮)에 보면, 맹춘(孟春: 음력 正月)에는 종묘(宗廟)나 왕궁(王宮)에서 희생(犧牲)을 쓸 때도 암컷을 쓰지 않는다. 맹자(孟子)가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한다.(君子遠庖廚)’고 말했는데, 이는 바로 나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보전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네 가지 먹지 않는 계율이 있었다. 도살하는 비명을 들은 고기는 안 먹고, 도살하는 것을 눈으로 본 고기도 안 먹으며, 스스로 사육한 가축의 고기도 먹지 않고, 오로지 나를 위해서 도살한 고기도 먹지 않는다. 학문을 수양하는 자가 처음부터 육식(肉食)을 완전히 금할 수는 없겠지만, 마땅히 여기서부터 조금씩 끊어 가야 한다. 고기를 점점 끊어 가다 보면, 자비로운 마음(慈悲心)도 점점 커진다.
“특별히 살생(殺生)만을 마땅히 경계할 것이 아니다. 꿈틀거리고 움직이며 영혼을 머금은 것은 다 만물의 생명이다. 비단실을 구하려고 누에고치를 삶고, 농사짓느라 땅을 호미질 하면, 자칫 그 안에 든 벌레를 죽이기 쉽다. 따라서 옷 입고 밥 먹는 일상생활의 유래가, 모두 다른 생명을 죽임으로써 내가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생각해야 된다. 그래서 물건을 함부로 부수거나 낭비하는 죄악은 마땅히 자기가 직접 만물을 죽인 살생과 같이 여겨야 한다. 심지어 손이 잘못해서 다치게 한 것이나 발이 잘못해서 밟은 것들은 얼마나 되는지 숫자조차 알 수 없으므로, 이런 것들을 모두 완곡하고 섬세하게 최대한 예방해야 된다. 옛날 소동파(蘇東坡)의 시(詩)에, “쥐를 사랑해서 항상 (쥐 먹을) 밥을 조금씩 남겨 두고, 나방이 죽을까 불쌍히 여겨 불을 켜지 않는다.(愛鼠常留飯, 憐蛾不點燈.)”는 시구가 있는데, 그 마음이 얼마나 어진가?”
정말 탄복할 가르침이다. 노자(老子)는 “길을 잘 가는 수레는 바퀴자국이 없다.(善行無轍跡)”고 말했다. 이 명제는 단순한 상징비유가 아니다. 불경에 나오는 “새가 허공을 날되 흔적이 없다.”는 조비허공(鳥飛虛空)이나, 불꽃이 허공을 사르되 역시 그을리거나 탄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화염소허공(火焰燒虛空)의 비유법문과 상통한다. 또 아라한이 허공을 자유자재로 비행하는 신통력이나 예수가 물 위를 걸은 기적과도 상통한다. 극락세계의 땅은 발로 밟으면 스폰지처럼 3-4치 들어갔다가, 발을 떼면 원상회복하여 자국이 남지 않는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경지를 상징하는 진리말씀이자 복음 법어이다! 수행의 법력이 그 경지에 이르면, 개미가 밟히거나 돌부리 채일 염려가 어디 있으랴?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보잘것없는 초라한 수행이 부끄럽고 한심할 뿐! 다만 그 경지에 이르도록, 그 경지에 이를 때까지 꾸준히 자비심을 함양하며 수행정진에 노력해야 하리라. “照顧脚下 개미보살!” 자비수행!
참선수행의 성성적적(惺惺寂寂)이나 특히 위빠사나 관조(觀照)수행에서 발밑부터 온 몸 구석구석 살피는 까닭은? 참나, 가장 가까운 나 자신을 찾기 위해서! 근데 참나 찾기는 어쩌면 “자기 눈으로 자기 눈 보기”인지도 모른다. 모든 수행은 “군자는 자기한테서 구한다.(君子求諸己)”로 대표하는 구심성 관조로 귀결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이. 심지어 거시의 원심성 우주천문과학도 결국은 자기로 되돌아오지 않은가? 극과 극은 서로 만나듯이! 아인쉬타인은 최고 완전한 성능을 가진 이상적 천체망원경으로 우주의 끝을 보면, 바로 자기 뒤통수가 보일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우주의 공간이 휘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그 망원경으로 보이는 것(곳)은 우주의 끝이 아니라, 어쩌면 바로 우주의 중심일지도 모를 일이다. 가가소소(呵呵笑笑)!
*이 글은 계간 불교잡지 ?光輪?, 2005년 겨울호(통권 제16호)에 실은 원고를 조금 교정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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