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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먹이사슬

운명을 뛰어 넘는 길. 채식명상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2. 12. 2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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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저지른 살생업(殺生業)과 진에업(瞋恚業)을 참회하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불보살님의 자비광명 가피를 기원합니다.)

2005 5 26 오후, 도법스님의 생명평화탁발순례 광주일정으로 우리 전남대 방문 공개 강연이 있는데, 참석하기 전에 새인봉을 거쳐 중머리재서 물 좀 마시고 증심사 쪽으로 곧장 하산하던 중이었다. 그 유명해진 도법스님의 생명평화탁발순례에 내가 학생들을 권해 함께 강연에 참석하려고 마음먹은 인연으로, 호사다마(好事多魔)의 시험이었을까? 참으로 묘하고 희한한 장면이 나타나 나한테 미리 뭔가 소식(消息)을 전하고자 현신설법(現身說法)을 하는 것만 같았다.

얼마 안 내려와 안경 안 쓴 육안에 어슴푸레하니 뱀 또아리 같은 물체가 길 가운데 불쑥 나타나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무조건반사로 가슴이 덜컥 놀라면서, 무슨 뱀이 다치거나 죽어 길가에 버려져 있나 하는 생각으로 안경을 꺼내 쓰고 쳐다보았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화와의 고사에서, 사탄의 화신인 뱀의 꼬임에 넘어간 하와가 아담을 졸라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우리 인류가 하느님의 미움을 받아 지상 낙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그 원죄로 우리 후손들이 영생을 잃고 사망의 업보를 받게 되었다는 신화 같은 전설(傳說) 속에 스민 집단무의식의 발로일? 우리 인간은 누구라도 뱀을 보면 무의식의 반사인양 징그러워하며 소스라치게 깜짝 놀라고, 뱀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본능으로 피하는 것 같다.

어쨌든 내가 본 물건은 분명 뱀은 뱀인데, 다치거나 죽어 나자빠진 뱀은 아니고, 뭔가 칭칭 동여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이, 비록 금생에 한 번도 직접 목격한 적은 없지만, 필시 개구리나 두꺼비 먹이사냥 중이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 머리보다 덩치가 훨씬 큰 두꺼비를 아마도 숨죽이기 위해 덥석 물어 목조르기 하는 중이었다. 저 가는 뱀이 저 큰 두꺼비를 어떻게 삼킬까 도저히 믿기지 않을 덩치다.

순간 어떻게 할? 생각하다가, 이내 망설임 없이 곧장 주변을 살펴 작은 돌은 집어 던져 뱀을 맞혔다. 꿈쩍도 하지 않기에, 또 다시 작은 돌 한 개를 집어 던졌다.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러다가 두꺼비의 숨이 끊어지고 말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에서, 이번에는 급한 마음에 조금 굵은 돌을 집어 뱀을 맞혔다. 내가 그 돌을 맞더라도 비명을 지를 정도로 심하게 아플 만한 크기인데, 그 돌에 세게 맞은 뱀이 이번에는 마침내 반응을 나타냈다. 또아리 튼 몸을 스르르 풀더니, 뱀 대가리를 쳐들고 뱀 눈을 부릅뜬 채, 입술 사이로 그 가느다란 불꽃같은 혀를 내밀어 날름거리면서, 누가 무슨 짓을 자기한테 하고 있는 건지 탐색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덜컥 겁이 나면서, 이내 미안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일었다. 속담에 개도 밥 먹을 때는 건들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 무서운 독사가 혼신의 힘을 쏟아 먹이사냥을 한창 하고 있는데, 무엄하게 그것도 커다란 돌팍으로 한두 번도 아니고 무려 세 번씩이나 아프게 때린 것이다. 아아! 차라리 긴 나무토막이라도 찾아 점잖게 건들어 풀도록 할 걸! 주위에 얼른 긴 나무 가지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두꺼비 살리겠다는 다급한 마음에 돌을 집어 든 것인데…….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화가 났으며, 또 얼마나 독이 올랐을? 그러지 않아도 저보다 덩치 큰 두꺼비를 제압하느라 한껏 독을 품어 대고 있었을 텐데. 자기 먹이 사냥을 방해하며 자기한테 무력도발을 감행한 나를 얼마나 원망하며 분노하고 있을?

