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러나 전생의 업력 인연으로 타고난 가정 및 지역 환경의 영향으로, 불행히도 태어나면서부터 나도 모르게 직간접으로 고기를 먹기 시작하고, 자라면서는 고기를 얻기 위해 살생하는 모습을 보고 또한 나도 모르게 훈습하여, 마침내는 손수 적잖은 짐승의 생명을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죽이기에 이르렀다. 식육(食肉)과 살생(殺生)의 행위가 잘못된 짓(業)인 줄 모르고 30년 가까이 태연자약하고 천연덕스럽게 ‘습관은 제2의 천성’처럼 저질러 왔다.
그러다가 30세 끄트머리에 수행에 본격 입문하면서 채식을 발원하고, 20년 동안 꾸준히 실천하면서 반성참회와 기도발원을 해왔는데, 아직도 지난 업장이 너무도 두텁고 무거움을 느낀다. 이제 그 속죄발원의 뜻으로 지난날 철없이 저질렀던 식육과 살생의 죄업을 생각나는 대로 낱낱이 고백하고 참회하여, 업장소멸과 원한해소를 기도발원하며, 인연 있는 분들께도 자그마한 경각성(警覺性) 참고가 되길 염원한다.
나는 그리 총명한 편이 못되어서 어릴 적 기억이 별로 없다. 내가 태어난 변산반도 곰소는 당시 쇠락(衰落)하던 줄포를 대신해서, 칠산 앞바다에 이루어진 황금조기어장의 파시 포구로 한창 번영을 구가한 모양이다. 선친(先親)은 그 무렵 곰소 부두노동조합장을 몇 년간 맡으셨다. 셋방살이 설움 속에 바로 손윗누이가 강보에서 요절하자, 조그만 집을 마련하여 나를 낳으실 정도로 가세가 조금 핀 즈음이기도 하다. 그 뒤 조금 자란 내 눈에 비친 선친의 모습을 회상하건대, 선친은 조합장으로서 배에 싣고 온 물고기를 직접 어판장에 푸는 일을 하지는 않고, 조합원들의 작업안배나 조합의 관리 업무를 맡으신 듯하다.
그런 상황에서 몇 살 때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취학 전에 아마도 아버지를 따라 또는 찾아 어판장에 나가 누런 황금조기 무더기를 갈쿠리로 세고 종이에 마릿수를 써서 붙인 다음 경매(중매)하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은 뚜렷하다. 조합장인 선친은 당연히 싱싱한 조기와 생선들을 가끔 집에 가져오셨고, 어머니께서 얼큰한 찌개를 끓여 먹은 맛은 아직까지 내 뇌리에 생생하게 떠오르니, 습관의 업력이란 참으로 무서우리만치 크고 강력함을 실감한다. 겨울철 물매기탕의 시원한 맛도 잊히지 않는다. 설령 지금 내가 어육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때 그 맛을 생각하면 지금 양식어나 수입 물고기는 맛있게 먹을 수 없을 것 같다. 가끔씩은 선주(船主)나 어부들이 선친을 만나러 누추한 우리 집까지 찾아온 기억도 있다. 물론 싱싱하고 큰 생선을 선물로 들고 오셨을 게다. 특별한 청탁으로 뇌물을 가져왔다기보다는, 그저 소박하게 자기 배의 생선 하역작업 좀 잘 해 달라고 부탁하거나, 더러는 약간의 자금융통을 부탁하러 오신 듯하다.
여하튼, 나는 어려서 조합장 선친 덕분에 칠산어장의 생선 진미를 두루 맛보았으며, 그때는 복이었을 것이나, 자라서 수행을 하면서 그토록 크나큰 원업(冤業)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산에 기대면 산에서 먹고살고 바다에 기대면 바다에서 먹고산다.(靠山吃山, 靠海吃海.)”는 속담처럼, 태어난 곳이 바닷가요 태어난 때가 조기 파시 전성기니, 조합장 선친 아들로서 온갖 서해진미를 맛본 업은 숙명일 수밖에 없었을까?
