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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기와 낚시질의 악연

채식명상 20년. 살생과 식육의 고백, 참회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2. 12. 1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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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는 개고기도 여러 차례 먹은 적이 있다. 처음 맛본 것은 중학교 때다. 아버지께서 교감선생님을 집에 초대해 개정국(보신탕)을 대접하시는데, 옆에 있는 나한테 ‘어린애들은 안 먹는 거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당신들만 드시기 좀 미안했는지 나한테 먹어보라고 주셔서 먹은 것이다. 맛은 괜찮았다. 그 뒤 고1때 어머니가 병원에서 대수술을 받고 회복하시느라 보신탕을 좀 드신 것 같다.
특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은, 대학 몇 학년 방학인지 고향에 가 있을 때였다.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보신하려고 개를 한 마리 사서 잡는데, 혼자 드시기에 양도 많고 돈도 많다고 우리 어머니한테 절반씩 나누자고 제안하셨다. 어머니는 아들 영양 보충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고 선뜻 응낙하셨다.
문제는 친구 아버지가 개를 철사로 묶어 두고 손수 몽둥이로 때려잡는데, 개가 되게 얻어맞고 실신하기 직전 상태에서 몸부림치며 묶은 철사를 뿌리치고 미친 듯이 달아난 것이다. 광포하게 날뛰는 개가 친구 집을 벗어나 골목길을 달려 숨으려고 찾아든 곳이,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20m남짓 떨어진 바로 우리 집 마루 밑이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인연의 조화인가?
친구집 문 앞에서 두 길로 갈리는데, 흐름상 왼쪽 길을 타는 게 자연스럽다. 10m도 채 못 오면 다시 두 길로 갈라지는 삼거리인데, 여기서는 바로 곧은 앞길을 타지 않고 왼쪽으로 90° 꺾어 달린 게 묘하다. 추적으로부터 몸을 감추기 위한 무조건반사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그 골목을 따라 다시 10여m를 달리면 큰 신작로가 나오는 사거리고, 우리 집은 그 신작로 두 변을 끼고 대문은 골목길과 맞바라보게 열려 있다. 고삐 벗어난 개는 미친 듯이 골목을 달려나와 바로 정면에 보이는 대문을 향해 돌진해, 피신처를 찾아 마루 밑에 숨어든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마루 위에서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개는 우선 몸을 숨겼다고 생각했는지, 얻어맞아 몽롱한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우선 쏜살같이 질주하느라 가빠진 숨을 돌리며 안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뒤 도망간 개를 잡으러 황급히 뒤쫓아온 친구 형님이 우리 집 마루 밑에 숨어든 개를 붙잡아 끌고 갔다. 개가 사람을 물 겨를도 없어서 망정이지, 참으로 큰일 날 뻔한 사고였다. 그렇게 해서 개는 죽임을 당했고, 약정대로 그 절반을 어머니가 가져와서 나와 가족이 보신탕 끓여 먹은 것이다. 미칠 정도로 날뛰며 원한과 분노의 독기(毒氣)를 뿜고 죽어간 개의 고기를 또 내가 먹었다. 내 몸과 영혼이 얼마나 막중한 살업(殺業)에 물들었을까?
그 뒤 몇 년이나 지났을까? 채식과 함께 수행을 시작한 뒤로, 한번은 서울에서 선친 기제일(忌祭日)에 맏형님 댁에 갔는데, 집에서 키우던 자그만 애완견이 나를 보고 맥없이 거칠게 멍멍 짖어대더니, 순간 나한테 덤벼들어 내 손가락을 덥석 물어 피가 났다. 형님은 깜짝 놀라며 개를 때리며 따로 격리시켰는데, 나는 즉석에서 “아, 그때 몽둥이로 맞아 미친 듯이 도망했다가 붙잡혀 죽임을 당한 개의 후신(後身)이 오늘 이런 인연으로 나한테 앙갚음을 하는구나!”라고 직감했다.
그래서 혼자 속으로만 묵묵히 반성참회하고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한 번의 살업(殺業) 원한업장이나마 말끔히 해소한다면, 그 얼마나 다행스런 인과응보이랴?! 오히려 감사할 인연이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의 모든 기묘한 인연조화는, 어쩌면 나한테 이런 소식을 전하라고 미리 인상 깊게 연출한 현신설법(現身說法)인지도 모르잖은가?!
그러나 그 뒤로도 나는 길을 다니다가 개들이 뜬금없이 짖어대는 봉변을 가끔씩 당하는데, 그때마다 개고기 먹은 악업의 과보로 느끼고 반성참회하며 염불로 해원소업(解怨消業)을 기도하곤 한다. 심지어 무등산 중봉(해발 9백m) 위에 있는 방송국 송신소 지킴이 개들조차도, 이따금 나를 보고 요란히 짖어댄다. 그 영리한 개들이 내 체취에서 선배동료들의 피비린내나 원기(寃氣)를 맡는 모양이다. 그때마다 합장하고 염불하며 해원소업을 회향 기도한다.
한편, 그때 개를 때려잡은 친구 아버님은 그 뒤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당신 스스로 음독(陰毒) 자진(自盡)하셨다. 참으로 안타까운 업보로 느껴졌다. 친구 부모님은 곰소 앞바다 개펄에 참나무 기둥을 둘러 박고 그물을 친 다음, 밀물 때 몰려들어 왔다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고 걸린 물고기를 잡는 ‘살’이라는 어장을 가업으로 운영하셨다. 단순한 어업(魚業)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어업(漁業)으로, 살생의 업장이 제법 두터운 과보(果報)인지도 모르겠다.
또 대학 초년에는 송학(松鶴)도사라는 분이 곰소에 들어와 사는데, 친구 소개로 가서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 인연이 있었다. 몸이 허약하여 보약을 먹으라고 소개해 준다기에, 부안 읍내에 따라가 용(茸: 아마도 녹용이 아니라 녹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든 약 1제(劑: 스무 첩)를 당시 돈으로 무려 25만원이나 주고 지어다 먹었다. (당시 90kg 쌀 한 가마니에 3만 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지금도 어지간한 보약 1제는 25만원이면 지어먹을 수 있다.) 가난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내가 먹겠다고 하니까 어머니는 25만원을 조금도 아까운 생각 없이 기꺼이 지불하셨다. 얼마나 효험을 보았는지는 특별한 기억이 없다. 지금 생각해도 좀 지나치게 비쌌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건 도리어 전혀 아깝지 않다. 전생의 빚일 수도 있고, 또 좀 보시했다고 치면 그만이다.
그보다 몹시 안타깝고 후회 막심한 인연은, 그 분을 따라 조그만 배를 타고 곰소 앞바다에 나가 낚시질을 함께 하고 낚아 올린 망둥이를 산 채로 칼로 토막 내어 초장 찍어 먹은 짓이다. 나는 곰소에 태어나서 20년 살면서 배를 타고 바다 나가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낚시도 수영도 할 줄 모르던 내가, 그런 인연으로 바다에 나가 낚시를 하고 활어회를 초쳐 먹은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회를 먹은 기억은 난다. 근데 내가 직접 낚아 먹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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