그런 생각이 뇌리에 스쳐 지나가자, 순간 나는 다른 선택의 여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거의 반사적으로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소리내어 염송하기 시작했다. 뱀의 혀끝에 있다는 뱀의 귀에 또렷이 들리도록 일부러 큰 소리로 염불했다. “참 잘못했다고 미안한 마음으로 사과하면서, 부디 그 뱀이 부처님의 자비광명 가피를 받아, 나한테 대한 원한 및 보복의 감정을 풀고, 또 두꺼비와 맺은 숙세의 원한 감정도 풀어 버리고, 저 살기등등한 추악한 뱀의 몸을 얼른 벗고 삼악도를 영원히 벗어나서 리고득락(離苦得樂)하고, 하루빨리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바라는 회향기도의 염원에서 일심불란으로 쉬지 않고 염불하고 또 계속 염불했다. 뱀의 용서를 빌고, 마음과 영혼으로 뱀과 화해를 하여야 만이, 내가 방금 뱀과 두꺼비 사이의 먹이사슬에 불쑥 침범하여 그들의 인과관계에 끼어든 업장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뱀이 한참동안 정황을 살피더니, 자기가 도저히 감당(대적)하지 못할 인간임을 알아차린 건지, 아님 염불 소리에서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조금이나마 느꼈는지(제발 그러했길, 아아 부처님께 천만번 빌고 또 빌 따름이다), 마침내 체념한 듯 입안에 물어 삼키기 직전의 그 기름진 진수성찬을 눈앞에 놓아주고, 이윽고 미끄러지듯 몸을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바로 길옆의 숲 속으로 스르르 자취를 감추어 사라졌다.

그 뒤로도 염불은 소리내어 계속하면서, 이제는 뱀의 입 속에서 풀려난 두꺼비의 모습에 시선을 모으고 지켜보았다. 이미 독에 치여 목숨이 끊어진 걸까, 아니면 혼쭐나서 정신을 잃고 기절한 상태일? 도대체 두꺼비는 산 기척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지가 다 풀려 뻐드러진 것은 아니니, 아직 목숨까지 끊어진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여하튼 그렇게 줄곧 염불하기를 전후 약 20분 가량 되었을까? 마침내 두꺼비도 기력을 약간 되찾고 정신을 조금 차린 듯, 그러지 않아도 본디 육중한 몸을 힘없이 둔하게 폴짝거리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천적 뱀이 조금 전 몸을 감춰 사라져 간 그 숲 속 방향으로 천천히 옮겨가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마음 속에는, 또 다른 걱정이 나도 모르게 앞서는 것이었다. 두꺼비가 이미 치명상을 입었음에 틀림없을 것 같았는데, 이제 그 둔한 몸으로 그 뱀과 같은 풀섶으로 들어가서, “그 원수 같은 사람 녀석 지나가기만 해라 하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뱀한테 꼼짝없이 다시 걸려든다면 어쩌? 내가 무슨 보살도를 행하겠다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전생에 매한테 쫓겨 품안에 날아든 비둘기를 살려주기 위해, 그 대가로 매한테 비둘기 몸무게와 똑같은 살을 먹거리로 공양하느라, 결국 온 몸을 바쳤다는 보살행을 흉내라도 내려 했단 말인가?

과연 나도 뱀의 먹거리 두꺼비를 살려낸 대가로, 나중에 내 온 몸을 그 뱀한테 공양하여야 하는 건 아닌지? 과연 내가 먹이사슬의 인과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두꺼비를 살려주었다는 뿌듯함보다는, 뱀에 대한 미안함과 사과, 그리고 대상(代償)을 바쳐야 할 인과법칙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아직 해탈을 얻지 못한 심약(心弱)한 중생의 어쩔 수 없는 근심걱정일 수밖에 없었다. 착한 일도 아무나 아무 때나 쉽게 할 수 있는 장밋빛 낭만이 결코 아니구나!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보살의 원력으로 자기희생의 고행과 수행을 갈고 닦아 충분한 복덕력과 법력을 쌓아 갖춘 대 보살의 경지에서나 비로소 가능한 보살이구나! 그 대가로 언제든지 예수보살님 같이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질 각오로, 보현보살님의 십대 행원(行願)을 몸소 실천하는 보살행자가 아니라면, 결코 마음에 품거나 상상조차 하기 힘든 대 고난행(苦難行)이로구나! 나 같은 범부가 언감생심(焉敢生心)?!

