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미엄 세기말을 무사히 넘기나 싶었는데, 아직도 말세론은 수그러들 낌새조차 없이 치성한 가운데, 최근 들어 유난히 광풍(狂風)의 회오리가 거세다. 미친 소 파동이 그렇고, 독선적 맹신주의자의 미친 말 파동이 그렇다. 믿음이 자신의 내면 안에서 자리할 때는, 미치든 달치든 어느 누구도 거리낄 바 없는 절대 양심의 자유다. 영혼의 믿음 속에서 자기 믿음만이 최고 유일의 절대라고 믿는 건 신앙의 본질속성상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러나 그 믿음이 바깥으로 남을 향해 드러날 때는, 인간 사회성의 본질상 제약(制約)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개개인의 절대자유가 공존(共存, 共尊)하기 위해서 평등의 원리가 들어서는 까닭이다. 그래서 황금률과 이른바 ‘똘레랑스’라는 관용이 동서고금 모든 윤리도덕 및 법의 최대공약수로 공통 기본원리가 된다. 그게 사회의 약속(約束)으로서 규범이다.
종교신앙 조직도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자체 논리의 강화를 통해 존립의 독자성을 확보해 가려는 속성을 띠기 마련이다. 그런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특정 교리가 두드러지게 고양(高揚)하여 항진(亢進)할 수 있고, 구성원의 신앙심과 결속력을 높이기 위해 지나치게 극단으로 치달을 위험성이 적지 않다. 이점에서 정치이데올로기나 흡사한 성격을 지니며, 그 광란의 폐단은 인류역사가 참담하게 증명하고 있다.
최근 우리사회에서도 일부 특정종교인들의 ‘종교에 관한 언동’은 종교의 본질을 크게 벗어나, 사회의 평화공존을 위협할 만한 위험수준을 넘어서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자기네 종교를 믿는 나라는 다 잘살고, 다른 종교를 믿는 나라는 모두 못산다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21세기 첨단과학시대 광명 천지에 신앙이란 미명으로 뻔뻔스럽게도 버젓이 지껄인다. 2008년 1학기 학내 ‘종교간대화학회’의 행사에 초청 받아 온 어느 목사라는 분이 지정주제와 관계없이 그런 말을 불쑥 지껄이기에, 여기는 설교하는 교회가 아니라고 공개로 논박하려다가, 초청주최기관의 체면을 생각해서 주인의 예의로 용인(容忍)했다. 근데 이제 나라밖까지 나가서 공개로 떠들고 다니는 자가 있다는 보도를 보니, 어느 한두 사람의 우발적 실언은 아닌 것 같다. 이건 나라 망신이고, 그 교주(神) 망신이다.
그들이 말하는 ‘잘살고 못살고’의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경제적 군사적 강대국을 말하는가? ‘일본’은 유일한 예외라고 말하더라. 그럼 대만이나 싱가폴은? 북경올림픽으로 강성대국의 기지개를 켠 뒤, 벌써 미화 보유고가 2조달러를 넘어 단연 세계 제1위를 차지한 중국은 어떤가? 우리나라도 그 종교가 이만큼 발전시켰는가? YS때 IMF도 그 당연한 성과인가? 분명한 건, 세계 잘사는 선진국들의 그 종교는 우리나라처럼 그렇게 편협한 오만과 독선의 그림자도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다문화(多文化)를 껴안는 ‘똘레랑스’가 두드러진단다.
그리고 현장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경제상의 부와 행복지수는 그리 비례하지 않는다 게 정설이다. 세계 최빈국에 속하는 방글라데시나 부탄은 오히려 행복지수가 최고수준이라고 하지 않은가? 요즘 흔히 말하는 ‘부동산 거품경제’ 뿐만 아니라, 물질경제 자체도 종교상으론 물거품이나 뜬구름 같은 덧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육신생명’의 인생 자체를 한바탕 봄꿈처럼 허망한 놀음이라고 설파하는 게, 모든 종교의 공통 가르침이고 모든 성현과 철인들의 공통 깨달음일진대, 하물며 그 몸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인 물질경제야 오죽하겠는가?
근데도 청빈(淸貧)으로 정신상 영혼상 부유함을 추구해야 할 종교의 성직자가 돈과 물질경제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워, 잘사는 나라를 치켜세우고 종교간 갈등과 반목을 조장한단 말인가? 그 종교의 경전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오는 부자한테, “먼저 네가 가진 재산을 전부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따라 오라”고 말씀하셨다. “니 재산 전부 나한테 갖다 바쳐라. 내가 가난한 이들한테 나눠줄 테니.”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다. 그뿐인가? 광야에서 40일간 악마의 시험을 받을 때, 빵과 명예와 권력의 유혹을 모두 단호히 물리치고, 오로지 영혼의 생명을 내세웠다.
