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망경(梵網經)은 청정한 계율의 그물을 엮어 놓은 가르침이다. 인공의 그물 안에 갇힌 물고기, 새장 안에 갇힌 새, 우리 안에 갇힌 짐승은 얼마나 답답하고 부자유스러울까? 헌데 그물 밖에 상어나 고래․매․독수리․사자․호랑이 따위가 득실거린다면, 그물이나 우리 안에 갇힌 중생은 얼마나 안전하고 평화롭겠는가?
나는 지금도 밤에 모기장을 치고 잔다. 모기한테 피를 뜯기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왱왱거리는 소리에 그러잖아도 고단할 여름밤 잠을 설치지 않고 싶어서다. 수많은 분들은 이 말을 들으면 참으로 유별나고 답답하며 심지어 어리석다고 여길지 모른다. 모기향이나 모기약, 심지어 전기 모기등불도 있는 첨단문명시대에 촌스럽게 모기장을 치고 자다니! 근데 나는 그런 첨단문명의 편리한 살생무기를 쓰고 싶지 않다. 미욱하나마 불살생의 계율, 아힘사의 원칙을 힘닿는 데까지 지켜보려 하기 때문이다.
해탈이 과연 눈에 보이는 그물과 새장이나 우리를 벗어나는 걸 뜻할까? 그래서 그물을 찢고 새장과 우리를 쳐부수고 밖으로 뛰쳐나오는 걸까? 1-2십대 청년의 질풍노도는 그렇게 한때 애교로 봐줄 수 있다. ‘풀어 벗어난다’는 뜻의 참 ‘해탈’은 그물 안팎에서 그물에 걸리지 않고 그물 가운데서(中) 자유자재로움을 뜻한다. 그게 진정한 중도(中道) 실상(實相)의 해탈이 아닐까?!
근데 혹시라도 ‘걸림 없다’는 뜻을 미꾸라지 빠져나가듯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는 간사하고 교활한 지능범의 수완쯤으로 여기는 건 아닌지? 그물은 그대로 있되, 그물에 걸리지 않게 애써 조심스레 행동하는 게 초입자(初入者)의 유위(有爲) 유학(有學)의 수행이라면, 그런 연습에 아주 익숙하게 무르익고 통달해서 어떻게 행동해도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게 무위(無爲) 무학(無學)의 경지이리라. 바로 무위자연(無爲自然), 무위(無爲)하면서도 무불위(無不爲)한 궁극의 경지다. 공자가 말했듯이 일흔 살에 마음대로 해도 법도를 벗어남이 없는 그런 경지다. 노자로 말하면 호랑이 같은 맹수도 할퀴지 않고, 벌이 쏘거나 뱀이 물지도 않으며, 사나운 새도 낚아채지 않는, 갓난아기 같은 함덕지후(含德之厚)의 경지다. 육조 혜능대사나 진표율사가 호랑이를 조복시켜 거느리고, 연지대사가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자 모기가 아예 멀리 이사가 버렸다는 법력쯤 되지 않을까?
말하자면 모기장을 안 치고 자도 모기가 감히 물지 않을 정도 되면, 모기장으로부터 자유롭고 모기로부터 해탈했다고 일컬을 만하다. 설사 범망경의 내용이나 존재조차 전혀 모르더라도, 일거수일투족이 계율의 그물에 전혀 걸림이 없다면, 가장 큰 자유를 누리는 참된 해탈자라고 할 것이다. 늘 깨어 있으면 모기에 물리지 않을 수 있으리라. 내 경험에도 참선이 잘 되는 한창때는 희한하게 모기가 범접하지 않는 걸 느꼈다. 허나 육신을 가진 중생이 피곤하면 졸리기도 하고, 일에 바쁘다 보면 정신없을 때도 많지 않은가?
옛날 호랑이가 나타나던 시절에는, 적잖은 사람이 물려갔다고 한다. 허나 지금은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를 동물원 우리에 가둬 두고 관상한다. 사람들은 자기네가 호랑이를 철창 속에 가두었다고 여기지만, 호랑이는 오히려 밖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갇혔다고 안타까워할지 모른다. “야, 너희 인수(人獸)들아, 왜 답답하게 우리 안에 갇혀 사니? 여기 우리랑 같이 지내게 우리 밖으로 나와 봐!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 자기네가 사는 세상이 가장 좋고 넓은 줄 아는 우물 안 개구리나 다름없다.