아아! 그럴 바에는 그 뱀이 차라리 숲 속에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두꺼비를 잡아먹었더라면……. 그래서 내가 그 인과에 끼어들 기회조차 보이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내가 어설픈 측은지심을 발휘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 그대로를 지관(止觀)의 마음으로 지켜볼 만큼 초연한 정력(定力)과 밝은 지혜를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래서 쌩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의 첫머리에서 아프리카 보어 뱀이 코끼리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옆모습을 마치 커다란 중절모자처럼 묘사하였듯이, 두꺼비 집어삼키는 한국 독사의 옆모습은 또 어떤 물건을 연상시킬지 잠자코 관찰하였더라면…….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다시 주워 담거나 돌이킬 수 없는 현실에서, 그런 가정은 부질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상상 가능한 잠재성은 이런 것이 아닐까? 사실인지 꾸며낸 얘기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언젠가 어디선가 들었던 얘기다. 어떤 두꺼비는 남달리 지극한 모성 본능에서, 암컷이 수정(受精)을 한 뒤 장래 부화할 새끼들한테 충분하고 안전한 영양을 공급할 속셈으로, 자기 몸에 스스로 독을 잔뜩 뿜어 올린 다음, 숙주(宿主)가 될 만한 뱀을 찾아가 그 앞에서 뱀을 잔뜩 약올리면서 도발한다. 그 뱀도 독 있는 두꺼비를 잡아먹으면 자신이 죽는 줄 알고 처음에는 꾹 참고 잘도 피하다가, 어찌나 두꺼비의 도발이 교묘하고 능숙 능란하던지, 개가 똥을 참는다는 식으로, 화 잘 내고 독 잘 뿜는 그 성질 못 이기고, 결국에는 울컥 치미는 다혈질에 잔뜩 독 오른 두꺼비를 한 입에 덜컥 물어 집어삼킨다. 마침내 독사가 두꺼비 독에 치여 죽으면, 어미 두꺼비도 독사 뱃속에서 죽어 썩어지고, 그 두 겹의 뱃속에서 부화한 두꺼비 새끼들이 어미 몸과 독사 몸의 피와 살을 영양으로 자라난다는 자연계 먹이사슬 얘기다.

그런데 혹시라도 저 두꺼비도 뱃속의 알들을 부화시켜 키울 심산으로, 아까 그 뱀을 잔뜩 골려 막 잡아먹히려던 찰나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내가 뱀을 건드려 두꺼비를 풀어 주게 만든 것은, 뱀의 먹이를 빼앗아 뱀한테 원수 척을 진 게 아니라, 오히려 두꺼비 독에 치여 죽을 뱀의 목숨을 마지막 결정적 찰나에 극적으로 기사회생(起死回生)시킨 은혜를 베푼 셈은 아닐까? 하지만 독을 품을 만큼 화(瞋心)를 잘 내어 그 보기 흉한 파충류의 몸을 받은 뱀이, 과연 그걸 알 만큼 현명하고 지혜로울까? 아니야. 어쩌면 뱀은 너무나 영악해서 이 모든 걸 다 알고 남을지도 몰라.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꼬여 아담한테 선악과를 따서 먹도록 만들 만큼 영악하면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한테 자기가 두꺼비 잡아 삼키고 중독사하여 얼른 그 흉측한 껍질 벗고 해탈할 절호의 기회를 망쳤다고 분하고 억울해서 통탄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두꺼비한테는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은혜는 고사하고, 살신성자(殺身成慈)의 모성본능을 가로막아 자손 번창의 인연을 어그러뜨렸다고 도리어 원한감정만 산 것은 아닐까?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느 쪽이 진실이든 간에, 내가 어느 한 쪽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에, 다른 한쪽의 먹거리를 빼앗아 생존권을 위협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처음에 내가 의도했던 대로 두꺼비를 살렸든, 아니면 나도 모르게 뱀을 두꺼비 중독치사(中毒致死)로부터 구해 냈든 간에, 한 생명을 살리는 대신 다른 생명의 배를 곯린 셈이다. 배곯음보다는 목숨 부지가 더 크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반인의 통상 가치 비교에 따른다면, 나의 무모한 행동은 어쨌든 공로가 과실보다 상대적으로 커서, 공과상계(功過相計)하고도 약간의 잉여 공덕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의 자의적인 가치기준에 의한 비교형량일 따름이지, 두꺼비나 뱀의 본능 생각과 자연법칙의 질서 가치는 어떠한지, 신의 섭리를 인간의 어림짐작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게 아니리라. “사람의 셈이 하늘의 셈만큼 정교하지 못하다.(人算不如天算巧)고 했던? 인간의 잣대로 자연을 재려는 생각은, 어쩌면 참으로 어리석고 교만하며 무모한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자연에 내맡기고 지켜보기만 하는 게 오히려 더욱 현명한 자연스런 사고방식일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오래 전부터 뱀과 악연을 맺었다. 대학 초년 친척집에 가서 우연히 사주(蛇酒)를 얻어 마신 적이 있다. 이에 닿으면 이가 상한다고 빨대로 빨아 마신 것 같다. 그 앞인지 뒤인지 잘 생각나지 않는데, 그 무렵 기력이 몹시 쇠약해져 뱀탕이 몸에 좋다는 얘기를 듣고, 누가 권한 것도 아닌데 돈도 없는 형편에, 기숙사에서 낙성대 입구까지 2km남짓 걸어 내려가 몇 차례나 사탕(蛇湯)을 직접 주문해 마신 적도 있다. 뱀장어 곰탕처럼 기름진 뿌연 국물이 기억난다. 그러다가 또 한번은 시골집에 가 있을 때, 뱀을 어떻게 잡았는지 1.8유리소주병에 넣어 술 담아 마신 것도 같다.