근데 말세의 일부 자칭 ‘예수님 제자’라는 분들은 정신(精神)이 아닌 물신(物神)주의에 젖어, 오로지 신도수와 교세의 확장을 위해 경전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치닫고 있으니, 정녕 말세의 징조란 말인가? 물론 ‘예수님의 뽑힌 12제자(사도)’ 가운데는, 돈을 밝히는 데 눈이 멀어 지 스승님까지 은전 몇 닢에 팔아넘긴 자도 있었다. 지금 ‘예수님 이름’을 팔아 헌금이란 명목으로 황금을 긁어모아 ‘더 많이 더 높이’를 꾀해 세계적 조직과 부를 자랑하려는 극소수 ‘교직자’들도, 바로 ‘스승님 팔아먹은 제자’의 정통 직계후예들이란 말인가? 그들 자신도 스스로 잘 알겠지만, ‘스승님 팔아먹은 제자’는 곧바로 ‘피 값’을 스스로 톡톡히 치렀음을 기억해야 한다.
더구나 선량한 신도들의 헌금으로 모인 교회재산을 사유화하여 세습상속하면서 온갖 다툼과 추문으로 얼룩진 자들은, 무신론자인 공산주의를 비판하거나, 특히 권력의 부자세습으로 악명 높은 북한을 비난할 자격조차 없는 파렴치한들이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미리 예언을 남겨 놓으셨지 않은가? 말세가 되면 자칭 ‘재림자’와 ‘제자’가 득실거릴 테지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는다고 외치는 것만으로 천당에 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이 모두 사람 정신이 줏대 없이 지나치게 격앙해 미치는 광신병(狂信病)일 따름이다.
‘광우병’도 사실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이 자기네만 하늘(자연)의 선택을 받은 최고 제일의 절대 존재라는 독선적 만물영장론에 우쭐하여, 다른 생명의 영혼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여 빚어진 ‘물질 먹거리’론의 당연한 결과다. 위의 ‘잘사는 나라’ 기준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잘 먹는 사람(삶)’ 기준을 물질상의 먹거리 맛과 영양으로 잡은 것이다. 누가 생명을 죽이는 데 더 용감하고 힘센가? 순전히 ‘무식이 용감’ 시합이다. 그 고기와 피를 먹고 힘을 더 불끈 쓰는 자가 힘 있고 용감하여 다른 사람을 호령하는, 비열한 야만적 권력투쟁에서 비롯했다. 그들한테는 영혼의 자비와 정신의 지혜가 나약하고 소심한 겁쟁이의 상징이요 대명사며, 심지어 노예근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인구가 늘어나고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더 맛있는 먹거리를 더 싼값에 더 많이 팔아 돈 많이 벌고, 더 많이 사 먹어 부와 힘을 자랑하자고, 쌍방이 서로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무한경쟁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 시너지 효과가 극점에 이르러, 마침내 광우병을 만들어 낸 것이다. 어디 소뿐이랴? 닭오리는 미쳐 조류독감으로 폐사하며, 사람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집단 생매장을 원한다고 퍼덕이지 않는가? 돼지는 미친 나머지 구제역(口蹄疫)에 걸려 집단 자살의 길을 택한다.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미니 애완동물들은 주인과 동침하며 동고동락하는 호강에 겨운 나머지, 마침내 미쳐 SARS를 퍼뜨렸다.
인간의 탐욕과 극성에 시달리다 못해 미친 ‘생명’이 어디 한둘이랴? 주위의 조연(助緣, 助演)들이 모두 미쳐 날뛰는 마당에, 그 한가운데 선 주인(主因, 主人)만 멀쩡할 수가 있겠는가? 실은 주인 격인 사람의 마음이 미치니, 주위 생명도 감염 당한 셈이다. 심신(心身)과 영육(靈肉)이 함께 미치고 주객이 모두 미쳐 날뛰는, 온통 ‘광란(狂亂)의 축제’ 한마당이다. 더 무엇을 바라고, 또 누굴 탓하랴? ‘광우병’이나 ‘광신병(狂信病)’이나 모두 사람 마음이 미친 ‘광심병(狂心病)’에서 비롯할 따름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요, 만법유식(萬法唯識)인 걸!
일찍이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한테 먼저 대접하라.(Do as you would be done by.)”고 가르치셨다. 또 공자님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짓은 남한테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인류사회 모든 규범의 공통기본원리인 황금률이다. 자기 종교가 존중받고 싶으면 이웃 종교도 존중해야 하고, 자기 신앙이 능멸 당하기 싫으면 남의 신앙도 모멸해선 안된다. 나아가 황금률을 인류와 다른 동물들 사이에도 넓혀 똑같이 적용하자는 게 불교의 ‘불성론’과 ‘중생평등’사상이다. 근데 배타적 인본주의도 모자라서, 자기 스승님의 가르침을 거역하여 배타적 독선적 종교신앙으로 미쳐야 하는가?
