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전에 어느 TV에서인지 기록 영상물을 보았다. 인도에서 순하기 그지없는 채식동물 코끼리가 인가를 습격해 집을 부수고 사람을 살상하는데, 왜 그런지 취재한 기록영상(다큐멘터리)이었다. 더러 길들여진 가축 코끼리가 발정기 때 난폭하게 굴어 조련사를 다치게 하거나 죽게 까지 한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늑대나 사자처럼 먹이감으로 가축을 해치기 위해 민가를 사냥하는 것도 아닐 텐데, 풀만 먹는 코끼리가 집단으로 동네를 그것도 밤중에 습격해 쑥대밭을 만들고 많은 인명피해까지 낸다는 것이다.
그 주요원인은 사람들이 곡물경작을 위해 들과 산을 개간하면서, 코끼리들이 살 터전을 야금야금 빼앗겨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그 순하디 순한 식물성들이 생존권 투쟁으로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유력했다. 종(種)간의 생존경쟁이 치열한 자연계의 한 모습을 생생히 지켜보면서, 마음속에는 공감과 우려가 함께 어우러졌다.
코끼리 못지않게 순하고 착하며 우직하기까지 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동반자인 소까지 마침내 주인한테 반역의 기치를 높이 치켜세워, 전 세계 온 인류를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은 작금의 현실은 새삼 말할 나위도 없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개도 밥 먹을 때는 안 건드린다는데, 생존의 제1 필수요건인 먹이를 가지고 생명 자체를 위협하니, 소들도 화가 안 치밀 수 있겠는가? 주식인 풀 대신 알곡을 주지 않나, 온갖 화학약품으로 전신을 중독 시키지 않나, 마침내 동물성 사료, 그것도 동족의 뼈와 살까지 먹으라고 강요하였으니……. 말 못하는 소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달리 원한을 보복할 수도 없으니, 마치 자살폭탄 테러처럼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미치게 한 다음, 자기 고기를 먹을 인류한테 광우병이란 ‘극독(劇毒)’병균을 전염시키기로 전 우족(牛族)이 공동으로 집단 모의하여, 자살 병독(病毒)테러를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집안에는 소와 관련한 특이한 불문의 전통이 있다. 조상님들 제사상에 소고기를 절대 올리지 않는다는 예법이다. 사연인 즉, 고조부께서 고창 해리 사실 적에 장터에 소를 팔러 가셨다가 못 팔고 간 길을 되돌아오는데, 해가 저물어 숲이 우거진 산 속에서 호랑이를 만나셨다고 한다. 배고픈 호랑이는 당연히 소를 먹이감으로 사냥하려 꾀했고, 갑자기 봉변을 당한 고조부님께서는 깜짝 놀라 두려움에 황급히 혼자서 몰래 도망쳐 오셨단다. 물론 소는 호랑이한테 희생(犧牲: 祭物)으로 바친 셈 쳤으니 당연히 죽은 줄로만 알고, 집에 무사히 돌아오신 고조부님께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셨다.
그런데 이게 무슨 기적이란 말인가? 뜻밖에도 새벽녘에 집채만한 소가 피투성이가 된 채 집안에 들어섰는데, 자기를 버리고 달아난 주인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뿔로 들이받아, 고조부님께서는 그만 즉사하셨다는 것이다. 소가 호랑이를 만나 한판 싸우게 된 마당에서는, 주인인 사람이 소 뒷잔등을 손으로 토닥토닥 쳐주면서 ‘잘한다, 잘 싸운다.’라고 용기를 북돋워 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소도 신이 나고 힘이 나서 호랑이와 한판 승부를 벌일 만하다고 한다. 그런데 전의(戰意)와 사기(士氣)를 고무시켜 주기는커녕, 소는 죽든지 말든지 자기 혼자만 도망친 주인한테, 소는 커다란 배신감을 느끼고 사력을 다해 싸워 이긴 뒤, 그 분노로 원한을 갚은 셈이다.
이쯤 되면, 소라고 영혼도 없고 의식도 지각도 없는 미물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이후로 우리 집안에서는 조상님 제사상에 절대로 소고기를 올리지 못하도록 엄격한 금기전통이 섰다.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조선에 널리 퍼졌지만, 우리 광산(光山)김씨 문중에는 독특한 예법이 따로 전승한다고 하던데, 그 가운데서도 다시 우리 집안은 또 다른 특이한 예법전통이 덧붙여진 셈이다.