특히 기억나는 일은, 대학 3학년 중문학 부전공 시절 여름방학 때 고향 내소사(來蘇寺) 위 청련암(靑蓮庵)에서 한달 간 머물 때 소행이다. 당시 (나는 아니고) 고시 공부하던 대학생이 몇 있었는데, 하루 저녁에는 큰 뱀 한 마리가 암자 바깥벽에 붙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마도 내가 주동이 되었을까, 우리는 함께 그 뱀을 잡아 양철로 된 큰 콩기름 깡통에 넣고서, 산 채로 보관한답시고 뚜껑을 잠그는 대신 입구에 엉성한 돌을 올려놓았다. 근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뱀이 양철 벽을 기어올라 돌틈 사이로 감쪽같이 빠져나가고 없었다. 당시에는 좀 허전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시골에서 집에서 나오는 뱀은 그 집의 업()이라고 해서 잡지 않았던 기억이 있는데, 청련암의 뱀도 어쩌면 암자의 업이었을지 모른다. 전생에 청련암서 불도를 수행하던 스님의 업보 후신(後身)이 아니라고 어떻게 단언하겠는가? 아직 불법인연이 본격 닿기 전의 일이지만, 부처님께서 적어도 나한테 수행도량 내에서 중대한 살업(殺業)은 짓지 못하도록 막아 주신 게 틀림없다. 불행(不幸) 중 다행(多幸)이요 불행(佛幸)이다.

나중에 부처님 법을 공부하면서 연지대사(蓮池大師)의 방생문(放生文)을 읽고 번역하다가 비슷한 사연(지네가 흰 벽에서 경전 설법을 들은 일)을 보고, 보살과 중생의 마음씀 차이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蓮池大師가 한 암자에 의탁해 머무를 때, 어떤 사람이 지네 몇 마리를 잡아 대나무 가지로 그 머리와 꼬리를 활처럼 꿰어 놓았기에, 돈주고 사서 놓아주었다. 나머지는 모두 거의 절반가량 죽었고, 오직 한 마리만 온전히 살아 부리나케 달아났다. 나중에 한 친구와 함께 밤에 앉아 있는데(坐禪인 듯), 벽에 지네가 붙어 있길래 나무자(木尺)로 그 옆을 힘껏 두들겨 도망가도록 내쫓았으나, 달아날 생각이 전혀 없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지대사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접때 놓아준 게 그대 아닌가? 그대가 다시 찾아와 나에게 감사하는 것인? 정말 그렇다면 내가 그대를 위해 설법해 주리니, 그대는 움직이지 말고 내 말을 잘 듣게나.”라고 말한 뒤, 이렇게 일러주었다.

모든 감정 있는 생명(有情)은 오직 마음으로 모든 것을 짓는다네(唯心所造). 마음이 사나우면 호랑이나 이리로 태어나고, 마음이 독하면 뱀이나 전갈로 생겨난다네. 그대도 독한 마음을 없애 버리면, 그 몸뚱아리를 벗어날 수 있다네.”

설법을 마치고 떠나가도록 일렀더니, 쫓아내지 않아도 스스로 천천히 창밖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던 친구가 이 모습을 지켜보고 몹시 놀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는데, 그 때는 융경(隆慶: 나라 穆宗의 연호) 4(서기 1570)이었다.

