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사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논쟁이 끊이지 않는 수행방법론상의 핵심문제에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자리잡고 있다. 나는 불교학자가 아니라 교학상 두 논지를 깊이 파헤쳐 보지 않았고, 단지 자신의 수행관점에서 어렴풋이 나한테는 ‘돈오점수’가 알맞겠다고 여겨만 왔다. 그런데 이번에 ‘채식하는 마음’ 글을 정리하는 인연으로, 불현듯 둘의 차이와 공통점이 채식 실행방법의 비유로써 내 마음에 또렷이 떠올랐다. 그리고 사실은 적어도 채식에 관한 한, 나는 ‘돈오돈수’의 길을 걷고 있는 줄 알아차렸다. 어쨌든 이제야 비로소 내 나름대로 문득 또렷이 깨닫게 되어 내심 무척이나 기뻤다. 그것도 채식 20년을 맞이하며 그간 서원을 매듭지으려는 수행노력의 결실로 다가와 더욱 감회가 깊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 마디로 “대동소이(大同小異)”다. 육식이 몸과 마음의 건강에 해롭고 수행에 커다란 마장이 된다는 걸 홀연 깨달았다면, 이는 바로 “돈오(頓悟)”에 해당한다. 이는 두 주장에 공통한 깨달음이라 별 문제가 없다. 깨달은 다음에 수행방법상 실천궁행의 의지결단이 “돈수(頓修)”와 “점수(漸修)”의 근본 차이로 나타난다.
채식을 하고 싶은 염원이 일었으면, 무조건 당장 완전 채식을 결연히 시작하고, 일체 고기를 완전히 끊는 대장부의 결단실행이 바로 “돈수(頓修)”다. 즉, 단박에 깨달음과 동시에 단박에 실천수행에 몰입해 전력투구로 일로매진(一路邁進)하는 것이 “돈오돈수”다.
반면, 자신의 복덕이 모자라고 업장이 두터워, 우선 당장 주위 여건이 너무 어려워, 단박에 완전채식하기에는 저항과 갈등 시련이 너무나 엄청 커서, 자신의 의지와 정신력으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마지못해 상황을 고려하고 여건과 타협하며 조금씩 고기를 끊어 가며 점차 채식을 확대해 가겠다는 수행법이 바로 “점수(漸修)”다. 즉, 단박에 깨달았지만 상황여건을 조금씩 바꿔가면서 점차 채식수행을 성취해 가는 것이 “돈오점수”다.
불경의 기록에 따르면, 석가모니부처님도 처음에는 여건상 제자들한테 ‘삼정육(三淨肉)’이니 ‘구정육(九淨肉)’ 등의 이름으로 방편 육식을 허용했다고 한다. 임기응변의 선방편이랄까? 그러다가 수행이 무르익으면서 점차 고기를 완전히 멀리하고 완전채식에 이르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채식의 점수’에 해당하겠다. 그러다가 열반에 이르러 제자들한테 ‘가르침(法)에 의지하라’고 유교(遺敎)를 내리면서, 앞으로는 일체의 고기를 모두 끊으라고 당부하셨다고 한다. 스승이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아 수행자들을 위해 엄격한 계율을 주문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이는 ‘채식의 돈수’를 강력히 권청하는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다.
그러나 불도(佛道)의 수행으로 본다면, 오히려 ‘점수’와 ‘돈수’가 정반대로 맞바뀐 듯한 느낌마저 든다. 부처님 생존 당시에는 성문제자를 중심으로 용맹정진의 ‘돈수’가 이루어지다가, 열반 후 대승불교의 출현과 함께 수행자 자신의 성불 못지 않게 중생제도의 보살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점수’쪽으로 점차 방향을 돌린 게 아닌가 여겨지기 때문이다.