물론 우리 집 운명은 순탄치 않았다. 내가 국민(초등)학교 입학한 직후쯤, 행인지 불행인지 선친은 조합장직에서 밀려나셨다. 나중에 어머님의 한탄을 들은 바에 따르면, 같은 광산김씨 아저씨뻘 되는 사람의 음모에 밀려나신 듯했다. 순박하고 정직한 사람이 속세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따돌림 당하는 신세를 그대로 답습했다. 선친은 그동안 제법 모은 재산을 친구한테 우정으로 몽땅 빌려주었다가 한 푼도 못 받고 다 떼였다. 그 친구의 아들들은 나와 아우의 동창이기도 했다. 줄포에 계시던 큰아버지께서 논 좀 사주면 농사지어 쌀을 나눠 먹겠다고 그렇게도 간청하셨다는데, 땅 한 평도 사지 않고 고스란히 친구한테 주어 다 날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졸지에 빈털터리가 된 선친은 일자리도 잃고 실의에 잠겨 술과 벗하며 가끔씩 줄포장에 나가 거간으로 용돈이나 벌어 쓰시는 정도였다.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가난이 코앞에 닥치자, 마침내 어머니가 생업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부둣가에서 할 일이란 게 뻔하지 않은가? 결국 어머니는 선창에 나가 고기 다듬는 일 좀 하다가, 마침내 생선을 받아다가 다라(큰 플라스틱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이웃 농촌마을을 돌아다니며 곡식이며 돈으로 바꿔오는 생선 장사를 시작하셨다. 그때가 국민학교 2-3학년쯤인 듯하다. 왜냐하면 내가 3학년 때부터 이따금씩 어머니가 늦게 오시거나 못 오시는 경우 내가 밥을 지어먹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아우가 입학하고 내가 중학교 들어갈 즈음이 되어 학비마련 등 경제적 수요가 커지자, 어머니는 시골 다라장사에 한계를 느끼시고 5일장에 진출하셨다. 1일 줄포장, 2일 정읍장, 3일 고창장, 4일 해리장, 5일 무장장을 도셨는데, 정읍은 잘 안 가시고 무장은 물건이 남을 때만 들르는 형편이 되었다. 중간 중간 집에 들러야 자식들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하고, 또 새로운 생선을 받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빈 끼니는 어김없이 내가 불을 때서 준비해야 했다. 장사 규모는 점차 더 커졌고, 나중에는 차를 불러 장사꾼들 짐을 모아 시장에 띄우는 정도에 이르렀다. 한글해독도 제대로 못하신 어머니가 그 방대한 규모의 화물 운송료 분담계산이나 물고기 원금계산 등을 암산으로 하셨는데, 나한테 검산을 시키시면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이 아주 정확했다. 그렇게 생선 비린내 장사를 15년간이나 계속 하시어, 내가 중학교를 마치고 전주에 고등학교 유학한 다음 서울에 대학까지 유학했다.
1984년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아무런 대책이나 계획도 없이 무조건 시골집을 팔고 서울 내 자취방으로 어머니와 아우를 이사시켰다. 어머니의 생선 장사를 끝내고, 아우한테는 포구에 미련을 끊으라고 나 혼자 내린 결단이었다. 서울에 오신 뒤에도 어머니는 배운 게 장사라고, 사돈 할머니 도라지 장사를 배워 야채 행상을 시작하셨다. 경동시장에 가서 야채를 띠어다가 신림동에서 행상한 지 무려 22-3년만인 재작년(2007)에 오른 눈이 황반변증으로 거의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38년 행상을 마감하셨다.
이상이 우리 집안이 살생의 악업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어업(魚業)의 역사로, 내가 수행의 과정에서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가족의 공업(共業)으로 생생하게 실감한 인연(因緣)이다.
그동안 받은 크고 작은 과보도 적지 않다. 이점은 곰소에 같이 살면서도 어업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다른 친구들의 가정과 대비해보면 더욱 분명하게 느껴진다. 고교에 입학한 직후, 어머니는 마침내 그동안의 과로로 생긴 늑막염이 참고 버티는 사이 복막염으로 번져 위독한 지경까지 악화하였다. 고창 광주 서울의 병원들을 거쳐, 여름방학 때 전주예수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갈비뼈 하나를 잘라내는 대수술로 피고름만 한 양동이 가량 뽑아내며 두 달 가까이 치료를 받고, 한동안 요양하여 가까스로 기적처럼 살아나신 경험이 있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한 지 1달만에 선친께서 작고하셨다.
포구의 풍성한 생선으로 생계를 유지한 과보로, 어머니는 건강을 크게 위협받고, 선친과 아우도 비린내 나고 거친 바닷바람에 오염 당해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황폐해진 셈이다. 나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어렸을 적 말없이 차분하던 성격은 어디로 가고, 자라면서 거칠고 조급해져 화도 잘 내는 못된 성질로 바뀌어, 마침내 만성 활동성 간염에 걸려 군대도 못가고 허약한 건강으로 평생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게다가 채식하는 과정에서 박사논문 쓰며 수행하느라 영양실조로 악성빈혈에 걸려 쓰러지기도 했다.
어머니 생선행상 15년과 아버지 생업까지 합하면 30년 가까이 몸담은 가족 공업(共業)으로서 어업(魚業), 그리고 내가 서른 살까지 무의식 속에서 습관처럼 입댄 개인 별업(別業)으로서 식육(食肉), 그 악업의 고리를 끊고 채식을 다짐하고 수행한 지 어언 20년이 된 지금, 아직도 무거운 업장에 터덕거리면서 그 동안 발원해 온 “채식하는 마음” 책을 “채식명상 20년”이란 제목으로 펴내려고 정리하는 마당에, 나와 집안의 살생과 식육 업장을 고백하고 참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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