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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을 괴롭힌 짓궂은 장난

채식명상 20년. 살생과 식육의 고백, 참회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2. 12. 1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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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업(家業) 말고 일상생활에서 저지른 살생의 중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려 한다.
나도 여느 어린이들처럼 어렸을 때 무심코 뭇 미물을 괴롭히고 해쳤다. 호기심에 개미집을 지켜보다가 왠 심술이 이는지, 개미가 파 올린 흙으로 집을 다시 덮거나 더러는 물을 부어 보기도 하고, 심지어 구멍을 후비기도 한 적이 있다. 얼마나 잔인한 심술보인가? 놀부가 따로 없다. 나중에 수행하면서 선배 집에 한달가량 잠시 붙어살 때, 선배 아들이 예전에 나처럼 개미집을 귀찮게 괴롭히는 모습을 보고 옛 생각이 나서 좋은 말로 잘 타일러 보았으나, 순순히 듣지 않는 걸 보고 어찌할 수 없는 업력을 느꼈다. 그 애가 벌써 커서 재작년에 대학입시를 치렀는데, 안타깝게도 원하는 대학에 못 들어가 삼수(三修)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어렸을 적 단골 놀이에, 또 풍뎅이를 잡아 다리를 절반씩 자르고 모가지를 180° 비튼 다음 바닥에 뉘여 놓고, ‘손님 온다 마당 쓸어라!’를 연신 외쳐댄 기억이 선하다. 누군가 거인이 나타나 내 팔다리를 절반씩 분질러 내고 모가지를 180° 비튼다면, 과연 어찌 될까?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할 일이 아닌가? 지옥에 가면 틀림없이 그런 형벌이 있을 것 같다. 근래 컴퓨터를 자주 사용하면서 목이 뻐근하고, 가끔 잠자리에 목이 삐끗하는 경험을 하면서, 나는 여지없이 풍뎅이 괴롭힌 과보를 받는다고 생각하며 참회하곤 했다.
또 바닷가에 산 인연으로, 어렸을 때 사람들 따라 개펄에 들어가 다랑(조개)이나 고동을 잡아 삶아 먹기도 하고, 빨간 집게다리가 달린 농발기(농게)를 잡아 일본 수출용 게젓 담는 공장에 팔기도 했다. 선친은 일본 징용 끌려갔다 오신 경험 덕에 일본어를 제법 하신 모양인데 - 실제로 가족한테는 흔적도 보이시지 않아 전혀 몰랐다 -, 일본인 수입상이 오면 게젓 공장 주인의 요청으로 통역을 하시기도 했다.
국민학교 1학년 때는 어머니 따라 까치섬(鵲島) 밭에 갔다 오다가 큰 수문통에서 담임 김효근 선생님과 무서운 지주철 선생님이 함께 낚시질하시는 모습을 보고 인사했는데, 어떤 인연인지 어머니 따라 귀가하지 않고 선생님 곁에 있다가 염전 길 따라 동쪽 범섬 부근까지 갔다 온 기억이 난다. 여름방학 숙제로 곤충채집을 내주면, 우리는 철사를 둥그렇게 말아 거미줄을 많이 채집한 다음, 그 잠자리채로 잠자리를 잡곤 하였다. 나중에 나는 전공연구를 하며 법을 그물(거미줄)에 비유하는 ‘법망(法網)’에 대해 글을 썼는데, 이때 거미줄 기억이 많이 났다.
그밖에 파리나 모기를 해충이라고 사정없이 때려죽인 짓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기생충 박멸한다고 학교에서 대변검사하고 나눠준 회충약을 먹고 얼마나 많은 살생을 했는지 모른다. 마을 단위로 쥐를 박멸한다고 쥐약을 놓아, 그걸 먹고 죽은 쥐의 시체도 적잖이 치운 기억이 난다. 어릴 적 삼동 겨울에 목욕을 거의 못하다 보니, 속옷에 이가 슬고 머리카락 속에는 서캐가 서식하던 시절에, 이와 서캐는 또 얼마나 잡아 죽였는가? 쌀이나 보리에 난 벌레나 바구미는 또 얼마나 가려내 죽게 했던가? 사람이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끊임없는 살생의 죄업들도 인과의 법망을 피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단 한번 착한 일로 기쁘고 흐뭇했던 기억이 있다. 국민학교 때 어머니 따라 작도 밭에 갔다 오다가, 수문통 부근 길가에서 거미줄에 발이 걸려 퍼덕이는 제비를 보고 풀어 날려 보낸 일이다. 아마도 흥부와 놀부를 배우기 전일 텐데, 측은한 마음에서 저절로 한 일이다. 이따금씩 생각해도 흐뭇하고 기쁜 추억이다. 내가 이런 착한 ‘방생(放生)’을 좀더 자주 많이 할 인연이 닿았더라면, 내 인생은 지금과는 딴판으로 훨씬 잘 풀렸을 텐데…. 아쉽고 안타깝게도 나한테는 그런 선업(善業) 인연이 너무 적었다. 그에 반해 살생의 악업(惡業) 인연은 너무도 많았다.
아주 어릴 적, 측간이 큰 도가니 하나 땅속에 묻고 가마니로 주위를 둘러친 채, 지붕도 없던 시절이었다. 눈이 펄펄 내리던 어느 겨울날, 아버지가 변소에 다녀오시면서 난데없이 참새를 한 마리 잡아와 화롯불에 구워 드셨다. 측간 나무기둥 끝에 잠시 내려앉은 참새를 아버지가 손으로 살짝 쥐어 잡으신 것이다. 눈이 많이 내려 먹이 찾아 집으로 찾아 든 산짐승은 잡지 않고 돌려보내는 게 옛 조상들의 자비심이라고 하는데, 선친은 눈 속의 참새를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으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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