몇 년 전 KBS 일요스페셜에서도 방영한 적이 있는 ‘무소유의 삶, 거리의 수행자’를 예로 들어보자. 독일 쾰른대학 교정에서 노숙하며 수행하는 페터 노이야르처럼, 집 없이 돈 없이 여자 없이 탁발걸식으로 살아가며 수행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망설임 없이 우선 당장 시작하고 보아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돈수’다. 이렇듯 먼저 사고치고 나중에 고난과 시련으로 수습해 간다는 정신으로 수행하는 게 “돈오돈수”다. 이는 상근기 대심(大心)장부(丈夫)가 아니면 어려운 일! 그러나 그도 음식에서는 처음에는 육식도 조금씩 하다가, 점차 완전 채식하고 완전 두타행을 실천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과정 부분은 “돈오점수”라고 할 수 있다.
일반 범부중생이 “채식해 보고 싶다”고 마음을 내보는 것 자체도 이미 훌륭한 선근공덕이다. 이만해도 돈오요, 적어도 해오(解悟)는 될 것이다. 여기다 직접 채식을 실행에 옮겨 보는 것은 더 훌륭한 선근공덕으로, 이는 돈오점수라 하겠다. 이 점수가 제대로 꾸준히만 이어지면, 결국에는 육식을 완전히 끊고 순수 채식의 경지까지 이르게 될 테니, 시간이 좀 걸리고 변화가 느리다는 뜻에서 “점수”라 부른다. 사실 계율을 지켜 수행하다 보면, 저절로 고기와 비린내가 싫어지고 멀어지게 되니, 채식수행의 원만한 완성경지에 점차 이르게 된다.
반면 마음먹은 김에 단박에 고기 다 끊고 완전 채식을 실행하다 보면, 나처럼 무거운 업장과 엷은 복덕 탓으로, 온갖 고난과 시련의 십자가, 게다가 악성빈혈 등 병마의 시험까지 총공격을 받아 정신없이 휘청거릴 수도 있다. 초기에는 당분간 “채식” 수행 자체에 의미가 있을 뿐, “채식”의 본질의미와 가치까지 증명 체득하는 경지는 아직 멀었다. 이 “돈수(頓修)”도 굳센 의지와 정신력으로 한동안 계속 지탱하여, 어느 정도 터전을 다지고 안정된 기반을 확립해야, 비로소 본 궤도에 진입하게 된다. 문제는 사람의 나약한 의지와 온갖 주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작심삼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 흔히, 술은 절제가 사실상 불가능하니, 아예 뚝 끊어야 한다는 얘기도, 바로 ‘돈수’에 해당하겠다.
만약 성철스님의 ‘돈오돈수’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서로 날 세우고 목소리 높여 비판하고 비난하며 왈가왈부할 나위가 없겠다. 사실 ‘오(悟)’는 깨달음이고, ‘수(修)’는 닦음이니, 둘은 도를 원만히 이루어 가는 과정일 뿐, 그 자체가 ‘성불’은 아니다. ‘돈수’를 ‘돈오’와 동시에 ‘성불’하는 걸로 오해하여 논란의 불씨가 되지 않을까? 단박에 깨닫는 ‘돈오’와 동시에 단박에 닦기 시작하는 ‘돈수’가 계속 이어져 원만히 무르익으면 득도 성불한다고 이해하는 게 어색하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돈오돈수’나 ‘돈오점수’는 실질상 차이가 없고, 약간의 관점과 말 표현의 차이일 따름이다.
불교의 일반 수행법에 관하여서도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득도성불의 목표에 이르는 수행법문은 사통팔달로 팔만사천 법문에 이르러, 가히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수준에 이른다. 하나가 일체요, 무가 무한과 서로 통하는 진리의 역설성은 불교의 반야공 법문에 여실히 나타난다. 그러나 어떠한 수행법문이라도, 먼저 깨닫고 난 다음 진실한 수행에 들어선다는 ‘선오후수(先悟後修)’를 바탕으로 하며, 깨달음 없이 맹신으로 덤비는 것은 심봉사 개천 건너기보다 훨씬 위험천만한 어리석음일 뿐이다.