우리 속담과 민간전설에 “소가 된 게으름뱅이”라는 민담이 전해오고, 세계 많은 민족전설에도 비슷한 류의 이야기가 많다. 지금 말 못하는 소라고 하지만, 전생에 우리 조상이나 친척 내지 동족이 아니었다고 과연 누가 장담하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또 우리 자신이 죽어 다음 생에 마소나 개돼지나 닭오리가 되지 말라는 법은 누가 보장하고, 과연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가?
공자는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남한테도 베풀지(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너희는 너희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먼저 남한테 대접하라.”고 가르쳤다. 이 두 명제는 동서고금의 모든 법규범과 도덕률에 공통하는 최대공약수 같은 기본원리로서, 이른바 그 유명한 ‘황금률(黃金律)’이다. 앞에가 법의 기본원리인 ‘소극적 황금률’이고, 뒤에는 도덕의 기본원리인 ‘적극적 황금률’이다. 물론 역사적 구체 맥락에서 엄격히 좁게 볼 경우, 여기서 ‘남’은 ‘사람’을 전제로 한 개념범주다. 이것은 편협한 배타적 인본주의(人本主義)다. 이제 동물을 포함한 중생평등의 차원으로 확대하여,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보편적 ‘생본주의(生本主義)’로 승화시켜야 한다.
작년 초부터 조류독감이 극성을 부려 수많은 닭과 오리가 무자비하게 죽어 갔다. 조류독감에 걸려 죽은 게 아니라, 조류독감의 확산전염을 예방하겠다고 전전긍긍하는 인간들의 독감(毒感: 독살스런 감정)에 걸려 죽임을 당했다. 조류독감 발병지역 반경 몇km 이내의 닭과 오리를 무차별 몽땅 생매장한 것이다. 그 수가 자그마치 830만 마리 가량 된다고 한다. 이는 세계 제2차대전 때 나치에 학살당한 유태인 600만명보다도 훨씬 많은 숫자다. (또 한 가지 안타깝고 슬픈 일은, 현재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가 극심해진 우리나라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약 860만명에 이르는 ‘야만의 시대’라는 현실이다.) 우리 역사상 전란의 와중에 산 채로 처형당한 사람의 총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이보다는 적지 않지 않을까?
인류가 잡아먹는 동물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천문학적인 수다. 유럽연합(EU)에서만 해마다 3억6천 마리의 소․돼지․양 등의 가축과 수십억 마리의 가금류를 도살한다고 한다.(한겨레신문, 2008년 9월 20일 토요일 19쪽) 우리나라에서는 닭만도 하루 평균 120만 마리, 줄잡아 한 해 4억3천 마리가 먹혀진다고 한다.(한겨레신문, 2008년 10월 17일 금요일 17쪽) 그렇다면 미국과 아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에서 도살하는 가축은 얼마나 되고, 가축 이외의 야생동물이나 물고기 종류는 또한 얼마나 될 것인가? 사람 1인당 한해 잡아먹는 동물의 목숨은 몇이나 될까? 해마다 이러할진대, 한 평생 잡아먹는 생명은 또 얼마나 될까? 과연 가축과 짐승들은 사람한테 잡아먹히기 위해 생겨나는 걸까?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황금률(黃金律)처럼, 사람과 닭오리의 입장을 한번 바꿔 놓고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닭오리나 마소 개돼지는 만물의 영장 인간과 달리 영성이 없는 걸까?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 조상님들의 영혼이 전생의 악업으로 가축으로 생겨나 우리 앞에 와 있는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래도 그 생명을 빼앗고 그 고기를 맛있게 씹어 먹을 수 있을까? 내가 뿜은 독은 먼저 내 입을 중독 시키고, 하늘을 향해 쏜 화살은 솟아오르기를 다하면, 방향을 180도 바꿔 내 얼굴에 떨어진다.
우리가 그렇게 생매장한 닭오리의 시체에서 나온 유독물질이 지하수를 오염시켜 식수로 마실 수 없다는 보도가 나온 것은 매장한 지 한 달도 채 못 되어서이다. 830만 생령(生靈)에 사무친 원한감정의 복수이며, 인간의 자업자득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옛 속담에도 “한 아낙이 원한을 품으면 (음력) 오뉴월에도 서리가 날린다(一婦含怨, 六月飛霜.)”고 했다. 억울하게 질식사한 8백만 남짓 생명의 원한과 독기가 하늘에 사무치면, 과연 어떤 재앙으로 돌아올지 그 어느 누가 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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