비슷한 이치지만 이젠 거꾸로, 모기장 안에 갇혀 잠자는 나한테 모기장 밖에서 왱왱거리는 모기들이 외친다. “여보시오, 당신은 왜 이 무더운 여름밤에 그 좁은 그물 속에 스스로 갇혀 갑갑하게 자는 거요? 이 넓고 시원한 마루와 평상을 놔두고!”
다시 ‘채식’이라는 자기계율의 그물(梵網) 안에 갇혀서 정갈하게 먹고사는 나 같은 행자들한테 잡식동물들이 외친다. “어이, 친구! 세상이 얼마나 넓고 산해진미가 얼마나 풍성한데, 토끼나 마소처럼 풀만 먹겠다고 자기 그물 안에 갇혀 답답하게 사는 거야? 우리처럼 걸림 없이 자유자재롭게 즐기지!”
그러나 사실은 어쩌면 거꾸로, 내가 모기장을 침으로써 모기들을 세상 만유와 함께 몽땅 모기장 안에 가둬 놓고, 나 혼자서 모기장 밖에서 유유자적 편안한 잠을 이루며 자유자재로운 해탈의 밤을 지내는 건지도 모른다. 과연 안팎이 한결같이 정해진 걸까? 좁은 곳이 안이고 넓은 곳이 밖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힐 필요가 있을까? 선입견만 풀어놓으면 안팎이 따로 없는 걸! 실상은 내가 모기장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바로 모기장 ‘가운데(中)’서 자유와 해탈을 누리는 거다!
마찬가지로 나는 스스로 ‘채식’이라는 자기계율의 그물을 침으로써, 수많은 모기나 파리 같은 해충뿐만 아니라,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나 자신을 안전하고 평화롭게 지키며, 피비린내와 원한업장의 빚더미와 살기로부터 자유로운 해탈의 삶을 찾아가고 있다. 정녕 채식의 그물 안에 갇힌 자들은 어쩌면 바로 수많은 잡식동물인지도 모른다. 소수의 채식주의자들만 채식의 그물 밖에서, 아니 채식의 그물 가운데(中道)서 자유와 평화의 법열을 만끽하는지 모른다.
설령 안팎의 개념을 일반 세속의 선입견대로 놓고 보아도 그렇다. 모든 성현은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가운데(中)서 찾으라고 말한다.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고, 바로 우주를 나토어(창조해) 주재하는 주인공이라고! 그렇다면 모기장과 채식의 그물을 치고 스스로 가운데 들어앉아 자기 계율을 지키는 거야말로, 참 나를 찾고 우주의 진리를 찾는 수행의 호신부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곽요새가 아니겠는가?
계율의 그물(梵網)이 귀찮고 답답하다고 뛰쳐나가 보라! 언제 어디서 무슨 덫에 걸리고 어떤 미끼에 물릴지 모른다. 지구의 중력이 무겁고 귀찮은 구속이라고 중력장 밖으로 뛰쳐나가 보시지! 우주선 로켓 발사처럼! 정교한 과학기술로 정확히 계산하고 완벽히 조화를 이루어 제 궤도에 진입해야 우주의 평화질서에 동참할 수 있는 거지, 그러하지 못하고 얼마 전에 첫 번째 발사한 나로호처럼 조금만 삐뚤어져 궤도에서 빗나가면, 영원한 우주의 미아(迷兒)가 되어 언제 어디서 산산조각 부서져 흩어질지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노자는 일찍이 “하늘의 그물은 텅 빈 듯하나, 엉성하지만 빠뜨림이 없다(天網恢恢, 疏而不失.)”고 하였다. 진짜 귀찮고 무서운 그물은 인과응보의 자연법칙인 하늘의 그물이다! 계율의 그물을 벗어나면 하늘의 그물에 걸리기 십상이다. 누가 자업자득의 인과응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랴?! 오직 완전히 해탈을 이루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또 부처님도 깨달은 뒤 전생의 업장으로 인한 고통과 곤궁을 당했고, 공자님 예수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보살행으로 중생의 업장을 대신 짊어진 거라고 여기는 견해가 유력한 통설이긴 하지만!
아무리 큰 도를 깨달아 해탈하여 자유자재롭게 노닌다고 할지라도, 우주의 평화로운 질서, 천체 운행의 궤도까지 벗어날 수야 없지 않은가?! 참된 해탈은 바로 청정한 계율 가운데서 누리는 自由다. 굳이 스스로 채식의 그물 가운데 갇혀 노니는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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