흔히 ‘선오(先悟)’의 ‘오(悟)’가 ‘증오(證悟)’가 아니라 ‘해오(解悟)’라고 이해하지만, ‘돈수(頓修)’건 ‘점수(漸修)’건 똑같이 ‘돈오’를 앞세우고 있는 점이 공통이고, 나중에 닦는 방법과 과정만 ‘돈(頓)’인지 ‘점(漸)’인지 갈리기 때문에 ‘후수(後修)’인 점도 공통이다. 다만 ‘후수’의 실제에서 둘은 구체로 달라진다.
‘돈수’는 좋다고 깨달은 채식결심을 단박 실천으로 단행하듯, 깨달음을 성불 향한 실제수행에 옮겨 석가모니의 6년 고행처럼 불퇴전의 의지와 기개로 용맹정진 하는 즉각성을 띤다. 반면, ‘점수’는 채식을 단박에 완전히 실행하기 어려워 조금씩 고기를 줄여가 마침내 완전채식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도록 ‘연착륙’을 꾀하듯이, 육도만행의 착한 업으로 자신의 업장을 점차 녹여 가고 복덕을 크게 쌓아 가면서, 중생도 이롭게 하고 자신도 이롭게 하는 보살행을 통해 느리고 기나긴 성불의 여행길을 택한다.
따라서 돈오돈수(頓悟頓修)건 돈오점수(頓悟漸修)건, 똑같이 “돈오”로 출발하고, 수행의 과정과 방법이 조금 다르지만, 궁극에 수행의 완성도 똑같이 귀일(歸一)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비록 ‘돈수’가 ‘점수’보다 훨씬 훌륭하고 성불을 앞당긴다고 할지라도, ‘돈수’한다고 해서 당장 즉시 단박에 성불하는 ‘입지성불’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본래 부처’라는 대승법문의 차원에서는, ‘돈수’건 ‘점수’건 간에 무슨 ‘닦음’이 필요할까만, 그렇다고 그 말(글자)에 끄달려 정말로 사바고해 현실에서 ‘닦음(수행)’을 내팽개친다면, 이는 대승 반야공 법문을 한쪽으로 치우쳐 오해해 무기공(無記空: 허무주의, 니힐리즘)에 빠진 사견(邪見)일 뿐이다.
중생의 복덕과 업장이 천차만별이니, 각자 근기와 인연 따라 가장 알맞은 수행법문을 달리 택할 수 있는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자기 수행법이 최고제일이고 모든 중생한테 절대로 맞고 옳은 길이며, 남의 수행법은 하찮고 보잘것없으며 심지어 틀리고 나쁜 짓이라고 비판하는, 독선적 배타적 논변이나 주장을 굳이 강변할 필요나 이유가 전혀 없다. 종교간 동질성과 차이점을 인정하지 못하여 이웃 종교를 차별하는 좁은 소견과 마찬가지로, 법문간 동질성과 차이점을 인정하지 못하여 이웃 법문을 차별하는 좁은 소견도, 똑같이 어리석은 미신(迷信)이요 사견(邪見)임에 틀림없다.
논어에 보면, 공자가 “아는 게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게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수행의 차원을 밝힌 명언이 있다. 채식도 마찬가지다. 채식이 저절로 좋아서 몸과 마음에 맞아서 기뻐 즐기는 경지가 최고다.
근데 오탁악세 말법 중에서도 말세이다 보니, 알량한 알음알이 분별 지식정보로 따지고 잔머리 굴려 이해득실을 견주어 본 다음에, 채식이 육식보다 좋은 줄을 머리로 논리로 이해하려는 게 현대의 교육받은 지식인들이다. 이들을 합리적으로 납득(解悟)시켜 채식이 좋은 줄 알게 하기 위하여, 부득이 이성과 지성의 논리로 장황한 해석과 설명을 부연하는 것이다. 확실히만 알아 놓으면, 언젠가 시절인연이 무르익으면 채식을 하고 싶다고 저절로 느끼고, 또 실행해 보려고 꾀할 것이기 때문이다. 타율의 해오(解悟)를 통해 장래 “점수(漸修)” 인연의 씨앗을 뿌리는 조그만 행원(行願)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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