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6학년 때인가, 우리 집에서 키우던 암탉이 알을 낳다가 때가 되니 병아리를 까려고 둥지에 앉았다. 근데 지금 생각하니 주위에 수탉이 없어서 알이 무정란이라 깰 수가 없었다. 유정란을 구하러, 부모님 분부에 따라 작은방 살던 동창여학생을 따라 이웃마을 백포에 갔다. 그 여학생 이모 집에 가서 유정란을 돈 주고 사온 것이다. 몇 개인지 얼마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사다 앉은 암탉 품에 넣어주니 21일 만에 병아리가 깨어났다. 귀엽고 신기했다. 큰 대광주리처럼 짠 닭장 안에 어미닭을 넣어두고 병아리를 키웠다. 병아리가 자라면서 한 달 남짓 지나 털을 갈기 시작하면서는 볼품이 없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마냥 좋았고 착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다. 병아리가 더 커서 중닭을 넘어서자, 부모님은 이제 가족의 식량으로 닭을 한 마리씩 잡아먹었다. 목을 비틀어 죽이고, 물을 끓여 살짝 탕에 데친 다음 털을 뽑고, 숫돌에 간 칼날로 배를 갈라 요리했다. 내장도 꺼내 갈라 똥을 씻어내고 소금으로 깨끗이 문지른 다음 요리해 먹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도 언제부턴가 보고 배운 대로 직접 닭을 죽이고 털을 뽑고 배를 갈랐다. 몸소 도살자(屠殺者)가 된 것이다. 내가 중고등학교 6-7년 사이 몇 마리나 그렇게 죽였는지 모르겠다. 유가 경전에도 군자는 도살하는 모습을 보거나 비명소리를 듣거나 자기를 위해 죽인 짐승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집에서 정들이며 직접 기른 닭을 자신이 먹기 위해 몸소 죽이며 비명소리도 듣고, 천연덕스럽게 요리해 먹은 것이다. 얼마나 무지하고 무자비하고 잔인한 살생의 죄업인가?
그 전에 한번은 국민학교 때 누나가 강아지를 한 마리 사다가 키웠는데, 다 크자 개장수한테 5천원인가 돈을 받고 팔았다. 누나는 정들어 눈물을 흘렸는데, 개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얼마나 발버둥 쳤을까? 죽으면서 자기를 돈 받고 판 주인을 얼마나 원망했을까? 그밖에는 우리 집에서 개는 잘 자라지 않는 편이었다. 곧잘 죽고 말았다. 한번은 내가 귀찮을 정도로 가까이 해서였는지, 강아지가 금세 죽어 땅에 묻어준 기억도 있다.
돼지는 집 측간 옆에 우리가 있어서, 매년 봄 한 마리씩 새끼를 사다가 꾸정물로 대여섯 달씩 키워 가을에 80-90kg 나갈 즈음 팔아 목돈을 마련해 생활비로 썼다. 그런데 한번은 어느 해인가 무슨 일이었는지, 동네 백정을 불러 집 우리 앞에서 돼지이마를 망치로 쳐서 죽인 기억이 난다. 참 끔찍한 일인데, 그때는 왜 크나큰 전율을 느끼지 않고 그대로 관조(觀照)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진 돼지를 키운 듯한데, 생계를 위해 몇 마리의 생명을 도살업자한테 팔아 넘겼는지 모르겠다.
중학교 입학해서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돼지우리 위에 토끼를 한 마리 키워 보려고 손수 나무를 주워다가 못질하여 엉성하나마 토끼장을 하나 지었다. 잡아먹거나 팔아 돈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단순한 호기심과 재미로 기르려 했던 것 같다. 같은 반 벗 기섭이네 집에 200원짜리 토끼새끼를 사러(분양 받으러) 연동까지 왕복 4km 남짓 걸어갔다 왔다. 호기심과 기쁨에 넘친 기분은 그날 하루에 지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토끼를 보러 가니 토끼가 보이지 않았다. 밑을 보니 돼지가 토끼새끼를 다 잡아먹고 흔적만 조금 남아 있었다. 아뿔싸, 너무 기뻐 흥분한 나머지, 토끼를 장에 넣고 문 닫는 걸 깜박 잊었던 것이다. 밤에 토끼가 열린 문으로 밑에 떨어진 걸 돼지가 포식한 것이다. 애먼 생명만 하나 희생시키고 말았다. 돼지가 곡류나 풀만 먹는 줄 알았는데, 육식도 하는 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뒤 하도 상심하여 더 이상 토끼 키울 엄두도 나지 않았다. 토끼장은 애물단지로 변해,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중학교 때인지, 한번은 보안면 선돌(立石리)에 사시는 고모님이 우리 집에 놀러오셨다. 내 기억에 유일한 방문이었다. (고교 1학년때 나는 전주 어은골에 이사한 고모 댁에서 1년간 하숙하며 학교 다녔다.) 그러자 아버지는 모처럼 찾아온 누님을 환대한다고, 어디서 들으셨는지 오리 생피가 고혈압인지 어디에 좋다고, 오리 한 마리를 사다가 집 앞 처마에 거꾸로 걸고 칼로 목을 베었다. 그리고 뚝뚝 듣는 선혈을 사발에 받아, 고모님한테 마시라고 드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섬뜩한 살생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고모님이랑 고모 아드님이랑은 고혈압 계통의 질환으로 돌아가신 줄 안다.
중학교 졸업 무렵, 내가 전주고에 시험 봐서 합격하자, 아버지는 기뻐서 선생님들의 가르침 노고에 보답한답시고, 산 닭 두 마리를 사다가 중학교 선생님들한테 닭죽이라도 끓여 드시라고 선물로 갖다 드렸다. 직접 살생은 하지 않았지만, 변산중학교 유사(有史) 26년 이래 아마도 첫 전주고 입학을 자축한다고 살업을 지었으니, 이 또한 적잖은 업장이 되었으리라. 입학 직후 어머니가 늑막염에 걸려 복막염으로 악화하여 1년 꼬박 투병하느라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중환자실에서 생명이 위독한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대수술 끝에 점차 회복하셨는데,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친지가 보신탕을 끓여다 주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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