근래에 대지도론(大智度論)을 봉독(奉讀)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리불(舍利弗)의 전생인연담을 들었다. 옛날에 한 국왕이 독사에 물려 죽으려 하자, 나라 안의 명의를 다 불러 뱀독을 치료하도록 명했다. 근데 의사들은 왕을 문 뱀이 독을 다시 빨아들여야 나을 수 있다고 답하면서, 주술을 부려 그 뱀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장작더미를 쌓아 불을 지르고는, 뱀이 왕한테 내뿜은 독을 말끔히 되빨아들이지 않으면 뱀을 불에 던지겠다고 위협했다. 독사는 혼자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한번 내뿜은 독을 다시 빨아들이는 일은 죽기보다 어렵다고 판단하고, 마음이 정해지자 서슴없이 곧장 스스로 불길에 뛰어들어 타 죽었다. 그 뱀이 바로 사리불인데, 철석같이 굳센 그 마음이 세세생생 이어져, 부처님 당시에도 한번 세인한테 청정하지 못한 음식공양을 받았다고 꼬집은 부처님의 힐난을 전해 듣고는, 다시는 남의 초청을 받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위 인연담은 사리불의 굳센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든 것이지만, 사리불 같은 대덕도 전생에 독사가 되었었고, 또 그 업보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뒤에도 미세한 성냄(瞋恚)의 습기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중생들의 수행에 중요한 귀감이 된다. 근데 내 자신을 돌이켜 보면, 체력이나 정신상 부하(負荷)가 많이 걸려 감당하기 힘든 경우 부아(無明火, 성냄)가 불끈 치솟는 걸 곧잘 느꼈다. 능력 이상으로 의욕을 부리면 분노와 진에의 원인이 됨을 깨달았다. 그래서 맹자도 일찍이 마음 수양은 적은 욕심보다 좋은 게 없다.(養心莫善於寡欲)고 했다. 노자와 불경에도 수행의 핵심으로 소욕지족(少欲知足)이 자주 나온다. 진정한 보살의 홍원(弘願)은 지혜와 복덕 수행으로 성냄을 완전히 끊고 욕심을 자비로 승화시킨 불퇴전의 무생법인(無生法忍)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영어속담에도 사실은 소설보다 기이한 법.(Truth is stranger than fiction.)이라고 하더니. 2005년 봄에 충청북도 어느 시에 사는 어떤 용달차 운전사 아저씨가 자기 누리집(인터넷 홈페이지) 무슨 새 육아일기를 연재해 화제가 되고, 한겨레신문에서도 사진을 옮겨 실어 중계 보도하여 알게 된 사실이다.

어느 날 용달차 주인은 자기 트럭 운전석 발판에 새 한 쌍이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품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모양이다. 이를 본 차 주인은, 차 발판에 알을 품은 새가 알을 까 새끼를 다 키워 둥지를 떠날 때까지 기다리면서 나아가 잘 보살피고 보호해 줄 마음으로, 생계수단인 차의 운행을 체념하고 보살행을 시작한 듯하다. 마치 그 옛날 어떤 선인(仙人)이 깊은 선정에 오래 든 사이, 새 한 마리가 나무인 줄 알고 그 선인 품에 날아들어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는데, 선정에서 깨어나 그 모습을 보고는, 그 새가 새끼를 길러 스스로 둥지를 떠나갈 때까지 기다릴 자비심으로 다시 선정에 들어갔다는 전생 인연담이 절로 떠오르는 소설 같은 얘기다.