사실 모든 사물은 크게 보면 같고, 작게 보면 다르다. 바로 대동소이(大同小異)다. 우리 조상님들은 하나로 같게 보는 ‘대동’사상이 강했다. 그래서 유불선(儒佛仙) 삼교합일 사상이 주류였다. 높은 산에 정상은 하나지만, 산에 오르는 길은 사방팔방으로 갈라진다. 바퀴의 축(중심)은 하나지만, 바큇살은 사방으로 30폭(輻)이 퍼져 있다. 마찬가지로 절대 궁극의 진리(신)는 하나지만, 그 진리에 이르는 길은 갖가지로 나누어진다. 본질은 하나나, 현상은 지역과 민족과 역사문화에 따라 다채롭다. 각자 인연과 근기 따라 자신한테 알맞은 길을 따라 궁극의 절대 본질세계를 향해 꾸준히 정진하면, 언젠가는 정상(중심)에서 하나로 만날 것이다.
심지어 현대 첨단과학에선 초거시의 우주와 초미시의 우주가 서로 닮아, “양극단은 상통한다.(Extremes meat.)”는 속담이 진리임을 증명하고 있다. 과학보다 훨씬 앞서가는 종교를 믿고 수행하는 사람들도, 종교 간의 거시적 ‘대동’에 주목하면서, 이왕에 ‘소이’를 따지려면 아주 깊이 천착하여 ‘소이’도 ‘대동’과 같아지는 지극한 초미시의 경지까지 정진하길 바란다. 우리 모두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님이나 함석헌 선생님 같은 분들처럼, 기독교도 유불선과 하나로 통하는 ‘종교대동(宗敎大同)’을 이룩하여, 천국과 극락이 둘이 아니고, 부처님과 노자님과 공자님과 예수님이 모두 그 한 분의 심부름꾼으로 오셨음을 확인 증명하길 빈다.
일찍이 공자님은 “사람이 길(진리)을 넓힐 수 있지, 길이 사람을 키워주는 게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고 가르치셨다. 제자들한테 군자유생이 되고 소인유생이 되지 말라고 당부하신 뜻이다. 부처님도 가르침(法, Dharma)은 뗏목과 같아 생사윤회의 고해를 건너는 탈것에 지나지 않으니, 고해를 건너면 놓아버려야 할 도구라고 설하셨다. 해탈과 자유를 얻기 위한 진리와 빛의 말씀인 복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서로 자기네가 탄 뗏목이 이 사바고해의 유일한 절대 최고의 탈것이라고 떠들어대면서, 남의 뗏목들을 쳐부수고 물에 가라앉히려 한다면, 과연 착하고 어진 뱃사람(사마리아인)이라 하겠는가?
하나인 중심은 인격화해 부르면, 기독교에선 ‘God’이고, 유교에선 ‘상제(上帝)’며, 도교에선 ‘옥황상제(玉皇上帝)’이고, 불교에선 비로자나 법신불(法身佛)이며, 이슬람에선 ‘알라’이고, 우리나라 전통에선 ‘하늘님’이다. 또 이를 객관화하면, 기독교에선 ‘진리말씀(복음)’이고, 유교에선 ‘태극(太極)’이며, 도교에선 ‘도(道)’나 ‘무위자연(無爲自然)’이고, 불교에선 법(法, Dharma)이 된다. 사실 기독교의 ‘하나님’도 본디 성경의 중국어번역본에선 유교나 도교의 ‘上帝’를 빌려 옮겼고, 다시 한글로 옮기면서 ‘하느님’ 또는 ‘하나님’으로 쓰고 있다.
“서로 같은 점은 사랑하고, 서로 다른 점은 존경한다.(愛其所同, 敬其所異.)”는 관용정신이 다원화한 사회의 평화공존에 절실히 필요하다. 성경에서 예언한 것처럼, 예전에 있었다는 노아의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의 불길보다 훨씬 참혹할 ‘최후의 심판’이 장차 어느 순간 들이닥친다면, 이번에는 과연 어떤 자들이 살아남을까? 돌돌(咄咄)!
*이 글은 한겨레신문 2008년 9월 20일 토요일 27면에 실린 ‘광신병과 종교대동’을 바탕으로 보충하여 YMCA서 발행하는 “꽃들에게 희망을” 2008년 10월호에 실은 ‘광신병과 종교대동’과, 월간 불광 2008년 10월호에 실린 “광우병과 광신병”을 합쳐 손질한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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