나는 한겨레신문의 첫 번째 사진 보도는 못 보고, 두 번째 보도로 어미 새가 알을 깐 뒤, 마치 흥부네 집 처마 밑 제비둥지 속의 새끼제비를 연상시키듯이, 새끼들의 노오란 주둥이 속으로 벌레를 물어다 먹이는 사진이 실린 것을 처음 보고서는, 참으로 희한하고 불가사의한 신비가 첨단 물질문명의 인간세상에서도 펼쳐지는구나 하고 감탄과 경이를 감추지 못했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 : 좋은 일에는 마장이 많이 낀다.)라던가, 언진도단(言盡道斷 : 말 끝나기가 무섭게 도도 끊어진다.)이라던가? 다시 한 달쯤 뒤에 이번에는 위아래로 사진이 두 장 나란히 실렸는데, 아래에는 텅 빈 둥지 곁에 허탈하게 서 있는 슬픈 어미 새 모습과, 위에는 한 마리의 배부른 뱀이 유유히 기어가는 모습이 선명한 대조를 보이는 것이었다. 어미 새가 먹이사냥을 나간 사이, 언제부터 틈을 노리고 있었을지 모를 천적인 뱀이 어느새 다가와, 날지 못하는 어린 새들을 단숨에 감쪽같이 몽땅 집어삼킨 게 분명했다. 그리고 얼마나 배가 불렀던지, 포식한 뱀은 한동안 그 자리를 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또아리를 틀고 있다가, 사람이 나타나자 그때서야 비로소 굼뜬 몸을 움직여 피해 달아나는 모습이 문명의 눈조리개에 붙잡혀 그 소행이 탄로(綻露)한 것이었다. 그 새들한테 둥지 자리를 당연히 무상으로 빌려주고, 그 보호자 내지 후견인까지 자임했던 그 차 주인도, 어쩌면 어미 새만큼이나 허탈하면서도 체념했는지, 그냥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마음만 먹으면 때려죽이거나 잡아먹을 수도 있었던 그 살생마(殺生魔) 뱀을 제 갈길 가도록 하릴없이 놓아주었다는 것이다.

그 뱀이 무슨 죄입니까? 자연계의 먹이사슬이 본래 그러한 것을!

그 차 주인이 체념하고 탄식하며 마지막으로 읊조린 그 말 한 마디가 심오한 자연의 신비에 기나긴 여운을 남기며, 보는 이의 심금을 미묘하게 울리고 있었으리라. 그 사진과 글을 본 많은 일반사람들은 어쩌면 어미 새나 차 주인과 함께 소리 없이 눈시울을 붉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와 같이 부처님 법을 배우고 수행하는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은 아마도 조금 다른 시각에서, 먹고 먹히는 중생들의 원한 업장 관계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돌고 도는 생사윤회의 고통스런 굴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아울러 언제나 또 어떻게 해야 다함께 그 윤회고해를 벗어나 생사해탈의 열반언덕에 오를 수 있을까 고뇌하며 기도 염원을 자연스레 하게 되는 것 같다.

다른 한편 일말의 아쉬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나 혼자만의 구슬픈 감상(感傷)일까?

만일 그 차 주인이 그 사실을 동시에 생중계 하는 방식으로 미리 공개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차분히 개인 차원의 육조일지(育鳥日誌)로 기록만 해 두었다가, 나중에 새들이 다 커서 날아간 뒤에 비로소 녹화중계로 공개했더라면, 혹시라도 악마의 시기와 농간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따라서 살생마가 나타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아, 새끼 새들이 무사히 자라 허공의 품으로 날아갈 수 있지 않았을?

악마란 다른 게 아니라, 인간의 사사로운 욕망감정의 틈새를 엿보다가, 어떻게 알고 감쪽같이 외수없이 끼어들어 헤살을 부리는 장애를 가리킨다. 그 욕망감정에는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 못지않게, 명예를 바라는 마음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착한 의도를 온전히 성취하기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세심하고 주도면밀한 배려가 필요하고, 아니 역설로 그러한 인위적인 의도나 마음을 완전히 놓아 버리고 글자 그대로 무심(無心)하게 자연에 내맡기는 것이 최상의 도()인지도 모른다. 허나 그러기에는 우리 인간 문명과 사회가 이미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부터 너무도 멀리 이탈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심하고 착한 덕성(德性)이 그 차선책으로나마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간이 분류한 생물계통도에서 보면, 먹이사슬의 맨 위층에서 다른 고등동물을 잡아먹는 동물들을 맹수(猛獸) 또는 맹금(猛禽)류로 부르고, 독물질을 내뿜어 다른 동물을 죽이는 동물까지 합쳐 맹독류(猛毒類)로 부른다. 그런데 자기 몸과 특히 정력에 좋다면, 굼벵이나 달팽이, 지렁이부터 독사나 곰쓸개 등 맹독류까지 물불 안 가리고 잡아먹는 일부 사람들은, 과연 무슨 동물로 분류해야 할? 언제부턴가 우리 인류의 상당수는 더 이상 영장류(靈長類)이길 스스로 포기하고, 흉악하고 혐오스런 맹독류(猛毒類)를 자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계간 불교잡지 ?光輪?, 2006년 봄호(통권 제17)에 싣기로 보냈는데, 편집과 인쇄를 마친 다음 갑자기 바뀐 발행자의 독단결정으로 배포하지 않고 결국 폐기 처분한 인연이 있는 원고다. 그 글을 조금 수정 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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